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명주사를 찾다.
감로수
꽃잎 진다고 바람을 탓하리오. 찻잔에 한잎 띄워 마시면 그만이지......
아름드리 금강송이 늘어선 소나무 숲길을 따라 명주사 올랐다.
작지만 아담한 명주사가 거기 있었고 극락전이 문을 활짝 열고 중생을 반겼다.
明珠寺
강원 양양 현북면 어성전리488번지 만월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 말사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만월산에 자리한 명주사는 고려 목종 12년(1009) 해명과 대주 스님이 창건하여
비로자나불을 모신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다.
사찰명은 두 창건주의 이름을 따서 명주사라 하였다.
고려 인종 1년에 청련암고 운문암이 그리고 조선 숙종 2년에 향로암이 부속암자로 창건되었으며,
정조 20년 명주사 출신 고승 연파스님이 원통암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모두 소실 되었고 그후 중건과 소실을 계속하다 1911년 건봉사 말사가 되면서 중건이 계속되어
원통암 30간을 비롯한 독성각, 산신각, 어향각, 응향각, 진영각, 선방인 현위실, 강원인 만수실 등 총 15동 95간의
대찰의 면모를 갖춘 큰가람을 이루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페허화되었고 근간 수해로 소실되었던 것을 8년의 각고
끝에 홍진스님께서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
종각입니다.
명주사 전경
극락전과 석등들
산신각을 돌아드니 맑은 감로수가 나무통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대 나그네여 목을 축이라.
산사 옆의 작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며 흐르고 그 옆에는 산승이 쌓은 듯한 돌탑이 드믄드믄 서 있었다.
물은 흐르고 돌탑은 말없이 그 흐름들을 지키고 섰다.
가끔 흐르는 물소리에 저 범종소리가 더하는데 산사는 여름내 그 고요를 혼자 안았으리라
襄陽 明珠寺 銅鐘
강원 문화재자료 제 64호
강원 양양 현북면 어성전리
이 종은 조선 숙종 30년(1704)에 제작된 높이 83 Cm의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쌍룡의 종뉴아래 안으로 오무라든 종신이 연결된 형태로 종신을 2등분하여
위쪽에 원문법자, 기하학적인 사선문의 유곽, 4구의 합장천부보살상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명문과 구연부에 붙어 있는 하대가 배치되었다.
산사는 특히 단청이 화려하였습니다. 하여 디카에 담아 보았답니다.
누군지 모릅니다. 그냥 부릅뜬 눈이 몹시 무섭더군여 ~
이분의 웃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자비의 웃음이가보다는 세상을 비웃는 조소같았습니다.
부도입니다. 이분들이 여기 명주사를 오늘날까지 지켜왔겠지요.
襄陽 明珠寺 浮屠群
강원 문화재자료 제 110호
강원 양양 현북면 어성전리
명주사는 고려 목종 12년(1009)에 대주와 해명 두 대사가 창건하였다.
이둘 스님의 이름을 따서 명주사라고 불렀으며, 조선 철종 11년(1860)에 불타 버린 것을 월허대사가 지금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이 부도들은 명주사의 역대 고승들의 부도로 조선시대 후기의 부도 중 도냉서 가장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남아 있는 부도는 모두 12기로 원당형이 7기 석종형이 5기이다.
해연풍님의 카페에서 가져 왔습니다.
옮기면서 ^^;;
명주사
명주사는 현재 아담한 사찰로 깊은 산중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예전엔 강원도에서 건봉사 다음으로 큰절이었다고 한다.
금강산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월정사, 명주사, 신흥사, 화암사, 건봉사를 들러 금강산을 들어갔다고 한다.
고려 목종12년(1009)에 혜명, 대주 두 대사가 창건하고 비로사나불상을 조성하였다고 전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1009년(고려 목종 12) 혜명(惠明)과 대주(大珠)가 함께 창건하고 비로사나불상을 조성하였다고 전하며
두 대사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명주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1861년(철종 12) 불이 나자 월허(月虛)가 중건하였고,
1879년(고종 16)에 다시 불이 난 것을 1880년에 중건하였다.
1897년에도 불이 나 본사를 원통암으로 옮겼는데, 이후 원통암 자리가 현재의 명주사 자리가 되었다.
1917년에 백월(白月)이 중창하고, 1923년 윤설호(尹雪昊)가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으며
1963년 법당·삼성각·추성각을 중건하고 꾸준히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바람새/김능자가 덧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