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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중의 민조시집 평설
신기록 세운 민조 기행시의 향연
- 김운중의 제6시집 『셔블 아리랑』을 읽고
이 명 재
(문학평론가, 중앙대 인문대학 명예교수)
평설자는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45년 동안 거의 전 장르를 비평하거나 평설해 왔으나 민조 시집을 대상으로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기에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르더라도 지금까지 국내외 기행 시집 출간으로서는 기록적인 김운중(金運中) 시인의 작품들을 통해서 여러분과 만나기로 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온 김 시인의 생활 자세에 공감하고 이번에 펴내는 두 권의 시집 출간을 축하해서이다. 사실 평설자와 김운중 시인은 십수 년 넘게 여러 문학 행사에 자주 참여하고 여행했다. 특히 2017년 초여름에 문인 일행과 북유럽 일대를 탐방했던 일은 기억에 생생하다.
새로운 기록자와의 만남에서
이 평설을 위해 김운중 시인의 작품을 독자들과 음미, 탐독하는 과정에서 얻은 보람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대선 공방과 동계올림픽 분위기로 어수선한 달포 동안을 필자는 유익하게 보냈다. 우선 생소했던 민조시(民調詩)를 이해하게 되었고 시인이 펴낸 시집 다섯 권을 통독하며 김운중 시인의 작품 세계를 살필 수 있어서였다. 바야흐로 지구촌이 일일생활권인 글로벌시대에 30여 년 동안 김운중 시인 스스로 유네스코 서울협회 이사와 팔방교역 대표로서 세계 곳곳을 탐방하며 써낸 성과였다.따라서 올해 출간하는 김 시인의 국내와 국외 대상의 두 권 민조 시집 가운데 필자는 국내 기행 시집인 제6시집 『셔블 아리랑』을 대상으로 여러분과 논의하기로 한다.
일찍이 1950년에 경북 의성군의 안동김씨 가문에서 여러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운중 시인은 전통적인 생활관과 문화 의식이 각별한 실사구시적인 엘리트이다. 소년 적에 가난한 농촌에서 상경하여 서울에서 고교를 마치고 대기업에 취업하여 고학으로30대 초반에 대학(일어일문학),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팔방교역을 경영하며 시를 쓰는 문인이다. 특히 김 시인은 2006년에 민조시로 신인상에 당선한 후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주목된다. 일문학 전공자로서 일본의 하이쿠(徘句) 취향에 걸맞은 데다 동향의 출신으로서 한국 민조시를 새로운 장르로 정립한 아산(我山)과도 비교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한된 지면 속에 김운중의 역동적인 생활에서 우려낸 여러 작품에 드러난 문학세계를 개괄해 본다.
체험적인 민조시 기행 실적
지금까지 여러 권 펴낸 김운중 시인의 기행 민조시 창작집(紀行民調詩創作集)은 책자마다 100여 편의 기행 작품들로 엮어져 있다. 등단 이듬해에 상재한 첫 시집 『地球行』, 2007에는 국내와 국외의 탐방 시를 섞어서 실었다. 그리고 제2시집 『아리랑 땅』 2009에는 국내의 기행 시, 제3시집 『천산을 날면서』 2010에는 국외의 탐방 시만 수록했다. 이어서 제4시집 『스리랑 땅』 2016에는 국내 기행 시만, 이와 같은 해에 낸 제5시집 『雲海 9만리』에는 국외(동양) 편만 수록했다. 그리고 이번의 제6시집 『셔블 아리랑』, 2022에 발표한 국내 시 120편에 이어 펴낼 제7시집은 국외 편으로 조화를 이룬다. 등단 이후 15년 사이에 출간한 위 기행 민조시집들은 국내외 혼합편 1권을 비롯해서 국내편과 국외편이 각 3권씩으로써 균형을 보인다. 그러므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다룬 기행시로서는 김운중 시인이 선구자이다.
이렇게 김운중 시인은 늦깎이답지 않게 여느 시인보다 다양하고 폭 너른 기행 민조시로서 두드러진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 소재나 제재적인 면에서 김 시인의 작품들은 남달리 다양한 면을 추구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역사와 지리, 기후, 인종, 언어, 풍속이 상이한 동서양 각국을 섭렵하며 대비시킨다. 국내외를 열어두고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과거 시간과 현재의 교차나 대비를 통해서 판을 키우지만 그 해결이나 수용의 폭은 독자들에게 맡겨 둔다.
더새로운 국토 순례
전체의 대상 작품 가운데 편의상 20여 편을 샘플로 삼아서 게재 순서대로 감상, 논의해본다. 먼저 경기 서울 편으로부터 테마가 있는 순례를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 시집으로 각 지방의 명승지와 특산물을 담은 작품의 전시장을 산책하는 것이다.
연등 든 초록바람/ 쌍버들 새촉/ 어이 알까 제철./
언발치 뛰어올라/ 내 뿜는 첫 숨/ 속없는 대(竹)마다,/
연미정(燕尾亭) 황영 장군/ 제비 꼬리 땅/ 숨 멈춘 고려기(旗)/
엎드린 인조(仁祖) 눈물/누루하치 꿈/얼룩진 강화섬./- 「강화바람」 전문.
이 작품은 여느 지방과 달리 한겨레의 역사와 지역 특산물에다 빼어난 풍광의 삼박자를 지닌 강화도에 대한 기행 민조시이다. 주목되는 바는 3-4-5-6 음절에 따른 짧은 민조시 1편씩을 일반시의 연으로 삼아서 기-승-전-결 형태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초록빛 새봄을 맞이하여 나들이를 나선 전반의 계절감에 이어서 후반의 유서 깊은 민족사와 인물들이 가미된 서사가 중량감을 드러낸다. 특히 월곶리 돈대가 높은 곳에 남한강과 한강이 합쳐진 제비 꼬리 모양의 연미정(燕尾亭)이 일품이다. 강화도 8경으로 일컫는 이 정자는 1510년 삼포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형 장군에게 임금이 하사한 땅인데 정묘호란 때이던 1627년에는 후금(後金)과 굴욕적인 형제국 조약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마무리 연에서는 1636년에 청나라를 건국한 누루하치가 군사를 몰고 들어와서 강화도에 피신한 두 왕자와 함께 인조의 항복을 받아 치욕을 준 역사의 현장임을 되새긴다.
이어진 작품에서는 고려 때 몽골 사신들을 예성강에서 배에 태워 개경으로 영접하면 개성에서는 그 오랑케 나라에 항거하던 기세가 높았던 호국 의식부터 불러일으킨다. 역시 일반 서정시와 달리 역사적인 서사는 네 개의 민조시를 연결한 형태이다.
돛단배 가교 실은/예성강 포구/애끓는 개경궁./
고려궁 고종황제/옮긴 송악산/항몽 큰북소리./
불란서 총잡이들/후린 강화도/활휜 궁터초병./
회나무 외규장각/끌려간 의궤(儀軌)/ 흰옷 가린 눈물./ - 「예성강 돛단배」 전문.
그리고 그 후반부에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서 프랑스 신부들을 처형했단 빌미로 신미양요를 일으킨 나머지 1866년 가을 서너 달을 강화도에 침범해온 프랑스 해군의 폐해를 고발한다. 당시 두 차례에 걸쳐서 10척의 군함을 앞세워 갑곶돈대로 상륙한 점령군들은 조정의 강화행궁을 불사르고 거기에 소장된 주요 의궤 등, 많은 외규장각 도서를 침탈해 갔던 것이다. 시 작품으로서는 두드러지게 민족적인 역사 수난과 문화 의식을 고취한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 편에서는 옛 조선 초기부터 이름 지어진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요즘의 대학인 ‘성균관’을 이야기한다. 현존하는 대학의 캠퍼스에 자리하고 있는 은행나무들과 학파를 이루는 학설 담론의 풍속을 일컫는다.
6백년 은행나무/ 학동들 노래/동편제 서편제/
대성전 앞에 두고/ 지은 명륜당/ 동방의 배움터./
송은공 松隱公/할아버지/내친 붓 대롱/비껴간 싸움터./
오기로 얽힌 세상/제 살점 찾기/예나 지금이나./ - 「성균관 할배」 전문.
이 시편에서 ‘동편제 서편제’는 본디 판소리의 유파나 형식보다는 서로 여러 파벌을 만들어 다투고 토론함을 지칭한다. 특히 후반의 ‘松隱公’은 김운중 시인의 18대조 할아버지로서 예전이나 지금 할 것 없이 제 식구를 챙기는 연줄 위주 사회임을 풍자하고 있다고 풀이된다.
이어진 서울 편의 「경로석」은 여기에서 색다른 작품이라서 흥미롭다. 대체로 민조시는 여느 자유시와 대조적으로 자수율에 붙박이로 된 글 같지만 퍽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다. 서울의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 중에 경로석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이를 꾸짖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임신부라면서 버티는지라 오히려 중절모 쓴 노인이 더 좌불안석인 처지가 인상적이다.
강원 편 중에서는 옛 역사와 근년의 분단에 의한 전쟁의 도가니를 이루었던 동족상잔의 현장을 되새기고 있다. 신라 말기에 궁예가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며 도읍지로 정했던 태봉땅이 철의 삼각지(금화-평강-철원)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1952년 10월에 전쟁 북새통의 회오리 속에서 휴전회담을 벌이는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백마고지 탈환전을 연상시킨다. 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10일 동안 12차례 공방전을 벌였던 곳,-지금은 피 묻은 채 폐허가 된 노동당사에 밀려든 관광객을 혼합시켜 입체적 접근을 보인다.
짙은 꿈 너른 녹음/ 펼친 태봉국(泰封國)/ 평강 아카시아./
지뢰탄 관광열차/ 철원역 기적/울린 백마고지./
피 묻은 노동당사/ 땅친 김일성/쇠사슬 대동강./
땀내난 동굴 속엔/ 찬바람 여름/ 녹슨 평양밤길./- 「태봉(泰封) 땅에서」 전문.
그런가 하면, 후미진 선비고장이던 오죽헌의 강릉 땅을 시적 상상력으로 조선 중기의 빼어난 여류 시인인 허난설의 문학과 고속열차로 잇는 발상이 신선하다. 세계인의 체육제전인 2018년 2월의 평창 동계올림픽을 포스트모던 시 미학으로 대비시켜 눈길을 끈다. 옛 시인과 1994년 노르웨이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과 연결시킨 시공간의 비대칭적 접근이 참신하게 다가온다.
오죽헌 검은 대순/ 허난설헌 땅/ 새노래 새마음./
꿈속의 고속열차/ 동해 물이랑/ 한달음 대관령./
썰매탄 흰호랑이/지구촌 아이/평창길 눈밭길./
경포대 하늘 후린/ 마음의 술잔/ 별 녹인 하늘 땅./- 「허난설헌(許蘭雪軒) 땅」 전문.
충청-호서편에서는 살벌한 요즘의 현대인 생활에다 불교적인 상상력으로 옛 문화를 접맥시켜서 새롭다. 김 시인의 여타 작품에 비해서 한결 내면적이고 은은하며 단백한 고전미를 느끼게 한다.
칠불사 종소리에/ 숨은 파안(破顔)은/ 억겁을 이을 힘./
손끝의 천년 미소/ 백제 먼 할배/ 자비 흔든 적삼./
돌고 돈 복연대좌(覆蓮臺座)/안창속의 불/ 속탄 보살 거사/
불타는 부귀영화/ 벼랑 마애불/ 울고불고 웃고./ - 「천년 미소」 전문.
또 「구드래 탕관」에서는 예전엔 왕인박사를 비롯한 백제인들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교육하고 무역도 했음을 상기시킨다. 야만인 옷차림인 일인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느라고 하얀 두건을 두른 조선 선비들이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백제 쌀을 옛 돛단배에 싣고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에 무역해서 가져온 보물들이 대단했다. 이 황포돛배와 꾀죄죄한 버슬아치들 깃밑 탕관을 지킨 일은 세력이 높던 백제왕의 공로에서였다.
훈도시 글 가르친/ 하양옷 두건/ 들락날락 물길./
백마강 차나락배/푸첸성(福建省) 나라(奈良)/ 왔다리 갔다리./
곤룡포 신바람에/바쁜 뱃머리/ 챙겨온 황금꽃./
삿대든 황포돗대/ 구드래 탕관/ 지킨 백제 성왕./ - 「구드래 탕관」 전문.
그러나 다음 시편에서는 한때 그렇게 융성하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후의 정경을 읊는다. 「황포 나루」는 바다를 건너와 의자왕을 생포했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대왕포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몰아쳐 병선들이 뒤집히자 그 이유를 일관에게 물었다는 백마강 전설과 연결된다. 그것은 백제정벌에 화가 난 바다의 용이 화를 낸 것이니 백마를 미끼로 해서 용을 낚아 가라앉혔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큰 용을 낚은 조룡대(釣龍臺)에서 거드름을 피는 장군의 모습을 고란초 어린 달빛과 낙화암의 칼바람, 둔덕 위의 갈대나 일렁인 물살 위의 황포 돛대와 대조시킨 애상조의 시 이미지가 인상적으로 다가든다.
용 낚은 백마미끼/조룡대 바위/소정방 거드름./
고란초 어린 달빛/ 매달린 애수/ 낙화암 칼바위./
갈대춤 둔덕 위에/걸린 낮달은/ 하늘 가른 북춤./
백마강 황포돛대/ 일렁인 물살/ 달아난 옛 하늘./ - 「황포 나루」 전문.
윗 시편과 달리 영남편 중에 「셔블 아리랑」은 천년고도 경주의 안압지를 비롯한 문무대왕 등을 소환하여 신라의 영광과 은성한 문화로 꽃핀 옛 역사를 낭만적으로 되살리며 구가한다. 통일신라의 연회를 베풀던 엣 별궁인 안압지는 물론 첨성대나 밤하늘로 이어지는 천문학 지향과 화랑도의 호국별만이 아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안장된 무열왕릉으로 잇다은 호국 이미지가 건강하고 진취적인 이미지라서 좋다.
안압지 첨성대에/ 걸린 밤하늘/ 화랑도 호국별./
불국사 아쟁소리/달뜨는 염불/ 새바람 동방향./
분황사 여황 도포/ 불꽃튄 사랑/ 한 덩어리 반도./
해신된 문무대왕/ 닦은 반월성/천천세 만만세./ - 「셔블 아리랑」 전문.
그런 한편, 「배산임수(背山臨水)」는 유네스코에서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의 ‘良洞마을’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앞에는 강을 두고, 뒤에는 산을 두른 채 큰 소쿠리처럼 언덕을 이룬 풍수지리 못지않게 종가 고택과 상민들의 초가집 삶터가 조화롭다. 조선 중기 영남지방의 모델을 이룬 이 마을은 더욱이 경주-월성 손씨와 여강-여주 이씨 중심의 씨족 마을로서 여러 유학적인 인물도 배출하고 있어 유명하다. 마을 주변의 울타리나 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조경 또한 일품임을 드러내고 있는 시편이다.
형산강 수놓는 물/ 적신 안강 녁/ 공자왈 이언적./
맹자왈 양동 손가(孫家)/ 저녁놀 동산/ 그리운 한양땅./
찔레꽃 배롱나무/탱자남ㄱ남/ 가르친 참을 인(忍)./
달구지 횃대 오른/ 동녘 사립문/ 별 지킨 가릿대./ - 「배산임수(背山臨水)」 전문.
위 시편과 다른 「聖人峯1」은 해발 984미터 산봉우리 연작 중의 하나이다. 특이한 지세와 바위들이며 쾌속선이 운행하는 바다의 정경 등을 곁들인 시편이다. 김 시인의 여느 작업에 많이 삽입된 역사나 인물에 상관된 작품이 아니라서 한 폭의 풍경화처럼 시원하다.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바닷바람 속에 자라나는 부지깽 나물과 원시적인 안식의 향수를 자아내는 너와집 근처에서 싹트는 천궁 약초의 씨가 생명력을 자아낸다.
꼬불길 해발 5백/ 부지깽나물/ 너와집 천궁 씨./
애타는 촛대바위/ 매달린 하늘/ 떠나는 쾌속선./
뒤집힌 2백만 년/ 우산국 바다/ 오징어들 친구./
통구미 거북바위/ 불타던 억겁/ 헤는 창파 용암./- 「聖人峯1」 전문.
울릉도와 이웃한 「독도 파랑」 역시 너무나 많이 논의하는 한일 양국과의 분쟁 이야기로 접근하지 않아서 신선하다. 푸른 동해상에 자리한 독도의 두 섬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며 4백만 년 동안 한반도 동해를 지켜온 동해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천연기념물 제336호인 독도를 한일 양국이 영유권의 대상으로 싸우기보다 바다제비와 갈매기들의 삶 터전으로 대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예술품 지구 걸작/ 물개놀이터/ 금수강산 첨병./
전해준 이끼양식/ 심은 아리랑/ 하양 바지적삼./
지켜온 4백만년/ 동해 파수꾼/ 독도항 물소리./
숨이은 바다제비/ 갈매기들 집/ 해뜨는 코리아./- 「독도 파랑」 전문.
위 작품들에 견주면 「남명 고을」은 색다르게 옛 선비들의 학덕을 기린 시편이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인 퇴계 이황과 동갑인 성리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덕천서원을 탐방한 소감을 압축한 내용이다. 상사화를 통한 학자들 우정이나 살구, 매화 같은 식물적인 상생의 이미지와 지리산 기슭의 ‘청청 푸른 개울’로 잘 비유되어 있다.
상사화 보듯 만난/ 지리산자락/ 남명 조식선생./
산청골 덕천서원/ 냇가에 모인/ 오늘의 후학들./
이 퇴계 동갑내기/ 갑론을박설(說)/ 빛보는 문집들./
복숭아 살구 매화/ 향기 풍기는/ 청청 푸른 개울./- 「남명 고을」 전문.
호남편에서는 새봄을 맞이한 남원골의 「광한루 하늘」보다는 여름철의 「군산(群山)항 나락배」 풍경부터 인상적으로 와닿는다. 경제적인 불황 속에 하릴없이 군산항 어귀의 빈배 위에서 낮잠에 떨어진 서민의 모습이 선연하다. 돈벌이 계산과는 딴판으로 일본인들이 북적이며 판을 치던 일제 강점기 실상을 전시한 근대역사관 사진 속의 몰골과 겹쳐진다. 옛 군산 부둣가에서 일하던 허름한 바지에다 땀에 배인 상투쟁이 인부와 다를 바 없다. 이웃의 장항 공장도 가동을 멈춘데다 1987년 정부의 대역사로 개발해온 새만금마저 침체되어 있는 현실을 묘파한 것이다.
빈 배에 걸린 삿대/ 코 고는 낮잠/ 군산항 흰 파도,/
튕기던 주판알엔/홑적삼 바지/ 상투 튼 땀방울./
게다짝 널부러진/ 근대역사관/조선 끝 한 자락./
불 꺼진 장항 굴뚝/ 하구언 넘어/ 출렁인 새만금.- 「군산(群山)항 나락배」 전문.
이어서 「도초도 흰파랑」은 전남 신안군의 섬에서 살아온 어르신의 애환을 적고 있다. 겨우 바람막이할 정도의 헐렁한 배로 흰 물결 헤치고 비금도 백사장에서 무역선의 소금과 섬에서 특산물로 재배한 시금치를 사고팔며 지낸다. 80년 시집살이해온 할멈과 기껏 흑산도나 가볼까 하며 사는 인생이 눈물겨운 영상으로 떠오르는 작품이다.
금정산 탄(乘) 반월대/바람막 헐배/ 도초도 흰 파랑./
비금도 백사장엔/ 허풍선(虛風扇) 초로(初老)/지새우는 별밤./
무역선 소금배에/실려 온 추위/ 섬마을 시금치./
8십 년 시집살이/ 일백수 할멈/ 바라본 흑산도./- 「도초도 흰 파랑」 전문.
「완도(莞島) 물길」은 265개의 크고 작은 도서로 이루어진 여러 섬 가운데 대교 외로 출렁다리로 이어진 섬 풍경을 다룬다. 푸른 물 등성 위로 솟아오르는 해녀들의 거품과 이웃 섬들을 오가는 사람들과 돛단배 들의 정경이 일품이다. 더구나 여기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에 중국이나 일본을 포함해서 동남아 일대의 무역과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의 청해진 권역이란 민족적 긍지를 떠올린다.
물 등성 해녀 거품/ 나는 꼬리연/ 창파는 푸르다./
오가는 신지, 고금/ 약산 마량 길/ 춤추는 새 다리/
가로등 바다 안개/ 참아낸 하품/ 덩덜구 쫌팽이./
드나든 흰돛단배/ 엽전 긁어댄/ 장보고 청해진./- 「완도(莞島) 물길」 전문.
이상의 각 지역 밖에도 몇 시편(잡록편)이 이삭줍기 이상의 작품으로 빛나고 있다. 이 시편들은 역사적인 서사나 전설로 복합적인 내용이 아닌 평면적 일상의 단면이기에 선명성이 짙다. 「하늘 찾는 날」은 모처럼 하늘 높고 맑은 봄날의 반겨줄 데 없는 어르신의 고독한 심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연속된 3-4-5-6 음절의 민조시 한 편씩을 편의상 연으로 칠 경우, 희 구름 뜬 첫 연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로 시작된다. 그리고 셋째 연에서는 쑥 캐고 냉이 꽃핀 버들밭의 능금나무는 식물적 이미지가 선연하다. 그리고 끝 연은 갈곳 없는 할아버지들이 활터나 찾아다니는 불청객 신세를 리얼하게 나타내서 공감을 이룬다.
하늘로 날아갈까/밟은 허공엔/ 디딜 곳 흰 구름./
달뜨는 언덕에나/찾아볼 것을/ 마음 걸어 둘 곳./
쑥 캐고 냉이 꽃핀/ 땅 버들 밭엔/ 늙은 능금나무./
할배들 활터에는/ 전봇대 손님/ ‘오이 오나카나,/ 가이 가나카나,’/- 「하늘 찾는 날」 전문.
또한 「봄날」에선 역시 첫 연에서 새봄에 꽃내음 진한 아카시아에 모아 꿀벌을 모으는 후각이미지로 시작한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는 골목에서는 품바와 하모니카를 통한 청각이미지로 있다가 끝 연에서는 첫 모내기와 푸른 촉이나 꼴의 식물적 이미지로 마무리하여 흥겹게 읽힌다.
주저리 아카시아/ 새봄을 꿰고/ 모으는 꿀벌들./
골목엔 풀잎 품바/ 하모니카 춤/ 희롱하는 귀, 코./
산 절로 물도 절로/ 찾아온 훈풍/ 하늘을 채웠다./
물 채운 첫 모내기/가느다란 촉/ 낫 꼴 베는 5월./- 「봄날」 전문.
끝으로 「잃어버린 공포」는 근래 한반도에 긴급한 현안이 되고있는 핵 공격으로 인한 전쟁의 불안감을 고발한 시편이다. 핵의 위험성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우리 처지로서는 민감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자주 미사일 실험을 겪은 터라 이제 공포감을 잊고 지내는 실정이지만. 적대적인 주변 강국들의 위협 속에 우리는 언제 제대로 주권 행사를 하며 살 것인가를 일깨우는 문제작이다. 민조시에서도 이렇게 현안의 참여의식을 살릴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이고 잔 버섯구름/ 앞뒤 없는 차/ 잊어버린 공포./
호랑이 사자 늑대/ 정글은 깊고/ 숨구멍 한줄기.
아까운 발버둥에/ 짓밟힌 민초/ 무거운 철갑차./
어느 날 꼭두각시/제 팔 흔들며/ 살아갈 날 올까./- 「잃어버린 공포」 전문.
그리고 「꿈 같은 날」에서는 시인 스스로 겸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친손주를 얻은 기쁨을 담아내고 있다. 자신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민조시에서도 생생히 드러낼 수 있음을 솔선해 보인 작품이다. 앞으로도 가끔은 이렇게 친족이나 사생활적인 내용을 시 미학적인 범주 안에서 활용함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김운중 시인의 친손주 얻음에 축하의 마음을 함께한다.
새 생명 아쉰 기쁨/ 반가운 축복/ 이름 찾은 애비./ 친손주를 얻은 기쁨/
긴 여정 꿈속에서 흐르던 핏줄/ 할배 마음잔치./에서 - 「꿈 같은 날」에서.
장르 활용의 기법과 지향점
김운중 시문학의 형식 면에서는 무엇보다 민조시라는 새 장르를 활용하여 관심을 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일본문학을 전공한 시인 자신의 제3시집 서문도 참고된다. “음미할수록 간결하고 신선한 맛이 나는 우리 민족의 음률인 3 ⸱ 4 ⸱ 5 ⸱ 6 민조의 정형을 기행시에 접목시켜 보고자”한 점 또한 수긍된다. 문제는 아직 일반에 생소한 4행 18음절로서 한국 서민층의 정형시인 민조 시문학과 일본의 서민 시가체로서 3행 17음절인 하이쿠(徘句)의 상이점을 분명히 했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 전래의 시조나 단가 등과의 차별성에 대한 보다 학문적인 구명과 위치 설정을 바탕으로 활용되었으면 싶다. 민조시는 산스크리스트어에 뿌리를 둔 채 향가, 여요, 민요 등으로 연결되었다는 고증도 마찬가지이다.
요즘도 일본에서는 ‘하이쿠가 순간 속의 영원을 담는다’ 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가 양식으로 성행한다고 알려져 있다. 시 장르는 사물의 인상을 최소한으로 응축시킴이 본령이라는 허버트 리드의 주장과도 일치하기에 민조시 추구의 타당성이 인정된다. 김운중 시인의 민조시 작품 성향에는 그런 긍정적인 면이 많아서 좋다. 단아하되 날카로운 풍자성을 지닌 초기 등단작부터 일본 하이쿠와는 차별성을 보인 것이다. 당선작인 「봄비」나 「시렁거사-정치하는 사람들」에서는 한 편씩만의 소박한 내용으로 3-4-5-6 음절에 맞추되 행의 구분에 다소의 융통성을 두었다. 근대 일본의 하이쿠 대가인 바쇼(芭蕉, 1644~1694)식의 계절이나 3행 17음절에 갇힌 채 미세한 곤충류와 화초를 서정적으로 읊은 틀에서 벗어난 성향부터 긍정적이다. 날로 발전해 가는 사회에 발맞춰 우리답게 행하는 역동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김운중의 초기 시집부터 민조 시의음절에 맞추되 다양한 변화로써 입체적인 시적 효과를 거둔다. 첫 시집에서부터 민조 시의 기본적인 여러 작품을 일반 시의 연처럼 작품 성향에 맞춰서 활용하여 효율성을 얻고 있다. 일종의 파격적인 개선을 위한 연작성의 창작적 행보는 거침없이 활달하게 역사, 전설, 시사적인 서사를 담아내는 기행시에 필요한 요소이다. 기본 민조시의 계속적인 일반시 연 대용식 활용은 이후 시집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다가 이번 제6시집『셔블 아리랑』 에서는 거의 4개의 연처럼 질서화시켜서 바람직하다. 그만큼 김운중 시인은 옛것의 전통은 존중하되 불편한 기존의 틀에 묶이지 않고 수시로 과감하게 개선하려는 긍정적 자세를 지닌다. 그것은 최근 2년 동안 겪는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묵묵히, 그동안 지구촌 곳곳의 문화 탐사자료를 두 권의 시집으로 엮는 과정에서 터득한 탈속의 지혜로 보인다.
값진 마무리를 위하여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마침 생후 여섯 번째로 맞이하는 호랑이해에 맞춰 펴내는 김은중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거듭 축하한다. 아울러 그동안 국내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을 탐방하면서 보고 느낀 정보와 소감을 올해까지 일곱 권의 민조 시집으로 펴내서 값진 기록을 세웠음에 더욱 마음의 갈채를 보낸다. 여러 독자와 시인의 중간 매개자로서 대화한 평설자 역시 기쁜 기분이다. 실로 대단한 보람이라서 바람직한 전환도 모색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여러 권의 시집을 통독한 독후감 겸 문단인으로서 격려의 뜻을 담은 몇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다.
이순을 넘어 인생의 종심(從心) 연륜에 들어선 김운중 시인은 이제 기행시집으로부터 해방될 일이다. 미련이 남는다면 여건대로 북한지역을 포함해서 국내외의 빠진 데는 이삭줍기로 보충해서 80대쯤에 펴내면 된다. 그리고 제4시집 서문에서 “꾸며진 글이 싫어 온 천지를 돌아다니게 되니 그 또한 즐거운 행보였다.”-는 가상한 점이지만 고정관념에서는 벗어날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처럼 시인은 현재나 과거에 실재했던 사실만 다루는 역사가와 달리, 앞으로 가능한 세계를 상상력으로 활용해서 작품화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현지답사만이 아닌 미래나 우주의 세계도 문학의 영역으로 열려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번 시집 출간으로 기행문학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김운중 시인 스스로 자세를 가다듬고 새롭게 문학적 변모를 꾀할 시점이란 점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특수하게 세계 각처를 답파하면서 거시적이고 외면적인 역사, 지리, 사회, 풍속 등을 챙겨 작품으로 압축해 넣느라고 애쓴 대신에 온전한 문학 발전에는 저해 요소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더 인간적인 성찰과 달관 경지의 고독, 사랑, 죽음 등의 내면적인 아픔을 서정적으로 밀도감 있게 형상화한 르네상스적인 복귀 노력이 따라야 마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랜 양적인 기행 시문학에서 잃은 것을 채운 나머지 바람직하게 질량을 겸비한 중견- 원로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꾸준한 자세로 시문학 창작에 진지하게 임해온 김운중 시인의 건필을 빌며 대성을 바란다. (문학평론가, 중앙대 인문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