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힘겹고도 거친 삶을 살고 있을 때 미국은 세계 최고의 부와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 시기가 바로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다.
당시의 미국은 세계의 부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터였다. 미국 동부의 뉴욕은 그런 부의 정점에 있는 곳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닉이라는 인물은 중서부 출신으로 동부로 꿈을 안고 찾아들었다. 중서부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농업 지역으로 야망을 가진 젊은이들은 그들의 꿈을 좇아 동부로 몰려가는 일은 흔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닉도 그런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그 당시의 미국은 한창 주식 열기로 뜨거웠던 시기로 산업에 투자하기보다 주식에 투자하는 일이 수익이 더 컸었다. 그 결과로 1920년대 말경에는 대공황을 겪기도 했었다. 어떻든 1920년대의 뉴욕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들뜨게 하는 곳이었다.
소설은 화자인 닉이 줄곧 개츠비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개츠비는 시골 청년으로 야심이 상당했지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초급 장교 시절에 부유층의 딸인 데이지를 알게 되고 이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다행히 장교복 덕분에 그는 자기의 궁핍한 삶은 감출 수가 있었다. 데이지도 개츠비에게 호감과 함께 사랑을 느꼈으나 개츠비는 전쟁터로 불러가게 된다. 제1 차 대전이었으며 그가 참전한 곳은 프랑스였다.
전쟁터에서 그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소령 계급까지 달게 되었다. 그리고 종전. 전쟁이 끝나자 한걸음에 달려가 데이지를 만나고 싶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영국의 옥스퍼드로 보내지고 6개월 정도를 그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 일로 게츠비는 세간에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어떻든 화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게츠비에 관한 모든 것은 스토리의 전개와 함께 조금씩 드러나며 마치 퍼즐 맞추듯이 독자들이 행간을 따라가며 채워야 했다. 그것을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였다.
마침내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돌아왔을 때, 데이지는 톰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난 뒤였다. 소설은 개츠비가 언젠가는 반드시 데이지를 찾아오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암시한다.
그리고 5년 후. 개츠비는 큰 돈을 벌었고, 마침내 뉴욕 외곽 바닷가 마을인 웨스트에그의 대저택을 구입하고 날마다 파티를 벌였다. 파티에는 초대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드나들었다. 그의 행적이나 사람됨 등은 이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드러났다.
그는 혼자가 되면 늘 바다 건너로 시선을 돌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초록 불빛을 한참씩 바라보았다. 그곳이 바로 그가 찾고 있는 데이지가 사는 저택이 있었다.
그러니까 개츠비가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초대와 상관없이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올 수 있도록 개방한 것도 혹시라도 데이지도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 소설 속 화자인 닉이 그 옆집으로 월세를 들게 된 것이고 그때부터 화자는 게츠비의 관찰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침 화자인 닉이 바로 데이지의 6촌 오빠였으며 데이지의 남편 톰과는 대학 동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츠비와 함께 그들과 어울리면서 소설이 기둥을 이루고 있다. 화자를 끈으로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게 되고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데이지는 한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남편의 품을 떠나지 않으나 개츠비는 데이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톰은 자동차 정비사 윌슨의 아내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는데, 그 남편 윌슨이 어느 날 자기 부인이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다 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부인이 집을 뛰쳐나와 도로 쪽으로 달아나다 마침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여 즉사하고 말았다. 그 차는 개츠비의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톰의 아내인 데이지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를 세우지도 않은 채 달아나 버렸고 윌슨은 자기 부인을 죽인 범인이 바로 그녀의 정부일 것이라 여긴다. 윌슨은 범인을 찾아 나섰고 결국 톰으로부터 개츠비가 범인임을 확신하게 되자 그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기도 자살을 하게 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위대한 게츠비’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로 읽힌다.
그런데 그런 흔한 사랑 이야기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내 시선에서는 명확치 않다.
소설의 구도로 볼 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상류층과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비로 읽을 때 개츠비의 위대성을 잠깐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의 축적 과정은 결코 올바르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붙여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느 평자는 개츠비에 대한 닉의 평가에 주목하여 ‘개츠비의 순수하고 힘찬 영혼에 대한 저자 피츠제럴드의 찬사임에 분명하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내 무지는 이러한 핑크빛 평가는 도무지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닉의 시선이 저자의 시선인 것은 분명하나 소설을 통해 개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몇 마디의 문장이 오히려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소설의 역자는 이에 대해 재미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1920년대 당시 미국에서 ‘The Great~’라는 표현은 당시 유명한 마술사나 엔터테이너의 공연 광고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The Great~’는 ‘위대한’ 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개봉되기 전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노팅힐>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보면 데이트를 약속한 제닌이라는 여자에 대해 <great Genin>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내게는 역자의 이러한 설명이 오히려 설득이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