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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6착검·헬기동원 노골적 무력위협
계엄군 무차별진압 시민 배신감증폭 학생들 [동명·지산파출소] 연쇄습격
공수부대만행에 "아연실색"…경찰들까지도 시민·학생 묵시적 동조
18일 오전11시50분께 계엄군들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밀려 가톨릭센터앞을 포기한 학생들은 금남로 좌우로 빠져나가 시내 전역을 무리지어 다니면서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황금동과 불로동 광주공원 현대극장앞을 거쳐 한일은 행사거리에 도착한 3백여명의 학생들도 여기서 또다른 방향에서 도착한 2백여명과 합류한다.
금남로 반대편으로 빠져가 대한극장 공용터미널 시민관 중앙국교등을 거쳐 골목골목을 통과해 온 동료들이다.
계엄사와 2군사령부 [작전상황일지]는 이와관련[가톨릭센터에서 분산된 학생 9백50여명중 3백여명이 학생회관옆에서 재집결, 불로동방면으로 행진하면서 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음. 한일은행 앞에도 2백여명이 집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은 큰 대열이며 이당시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한 금남로 일대에서는 1백명내외의 소규모 시위대가 곳곳에서 게엄군들과 투석·최루탄공박을 계속한다.)
이날 오후 12시30분께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재집결한 5백여명의 학생들은 곧바로 고용터미널로 향한다.
전쟁용 헬리곱터가 저공비행을 하며 학생시위대를 위협하는 한편 낱낱의 움직임을 감시한다.
공용터미널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방민들이 아니라 최루탄으로 무장한 전경들이었다.
최루탄과 곤봉세례를 피해 학생들은 인근 대인시장으로 몸을 피했으나 게엄군들의 추적은 계속된다.
일요일을 맞아 유난히 붐비던 대인시장은 최루탄과 곤봉, 학생들의 비명으로 이내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학생들은 대인시장앞 시민관과 전남여고 사이에서 대열을 재정비하지만 계속해서 쫓아온 전경들에 의해 오후1시께 계림극장앞까지 밀려난다.
5백여명을 넘어선 학생들은 오후 3시 학생회관앞에서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일단 헤어진다. (전교사와 계엄은 이에 앞선 12시45분께 학생 20여명이 산수파출소에 투석, 유리창을 깨고 도주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잠시 흩어졌던 학생들은 이날 오후 2시께 다시 학생회관 앞으로 모여든다.
2백여명정도가 모이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일 수 있도록 당초 집결예정지인 학생회관 앞으로 진출할 것을 주장한다.
공수부대와의 처절한 사투를 벌인 경험을 갖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내내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격앙된 학생들은 학생회관 앞으로 진출한다. 이시각 학생회관앞에는 짚차형가스차와 4t 트럭이 접근한다.
구호를 회치며 접근하는 학생들을 목격한 군용트럭은 방향을 돌려 도망했으나 가스차는 순식간에 학생들에 의해 둘러싸인다. 이시각 우연히 학생회관앞에서 학생과 전경간들의 충돌을 목격하고 이후 시위에 동참한 김현채씨 (당시 20세·식당종업원)는 분노에 찬 학생들과 합세해 가스차를 불태운다.
[이날 오전 시내에 나갔다 아무 이유없이 두차례나 공수부대원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왜 맞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학생회관 앞을 지나다 가스차와 군용트럭을 향해 학생들이 돌을 던지는 것을 목겼했다. 군인들은 더이상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과 합류해 돌을 던지고 계엄군들이 빠져 나간 가스차를 넘어뜨렸다. 시위대중 누군가가 연료통을 개뜨렸고 이내불을 붙였다. 모두가 환호했다.] (학생회관앞 가스차방화시각은 기록에 따라 큰차이를 보인다. 광주시청상황일지는 이시각을 1시20분으로, 군작전일지는 오후 3시30분상황으로 기록하고 있다.)
학생회관 첫 화염병
한편 이날 학생회관앞 충돌에서는 처음으로 화염병이 등장, 학생시위의 양상이 단순시위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방어자세로 변화됐음을 보여준다.
학생회관앞에서 분노를 폭발시킨 학생시위대는 광주천변을 따라 구시청사거리를 거쳐 충장로진출을 시도한다.
오후3시를 넘어서면서 학생시위대는 1천명가량으로 늘어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2천여명, 계엄상황일지 - 6백여명)
도청앞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다 좌절된 학생들은 도청을 우회해 전남도교육청을 거쳐 동명동쪽으로 나간다. 때마침 동명파출소앞에 이른 학생들은 계엄확대조치에 강한 분노 표시의 일환으로 동명파출소를 습격한 뒤 곧바로 인근에 있던 지산파출소까지 진출한다.
이날 오전 충장파출소와 산수파출소에 투석을 하던 시위대와는 달리 이들은 파출소 내부에까지 들어가 최규하대통령사진을 떼내고 오토바이에 불을 지르는등 격한 모습을 보인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유승규씨 (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2년·현재 다솜제과점 운영)의 증언.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한 계엄군들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하면서 18일 이전 전경들에 대해 갖고 있던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전경들이 정권찬탈의 앞잡이로 변했다는 배신감이 더했다. 동명파출소앞에 이르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파출소내부로 쳐들어갔다.
경찰들이 혼비백산 도망갔다. 최대통령사진을 뜯어내고 파출소 앞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불을 질렀다. 지산파출소에서도 우리들은 집기등을 부순뒤 무선기등을 들고 나왔다.] (계엄사, 전교사상황일지 - [오후 4시20분께 시위대 3백여명이 동명파출소와 지산파출소를 습격, 유리창 80여장을 파손하고 시장 관사등에 투석해 학생 32명을 연행)
지산파출소에서 나온 학생시위대는 지산동오거리방향으로 향한다.
학생들은 그러나 곧방향을 바꾼다. [산수동 오거리에 왔을때 한 택시기사가 [지금 공용터미널인근에서는 공수부대들이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있소]라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을 살리자며 시위대는 곧바로 방향을 바꾸었다. 조금전에 거쳐왔던 길을 거슬러 이동했다.] (김상집씨 - 당시 <주> 전방근무·현 빛고을수의과병원장)
태극기를 앞세운채 공용터미널을 향해 바삐 이동하던 시위대는 동명동 농장다리 인근에서 시위진압 지원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경찰을 태운차량과 만난다.
수적으로 우세에 있던 학생들은 차를 세운뒤 경찰 45명을 무장해제 시킨다. 이날 시위를 주도했던 김상집씨의 증언. [장동로터리로 이동하던도중 경찰차량을 만났다. 갑작스런 학생들의 출현에 놀란 경찰들이 버스내에서 약간의 저항을 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투석을 하고 창문에 달린 철만등을 뜯어내자 한사람씩 내리기 시작했다.
경찰들의 처리문제를 논의하다 이날오전 전경들에 의해 연행된 동료들과 교환자는 의견이 제시돼 이들중 환자인 3명을 보내고 나머지는 시위대가 빙둘러싼채 진행했다.] 경찰을 이끌고 이동하하던 시위대는 청산학원 인근에서 미리 대비하고 있던 계엄군들과 만나다.
학생들은 이들을 향해 인질로 잡힌 경찰과 시위도중 연행된 학생과의 교환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20∼30여분의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이같은 분위기도 잠시뿐 트럭 2대에 분승한 공수부대원들이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
홍현희씨 (당시 조대공전기계과 2년)는 당시 맞닥뜨렸던 군인들이 이미 시내 곳곳에서 무자비한 진압을 마치고 달려온 공수대원들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적극적인 시위양상
[트럭 2대에서 군인들이 뛰어내렸다. 누군지 모르는 우리들은 그 상황을 잠시 구경했다. 그들은 M-16에 착검을 하고 있었다. 구타와 살상이 시작됐다. 붙잡힌 시민·학생들이 트럭 밑에서 구타당하고 거의 실신하면 짐짝처럼 사람들을 트럭위로 던졌다. 그러면 트럭위에 있던 공수대원들이 다시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했다.]
오후 2시 학생회관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오후 4시40분께 공수부대의 강력한 진압에 밀려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들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시내시위는 계속된다.
광주공원 인근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 시민들은 태평극장 인근을 거쳐 공용터미널까지 진출, 시위를 계속했으며 금남로 일대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과 청산학원에서 해산된 학생들은 또다시 도청옆 노동청등지에서 시위를 계속한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잘 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