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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사 노동자를 위한 한국노동운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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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일제하에서 해방공간까지의 노동운동
2강 암흑시대 : 독재정권과 노동운동 (1948~1986년)
3강 폭발과 약진 (1987년~1997년) 4강 위기와 모색 :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운동 (1997년~현재) |
제 1강
일제하에서 해방공간까지의 노동운동
1. 근대적 노동자계급의 출현
- 근대적인 임금노동 :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과 잇달아 불평등조약을 맺으면 서 등장. 도시, 개항장, 광산, 철도 건설 공사장
- 조직 결성 : 의형제, 만동생, 노계에서 노동조합으로. 1898년 최초로 성진에서 운반부 46명이 성진 본정 부두노동조합을 결성. 군산, 진남포 등의 부두와 평양, 개성 등에서도 노조가 출현. 초 기의 노조 활동은 친목과 상호부조, 취업알선에 주력.
2.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
가. 1910년대 노동운동
- 일제의 토지조사사업(1912~1918)은 한국식 인클로져운동 : 토지에서 쫓겨 난 농민들은 일본으 로, 만주로, 광산으로, 도시로 흘러들어 하층 노동자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
- 1911년 공장노동자 수 14,575명 -> 1919년 48,705명, 전체 15만 명.
- 하루 12~16시간, 심지어 18시간의 장시간 노동(일본인의 평균 1.5배),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1/2~1/3. 민족차별과 성차별.
- 1910년대 초기의 노동쟁의 : 임금인상과 처우개선 요구. 파업은 1912~1917년 36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1918년 50건(6천1백명 참가), 1919년 84건(9,011명)으로 증가. 노동자들은 3.1운동 에도 시위와 파업, 공장점거 등의 형태로 적극 참여.
- 1917년 러시아 혁명, 1919년 3.1만세운동은 민족적인 의식 각성 및 역량 강화의 필요성 제기. 노동운동 이념도 초기 ‘친목과 상호부조’에서 ‘단결과 계급의식의 함양’으로, 투쟁의 성격도 근로 조건 개선 등 경제투쟁에서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목표로 한 정치투쟁으로 변화.
나. 1920년대 노동운동
- 공장노동자는 1921년 4만9천명, 1930년에 10만여 명으로 증가. 1920년대 말경 조선 전체 노동 자는 113만여 명.
1) 노동조합의 조직과 지역별 노동조합
- 노동단체들의 조직 활발 : 1920년에 33개의 단체, 1921년에 90개 , 1922년 81개, 1923년 111 개 단체가 조직. 회원 수도 1928년에 67,220명(488개).
- 조직형태 : 1920년대 초반 지역합동노조 → 1920년대 중반에는 직업별 노조
직업별노조의 직업분포를 보면 운수, 통신, 인쇄 출판, 상업 서비스, 피복 신발과 같은 수공업적 성격의 공업, 또는 섬유나 화학과 같은 경공업노동자들이 대다수를 차지.
2) 전국적 노동조직의 등장
-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4월) / 조선노동대회(2월) 결성.
- 조선노동연맹회(1922), 조선노농총동맹(1924), 조선노동총동맹(1927) 결성.
- 조선노동연맹회는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5.1절) 행사
- 조선노농총동맹은 ① 노동계급의 해방과 완전한 신사회 실현 ②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 ③ 노동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을 강령으로 내세움. 전국 260여개 노동단체와 5만 3천여 회원 포괄.
- 조선노동총동맹은 결성당시 직업별 조직 108개, 지역별 조직 40개, 직업별 지역별 혼합조직 6개 단체로 구성.
3) 지역별 노조연합회와 직업별 연맹체의 결성, 그리고 산별노조로
- 1920년대 후반 전국 곳곳에서 지역별 노동조합연합회들과 직업별 연맹체 조직. 지역별로는 원산 노동연합회, 전남노동연맹, 전북노동연맹 등 26개.
- 직업별 연맹체 : 1926년에 결성된 전조선신문배달조합총동맹과 조선인쇄직공조합총연맹, 조선철 공조합총동맹 등.
- 20년대 후반 산별노조 조직운동도 활발히 전개. 산별노조 조직 방침은 1926~1927년 사이에 채 택, 1928년 인쇄출판업에서 가장 먼저 실행 : 1927년 4월 인쇄직공조합과 인쇄직공동맹이 서울 인쇄공조합을 새로이 결성, 이듬해 1928년 6월10일 산별노조인 출판노동조합으로 조직 개편. 서 울에 이어 부산에서 같은 해 12월 <부산 출판노동조합>을 결성했으며, 1930년 원산에서 <원산 출판노조>, 1931년 평양과 진주에서 <평양 출판노조>와 <진주 출판노조>가 결성.
- 산업별노조의 조직 구상 : 공장반 → 노동조합 분회 → 지역 조직 → 전국 단일노조
-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강령이나 구호보다 생산현장에 기반한 구체적 강령이나 목적 표방.
- 부인부와 청소년부, 실업부 등의 전문부를 설치하여 여성, 청년, 혹은 실업자를 단일조직으로 묶 기 위한 조직적 차원의 노력 시도.
- 이 시기 지역산별노조 결성을 바탕으로 전국적 단일조직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끝내 실현되지 못 하고 30년대 혁명적노동조합운동으로 일컬어지는 비합법영역으로 옮아감.
일제하 노동조합 조직의 흐름
4) 1920년대의 투쟁
- 노동쟁의는 1921년 36건에서 1925년 55건, 1928년 119건으로 증가. 참가 인원도 20년대 전반 기에는 3천여 명 정도, 1927년도에는 무려 1만 명을 돌파. 지역 내 직종별 동맹파업이 많았으 며, 점차 다른 직종들도 파업에 함께 참여하는 지역총파업도 출현.
- 1920년대 전반기 :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1921년 5천여 명 참가), 평양 양말직공 총파업 (1923, 1천명) 등.
- 20년대 중후반기 : 1925년 서울의 전차 승무원 파업, 1927년 영흥 흑연광산노동자 파업, 1929 년 원산총파업 등.
다. 193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
1)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 1930년대 이후 대륙침공을 위한 수탈과 착취. 1930~36년 사이에 공장 노동자는 10만 6천여 명에서 20만 7천여 명으로, 광산노동자는 3만 5천여 명에서 16만 1천여 명으로 증가. 일제는
1920년대 말 조선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 전국조직을 해산시키고, 1930년대는 모든 집 회, 결사의 자유도 철저히 봉쇄.
-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 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운동과 국제노동운동의 일환으로, 그리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결합되어 전개.
- 조직 방침 : 공장반 또는 직장그룹(3~5명으로 구성된 세포) - 공장별 노조 분회 - 지역 단위 지부 - 전국 조직 / 공장대표자회의, 공장위원회, 투쟁위원회, 파업위원회
- 혁명적 노동조합은 노동자대중에서 혁명적 반대파만을 독자적으로 결집하는 전위적 노동자 조직 으로 이해.
- 이주하 중심의 ‘원산그룹’의 활동(1936~1938), 강주룡을 중심으로 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1931),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재유 그룹’의 활동(1933~1936) 등.
2) 1930년대 전반기 노동자들의 투쟁
- 1930년대 노동자들의 파업건수는 1930년 160건, 1931년에는 식민지 시기에 가장 많은 205건 을 기록. 노동자의 조직결성의 자유나 일제경찰의 간섭에 대한 반대, 또는 민족차별을 거부하는 요구 등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더욱 강화.
- 1930년 1월 부산조선방직공장 노동자 파업, 5~6월에는 신흥 탄광노동자 파업(탄광 시설들과 사 무실을 습격, 무장경찰과 육박전), 부산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연대파업(1933년 7월) 등.
3) 1930년대 중반이후
-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일제의 파쇼적 탄압은 ‘전시체제’라는 이름으로 더욱 가속화. 공개 적인 노동조합 활동은 제대로 발을 붙이기 어려웠고, 그 결과, 합법적 공간에서의 운동은 대부분 ‘개량주의’나 ‘어용’으로 전락, 혁명적 노동운동은 비합법 영역에서 진행
- 일제의 군수산업이 집중되어 있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파업투쟁. 1938년 해주 시멘트 공장 노 동자 파업, 평북 후창 광산노동자들의 5.1절 파업 시위, 인천 부두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등.
- 일제의 전시정책을 파탄시키기 위한 각종 형태의 반일반전 운동에 적극 참여. 1940년에서 1943 년 사이 문평 제련소 노동자들의 태업투쟁. 1942년 5월 동방광산 광부들의 일제의 전시징용정책 과 임금체불 및 차별대우에 반대한 취업거부와 시설물 파괴 등.
- 파업이 힘든 조건에서 태업, 공사 방해, 방화, 기계 파괴, 집단 이탈, 탈주 등 다양한 형태로 전 개. 1943년 회령 광산의 탄광 인입선 폭파 사건, 남포제련소・이원광산 노동자들의 기계 파괴 투 쟁, 부산의 조선중공업・조선항공회사의 화재 사건 등.
- 무장봉기 : 평양 철공 노동자들은 1941년 1월에 비밀리에 자체 철공소를 설치, 무기를 제작하여 결정적 시기의 반일무장 폭동을 준비했으며, 함북 계림 탄광의 노동자들도 비밀 근거지를 두고 무장투쟁을 통한 반일투쟁 전개. 서울과 평양, 부산이나 공주 등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
라.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으로 계승․부활
- 식민지 착취와 수탈에 반대하는 경제적 성격과 더불어 민족차별에 반대하고 반일민족해방을 추 구하는 정치적 지향. 초기에 지식인이나 민족운동가들의 원조와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차츰 노 동자들 자신의 역량에 의한 주체적 운동으로 발전. 특히 당시 노동운동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 고 조직 형태에서 급속한 발전과정을 밟았던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음.
- 사회주의운동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개. 이는 당시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이 소극적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에 반하여 사회주의운동이 적극적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상황과 관련.
- 일제하에서 형성된 노동운동의 역량은 1945년 해방 직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를 중심으 로 한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으로 계승되고 부활.
3. 해방공간의 노동운동
가. 해방의 의미와 과제
-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구축된 식민지 잔재를 청산. 즉 식민지 지배의 물적 구조 청산과 인적 구조, 곧 친일파 청산.
- 토지개혁
- 민족통일국가 건설 : 분단은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들어오면서 현실화되기 시 작.
- 민주 평등 세상 갈망 :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 “귀 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중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 의 7%, 모른다 8%로 답변.
나. 미군정에 맞선 민족통일국가 건설 노력
1) 해방직후의 건국운동
-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활동 : 8월말까지 145개의 지부가 건설.
- 9월 6일 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선포.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38선 이남 의 조사대상 138개 군 가운데 128개 군에 인민위원회가 조직, 그 가운데 약 절반에 해당하는 69곳의 인민위원회가 자치관리.
2)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 미군은 9월 8일 인천 상륙. 9월 7일 맥아더 총사령관은 포고문 제1호에서 “점령군에 대해 반항 행동을 하거나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 1945 년 10월 10일 미군정장관 아놀드, 남한에는 미군정이라는 단 하나의 정부만 있을 뿐이라고 발 표.
- 미군정은 지지기반으로 친일파와 보수 세력의 한국민주당을 선택. 이들은 친미파로 변하여 미군 정의 행정고문이나 관리로 중용됨. 특히 경찰기구는 친일파가 80%를 장악.
- 또한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를 공포, 조선에 있는 일본인 재산을 ‘적산’으로 규 정 접수함으로써 남한의 주요 산업 거의 전부와 일부의 토지를 물적 기반으로 확보. 이 법령으로 해방 후 민중의 토지획득 투쟁과 공장관리운동은 불법화.
3) 국내의 주요 정치세력
- 한민당 : 보수 우익을 대표하는 정치세력. 부르주아․지주 세력을 대표. 친일파 처단 반대.
- 김구, 김규식 등의 중경임시정부 세력. 다양한 흐름으로 분화.
- 안재홍의 국민당(중도우파) :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주축. 만민공생의 신민주주의와 신민족 주의를 표방했으며 좌우 협조 중시
- 건준을 주도했던 중도좌파의 여운형은 1945년 11월12일 조선인민당(약칭 인민당)을 결성. 인민 당은 좌우 갈등을 최소화하고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좌우연합 정부 수립 목표.
- 조선공산당 : 가장 큰 영향력. 조공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토 지개혁 방안, 주요사업 국유화와 국가주도 계획경제 제시. 2차 세계대전 후 미소의 협조 정책이 장기간 지속되리라는 판단에 기초해 미소의 협조를 받으며 정부 수립코자했으나 미군은 인공을 부정.
4) 공장 자주관리운동과 전평의 결성
- 자주관리운동은 주로 일본인이 소유했던 기업들에서 활발, 한국인 소유의 사업체로 파급
- 노동자들은 자주관리운동 속에서 점차 노동조합의 형태로 조직화. “자본계급의 지배에 대한 대 안적 경험”
- 1945년 11월5~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
- 전평은 남북을 합쳐 16개 산별노조와 1,194개의 분회, 50만여 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505명이 참가하여 결성, 이후 조합원 수는 남한에만 50여만 명(11개 지방 평의회, 8개 도 평의회). 한편 북한 지역은 전평 북조선총국을 독자적으로 운영, 전평 북조선총국은 북조선노동총동맹(1946.4), 북조선직업총동맹(1946.5)으로 개편.
- 전평의 일반 행동 강령 : ① 노동기본권 보장 요구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차별대우 금지, 단체계약권 확립, 공장폐쇄 ․ 해고와 실업 절대 반대, 유년노동 금지, 청부제 반대), ② 후생복리 요구(산전산후 휴가제, 복지. 휴게시설 설치, 사회보장 실시), ③ 정치적 요구(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시위의 절대 자유, 농민운동 지지,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조선의 자주독립, 세계노동 계급 단결 주장).
- 전평의 결성은 지역적 직업적 단결에서 산업적 전국적 단결로, 분산적 수공업적 단결에서 대중 적 단결로 전진해가다가 결실을 보지 못했던 일제하 노동운동의 발전 경향을 합법적 공간을 통 해 현실화시킨 것으로 평가.
- 미군정이 45년 12월 일본인 재산을 전면 접수하겠다는 법령을 발표, 자주관리운동을 전면 부정 하고 탄압.
-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반공청년단 간부를 앞세워 1946년 3월10일 대한노총(대한독립촉성노동총 연맹)을 결성.
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민중항쟁
1) 찬탁・반탁의 소용돌이
-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 1)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 2) 미소공동위원회(약칭 미소공위) 열 것, 3) 최고 5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 소공위가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할 것 등 결정. 3상회의 결정의 핵심은 임시정부 수립.
- 그러나 동아일보의 왜곡보도와 우익의 정치적 악용으로 신탁통치 찬반 논쟁으로 이어짐. 이를 계기로 좌우 갈등과 대립 본격화. 친일파는 반탁운동을 ‘세탁’의 계기로 삼아 ‘애국자’로 둔갑.
- 1946년 2월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 발족
-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공동의장 여운형, 박헌영, 허헌, 백남운, 김원봉) 결성. 과도적 임시정부 역할을 맡겠다고 선언.
2) 미소공위의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 1차 미소공위가 1946년 3월20일 열렸으나 5월 6일부터 결렬.
- 남한 단독정부 수립설 : 4월 6일 AP통신은 “미소공위가 결렬될 경우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 이 미 군정청 안에서도 검토되고 있다.” 보도.
- 1차 미소공위가 결렬 후 미군정은 좌익과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
- 조선공산당은 7월 이른바 ‘신전술’ 채택, 반미투쟁도 불사한다는 강경노선으로 전환.
- 47년 5월21일부터 미소공위가 재개되었으나 반탁투쟁을 한 정당・사회단체 처리 문제로 난항, 7 월1일 평양회의를 끝으로 사실상 결렬. 미 ․ 소 냉전 격화(트루먼 독트린, 6월 마셜플랜 등 대소 봉쇄 정책 강화).
3) 전평의 총력투쟁
- 일본자본 철수, 공업생산량 크게 감소. 남북 단절로 생산 차질 가중, 대량 실업.
- 식량난은 더욱 극심. 미군정의 양곡정책 실패. 전평은 ‘쌀 획득 투쟁’으로 맞섬.
- 9월 총파업 : 9월 23일 부산 철도국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다음날 서울 철도국 노동자들 도 파업에 가세. 전평은 9월 24일 ‘남조선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파업을 지도했고, 파 업은 10월초까지 전국으로 확산. 10월 중순까지 계속된 파업에는 전국에서 26~27만 명의 노동 자와 학생들이 참가했다. 투쟁 초기 전평의 주요 요구는 쌀배급, 임금인상, 공장 폐쇄 및 해고 반 대 등 경제적 요구 중심이었다. 그러나 투쟁이 확산되면서 민주인사 석방, 미군정의 사과, 경찰 처단 등 정치적 이슈를 제기.
- 10월 인민항쟁 :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9월 총파업은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짐. 인민항쟁은 12월 초까지 73개 시, 군을 휩쓸고 지나 갔으며, 연인원 230만 명이 참가.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거치면서 검거된 사람만 해도 전국에서 3만 명이 넘음. 10월 항쟁 진압 이후 미군정과 우익은 지역 인민위원회를 파괴하고 사회주의 세력을 더욱 탄압. 전평에 대해서도 대량 해고와 테러를 통해 조직을 파괴.
- 3월 총파업 : 47년 3월 22일 서울출판노조를 필두로 24시간 시한부 총파업. 구속자 석방, 경찰 의 민주화, 테러방지 등이 표면상의 주요한 요구였지만 파업의 실제 이유는 미군의 대한노총 옹 호 및 전평 탄압에 대한 반발. 노동자 20만 3천여 명, 농민과 소시민 15만 7천 명이 참여했으 며, 학생 8만 명이 맹휴를 벌임. 미군정은 다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3월 28일 당시 검거된 인 원은 2천명을 넘음.
- 1945년 8월15일에서 1947년 3월 31일까지 연인원 60만 명에 2,388건의 쟁의. 미군정의 탄압 으로 피살자 26명, 피검자 7,836명, 해고자 1만 5,534명이라는 엄청난 피해. 미군정 47년 6월에 “정치색을 띤 노동조합은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평을 불법화.
4) 대한노총의 탄생
- 전평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자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우익 진영이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 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급조. ‘전평 파괴’가 목적. 대 한노총이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아니라는 것은 그 행동강령에 “혈한불석(血汗不惜)으로 노자간의 친선을 기함”이라는 조항이 들어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음.
- 전평의 9월 총파업이 시작되자 대한노총은 경찰과 협력하여 파업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조직을 확장. 이어서 10월 인민항쟁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삼아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에 각각 테러 단을 파견하여 전평을 파괴하고 대한노총 지방조직을 건설.
- 대한노총은 전평 타도운동에만 전념. 당시 대한노총 임원들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모리배와 야 합하고 군정당국과 결탁하는 등 극심하게 부패. 공공연히 기업주들과 손을 잡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억압하는 데 적극 협력.
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
1) 분단의 진행
- 1947년 9월23일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안 가결,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안을 43:0(기권 6, 결석 8)으로 결의(소련불참).
- 중도파 민족주의자 중심의 민족자주연맹(약칭 민련, 주석 김규식)과 김구는 이북의 정치 지도자 들과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 ①외군 즉시 철거, ②외군 철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 ③전조선정치회의 소집 → 임시정부 수립 → 총선 → 헌법 제정과 통일정부 수립, ④남 조선 단독선거 절대 반대 등의 4개 항이 담긴 공동성명서 발표.
-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미국의 남한 총선거안을 통과. 5.10 선거 강행
- 7월17일 제헌헌법 공포, 7월20일 이승만 대통령 선출
-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공포.
-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를 구성, 9월8일 헌법제정,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2) 단정 반대 투쟁과 전평의 몰락
- 1948년 2월 7일 남한 단독선거 위한 유엔임시한국위원단 입국 반대 총파업 투쟁(2.7구국투쟁). 군정당국은 전국에 걸쳐 “70건의 민중봉기, 데모 103건, 봉화 204건, 파업 50건, 동맹휴학 34건 이 발생, 이와 관련하여 8,479명이 체포되고 1,290명이 송치되었다고 발표. 이 투쟁 이후 남한 각지에는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했고, 4.3제주민중항쟁과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이어짐.
- 5월8일에도 ‘남조선단선단정반대 총파업’을 벌였으나 좌절. 전평은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사 실상 해체. 그러나 전평은 11월 20일에도 전평 2시간 총파업 전개, 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
- 전평은 1930년대 이래 지하로 잠복했던 노동운동의 전통을 계승. 전평은 몇 차례에 걸친 총파업 을 통해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저항했지만 그 꿈은 좌절. 전평은 국가형성을 둘러싼 투쟁에서 미 군정 및 우익세력에게 패배했지만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변혁적 노동운동을 전 개했다고 할 수 있음.
제 2강
암흑시대 :
독재정권과 노동운동(1948년~1986년)
1. 남북분단과 1950년대
가. 헌법 제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
○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1948년 9월 9일 북한 단독정부 수립
○ 대한노총은 권력의 시녀
- 정부수립 후에도 이승만은 대한노총 총재직을 유지했고, 대한노총은 오로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과 반공 활동에만 충실
- 1949년 대한노총은 683개 사업장조직에 12만 8천여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 중 단체협약을 체결한 사업장은 단 2개
- 1949년 7월 1일 ‘국토통일방위강화 노동자, 농민 궐기대회’, 1949년 10월 22일 ‘대한노총 애국기(愛國機) 헌납 운동’
나. 한국전쟁과 대한노총
○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한 직선제 개헌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대한노총은 <원외 자유당>을 설립하고, <땃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등의 유령단체를 만들어 데모를 주동하고 국회의원들에게 물리적 테러
○ 조선방직 쟁의
-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이승만의 심복 강일매의 착취와 횡포에 저항하여 쟁의를 일으키자 대한노총 간부들은 조선방직에 어용노조를 만들어 쟁의를 파괴하려고 획책
- 대한노총 전진한 위원장은 <조방쟁의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3월 12일 총파업을 선언 이승만은 전진한을 대한노총으로부터 축출
- 조방쟁의를 둘러싼 대한노총의 파벌대립은 정권에 맞서서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주장한 세력과 정권에 영합한 세력 간의 대립
다. 6.25전쟁 이후의 정치경제 상황
○ 활동가집단의 소멸
- 6.25전쟁으로 남한에서 혁신세력 소멸
- 전쟁 후 노동자에게는 어용노조만을 노동조합으로, 보수정당만을 정당으로, 반공사상만을 유일사상으로 선택하도록 강요
○ 원조경제의 시작
- 미국은 생산설비가 아니라 주로 잉여농산물을 원조물자로 제공. 밀, 원면, 원당을 가공하는 이른바 삼백산업(제당, 제분, 방직)
- 원조경제의 부작용 : 우리 농업은 막대한 피해, 굶주린 농민들은 무작정 도시로 이동
○ 정경유착과 재벌의 뿌리
- 적산불하 : 친일세력에게 무상공여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불하. 삼성, 현대, 한화, 한진, LG, 두산 등의 재벌 형성.
- 정경유착의 또 다른 경로는 원조물자 배정. 원조물자를 배정받은 대표적 기업은 제일모직, 제일제당(현 삼성의 모체), 경남모직(현 한일합섬), 금성방적(현 쌍용), 대한방직, 대한제본, 럭키유지 등.
라. 노동관계법 제정
- 1953년 1월에 노동조합법, 노동위원회법, 노동쟁의조정법, 4월에 근로기준법 제정
- 노동조합법의 핵심내용 : 복수노조의 설립 허용, 노조 대표자 또는 조합의 위임을 받은 자가 단체교섭권을 행사, 노사 쌍방에게 단체협약 체결 의무화
- 근로기준법의 핵심내용 : 8시간 노동제, 여자와 미성년자에 대한 특별보호규정,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규정
- 실제 산업현장에서 노동법은 거의 지켜지지 않음. 50년대 내내 근로감독관도 배치되지 않음
마. 자유당과 대한노총
- 1950년대에도 대한노총은 현장과 분리된 지역별 조직체제
- 핵심관료들은 50년대에도 여전히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활동 : 1956년 3월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삼선출마를 간청하는 데모를 조직, 1960년 3.15선거 때에는 산하 노동조합을 통하여 조합원들에게 부정선거를 지시
- 대한노총 중앙 및 지역 조직은 현장조직들이 노동조합 본연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 : 사용자가 조직한 어용노조를 지지, 예컨대 55년 대구 대한방직 노동쟁의
바. 대한방직 쟁의와 전국노협
○ 대구 대한방직 쟁의
- 자유당 재정부장 설경동이 1955년 말에 대한방직을 인수받자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 2천 6백 명을 전원 해고하고, 그 중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2백 명만 다시 고용하여 어용노조를 설립.
-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간부를 쫓아내고 새 간부를 선출하여 쟁의에 들어가자 대한노총은 어용노조를 지지하여 파업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 5년 이상 계속된 대한방직쟁의는 4.19혁명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남.
- 대한노총의 배신과 공권력의 불법개입으로 시련을 겪은 노동자들은 김말룡의 지휘를 받으며 <대한노총 경북지구>를 탈퇴, 대한노총으로부터 독립적인 <대구지구 노동조합연맹>을 결성.
○ 김말룡과 전국노협
- 대한노총 일각에서 대한노총을 민주화 시키려는 세력이 김말룡 등을 중심으로 성장.
- 김말룡 세력은 대한노총이 너무나 부패하여 내부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제2노총을 설립하기로 결의, 1959년 10월 26일 14개 단위노조 대표 21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노협>을 결성
- 전국노협의 주축을 이룬 세력은 대한방직 쟁의 과정에 설립된 <대구지구 노동조합연맹>과 조선방직 쟁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던 <부산지구 노동조합연맹>
사. 4.19 혁명과 민주노조운동
○ 민주노조운동의 세 가지 유형
1) 자유당 정권 및 자본에 기생하던 어용노조 타도투쟁 –전국노협 주도
2) 신규노조 및 전문직노조 결성운동
3) 임금인상 또는 체불임금지급, 해고반대 등을 이유로 벌어진 노동쟁의
1959년 말에 558개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이 1960년 말에는 914개로 늘어났고, 조합원 수도 28만 명에서 32만 명으로 늘어남.
○ 교원노조운동
- 1950년대 후반에 교원노조 결성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 대구에서 1960년 4월 29일 <대구시 교원노동조합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작, 5월 22일에 벌써 전국조직인 <한국교원노조연합회>를 결성하고, 7월말까지 전체 교원의 25%에 해당하는 2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
- 4.19혁명 덕분에 집권한 민주당 장면 정권은 노동자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교원노조의 해체를 지시, 교원노조 결성투쟁은 1961년까지 이어졌고,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소멸
2. 5.16군사쿠데타와 1960년대
가. 60년대의 정치경제 상황과 5.16쿠데타
○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5.16 쿠데타
- 민주당 정권의 무능 : 3.15 부정선거 책임자 처벌, 식민지 잔재 청산에 실패
- 5.16쿠데타 : 박정희와 소장파 군부세력이 중심. 반공과 경제개발 표방
나. 한국노총의 탄생
○ 쿠데타세력의 노동조합 재편
- 노동쟁의 금지 및 사회단체 해산
- 중앙정보부가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 조직 : 이규철 등 옛 대한노총 간부 9인.
61년 8월 16~25일 11개 산별노조 급조
- 61년 8월 30~31일 한국노총 출범 : ‘반공체제강화’를 첫째 강령으로 내세웠고, ‘5.16 군사혁명을 전폭 지지하며, 혁명과업 완수에 전력을 경주할 것’을 결의
- 쿠데타정권이 노동조합을 산별노조로 재편한 것은 저임금 경제개발 전략을 추진할 때 대두될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통제하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 1963년 노동조합법 개정 :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에 결정적인 걸림돌. 복수노조 금지(한국노총을 유일한 상급단체로 인정),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 노동쟁의 사전 적법판정, 냉각기간 연장, 노동쟁의 절차의 복잡화 등 수많은 독소조항
○ 자본가단체
61년 8월 한국경제인연합회 (초대회장 이병철) → 1968년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다. 경제개발과 재벌형성
○ 한일회담과 6.3사태
- 1962년 1월 1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
-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 비밀회담 :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청구권’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으로 변질
- 국민들 반대에 대해 64년 6월 3일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 (6.3사태).
- 1965년 8월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도 함께 결정.
○ 수출주도형 경공업
- 60년대 성장 동력 : 노동집약적 가공무역 – 의류, 신발, 가발, 완구 등
- 1964년에 <공업단지 개발조성법> : 1966년 서울 구로공업단지, 인천의 부평, 주안 공단
- 1967~71년 <제2차 5개년 계획> : 공업구조 고도화, 수출의 획기적 증대 목표
- 마산 수출자유지역, 구미 전자공업단지, 포항 종합제철 및 석유화학공업단지
○ 정경유착의 재벌형성
- 박정희 정권의 재벌통제 : 대출 할당 및 투자자격 할당
- 대출 할당 : 차관의 도입 및 분배, 수출산업에 대한 특혜
- 투자자격 할당 : 정유, 화학비료, 화학섬유, 시멘트 및 섬유 산업을 육성산업으로 선정하여 신규기업의 진입을 제한
○ 자율적 노사관계의 미발전
- 자본가들의 주요 관심사는 오로지 정부로부터 특혜자금을 따내는 데 집중
- 높은 임금 또는 기타 동기부여를 통하여 기술과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일은 무시. 노동자들의 요구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억압
라. 60년대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
○ 계급구조의 변화
- 60~7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모 - ‘한강의 기적’
- 저임금 수출산업 – 저곡가정책 - 농촌의 해체 – 농촌인구 도시집중 – 빈민촌
- ‘산업전사’, ‘조국근대화의 역군’ – ‘공돌이’, ‘공순이’
○ 열악한 노동조건
- 1964년 제조업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3,880원(당시 가구당 평균 식료품비는 5,130원)
- 주당 노동시간은 63년 50시간, 69년에는 59시간
- 연평균 산업재해는 1964~69년 1천 5백 건에서 3만 8천 건으로 25배나 증가
○ 노동운동 암흑기
- 한국노총 산별노조들은 산하조직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기능만 수행
- 단체교섭은 대부분 기업별로 수행, 쟁의는 대부분 실력행사 없이 조정에 의한 양보와 후퇴
- 한국시그네틱스, 오크전자 등 외국인 투자기업에서 약간의 쟁의
-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등 종교단체들만이 노동문제에 관심
3.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불씨
가. 70년대의 정치경제 상황과 10월 유신
○ 박정희 독재정권의 위기
- 냉전체제에서 긴장완화 체제로 이행
- 석유파동과 외채부담 → 경제성장 위협 → 노동통제 강화
- 69년 ‘외국인투자기업에서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
- 70년 <한국경영자협의회(경총)> 결성
- 72년 ‘10월 유신’
○ 재벌의 성장
- 1973년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추진. 6개 전략산업(철강,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비철금속)을 선정하여 집중지원
- 1975년부터 종합상사 제도 시행. 재벌기업들이 수출입 업무 독점
나. 70년대 노동자계급 상태
○ 여전히 열악한 노동조건
- 1970년 최저생계비의 62%였던 임금이 1980년 45%로 하락
- 1970년 주당 평균52시간, 1980년에도 다시 52시간
-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미국과 영국의 5배였고, 일본의 15배
○ 한국노총의 어용 활동
한국노총은 아래로부터 터져 나오는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하는 역할을 자임
다. 전태일
-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동회> 시위
- 경제성장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을 위한 것임을 만천하에 폭로
-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형성을 점화하는 불꽃 → 노동자들 및 지식인들의 각성
- 70년 11월 27일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 지부> 결성
라.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 민주노조운동의 두 가지 유형
- 한국노총을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노조 건설 : 청계피복노조
- 어용노총을 장악하여 민주노조로 전환 : 원풍모방, 동일방직
- 70년대 노동운동은 경공업 여성노동자들이 주도 : 반도상사, 방림방적, 동광섬유, 크라운전자, 시그네틱스, 콘트롤데이터, YH무역 등
- 1976~78년의 <동일방직> 사건은 정권-자본-한국노총 합작으로 획책된 노조파괴 공작의 전형적인 사례
○ 민주노조운동의 성격
- 기존의 노사관계 틀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
- 각성된 노동자 :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임금 노예의 현실을 부정.
-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통하여 한국노총의 어용적 관료주의체제 극복
- 박정희 정권의 ‘선성장 후분배’ 경제개발전략에 정면으로 도전
마. 노동운동과 교회
○ 노동운동과 지식인집단
- 교회단체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과 결합.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
- 노동운동가들에게 피난처 제공, 노동자야학과 소모임 활동을 조직, 최초의 현장 노조 활동가들이 탄생
- 교회단체들의 지원과 참여는 계급투쟁사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양심에 근거, 그것이 결정적인 한계, 그러나 70년대에는 거의 유일한 노동운동 지원세력. 학생들이 집단으로서 노동운동과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80년대 초부터.
○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특징
경공업 여성노동자 주도, 수도권 중심, 교회단체와 연계 (교회단체들이 수도권 중심으로 활동)
4. 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결합
가. 80년대 전반기의 정치경제 상황과 광주 민중항쟁
○ 5.18 광주 민중항쟁
-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사망
- 12월 12일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가 무력으로 청와대를 점령
민주화 세력은 분열 - 김대중과 김영삼
- 80년 5월 17일에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 금지
-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 시작, 5월 21일 시민군 도청 장악, 5월 27일 신군부 유혈 진압
○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집중투자정책은 중복과잉 투자 및 경제위기로 귀결
- 신군부는 재벌의 문어발식 기업 확장이 초래한 중복투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을 단행. 이러한 위기극복 전략은 무자비한 노동통제를 요구
나. ‘80년 봄’의 예고
○ 80년 봄 노동운동 활성화의 세 유형
1)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쟁의 및 파업
2) 신규노조 결성투쟁
3)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
○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 예고
- 70년대의 소극적 준법투쟁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격렬한 투쟁으로 전개
- 중화학공업 대기업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한 양상 – 사북 동원탄좌 / 노동운동의 중심이 경공업 여성노동자들로부터 중화학공업의 남성노동자들로 옮겨가고 있음을 예고
- 투쟁은 대체로 자연발생적이었고 비조직적으로 진행 – 조직화 과제 예고
○ 신군부의 탄압
- 광주 민중항쟁 진압 이후 신군부는 노동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 한국노총 민주화투쟁을 주도했던 노조간부들을 노동계 정화대상자 191명에 포함시켜 제거, 84명을 계엄사로 끌고 가 사표를 강요, 그 중 일부는 삼청교육대 강제입소.
- 8월 21일에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시달하여 산별노조를 해체하고 지역지부를 폐지 - 9월15일까지 105개의 지역지부가 해산되면서 조합원은 14만 명이나 급감
- 한국노총은 신군부의 탄압에 굴종하였고, 노동자들의 개혁요구를 묵살
- 신군부의 탄압 중 가장 후유증이 많이 남은 것은 기업별노조 체제의 확립. 80년 12월 31일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 제정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 산별노조체제를 부정하고 기업별노조체제를 강제, 노조설립 요건강화, 단체교섭권 위임금지, 제3자 개입금지, 냉각기간 연장, 공익사업 범위확대, 직권중재 대상 확대 등등의 독소조항
다. 활동가 집단의 형성
○ 노동운동 활동가 집단의 형성 – 노학연대
- 선진노동자 집단 : 민주노조활동 또는 소모임 활동을 통하여 성장한 선진노동자 집단,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해고노동자 집단
- 학생 출신 활동가 집단 :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각성시켜 사회변혁투쟁에 나서게 하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학생들이 대거 공업지역에 위장취업. 70년대의 교회단체들을 대신하여 80년대 초부터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을 추동.
○ 영남권 산업도시들의 지체
- 80년대 초반 활동가집단은 주로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형성
- 울산, 마산, 창원, 거제 등 중화학공업이 밀집해 있던 영남권 산업도시들에서는 1987년까지 활동가집단 형성 실패
라.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동맹파업
○ 85년 4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파업
-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파업을 조직하고 주도. 합의내용은 임금인상을 포함하여 주로 경제적인 사안들 - 분명한 한계
- 상징적 성과 :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대표(‘공돌이’)가 재벌총수(‘회장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섭장을 나서는 장면이 매스컴을 통하여 전국으로 전달
- 노동운동의 성격변화 예고 : 남성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중공업 부문에서 일어난 최초의 조직적인 파업, 재벌기업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 노학연대의 전략이 주효했음을 증명하는 사건
○ 85년 6월, 서울 구로공단 동맹파업
-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명을 연행하자 대우어패럴, 효성, 선일, 가리봉전자 등 구로지역 10개 노조 간부들이 그에 맞서서 동맹파업, 총 2천 5백여 명의 조합원이 참가
- 당시 한국사회의 모든 노동운동단체와 사회운동단체의 역량이 집중. 구로공단에서는 경인지역에서 몰려온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연일 가두에서 연대투쟁,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는 22개 단체가 지지농성
- 동맹파업 등을 이유로 구로 지역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약 2천 5백 명, 기타 수도권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대략 3천 명
- 표면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로 동맹파업은 80년대 중반기의 가장 중요한 투쟁으로 평가
▪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성사된 지역연대투쟁
▪기업별노조들이 평소에 긴밀하게 연대활동을 벌여왔음을 입증한 투쟁
▪경제적 불만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에 맞서 촉발된 투쟁
▪민중운동 내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하게 부각시킨 계기
제 3강
폭발과 약진 (1987년~1997년)
1. 87년 노동자대투쟁
가. 6월 민주화 항쟁
80년 광주학살로 전두환 정권 등장
83년 유화국면과 85년 총선 신민당 돌풍
86년 권인숙 성고문, 5.3 인천사태
87년 4.13 호헌 조치 발표
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족
6월 10일 범국민대회 개최, 24만 명 시위 참여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6월 29일 6.29선언. 신군부 정권의 항복 선언.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전환점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100만 인파 집결
- 6월 민주화항쟁은 초기에 학생들이 주도. 그러나 점차 일반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시위대열에 합 류하게 되었고, 서울에서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라 불렸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합류하면서 전국민 적 민주화투쟁으로 발전.
- 노동운동진영은 지역별로 <민주헌법쟁취 노동자 공동대책위> 등의 이름으로 6월 항쟁에 참여. 이 기간 동안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집단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
나. 7~9월 노동자대투쟁
- 6월 항쟁 후 일터는 변한 것이 없었음. 장시간 노동과 높은 노동강도, 저임금과 단결권 미보장 등.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산업현장의 민주화 필요 절감.
-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권용목 위원장)에서 노조 결성 → 7월 노동자투쟁이 울산 각 공장을 휩 쓸었음.
- 금속산업 노동자들은 7・8・9 투쟁을 주도. 울산의 투쟁은 마창, 부산, 거제를 거쳐 대구, 경북, 구 로, 경인 등 전국으로, 업종별로는 전자, 섬유, 운수, 사무직, 광산 등으로 확산.
- 노동자대투쟁은 8월 중순,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가 4만여 노동자들을 끌고 울산 시가행진(8월 16~17일)을 벌이면서 절정.
- 거의 모든 시위와 파업은 불법으로 진행. 적법은 사실상 불가능. 선 투쟁 후 협상 양상. 노동자 대투쟁의 요구사항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중심으로 하고, 노무관리, 작업장 문화 등 광 범위한 요구조건이 제시되었음. 산업현장의 민주화 강제. 최종적으로는 노동조합 설립을 요구.
- 8월 28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 탄압에 이어 9월 4일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에 경찰 이 투입.
다. 새로 열린 계급정치 지형
-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3,34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 이는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 초부터 25년 동 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150여 개 사 업장에서 노동쟁의가 진행.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수는 120만 명으로 추산, 그것은 10인 이 상을 고용한 기업체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1/3에 해당하는 수임.
- 업종별로 살펴보면 제조업이 1,740건으로 전체 투쟁의 53%를 차지했고, 운수업이 1,247건을 차 지. 기업규모별로는 1,000명 이상을 고용한 대사업장이 61%를 차지하였고, 500~999명 규모의 사업장이 32%를 차지. 한 마디로 쟁의의 90% 이상이 500인 이상의 대기업, 특히 재벌기업에서 발생.
- 투쟁은 대체로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체계적인 계획이나 전략, 조직적인 통 솔 없이 수천 건의 노동쟁의가 전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쟁의는 대부분 작업 중단, 파업, 또는 시위의 형태를 띠고 격렬하게 진행. 합법적인 쟁의는 5.9%에 불과했고, 거의 모든 쟁 의는 노동법을 어기면서 진행.
- 87년 대투쟁은 질적인 면에서도 노동운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잉태. 우선 노동운동 주체의 지형 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투쟁의 중심무대는 경인지역이 아니라 영남지역이었으며, 노동 집약적 중소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경공업 부문이 아니라 자본집약적 대기업이 주축을 이루 고 있는 중화학공업 부문. 또한 남성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로 등장.
- 대투쟁은 노동운동 지도집단의 구성에도 큰 변화. 87년 대투쟁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아니라 이른바 ‘선진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
-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최고의 목표로 내세웠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조직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 87년 노동자들의 쟁의는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노동조합 결성투쟁으로 이어짐. 이를 통해 경제적 계급에서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해나감. 나아가 가장 근 본적인 질적인 변화는 노동자계급의 초기업적 조직화를 촉발한 데 있음. 대투쟁과 더불어 노동자 들은 기업의 담장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향하여 행군하기 시작.
라. 공장의 담을 넘어 연대의 길로
- 87년 여름부터 88년 가을까지 노동운동진영은 공세를 펼치기에 유리한 조건. 투쟁의 열기는 89 년까지 이어짐. 86년에 2,675개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의 수는 89년까지 7,883개로 늘어났고, 조 합원의 수는 103만 6천 명에서 193만 2천여 명으로 늘어남. 불과 3년 사이에 노동조합의 수는 3배, 조합원의 수는 78%가 증가.
- 87년 대투쟁 이후 새로 결성되었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 시킨 노조들은 국가-자본-한국노총 체 제에 종속되기를 거부.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체를 건설하려는 노력은 크게 세 갈래로 나타 남.
- 제조업 중소기업 노조들은 지노협(지역별 노동조합 협의회)으로. 87년 12월 <마창노련(마산창원 지역 노동조합총연합)> 창립을 시작으로 하여 진주, 서울, 인천, 전북 등을 거쳐 89년 11월에 <대구노련(대구지역 노동조합연합)>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개 지역에서 지노협이 건설되었으며, 630개 노조 26만 조합원이 참가.
- 물리적 탄압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비제조업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고용형태나 근로조건의 동질 성을 따라 자연스럽게 업종별 연대를 형성. 87년 11월 결성된 <사무금융노련(전국사무금융노동 조합연맹)>을 선두로 하여 88년까지 병원, 화물, 언론, 출판, 전문기술 등 모두 13개 업종에서 <업종협(업종별 노동조합협의회)>이 건설.(690개 노조, 17만 조합원)
- 재벌그룹의 연대 : 87년 8월에 만들어진 <현노협(현대그룹 노동조합협의회)>은 88년에 <현노련 (현대그룹 노동조합연합회)>로, 90년에는 <현총련(현대그룹 노동조합총연합)>으로 발전. 대우그 룹 및 기아그룹 노동자들도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선례를 따름.
- 87년 노동자재투쟁 이전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활동가들의 노력 : 노동상담소를 개설하여 민주노 조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하고, 정치학교를 개설하여 노동자들을 교육하기도 함. 88년 6월 7일 에 그들은 <노운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을 결성함으로써 전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지 노협 및 업종협에 투신하여 <전노협> 건설운동에 헌신.
- 88년 8월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결성. 11월 13일 ‘전태일 정신 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 국노동자대회’. 이후 12월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 결성.(16개 지노협, 4개 업 종협, 20만 조합원 참가)
- 89년 3월 임시국회에서 노동법개정안이 통과. 그러나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로 주44시간 노동제 등 근로기준법 개정만 이루어짐.
마.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 1988년 12월 발표된 노태우 정권의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 지시’ 이후 강력한 공안탄압이 시작 됨. 1988년 한 해 동안 구속 노동자는 80명 정도, 1989년의 경우 구속 노동자는 611명, 1990 년에는 492명, 1991년에는 515명, 1992년에는 275명으로, 89년부터 92년까지 4년 동안 구속 노동자는 모두 1,893명에 이르렀음.
- 자본의 공세가 강화됨. 전경련과 경총 등을 묶어 경단협을 구성. 무노동무임금, 한 자리 수 임금 인상 등 주장.
-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 1,500여명의 대량해고. 98년 2월 노사정 합의를 통해 합법화를 쟁취.
-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결성. 전노협은 14개 지역협의체와 2개 업종별 노조 조직에 속하는 600여 개 노조, 22만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 그러나 사무직 등 비제조업 업 종 노조들, 대기업노조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전노협에 불참.
- 전노협은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을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기본원칙으로 내세웠고, 산 별노조 건설을 조직전략으로 분명하게 선언.
2. 시련과 돌파 : 1990~1992년
가. 90년대 초반기의 정치경제 상황
-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 경제 상황 악화 : 물가 상승, 부동산 값 폭등, 재벌들의 과잉 중복 투자
- 보수대연합 추진과 3당 합당 → 정국 주도권 장악, 공안정국 계속
나. 민주노조운동의 고난에 찬 행군
-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조직 해체를 겨냥한 전면적인 탄압 자행. 자본과 국가에게 전노협은 ‘정치 주의적’ 노동운동으로 보임. 탄압은 전노협 조직 와해를 목표로 진행. 전노협의 핵심이었던 마창 노련 탄압 집중.(기아기공 노조 마창노련 탈퇴) 91년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 옥중 사망.
- 활동가 조직들은 전노협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 사무직노조 및 대기업노조의 전노 협 참가 지연. 대다수 사무업종 노조들은 조직 내부 문제, 즉 조직의 안정화 문제에 몰두, 현총련 산하 노조들과 및 대우조선 등 제조업 대기업 노조들은 전노협 지도부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 지하고 있기는 했으나, 조직적인 수준에서는 전노협 가입보다는 사안별 연대관계를 선호.
- 이 시기 대기업의 경우 현장 노무관리가 강화됨. ‘신경영전략’을 통한 현장통제 강화에 맞서는 과정에서 노사관계가 기업내부로 축소되는 경향.
- 전노협에 집중되었던 탄압은 그나마 전교조에 의해 일정 정도 분산. 89년 5월 28일 전국의 교 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 노태우 정권은 초강경 탄압수단을 동원, 1천 5백 명 가입교사 전원 을 해직시키는 것으로 맞섬. 전교조는 공안정국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탄압의 표적으로 나섬으로 써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생산직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분산하는 효과를 유발.
-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89년 128일 파업투쟁에 이어 1990년 골리앗 투쟁. 육해공 상륙작전. 5 월 10일 골리앗 전사들 ‘현중노조가’ 부르며 크레인을 내려옴. 1990년 5월 서기원 사장 퇴진과 방송제작 자율성을 요구하며 KBS 노조 파업. MBC, CBS 등 다른 방송사 노조들도 연대.
- 전노협은 현대중공업 투쟁 지원 위해 4월 30일 총파업을 결정하였고, 5월 4일 146개 사업장, 12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 MBC(88년), 전교조(89년), KBS(90년) 등의 투쟁은 권력 과 자본의 이데올로기 통제를 담당하는 곳에서 일어난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 를 지님.
다. 단결의 징검다리
- 1990년 말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연대회의) 결성.
현대중공업, 현대정공(창원, 울산), 현대중전기,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대우정밀, 포항제철 등 모 두 16개. 총 조합원 수가 103,000 명, 평균조합원 수 6,500. 전노협 가입 노조 7개, 전노협 가 입 공약 노조가 2개(대우조선, 금호타이어).
- 91년 전노협 가입 공언한 대우조선노조 투쟁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던 연대회의 간부 67 명의 전원 연행 및 구속(1991년 2월 10일) 박창수 열사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의문사 당 함. 5월 박창수 위원장 장례식 총파업 투쟁은 전노협이 마지막으로 주도한 대투쟁이었음. 이 투 쟁 이후 전노협은 내부적으로도 대폭 약화되었고, 민주노조진영 내에서의 위상도 낮아짐. 전노협 이 상징하는 전투적인 운동노선도 크게 약화.
- 91년 말 한국의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계기로 ‘ILO 공대위’ 결성.
- 1993년 6월, ‘ILO공대위’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로 개편. 업종, 전노협, 현총련, 대 노협에 각각 1명씩의 공동대표 배정.
- 이 시기는 민주노조운동이 정권과 자본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조직을 지켜낸 민주노조 사수기,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조직적 노력을 계속해 나간 시기.
3.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 1993~1997년
가. 문민정부의 두 얼굴
-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물리적 통제와 함께 이데올로기 공세가 한층 강화. 세계화, 국가경쟁 력 강화 등. 1993년과 1994년에는 ‘노총・경총 임금합의’라는 이른바 ‘사회적 합의’ 방식을 통해 임금 인상 억제.
- 노경총 임금합의에 반발하여 전해투의 한국노총 점거농성, 한국노총 탈퇴투쟁 전개됨. 현총련 연 대 파업.
- 1994년 ‘전지협’ 투쟁
- 95년 1월 1일 WTO 체제 출범. 김영삼 정권은 95년 초 ‘세계화’를 내걸고 96년 12월에는 OECD 가입.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공공부문 노조이자 국내 최대 조합원을 포괄한 한국통신 노조에 민주집행부 당선. 김영삼 정권은 39명 구속, 31명 해고, 3천명 징계 등으로 탄압. 노조는 ‘통신개방 반대’, ‘재벌특혜 민영화 반대’ 등을 내걸고 명동성당과 조계사 등에서 농성을 벌였으 나 공권력 투입하여 해산. 종교계 거센 반발.
- 5월 12일 현대차 해고 노동자 양봉수 분신. ‘양봉수 동지 분신대책위’ 중심 파업 돌입. 한국통신 노조 탄압과 결합해 김영삼 정권 퇴진운동이 벌어짐.
나. 한국노총의 변신?
- 96년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새로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된 박인상은 ‘현장과 함께 강한 노 총건설’을 표방하며 한 걸음 더 민주노조진영 쪽으로 접근. 그는 지속적인 노총 개혁과 노동계 통합을 강조했으며, 그때까지 한국노총이 견지해오던 입장을 바꾸어 복수노조 금지조항의 철폐를 공식 결의. 처음으로 민주노총 인정. 한국노총 내부의 이런 개혁 움직임은 96년 말 김영삼 정권 이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을 때 그에 맞서 민주노총과 공동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배 경이 됨.
- 그러나 한국노총의 변신노력은 오래 가지 못함. 97년 대통령 선거에 임하여 박인상 위원장은 김 대중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고,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됨. 대통령선거에서도 한국노 총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지만,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 하면서 노골적으로 반노동자적인 행보.
다. 민주노총 출범
- 1994년 11월 전노대는 ‘민주노총준비위원회’ 발족, 1년여의 준비작업 끝에 1995년 11월 민주노 총 출범. 출범 당시 민주노총은 단위노조 862개, 조합원 42만 명을 아우름.
- 민주노총은 향후 산별노조 건설의 전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가입 조직들을 가능한 한 ‘산업별 연맹’ 단위로 조직. 이에 따라 산업별 연맹 건설 및 지역본부 재편작업이 함께 추진됨.
- 민주노총의 성공적 출범으로 1987년 이후 급성장해 온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마침내 한국노총 에 맞설 수 있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총연합조직을 가지게 됨. 산별노조 건설은 차후 의 과제로 남겨졌으나, 산별연맹 중심의 조직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산별노조로의 이행을 위한 초 석도 마련됨.
라. 노동법 개정 총파업
○ 전개 과정
- 김영삼 정부는 민주노총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노사관계 안정과 경쟁력 강화가 불가능하 다는 인식 아래 ‘참여와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을 목표로 5월 9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노 사관계 개혁위원회>를 발족. 그에 따라 노동법 개정이 1996년 노사관계에서 최대 쟁점으로 떠오 름.
- 민주노총은 96년 11월 노동자대회 열어 노동법 개악 시 총파업 결의
- 96년 12월 26일 새벽 국회, 안기부법과 함께 노동법을 단 7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 12월 26일 당일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88개 사업장 15만여 명의 노동 자들이 참가.
- 1단계 총파업(1996.12.26~1997.1.2) : 금속연맹 등 제조업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고 이후 병원 노조와 서울지하철 등 전문노련과 공공부문이 가세.
- 2단계 총파업(1997.1.3~1997.1.14) : 자동차연맹과 금속연맹에서 다시 시작된 총파업이 7일에 는 언론노련 등 공공부문의 파업으로 이어짐. 제조업에서 사무전문직 전체로 파업이 확산. 1월 14일에는 한국노총과 공동투쟁 대오를 형성.
- 3단계 총파업(1997.1.15~1997.1.19) : 기존 노동자 외에도 교수, 종교인, 변호사 등도 참가. 파 업 투쟁은 최고조에 도달. 이에 정부와 지배계급은 국회 내에서의 재논의 가능성과 사법처리 유 보 등을 시사. 유연전술로 전환(전면파업의 철회와 수요파업으로 전환)이라는 결정. 이후 총파업 투쟁은 협상국면으로 전환.
- 1월 20일부터 2월 28일까지 매주 수요일에 진행된 4단계 총파업은 전체적으로 소강국면 하에서 진행.
○ 1996~97 노개투 총파업 성격과 한계
- 1990년대 들어 신노동통제정책과 신경영전략을 구사하는 정부와 자본의 반격 속에 점차 수세국 면으로 빠져들고 있던 노동자들을 크게 고양시킨 투쟁. 민주노조운동의 총결집체인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고 주도한 투쟁. 민주노총의 지도 아래 다양한 전술이 구사되었고, 민주노총이 한국 노동운동의 확고한 조직적 중심임을 확인시켜 줌.
- 노동법 및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맞서 노동조합이 노동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주도한 대중적 정치투쟁의 성격. 87년 6월 항쟁과 달리 97년 투쟁은 노동운동이 주도했고, 전체 사회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노동운동의 지위와 역할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됨. 87년 노동자대투 쟁이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한 계기가 되었다면, 97년 총파업은 민주노조운동의 사 회적, 정치적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됨. 민주노총은 이 투쟁의 성과 위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오랜 목표의 하나인 ‘정치세력화’의 계기를 확보.
- 총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대규모의 대중적 정치투쟁의 성격. 세계적으로 진 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하나의 기폭제 역할. 1980년대부터 전세계 를 휩쓸고 있었던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던 세계 노동운동계는 민주노 총의 총파업투쟁에 의해 크게 고무되었고, 실제로 수많은 국제 노동운동조직들이 이 투쟁에 연대 와 지지를 보냄. 세계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됨.
- 그러나 실제 노동법 개정은 보수적인 여야 정치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던 국회에서 타협적으로 처 리됨(정리해고 법제화,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등)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속으로는 실패한 투쟁. 한국 노동운동의 취약한 정치역량 반영.
- 97년 12월 대통령선거 시기에 맞추어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 화. <국민승리 21>은 총파업을 이끌었던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권영길을 대통령후보로 선정하여 선거에 임했으나 30만 표 득표에 그침.
제 4강
위기와 모색 :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운동 (1997년~현재)
1. ‘IMF 사태’와 ‘노동의 위기’
-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작은 1997년의 ‘IMF 경제위기’와 더불어 본격화. IMF는 200억 달러에 이 르는 구제 금융을 해주는 대가로 한국 정부에 대해 초긴축 금리정책과 금융・기업의 구조조정, 정 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의 법제화를 포함한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전 분 야에 걸친 정책을 요구하여 관철.
- 공황은 기업의 파산, 대량실업, 급격한 소득 감소와 가족 붕괴 등 민중들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 대중들은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 다름 아닌 한국의 독점재벌들, 그리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집단 과 관료집단에 있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자각. 여론은 일제히 재벌해체 또는 재벌개혁을 요구하고 나섬.
- 공황 초기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공방이 진행되는 가운데, 재벌은 점차 공격의 표적에서 벗어나 고 오히려 한국의 노동운동이 경제위기를 불러 온 주범, 혹은 적어도 공범이라는 문제의식이 확 산. 임금상승과 고용안정 등이 이제는 ‘경쟁력 약화’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불러 온 주범으로 몰림.
-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대표들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재벌개혁, 그리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약 하는 법조항의 개정 등을 약속받고 대신에 정리해고제의 조기 실시에 합의. 이 합의는 급박한 외 환위기를 일단 벗어나기 위해 IMF와 국제금융자본 측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는 분위기,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상대적인 개혁적 성향에 대한 기대 등의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공황 초기에 조성된 상대적으로 노동 측에 유리한 정세를 일거에 반전시키는 계기가 됨.
- 이 합의 직후 민주노총은 하부조직들로부터 거센 비판과 반발에 직면해야 했고, 그 결과 제1기 집행부는 사퇴. 비상대책위원회의 총파업이 불발로 끝나고, 뒤이어 이갑용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 주노총의 제2기 집행부가 구성되었지만 몇 번에 걸친 총파업 투쟁을 조합원 동원 부진과 여론의 압력으로 인해 포기하는 가운데 급속히 지도력을 잃고 무기력하게 되어 감. 이런 과정을 거치면 서 공황으로 인한 자본의 위기는 오히려 노동운동의 위기, 노동의 위기로 전화.
2.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과 그 후유증
- 금융 기업 공공 노동부문의 4대 부문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나 많은 문제점.
- 재벌 규제 정책은 실패로 귀결됨. 5대 재벌은 더욱 비대화. 자본 시장 개방으로 인해 국내 알짜 배기 기업들과 은행들은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거래 문제는 더욱 심화.
- 금융기관 통폐합은 금융시장을 국제 독점 자본에 내어주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영미식 자본주의 로 변화시키는 한편 금융기관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으로 귀결됨.
-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공기업 사유화로.
- 노동시장에 대한 구조조정은 노동시장 유연화로.(‘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 기업간 관계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과정에서 인수, 합병과 같은 방식으로 산업조직이 재편되기 도 하였지만,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은 생산방식을 외주 및 분사로 전환하면서 기술혁신을 통한 합리화가 아니라 비용부담을 다른 기업으로 전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여 대기업과 중소기 업의 격차문제가 심화.(단가 인하 압력)
-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임금 및 근 로조건의 격차가 심화.
- 결국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은 경제개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치달음.
3.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상태
- 1998년 실질 및 명목임금이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함. 저임금으로 인하여 장시간 노동시간의 관행이 온존함. 경제위기 직후인 1998년 실업률 7.0%, 1999년 실업률 6.3% 등으로 크게 상승. 장기 실업자가 확산되면서 불완전 취업자 층이 급격히 확대됨.
- 노동계급의 내부구성에 변화가 발생. 1997~2000년 사이에 기능직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 수는 감소하였지만, 판매서비스직노동자 및 단순노무직노동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함. 즉 노동계급에서 상층부를 구성하는 고급노동에 기초한 숙련기능직이 감소한 반면, 노동계급 하층부인 단순노무직 노동자의 증가함.
- 1998년 경제성장률은 -5.8%에 그침. 이후 빈부격차문제가 발생하는 시점으로 작용함. 이후 근 로빈곤층 급증, 빈곤의 대물림과 같은 양극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기 시작함.
4. 노동계급의 투쟁
가. 구조조정 저지투쟁
- 민주노총은 1998~2001년 사이에 노동시장 유연화와 정리해고 저지, 국유기업 사유화 저지, 자 동차 등 기간산업의 해외매각 저지 등을 내걸고 무려 11회에 걸쳐 총파업을 시도. 이 가운데 총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수가 십만 명이 넘은 경우는 단 세 차례에 불과하고, 총파업을 유보 또는 철회하여 무산된 경우는 네 차례. 민주노총의 총파업 전술은 방어적 투쟁으로 일관하였지만, 조 합원의 저조한 참여와 총파업 전술의 남용으로 인해 지도력은 크게 약화됨.
- 구조조정저지투쟁의 내용 : 기업부실화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투 쟁임. 금속산업에서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만도기계 정리해고 저지투쟁, 그 외 삼미특수강 고용승계투쟁 등이 있음. 2000년에는 자동차 4사노조의 공동투쟁과 2001년의 대우 자동차 해외매각반대투쟁이 있음.
-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투쟁 : 1999년 서울지하철 노조 투쟁과 한국중공업투쟁, 2000년 운송하역 노조의 신선대 우암투쟁과 한국통신 파업투쟁 등.
나. 목숨을 요구하는 신종탄압에 맞선 투쟁
- 2003년 1월9일 두산중공업 배달호 노동자 분신 : 손배와 가압류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제기함. 비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의 경우 손배, 가압류로 인한 피해가 2개 사업장에 5억 4천만원에 불과 하였지만,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의 경우 손배, 가압류로 인한 피해는 2003년 1월 22일 기준 50 개 사업장, 2천 222억 9천 752만 4천 284원으로 집계됨. 2002년 6월말 38개 사업장 1,253억 원이었던 것이 불과 6개월 사이에 1천억 원이 증가함.
- 2003년 10월17일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 자결 : 김주익 지회장은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크 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129일 동안이나 진행하였지만, 회사측은 ‘선 조업 후 교섭’만을 주장하면 서 노조의 교섭 요구에도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생각해 보겠다”며 고압적인 태도로 일 관함. 김주익 지회장이 자결하면서, 합법적인 노조활동마저 부정당하는 현실이 폭로됨.
- 2003년 8월26일 세원테크 이현중 조합원 사망. 10월 23일 이현중 열사 문제 해결과 손배・가압 류 철폐 등을 주장하며 대구 세원정공(세원테크 본사) 관리동 앞에서 분신, 11월 17일 사망.
5.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 금속 사업장을 중심으로 -
가. 비정규직의 증가와 근로조건
-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특히 금속을 비롯한 제조업에서는 사내하청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 2007년 현재 금속노조 산하 사업장에서 사내하청을 통한 간접고용 인원은 64,767명으로 전체 종업원의 29.8%를 차지하고 있다. 2001년 39,167명이었던 사내하청 노동자는 2004년 60,874 명, 2007년 64,767명으로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
사원 수 |
조합원 수 |
사내하청 노동자 |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 | ||||
노동자 수 |
조합원 대비% |
사원수 대비% |
노동자수 |
조합원 대비% |
사원수 대비% | |||
2001 |
199,334 |
134,877 |
39,167 |
29.0 |
19.6 |
54,466 |
40.4 |
27.3 |
2004 |
199,338 |
130,804 |
60,874 |
46.5 |
30.5 |
78,558 |
60.1 |
39.4 |
2007 |
217,254 |
154,937 |
64,767 |
41.8 |
29.8 |
85,458 |
55.2 |
39.3 |
출처: 금속노조(2007.9월)
-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에서 일시적이고 주변적인 고용형태가 아니라 핵심적 노동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지만 고용불안과 열악한 근로조건, 정규직 노동자와의 차별에 시달리고 있음. 또한 대부분의 경우 정규직 종업원으로 가입자격이 제한되어 있던 노동조합의 보호로부터 배제 됨으로써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화된 통로를 갖고 있지 못함.
- 금속노조의 2007년 조사에 따르면, 금속노조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평균 38.3세, 평균 10 년 근속에 연봉 3,321만원을 받는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평균 41.8세, 평균 3.8년 근속에 연봉 1,999만원을 받고 있다. 업종별로 보면, 자동차업종에서 정규직 평균연봉은 3,519만원인 데 비해 비정규직은 2016만원, 기계업종에서는 2911만원 : 1380만원, 철강업종에서는 3693만 원 : 2486만원, 전자업종에서는 2237만원 : 661만원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금속노조, 2007.9 월).
- 법정 및 사내 복지의 적용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정규직과 비 정규직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큰 항목만을 보면, 정기승급(22.0%), 연말성과급(41.8%), 생리휴가 (67.3%), 산전후휴가(56.0%), 육아휴직(48.9%),경조금(46.2%), 주택자금지원(12.5%), 학자금지 원(20.4%), 탁아시설(2.1%) 등으로 확인되었다.
|
정규직 |
비정규직 |
|
정규직 |
비정규직 |
정기승급 |
72.8 |
22.0 |
산전후휴가 |
97.6 |
56.0 |
상여금 |
97.7 |
70.2 |
육아휴직 |
86.9 |
48.9 |
연차 |
100.0 |
77.0 |
경조금 |
98.9 |
46.2 |
명절상여금 |
87.1 |
67.3 |
주택자금지원 |
59.8 |
12.5 |
연말성과급 |
61.3 |
41.8 |
학자금지원 |
92.1 |
20.4 |
생리휴가 |
94.1 |
67.3 |
탁아시설 |
16.7 |
2.1 |
출처: 금속노조, 2007.9월
<표3>에서 보면, 실제로 비정규직이 규약상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사업장은 전체의 41%에 불과하다. 업종별로 비정규직이 규약상의 노조 가입대상인 경우는 전자 28.6%, 자동차 35.4%, 조선 50.0%, 철강 50.0%, 기계 55.6%의 사업장에 불과하다.
구분 |
자동차 |
조선 |
철강 |
기계 |
전자 |
기타 |
전체 |
빈도 |
17 |
1 |
6 |
5 |
2 |
3 |
34 |
비율 |
35.4 |
50.0 |
50.0 |
55.6 |
28.6 |
60.0 |
41.0 |
출처: 금속노조, 2007.9월
나. 개별적 저항을 넘어 조직적 투쟁으로
- 1997년 한라중공업에서 시작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0년도 초반까지 INP중공업, 대 우캐리어, 볼보 등에서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짐.
- 2003년 3월 발생한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식칼테러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조건을 만천하에 폭로하면서 금속노조 차원의 비정규직노조 결성 투쟁이 본격화되는 계기. 이 사 건을 계기로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가 결성되면서 대공장의 비정규직 노조 결성 움 직임이 가속화됨.
- 2003년 10월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 대회’에서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가 분신,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의 분신, 2004년 12월 한진중공업 김춘봉 씨의 자살, 2005년 류기혁 열 사 자살, 화물연대 김동윤씨 사망……
-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을 주요한 목표로 하는 노조 결성의 물결은 노동부가 2004~5년에 실시한 사내하도급 집중점검 및 불법파견 판정과 맞물리면서 가속화. 노동부의 잇단 불법파견 판정을 계기로 2005년에 금속연맹은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이나 비정규직 고용보장을 단체협약으로 체결한 26개 사업장에서 실질적인 조직화 사업 추진.
- 2003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시작된 비정규직 노조 결성 움직임은 금속노조 차원의 적극적 인 조직화 방침, 비정규직 활동가 양성, 몇몇 정규직 노조들의 적극적인 비정규직 조직화 지원활 동, 법원의 불법파견 판정 등과 맞물리면서 더욱 탄력이 붙기 시작. 2003년 현대중공업,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사내하청노조가 설립되었고, 2005년 2월에는 현대차 전주공장, 한라공조, 4월 GM 대우 창원공장, 6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현대하이스코, 7월 기륭전자, 동희오토, 10월 KM&I, 11월 태양기전 등 많은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조직됨.
다. 성과와 한계, 그리고 과제
- 성과 : 현대자동차전주비정규직지회,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등의 조직 결성 및 투쟁, 2004 년 전북 일성테크의 원하청 공동투쟁과 정규직화, 2004년 경주지부의 불법파견 투쟁 및 단계적 정규직화, 전북지부 타타대우상용차지회의 지속적인 정규직화 투쟁, 대구 삼우정밀지회의 이주노 동자 조직화, 중앙교섭을 통한 금속노조 차원의 산별최저 임금 확보 등
- 그러나 한계가 더 많음. 금속노조 산하 비정규직 조직현황을 보면 2008년 6월 현재 20여 개 사 업장에 노조가 결성되어 있으며, 조합원 은 4,400여 명에 불과, 그나마 업종으로 보면 자동차업 종에 집중되어 있음. 또한 이 가운데 대부분의 노조들은 원청의 정리해고와 계약해지로 고용이 불안한 조건 속에서 최소한의 노조활동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
- 더욱이 2004~5년 동안 불법파견 투쟁을 매개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비정규직의 조직결성과 투 쟁은 자본이 계약해지나 진성도급화 등의 방법으로 정규직화를 회피하면서 소강상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의식 또한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시혜적 차원을 못 벗어 난 상태이며, 고용불안에 직면할 때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
- 단체교섭의 방식에도 한계. 실질적 권한을 가진 원청사가 사용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교섭을 회 피하기 때문에, 단체교섭의 형태는 정규직 노조의 지원과 연대, 비정규노조의 투쟁력에 따라 다 양하게 나타남. 비정규직노조와 하청업체들의 개별교섭에서부터 하청업체들과의 집단교섭, 집단 교섭에 원청사가 참관하는 사실상의 3자 교섭, 정규직 노사와 비정규노조가 참여하는 3자 교섭, 정규직노조가 임・단협 과정에서 하청노동자들의 요구를 교섭하는 대리교섭 등.
- 결국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상시업무 정규직화를 통한 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를 쟁취하는 것 (정규직화), 실질적인 ‘동일노동 동일임금’ 확보를 통한 차별철폐,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을 비롯 한 비정규직 노동3권 확보(조직화) 등 세 방향에서 경주되어야 하며, 투쟁 영역에서는 제도개선 투쟁과 현장에서의 조직화・투쟁이 병행되어야 함.
6. 전국금속노동조합의 건설
가. 금속산업 산별노조 건설과정
- 1990년대 후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주요 연맹의 산별조직 전환 운동이 전개됨. 당시의 산별 노조건설운동은 소산별 노조보다는 대산별 노조를 지향하는 경향이 뚜렷하였지만, 연맹별로 준비 정도의 차이가 크며 대체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동력이 취약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임.
- 조직전환 문제가 현실의 과제로 등장한 것은 IMF 경제위기 상황이 지속되면서 나타난 양보교섭 의 급증과 기존 노조조직의 기반 약화, 대량 정리해고 사태에도 불구하고 초기업적인 대응 능력 의 부재, 기업별노조를 중심으로 한 전투적 동원이 약해지면서 산업차원, 전국차원의 투쟁력 부 재 등이 표면화되었기 때문임.
- 주요 연맹 가운데 민주노총 산하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이 1998년 2월 가장 먼저 산별 노조로 전환함. 사실상 최초의 산별 단일노조로 출범한 보건의료산업노조는 출범당시 병원노련 산하 130개 노조 가운데 93개 노조 25,704명이 참여함.
- 금속산업의 산별노조 재편 과정은 1998년 2월 민주금속, 자총련, 현총련 등 3개 조직이 통합하 여 금속산업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본격화되었으며, 3년 뒤인 2001년 2월 조합원 3만1천여 명으 로 구성된 전국금속노조를 출범. 그러나 당시 금속노조는 자동차 및 조선 등 핵심적인 대기업노 조가 제외된 채 중소노조를 중심으로 산별조직 전환을 이루게 되며, 이로 인해 처음부터 조직적 인 한계를 지님.
- 2006년 6월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의 산별 전환결정이 성사되면서 조직의 질적 성장 을 위한 계기가 마련. 2001년 2월 창립이후 2006년 6월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금속노조의 조직 현황은 그리 큰 변화가 없다가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산별전환사업이 성공하면서 조직이 급속하게 확대됨.
- 2006년 11월 23일과 12월 20일에 개최된 산별노조 완성대의원대회를 거쳐 마침내 금속노조는 14만 5천 명의 조합원을 아우르는 통합산별노조로 거듭남.
나. 금속노조 산별교섭 전개과정과 내용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대각선교섭 (사업장교섭에금속노조임원개입) |
지부집단교섭 (사업장교섭을 지역으로 이동) |
중앙교섭 (전국단위 교섭테이블형성) |
중앙교섭 |
중앙교섭 (사용자협의회법인등록촉구) |
중앙교섭 (사용자협의회법인등록) |
사업장단협승계 (전문, 집단 교섭, 유효 기간) |
기본협약 합의 (금속노조 인정) 전국노사실무위 |
주40시간 주5일제 합의 비정규직보호 |
손배가압류금지, 금속산업최저임금 |
산업공동화대책 금속산업최저임금 우리쌀사용 |
금속산업최저임금, 구조조정대책 등 |
시기집중 투쟁 |
지부별 통일투쟁 |
중앙교섭우선 |
○ 주요 과제들
- 조직체계 정비 : 기업지부를 지역지부로 재편하는 것은 금속노조의 조직체계를 바로 세우는 첫 단계 과제
- 조직 확대 : 장차 새로운 조직대상을 확보해야 하는 금속노조로서는 한국노총 소속 금속산업 노 조들을 견인하는 전술, 제조업 내부의 산업경계를 허물고 전체 제조업을 조직대상으로 삼는 전 술,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전술 등을 구사해야 함. 핵심과제는 비정 규직 조직화.
- 산별교섭 체계 확립 : 완성업체를 비롯한 불참 사업장들의 중앙교섭 참여 확대와 산별교섭・협약 체계 확립, 산별노조 관련 법개정을 통한 산별협약 적용 범위 확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