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향교 장의회 선현유적지 탐방하다(1)====
언 제 ; 2013년 12월 5~6일(양일간)
갔는곳 ; 강원도 일원과 영덕 창수면 인량리
영천향교 장의분들이 계사년의 마지막을 뜻있게 넘기기 위하여 평소에
근면 성실히 절약하여 모아 놓은 비용으로 동해쪽을 계획잡아 선현의 흔적을
돌아 보기로 의견을 모아 1박 2일 스케쥴로 아침 일찍 출발하였었는데 다행히 겨울인데도
날씨도 따뜻하고 눈도 오지않아 강원도 일원과 영덕 창수면 인량리를 답사하여 양일간의
보람있는 일정을 마침므로 본인은 어설픈 사진기술로 여러곳을 담아 카페에
실어봅니다.
양일간을 태워줄 관광버스
(기사 및 차주가 자양 안귀미 출신 전태운씨)
버스 앞 향교장의회 안내표시를 하고~~~
버스 안 장의분들의 모습을~~~
여기도~~~
이야기가 가지 각색이다~~~
너도 나도 얼굴을~~~
먼저 안동휴게소에서 휴식하고~~~
아~~ 멀리왔다 벌써 원주휴게소까지~~~
조선시대
원주시는 1395년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고
강릉의 '강'자와 원주의 '원'자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였고, 원주에 강원감영이 설치되어
이때부터 강원도의 수부로서 행정·치안·사회·문화 등의 중심지가 됨
1895년 5월 26일자로 전국이 23부 337군 제도로 개편되면서 원주는 충주부에 소속되었고,
1896년 8월 4일자로 팔도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여 전국을 13도 1목 7부 331군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으나, 원주에 있던 강원도 감영은 원주에 회복되지 못하고 춘천으로 이전하게 됨
일제강점기
1914년 3월 1일부로 시행된 지방행정개편에 따라 원주군은 10면 67리가 됨
1937년 본부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하여 원주군은 1읍 9면이 됨.
현 대
1955년 9월 1일 법률 제372호로 원주읍은 판부면 단구리·행구리 및 호저면 우산리를
편입하여 원주시로 승격되고, 원주군은 원성군으로 개청됨.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원주시와 원주군을 통합하여 원주시가 됨.
2005년 9월 1일 원주시제 50주년이 됨.
춘천 학곡리 맛국수와 닭갈비가 유명하다기에
점심을 여기서 맛있게 먹고~~
집은 어설픈데 맛은 춘천에서 제일이라네~~~
닭갈비가 지글 보끌 맛있겠다~~~
입에는 군맛이 돌고~~~
****제 1코~스 소양호에 가다****
있는곳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소양강 처녀의 배경이 되는 소양호. 면적과 저수량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소양호는
거의 화천, 양구에 가까운 춘천 동북부에 위치한 인공호수이다.
건설의 시대 1973년에 만들어진 동양최대의 사력댐이었던
소양댐의 등장으로 생겨난 호수이다.
버스나 택시.자가용을 이용해 소양강댐 주차장에 이른후 소양호,
소양강, 소양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거기서 15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강원도 특산품들을 팔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선착장으로 가 쾌속 유람선을 타면 청평사, 인제군,
양구군 등을 갈 수 있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은 여러곳에
흔적을 남겨셨다.
댐안쪽을 담아 보고~~~
머~얼리 있는 소양강 다목적댐도
담았는데 안개가 심해서~~~
공사 안내 표시판도~~~
댐의 뚝도 담고~~~
소양호의 고기형상도~~~
댐뚝 바깥도~~~
내려오면서 버스안에서 자연 경관도 담고~~~
아직 눈이 녹질않았네
****제 2코~스 평화의 댐에 가다****
있는곳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천미리와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걸쳐있다
평화의댐은 높이 125미터, 길이 601미터, 저수용량 26억3000만 세제곱미터로 우리나라
2만여 개 댐들 가운데 가장 높고, 소양강댐과 충주댐에 이어 세 번째로 저수량이 큰 댐이다.
실제로 평화의댐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비수구미 골짜기를 가로막은 육중함에 기가 질린다.
평화의댐은 ‘5공 정권의 대국민 사기극’, ‘불신과 낭비의 기념비적 상징물’, ‘바보댐’ 등으로
결론 났지만, 최근 이 댐에 다시 1650억 원의 혈세가 투입돼 보강공사가 진행중이다.
평화의댐은 다른 댐처럼 전기를 생산하지도, 용수를 공급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왜 또다시 세금이 들어가야 할까?
평화의댐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역사를 짚어 보면, 남북대립 상황에서 정권의
거짓말과 거기 동조하는 지식인들,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돈벌이로 활용한 토건진영 등이 합작한 한국 현대사의 일그러진 모습이 날것으로
드러난다.
평화의댐은 1단계(1986~1988년), 1단계 보강공사(2002년), 2단계 사업(2002~2006년),
3단계 사업(댐 치수능력 증대 사업 2012년~) 등 총 4번에 걸쳐 예산이 들어갔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어림잡아 1조 원 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평화의댐은 잘못된 국책사업이 어떻게 혈세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평화의댐, 한국판 ‘웩 더 독’
더스틴 호프만과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영화(『Wag The Dog』, 1997)가 있다.
‘웩 더 독’은 개가 꼬리는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든다.’라는 의미로,
주식시장에서 비정상적 상황을 표현하는데 흔히 사용된다. 영화 ‘웩 더 독’의 내용
역시 음모가 판을 치는 비정상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 미 대통령 선거 직전, 재선에
도전한 대통령이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비난 여론에 재선이
불투명해지자 참모진들은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가상의 적을 내세운다.
여기에 미디어가 적극 동원되는데,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한 가상의 전쟁 현장이
TV를 타고 전국을 강타한다. 야당이 성추문과 전쟁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하자
이번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전쟁 영웅을 내세워 위기를 모면하고, 결국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된다. 영화는 권력 연장을 위한 음모와 이를 위해 여론을 어떻게 조작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화의댐 사업이 꼭 그렇다.
1986년 10월, 당시 전두환의 5공 정권은 북한이 높이 200미터, 저수량 200억 톤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댐은 88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핵무기에 버금가는 위력의 물 폭탄’, ‘12시간 서울 물바다’, ‘북한의 남침 전략’
등으로 홍보되면서 전국을 전쟁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당국은 남한으로 귀순한
북한 병사를 통해 북한이 88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수공을 기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거의 모든 언론매체가 ‘금강산댐이 (고의 또는 사고로) 붕괴되면 100미터의 물기둥이
수도권을 덮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KBS 등 방송에서는 권위 있는 토목전문가들을
등장시켜 ‘200억 톤 방류 시 63빌딩의 절반까지 물이 찬다.’고 보도해 ‘서울 물바다설’을
확산시켰다
정권에 의해 북한의 금강산댐 수공(水攻)설이 전해지자 전국은 반공의 열기에 휩싸였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금강산댐 반대 및 북한 정권 규탄집회가 전국에서 잇따라 열렸는데,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만 10만 명이 운집하는 등 11월 한 달 동안만 전국적으로
도합 1000만 명이 참여했다.
1986년 11월 정권은 수공 대응 댐 계획을 밝혔다. 대응 댐 건설로 오히려 북쪽을
수몰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4대강을 죽이는 사업을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포장하는 것과 같이 그 댐의 이름은 ‘평화의댐’으로 명명됐다.
정권은 평화의댐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인 국민모금 열풍을 일으켰다.
1986년 12월부터 1987년 11월까지 이렇게 모인 국민 성금이 881억원에 이른다.
이 중 639억 원(242억 원은 국고로 환수)과 국고 867억 원 등 1506억 원을 들여 1987년
2월 착공한 평화의댐은 1988년 5월에 높이 80미터, 길이 410미터로 1단계 공정이 완공됐다.
1986년 당시의 1500억 원을 2013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소비물가지수 기준)하면
약 4600억 원에 가깝다.
그러나 막대한 혈세가 들어간 평화의댐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권력을 잡은 5공 정권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민들은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정통성 부족에 따른 논란과 국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북한 금강산댐 수공설 및 평화의댐은 당시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의 기획으로서
홍보 및 대응 댐 계획까지 철저하게 국민의 관심을 민주화 요구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 의도가 불온하다고
인정하도록 작업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하이 테크놀로지 산업의 동구권
수출을 포기하는 등의 국가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당시 일부 양심적인 전문가들이 북한강 상류에 200억 톤 규모의 댐이 들어설
수조차 없다고 공학적 분석을 했지만
밝힐 수는 없었다. 소수가 이를 밝히자 그들의 연구는 철저히 무시 받고
그 연구자들은 탄압 받아야 했다.
총무수장의 모습을~~~
김현주 장의 모습도~~~
나의 모습도 넣고~~~
전체의 기념촬영을~~~
소양강 처녀 - 김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