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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환은 한국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 받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사진 이휘영) |
하재훈(43) 대한축구협회 기술부장은 윤정환(35,사간 도스)을 가리켜 “한국축구가 낳은 불행한 선수”라고 했다. 윤정환은 타고난 패스 감각, 넓은 시야,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한국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체력이 부족하다” “수비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윤정환은 국가대표팀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윤정환만 그랬던 건 아니다. 이관우(31,수원)와 고종수(30,대전) 등 이른바 ‘테크니션’으로 불린 선수는 한결같이 대표팀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새롭게 출범한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윤곽이 드러났다. 허정무(55) 감독은 1월 4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에 나설 50명의 예비명단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선수가 한 명 있다. 수원 삼성의 미드필더
이관우(31)다. 이관우는 그동안 국가대표팀에 뽑혀도 벤치에 앉아 있기 일쑤였고 아예 뽑히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관우의 A매치 데뷔전은 2000년 1월 23일 뉴질랜드와 치른 친선경기였다. 8년이 지난 현재 A매치 출전기록은 9경기에 그치고 있다. 2004년 3월 31일 벌어진 2006년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조별리그 몰디브와 원정경기가 이관우가 뛴 마지막 A매치다.
이관우 뿐만이 아니다.
고종수(30,대전), 윤정환(35,사간 도스) 등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선수들이 대표팀의 외면을 받았다. 이들의 포지션은 플레이메이커였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축구가 그토록 목말라 했던 포지션이 플레이메이커다.
월드컵,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실패할 때마다 축구 관계자들은 플레이메이커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윤정환, 고종수, 이관우 등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플레이메이커였다. 프로 무대에서 활약은 빛났다.
정확한 패스와 넓은 시야, 그리고 경기상황에 맞는 경기 운영 능력으로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서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표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이들에 대해 한결같이 “체력이 부족하다” “수비 가담 능력이 떨어진다” “느리다”고 지적했다. 이들을 기용하면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도 했다.
대표팀 전술에 맞지 않는다고 ‘반쪽 선수’ ‘K리그용 선수’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이관우, 윤정환 등은 자신을 향한 지적에 반박했다.
이관우는 “체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었다. 경기에 계속 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같은 편견이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윤정환도 “반쪽짜리 선수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문식(37) 포철중 감독은 “상당수의 축구 관계자들이 테크니션에 대해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다. 한국축구에서 ‘테크니션 플레이메이커’로 살아 남기는 정말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축구와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36,프랑스)과 후안 로만 리켈메(29,보카주니어스,아르헨티나)는 플레이메이커의 본보기다. 자로 잰 듯한 패스와 물 흐르는 듯한 경기 운영 능력으로 경기의 흐름을 쥐락펴락했다.
두 선수 모두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갖춘 천재 미드필더였다. 그러나 지단과 리켈메는 완벽하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보다 빠르지 않았고 체력도 떨어졌다.
수비도 엉성했다.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는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지단과 리켈메의 부족한 면을 메워 줄 수비가 뛰어난 미드필더를 배치했다.
프랑스는 패트릭 비에이라(32,인테르 밀란)와 클라우드 마케렐레(35,첼시)가, 아르헨티나는 하비에르 마셰라노(24,리버풀)와 에스테반 캄비아소(28,인테르 밀란)가 수비를 맡았다.
지단과 리켈메는 이들의 뒷받침을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했다. 한국에서 이런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10월부터 1998년까지 유공 코끼리(현 제주)의 지휘봉을 잡았던 발레리 니폼니시(64) 감독은 유공을 플레이메이커 ‘윤정환의 팀’으로 만들었다.
공격수에게 전달되는 패스는 모두 윤정환의 발끝에서 이뤄졌다. 윤정환의 수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체력과 수비가 뛰어난 김기동(36,포항)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윤정환은 “니폼니시 감독은 선수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내게 더 공격적으로 경기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포항 스틸러스의 K리그 우승을 이끈 세르지오 파리아스(41) 감독도 김기동과 황지수(27)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둬 플레이메이커 따바레즈(25,인터나시오날)가 공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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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우(사진 왼쪽)는 2000년 1월 A매치 데뷔전을 치뤘다. 외국인 감독 중 움베르트 쿠엘류 전 감독만 이관우를 국가대표팀에 불렀다.ㅣ고종수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뛰었다.(사진=선원익, 이휘영) |
그러나 이같은 플레이 방식은 K리그 일부 팀에 있을 뿐이었다. 특히 국가대표팀에서는 플레이메이커가 철저하게 외면됐다.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상대 선수를 압박할 수 있는 선수가 중용됐다.
빠르면서 몸싸움이 뛰어나고 수비 성향이 강한 미드필더를 기용해 안정적인 경기운영을 꾀했다. 예나 이제나 국가대표팀에서 플레이메이커가 설 자리는 없다.
차범근 감독의 1998년 프랑스월드컵 차범근(55) 감독은 1997년 1월 박종환(70) 감독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국가대표팀은 1996년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에 2-6으로 크게 져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차감독은 독일식 축구를 강조하면서 기동력 축구를 내세웠다. 차감독은 미드필드에 5명의 선수를 두는 3-5-2 전형(그림 1 참조)을 주로 썼다. 왼쪽 및 오른쪽에 측면 미드필더와 윙백 2명씩을 배치하고 중앙에 미드필더 1명만을 뒀다.
서정원(38)과 이상윤(39)이 측면에서 빠르게 돌파한 뒤 올린 크로스를 공격수 최용수(35)와 김도훈(38)이 골로 연결하는 게 주요 득점 경로였다.
국가대표팀이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터뜨린 19골 가운데 11골이 측면 공격에서 이뤄졌다. 가운데 홀로 있는 중앙 미드필더는 공격보다 수비가 강조됐다.
차감독은 유상철(37)을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내세웠다. 최문식, 윤정환같은 테크니션은 힘과 스피드를 강조하는 차감독의 축구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는 두 선수는 좀처럼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최문식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니 답답했다. (차감독은)선수들의 능력을 120% 끌어내지 못했다. 공격을 더 잘 할 수 있는 플레이메이커를 활용하기보다는 공격은 못해도 수비가 좋은 선수 1명을 미드필더로 뒀다.
(윤)정환이와 난 차감독의 전술과 정반대인 선수였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차감독이 이끈 국가대표팀은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6승1무1패(승점 19)로 본선 출전권을 땄다.
그러나 순항하던 차범근호가 좌초 위기에 몰렸다. 1998년 3월 열린 제4회 다이너스티컵에서 부진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일본에 1-2로 진 뒤 중국과 홍콩을 각각 2-1, 1-0으로 물리쳐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그러나 수준이 떨어지는 미드필드 운영과 단순하게 측면만 고집하는 공격 등 답답하고 무기력한 경기내용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리고 플레이메이커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차감독은 프랑스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치른 유럽전지훈련 때 윤정환을 불러들였다. 윤정환은 프랑스 3부리그 팀인 생드니와의 평가전에서 진순진(34)의 골을 돕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그러나 차감독은 노정윤(37)과 고종수를 월드컵 최종명단에 넣으면서 윤정환을 뺐다. 윤정환은 “차감독은 많이 뛰는 걸 원했다. 대표팀에서 실시한 첫 체력훈련 때 부상 후유증으로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그때 나를 안 좋게 봤던 것 같다. 이후 체력훈련을 제대로 해도 ‘체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나와 전술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축구를 했다”고 기억했다.
유럽전지훈련 이후에도 차감독의 전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노정윤과 고종수는 플레이메이커 부재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차감독은 노정윤이 네덜란드리그 NAC 브레다에서 뛰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면서 오른쪽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고종수는 서정원을 받쳐 주는 왼쪽 미드필더였다. 중앙 미드필더로는 김도근(36)과 유상철을 기용했다. 한국은 프랑스월드컵 조별리그 1,2차전에서 무기력한 경기 끝에 멕시코와 네덜란드에게 각각 1-3, 0-5로 크게 지며 일찌감치 16강 진출의 꿈을 접었다.
차감독은 네덜란드전 직후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플레이메이커 부재는 프랑스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한국축구의 문제점으로 드러났고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허정무 감독의 2000년 아시안컵1990년대 후반까지 국가대표 선수를 뽑을 때 일반적인 기준이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빠른 발, 거친 몸싸움과 몸을 아끼지 않는 정신력이다.
그 가운데서도 체격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 ‘후반전의 사나이’로 불렸던 이원식(34)은 K리그 통산 73골을 넣었다. 그러나 172cm, 65kg의 작은 체격 때문에 국가대표팀에 한 번도 뽑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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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2.0) |
이원식 제주 유소년팀 코치는 “그때 만해도 실력을 떠나 체격조건부터 보고 국가대표선수를 뽑았다. 90분 내내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체력을 갖춰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나와 (윤)정환이 형 같은 선수는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국가대표팀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 중심에는 1998년 10월 경선을 통해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허정무 감독이 있었다. 허감독은 기본적으로 3-5-2 전형(그림 2 참조)을 쓰면서 측면 미드필더를 없애고 윙백에게 좀 더 공격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2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고 그 앞에 플레이메이커인 공격형 미드필더 1명을 뒀다. 플레이메이커가 수비 부담을 덜고 공격에 치중할 수 있도록 해 공격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허감독은 올림픽대표팀에서는 고종수와 이관우를, 국가대표팀에서는 노정윤과 이관우를 플레이메이커로 중용했다.
허감독은 “난 공격형 미드필더를 선호한다. 체력과 수비에 문제가 있다해도 다른 선수들로 충분히 공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고)종수, (윤)정환이 등에게 좀 더 공격적으로 뛸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허감독은 “신체 조건, 체력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선수 평가의 잣대는 지능이다. 머리가 좋아야 쉴 새 없이 바뀌는 경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허감독 또한 성적 부진으로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8강전에서 9명이 싸운 태국에 1-2로 졌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2승1패로 역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레바논에서 열린 2000년 아시안컵에서는 중국을 1-0으로 꺾고 3위를 차지했지만 허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국인 일본의 좋은 성적이 비교 대상이었다.
일본은 시드니올림픽에서 8강에 올랐고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했다. 미드필드의 정밀한 패스플레이가 눈길을 끌었고 측면 및 중앙 돌파, 세트피스 등 득점 경로도 다양했다. 허감독이 이끈 한국대표팀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경기 내용이 부실했다.
부정확한 패스와 효율적이지 못한 공격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허감독은 공격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으나 재임기간 치른 33차례 A매치 에서 3골 이상 다득점한 경기가 6번 밖에 없었다.
그나마 상대팀이 베트남(4-0), 라오스(9-0), 몽골(6-0), 미얀마(4-0), 인도네시아(3-0) 등 아시아에서도 약체로 꼽히는 나라였다. 2000년 10월 두바이에서 열린 LG컵에서 호주를 4-2로 이겼지만 당시 호주는 국내파로 이뤄진 반쪽짜리 팀이었다.
33경기 가운데 20경기가 1득점 이하였다. 노정윤, 윤정환 등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플레이메이커가 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윤정환은 이 문제와 관련해 “허감독은 국내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공격형 미드필더의 필요성을 많이 강조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전술은 기존의 전술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플레이메이커가 중심인 팀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베어벡 감독의 2007년 아시안컵 대한축구협회는 2006년 6월 26일 핌 베어벡(52) 감독을 신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스위스에 0-2로 져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지 이틀 뒤였다.
대한축구협회가 베어벡 감독의 선임을 서두른 데에는 2007년 아시안컵 지역예선,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등 촉박한 국제대회 일정도 있었지만 그동안 국가대표팀에 접목한 네덜란드식 축구를 체계화하기 위한 적임자라는 이유도 있었다.
베어벡 감독은 네덜란드식 축구의 색깔을 유지했다. 거스 히딩크(62) 전 감독과 딕 아드보카트(61) 전 감독의 전술적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4-3-3 전형(그림 3 참조)을 기본 축으로 조직적인 패스에 의한 중앙 돌파보다 빠른 측면 돌파에 이은 크로스로 골을 노렸다.
베어벡 감독 역시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보다 힘이 있고 빠른 선수를 중용했다. 미드필드는 공격형 미드필더 1명과 수비형 미드필더 2명으로 짜인 정삼각형 형태였다. 박지성(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천수(27,페예노르트) 등이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렇지만 두 선수 모두 테크니션은 아니다. 국가대표팀 안에 다른 플레이메이커는 없었다. 이관우가 2006년 8월 아시안컵 예선 대만전 예비명단에 포함됐지만 최종명단에서 빠졌다. 그리고 계속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007년 아시안컵 본선을 앞두고 박지성은 부상으로 쓰러졌고 이천수는 감기 몸살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용할 수 있는 선수는 김두현(26,성남) 뿐이었다.
그러나 모험보다 안정을 추구하던 베어벡 감독은 김두현을 기용하지 않았다. 대신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던 김정우(26) 카드를 뽑았다. 김두현이 아시안컵 본선에서 뛴 시간은 170분(3경기) 밖에 안 됐다. 조별리그 바레인전에서만 90분을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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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부터)윤정환(오른쪽에서 세 번째)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1분도 뛰지 못했다.ㅣ 김두현(가운데)은2007년 아시안컵에서 김정우에게 밀려 170분 밖에 뛰지 못했다.(사진 제공=대한축구협회, 사진=이휘영) |
이란과 치른 8강전에서는 연장 후반 시작과 함께 투입됐고 일본과 벌인 3,4위전에서는 강민수(22,전북)의 퇴장으로 후반 20분 김치곤(25,서울)과 교체돼 나왔다.
대전 시티즌의 김호(64) 감독은 “베어벡 감독은 패스를 잘하는 선수를 기용하지 않는 대신 수비형 미드필더 3명을 배치하는 극단적인 수비축구를 했다”며 “지지 않는 축구로 체면치레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베어벡 감독의 안전 위주 전술은 아시안컵 8강전 이후 효과를 봤다. 상대팀에게 1골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측면에만 의존했던 공격은 1골도 넣지 못했다. 공격은 낙제점이었다.
중앙에서 경기를 풀어야 하는 미드필더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윤정환은 이에 대해 뼈있는 말을 남겼다. “현대축구에서 측면만 이용해서는 골을 넣을 수 없다. 골은 중앙에서 더 많이 터진다.
중앙 돌파와 측면 돌파를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중앙에 기술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가 있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 2000년대 들어 일본 축구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는 나카무라 순스케(29,셀틱)다. 일본축구는 미드필더와 패스 플레이를 강조해 자연스레 플레이메이커가 부각됐다.
나카무라는 미드필드의 꼭지점에서 공격을 이끌었다. 일본의 축구 꿈나무들은 저마다 ‘제2의 나카무라’가 되고 싶어 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일본선수들은 조직 플레이와 발재간을 바탕으로 하는 재밌는 축구를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일본축구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일본 J리그 팀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 미드필드를 거치는 세밀한 축구를 하고 있다.
선수들 스스로 재밌는 축구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다른 한 축구관계자도 “일본선수들은 체력이 뛰어나지 않다.
조직력과 개인기술로 체력적으로 부족한 면을 메우려 한다. 테크니션이 인정 받는 풍토”라며 “감독들도 당장의 성적에 연연하기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팀을 이끈다”고 말했다.
한국은 그동안 수비에서 공격으로 한 번에 이어지는 장거리 패스를 남발하는 등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축구를 했다. 이른바 ‘뻥축구’다.
한일월드컵 이후 전술적인 완성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대다수 축구 관계자들은 아직도 세계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축구 관계자는 “한국축구는 여전히 재밌는 축구보다 이기는 축구를 하려 한다. 선수들도 프로 무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악착같은 축구를 한다. 또 감독의 지시대로 경기를 하다보니 경기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펼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기영옥 광양제철고 교사는 1990년대 초반 금호고 감독 시절 윤정환과 고종수를 키웠다. 기씨는 국가대표팀이 기술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를 외면하는 하는 것에 대해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기씨는 “(윤)정환이와 (고)종수는 수비수 뒷편으로 연결하는 패스가 뛰어나다. 국내 지도자들은 기술보다 체력이 뛰어난 선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된 생각이다. 체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기술이 뛰어나면 이를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한 축구관계자는 “일본축구가 기술이 뛰어난 선수와 미드필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1993년 J리그가 출범하면서 모든 축구 지도자들의 인식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소년을 거쳐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며 “한국도 대한축구협회가 지도자들에게 선진 축구의 흐름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크게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지식을 전달하는 수준인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국내의 한 축구 관계자는 “감독의 색깔이 있고 팀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성적에 연연해 변화를 두려워하다간 한국축구에서 플레이메이커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윤정환은 한국축구가 이미 그런 단계에 와 있다고 역설했다. “테크닉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에 대한 외면은 한국축구의 고질병이다. 국내 지도자들은 선수의 장점을 특화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유럽 등을 돌며 선진 축구를 경험하지만 예전부터 갖고 있는 축구의 틀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나와 (고)종수, (이)관우 외에 기술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는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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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환은 체력과 수비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했으나 인정받지 못해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사진=이휘영) |
인터뷰l 윤정환
“쓸 데 없이 체력 낭비할 필요 없다”
기술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라는 평가를 받았다. 난 독특한 미드필더였다. 드리블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가운데에 서 있으면 상대 수비의 압박이 심해 볼을 갖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동료에게 패스를 하고 빈 곳으로 이동해 자유로운 상태에서 패스를 받아 공격을 펼쳤다.
그런 게 다른 선수와 달랐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랐나. 두뇌 회전이 빠른 편이다. 경기를 읽는 시야도 한 쪽이 아닌 전체를 바라봤다. 예를 들어 오른쪽을 보면서 왼쪽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를 했다. 볼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주위를 둘러 보며 동료와 상대팀 선수들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했다. 그리고 동료의 달리는 속도에 맞춰 패스의 세기를 조절했다. 경기 내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이를 계산했다.
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을 앞뒀을 때 가장 힘들었다. 쉬지 않고 뛰는 걸 원했던 차범근 감독과 많이 뛰지 않는 나는 전술적으로 맞지 않았다. 1998년 4월 유럽 전지훈련 도중에 치른 한 평가전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데 (차감독이)내게 계속 지적을 하길래 화가 나 걸어 다녔다.
나름대로 항명이었다. ‘내가 왜 국가대표팀에 왔을까.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정무 감독은 다른 지도자와 달리 공격형 미드필더의 임무를 강조했지만 전체적인 전술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는 가장 늦게 국가대표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체력이 부족하거나 수비 가담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쓸 데 없이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볼이 나와 상관없는 곳에 있는 데 굳이 뛰어다녀야 할까.
차라리 쉬면서 체력을 아낀 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빠르게 역습을 펼치는 게 효율적이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과 조윤환 감독은 내게 그렇게 가르쳤다.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런 내 플레이가 수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축구에선 테크닉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가 빛을 보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됐다고 꼬집어 말할 순 없다. 그렇지만 감독의 성향 탓도 분명 있다. 니폼니시 감독은 선수들의 장점을 되도록 살리려고 했다. 패스가 부정확하지만 체력과 수비가 좋은 (이)을용이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장점을 살려 단점을 메운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내 지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술이 뛰어난 선수보다 많이 뛰는 선수를 선호했다. 예전부터 몸에 배인 축구 전술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눈 앞의 성적에 급급할 수밖에 없으니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수가 감독에 맞춰야 하지 않나.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체력과 수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뛰어 다녔다. 그런데 계속 감독의 질책이 이어졌고 45분만 뛰다가 교체돼 나왔다. 단점을 고치려고 열심히 노력했는 데도 그런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SPORTS2.0 제 86호(발행일 1월 14일) 기사
이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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