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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풍경|오사카 Osaka
여행 숙박
2009/09/07 18:29 http://blog.naver.com/japanitcp/130068651154 |
오사카 Osaka
일본풍경|사진으로 즐거운 세상을 읽는다
justinKIM의 탐구생활
신사이바시의 아메리카촌과 도톤보리, 오사카
도톰보리는 역시 밤이다. 낮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도톤보리의 상징,
글리코 아저씨 사진은 필수코스! 저녁은 접시당 무조건 130엔인 겐로쿠 스시에서 푸짐하게 먹는다.
사람들 바글바글하다. 도톤보리 강을 따라 형성된 번화가인 '먹자 도시' 도톤보리는 '쿠이다오레 (사치스럽게 먹고 마시다가 재산을 탕진하는) 거리'라고 불리울 만큼 많은 음식점과 오락시설이 밀집해있다.
신 우메다 시티의 스카이 빌딩과 공중정원 전망대, 오사카, 일본
16세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도요토미 가문이 오사카 성을 만들었다면
현대 일본은 그 오사카 성 옆 우메다 시티에 현대공학의 기술로 공중정원, 스카이 빌딩을 만들었다.
오사카 성 관광이 끝나면 사람들은 다음 코스로 이 스카이 빌딩 입장권을 끊고 초고속 승강기를 탄다.
우메다스카이빌딩 공중정원의 전망대는 360도를 돌며 모든 방향의 오사카 야경을 구경할 수 있다.
오사카의 커피 하우스 루이지에 예쁜(혹은 착한) 오사카 아가씨가 서있다.
흔히들 쿄토사람들은 옷입다 망하고, 오사카사람들은 먹다 망한다고 한다.
먹다 망하는 오사카사람들에게는 당연 먹을게 많은 데, 그중에 아싸한 커피집도 그중 하나다. 일본의 카페에는 거의 대부분, '런치 메뉴'가 있는데, 맛있고 예쁘고 간단하고 (또 뭐있남^^::) 그럴싸하다.
오사카의 드림랜드가 끝난 시간, 마지막 입장객들이 나가고 있는 시간이다.
유니버셜 저팬 USJ의 피터팬의 네버랜드는 오사카에 있다.
탈것들과 놀이 기구 중심인 USJ-할리우드 드림 더 라이드도 어사카 난바에 있다. .
USJ-피터팬의 네버랜드 파크 중앙의 러군에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후크 선장의 해적선, 미아 어린이들이 사는 숲들이 있다.
오사카의 명물 100엔 샵이다. 일본에는 '100엔샵' 체인이 여러 곳이 있다.
그중에서 다이소(DAISO)와 캔두(CAN DO)가 유명하다.
무조건 싹쓸이로 물건 사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행 기념상품을 100엔샵 또는 99엔샵에서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할수 있다. 규모도 제법 크며 쓸만한 물건도 많다.
오사카 텐만구(天滿宮) 신사에서 참배를 하려는 손을 씻고 있다.
이 신사는 오사카시 기타구(北区)에 위치하고 있으며는 일본 도처에 위치한 수 많은
“덴진상(天神さん)”을 기리는 신사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신사이바시와 도톤보리는 인접한 거리로 신사이바시는 도톤보리 강 (강? 강이라긴 이 경우에는 많이 부끄럽다. 갑천 같은데 비하면 이건 하천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청계천 보다는 좀 커서 유람선 하나가 겨우 지나가는 개천이지만), 오사카는 물의 도시이고, 인심 좋은 서양 사람은 아시아의 베니스라고도 한다. 물의 도시로 알려진 오사카 도톤보리 역시 수로(물)를 이용, 도시가 급팽창하고 있다. 교토 도톤보리의 도심 중앙에 위치한 오염된 하천을 새롭게 정비하고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 간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 두사람이 새로산 디지털 카메라로 셀카를 찍고 있다.
빈티지 진 가게, 청바지의 명품 디젤을 취급하고 있는 가게이다.
고베는 패션산업이 아주 유명한데, 이처럼 유리창을 가려놓는 경우는 대게 큰폭의 할인 세일을 하는 경우이다.
싼물건을 사러 들어오는 손님들의 체면을 위해 유리창을 막아놓는다.
(디젤 본사가 이 사진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세일을 안다면 브랜드 관리로 난리가 난다)
오사카의 대낮이다. 우리나라 교민과 재일 동포들께서도 제일 많이 사는 도시이다.
오사카 大阪, Osaka
일본 Japan
일본풍경|사진으로 즐거운 세상을 읽는다
justinKIM의 탐구생활
일본 긴키[近畿] 지방 중부에 있는 부(府)이자 시.
오사카 부[大阪府]는 혼슈[本州] 중앙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한다.
긴키 지방에서 제일 넓은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나라 현[奈良縣], 북동쪽으로는 교토 부[京都府], 북서쪽으로는 효고 현[兵庫縣], 남쪽으로는 와카야마 현[和歌山縣]에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오사카 만을 바라보면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해 주고쿠[中國]·시고쿠[四國]·규슈[九州]와 연결되어 있다. 예로부터 긴키 지방 수륙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면적은 도도부 현(都道府縣) 중 가장 협소하며, 인구는 도쿄[東京] 다음으로 많다. 행정상 부청이 소재하는 오사카 시를 비롯해 32시(市) 11정(町) 1촌(村)으로 나뉜다. 오사카 시의 주위에는 인구 80만 명의 사카이[堺], 50만 명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 40만 명의 도쿄나카[豊中], 30만 명의 히라카타[枚方]·다카쓰키[高槻]·스이타[吹田], 20만 명의 야오[八尾]·네야가와[寢屋川]·이바라기[茨木] 등의 위성도시가 오사카 시에서 방사선으로 뻗은 국철과 사철을 따라 분포한다.
오사카 부의 인구추이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전인 1941년에는 482만 명을 헤아렸는데, 종전 직후인 1945년에는 280만 명으로 격감했다. 그후 경제부흥과 함께 인구도 현저히 증가하여 1965년에는 315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고비로 해마다 감소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비해 오사카 시 근교지역은 주택단지 등의 활발한 개발에 따라 인구도 급증하여 최근 5년 동안에 오사카 시에서 20~40㎞ 범위 내에 있는 여러 도시는 15~30%의 인구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1965년부터 실시된 긴키권 정비법 사업계획에 따라 교통망의 정비가 추진됨에 따라 오사카 부 산하 일원의 지역개발은 한층 진전되어 새로운 오사카 부로 변모하고 있다.
일본의 지리 및 기후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마치 조각난 해마처럼 자리잡고 있다. 대략 10,000년정도 전,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해빙기가 찾아온 이후 아시아 대륙과 일본을 연결하던 육지가 바다에 잠기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은 수많은 섬들이 다닥다닥 모여 이루어져 있다(커다란 네 개의 섬과 대략 1,000개의 작은 섬). 3,000km 정도의 활 모양의 산맥이 열도를 가로지르고 있고 그 중 가장 큰 산이 완벽하게 좌우 대칭인 후지산(3776m)이다. 일본의 많은 산들이 화산인 까닭에 수많은 온천과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반면, 동시에 지진과 해일의 위험도 함께 동반하고 있다. 실제로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지진이 잦은 지역 중 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1년에 대략 1,000회 정도 지진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 중 대부분은 미진이어서 정교한 지진 계측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지진이 일어났는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일본은 위도상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남쪽의 아열대에서 북쪽의 아한대까지 다양한 생태계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보는 많은 동식물들이 사실은 예전부터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은 아니었다무모한 근대화의 진행으로 인한(벌목이나 인구의 팽창 그리고 산성비 같은) 부작용 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유럽과 미국에서 들여와 심은 식물들로 인해 일본의 자연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다행히 일본의 다가가기 힘든 험준한 산악 지형 덕택에 장엄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많이 보존될 수 있었다 특히 혼슈 중앙의 산악 지형과 홋카이도의 자연 공원 등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자연들이다. 일본의 가장 큰 육식 포유 동물은 곰으로 홋카이도에서 발견되는 갈색 곰은 2m의 키에 몸무게가 400 kg까지 나간다. 일본 특유의 동물로는 중간 정도 크기의 일본원숭이와 커다란 도롱뇽을 들 수 있다. 류큐 열도에서 발견되는 희귀종인 이리오모테 들고양이는 살아있는 화석으로 분류된다.일본은 커지는 엔화의 힘을 등에 업고 고래나 돌고래를 남획하고, 무차별적으로 열대 우림을 베어내고, 또 바다와 대기를 오염시키는 등 종종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는 한다. 이러한 것은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환경 보존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일본은 아직도 흘림 그물로 물고기를 마구 잡아들이고 있고,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잔뜩 포장을 한다든지, 가전기기가 마구 방치되어 버려지기도 한다. 또한 주로 말레이시아에서 들여오는 열대 우림 목재의 수요는 아직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의 생태 환경에 직접 영향을 미칠 만한 일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확고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놀랄 만한 일이다). 숨막힐 정도로 탁했던 1970년대의 대기나 수질 오염은 한풀 누그러졌지만 아직도 광화학 스모그는 도쿄나 다른 대도시의 문젯거리로 남아있다.일본의 산악 지형과 길게 뻗어 있는 열도, 그리고 대륙과 인접해 있는 위치 등이 일본의 기후를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북쪽은 짧은 여름에 폭설을 동반한 긴 겨울이 이어지는 반면 남쪽 섬들은 일반적으로 온화하고 다습한 기후이다. 겨울철(12~ 2월)은 춥고, 건조한 시베리아 기단이 습기를 머금은 태평양 기단과 충돌해 일본 서부에 많은 눈이 내린다. 그리고 여름철(6~ 8월)은 덥고 축축한 공기가 태평양에서 불어와 고온 다습한 기후가 일본 전역에서 지속된다. 늦은 여름 장마철에는 특히 해안 지역에서 억수같은 비와 강한 바람이 계속된다.
오사카 성 (大坂城,大阪城(おおざかじょう,おおさかじょう))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성이다. 다른 이름은 긴조 (金城) 혹은 긴조 (錦城)로, 과거에는 오자카라고 읽었지만, 현재에는 오사카로 많이 읽혀진다. 도요토미 정권의 본성으로 있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소실되었다. 그 후, 에도 시대에 재건을 해 에도 막부의 서일본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오사카 시 주오 구의 오사카조 공원 (大阪城公園)이다. 구마모토 성,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 3대 명성중 하나이다. 1583년 센고쿠 시대 이시야마 혼간지와 그 절안에 위치한 마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을 개시했다. 완성에 1년반이 소요된 혼마루는 이시야마 혼간지터에 조성되었고, 천수는 옛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외관은 5층5계이다. 그리고, 기와등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했다.
일본의 역사
일본에 처음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일본이 아직 대륙에 붙어 있었을 때 서쪽의 한국과 북쪽의 시베리아부터 건너와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 채집 등의 생활을 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또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온 사람들도 일본인들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AD 300년에 이르러 해를 숭배하던 야마토 왕국이 정복과 연합을 통해 일본을 느슨하게나마 통일하였다. 불교는 중국에서 소개된 6세기 중반 이후 곧 국교가 되었으며 불교와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인 신도가 융합되어 신도의 신들이 석가모니의 재현으로 믿어지게 되었다. 9세기에 토착민인 아이누 족을 정복한 이후 다소 왕국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왕들은 더 많은 시간을 정치보다 오락과 학문적인 일에 쏟게 된다. 중요한 궁정 요직은 타락한 귀족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이 거의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지방에서는 무사계급인 사무라이의 힘이 새로운 실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벌써부터 영주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력을 갖추고 수도 헤이안(현재의 교토)에힘을 뻗치기 시작했다. 타이라 일족의 난으로 후지와라 가문의 힘이 약화되고 이후 다시 1185년에 미나모토 가문이 들어서게 되었다. 쇼군(군사상의 지도자)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은 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수도를 가마쿠라에 정하게 된다. 그러나 일왕은 형식상의 지배자로서 교토에 남아 있었다. 이것이 1868년 왕가가 정치적인 힘을 되찾게 되기까지 긴 세월을 거쳐 여러 사무라이 가문들이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 봉건제의 시작이 되었다.일본의 봉건시대는 크게 다섯 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1185-1333) 당시는 계속해서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몽고 군의 침략을 받았다. 몽고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약해진 지도력은 무사계급의 지지를 잃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1333-1576) 초기에는 고다이고 왕이 직접 통치하였으나 불만을 품은 무사 아시카와가 이끄는 반란에 의해 고다이고 왕은 요시노의 산중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아시카와와 그의 후손들이 지배한 시대는 점점 통치력을 상실해 가면서 일본은 내전과 혼란의 도가니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었다. 잘게 나뉘어진 일본을 평정하고 다시 통일한 것이 노부나가이며 그의 모모야마 시대(1576-1600)의 후계자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기독교인 시대(1543-1640) 동안에는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관용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주제넘게 간섭하는 위험한 종교로 여겨지면서 잔인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1600-1867)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젊은 후계자를 쳐부수고 수도를 에도(현재의 도쿄)로 천도하였다. 일왕은 계속해서 교토에 머물며 지극히 형식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으나 도쿠가와 가문은 일본을 쇄국 정책의 시대로 몰고갔다. 당시의 모든 일본인은 나라 밖으로의 여행이나 교역이 금지되고 외국인들은 엄격한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의 규율을 요구하던 이때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있다.19세기로 넘어오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침체되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외국 상선이 점점 집요하게 고립된 일본을 조사하러 오기 시작했고 기근과 가난으로 인해 정권의 지지기반도 약화되었다. 1867년쇼군 케이키가 물러나면서 메이지 일왕이 내정을 관할하는 지배권을 되찾게 되었고 이때부터 급속히 서구화와 산업화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1889년에 일본은 서양식 정체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 때의 신조는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돌아가 민족주의 의식을 싹트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자신감을 북돋게 된 결정적 사건은 청일 전쟁(1894-5)과 노일 전쟁(1904-5)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꺾으면서부터이다. 메이지 왕의 아들 요시히토의 지배하에서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 참전은 전쟁의 피해는 크게 입지 않은 채, 선적과 교역을 통해 경제를 놀랍도록 빠르게발전시키는 기회로 작용하게 되었다. 뒤 이어 히로히토가 1926년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민족주의의거센 물결은 1930년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국민들 사이의 불안은 빠르게 군국주의자들이 실권을 잡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일본은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을 맺고 미국과 중립 조약을 맺으려는 외교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곧이어 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처음에 일본은 빠른 승리를 계속하면서 인디아 너머까지 전선이 확대되고 호주 근방과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국의 역공격은 일본 해군의 우위에 종지부를 찍고 전세를 일본에 불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결국 1945년 8월, 모든 전선에서 몰리는 지경에 이르면서 소련의 참전까지 겹치게 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다.히로히토 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연합군은 일본의 무장해제와 일왕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해1952년까지 일본을 점령했다. 이후 여러 재건 정책으로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수출 경제 국가가 되었고 거대한 무역 수지를 낳으며 전기, 로봇, 컴퓨터, 자동차 산업, 그리고 금융업 같은 분야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1990년대에 들어와 낡은 확신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전설적인 일본의 경제 성장은 눈에 띄게 정체를 거듭하고 있고, 1993년에는 38년만에 처음으로 보수적인 자민당이 쏟아져 나오는 추문으로 인해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었다(그러나 몇 년 뒤 다시 여당자리를 되찾았다). 1995년 1월 거대한 지진이 고베를 강타했다. 정부의 대응은 느리고 우왕좌왕하였고 일본이 그렇게 자랑하던 만반의 지진 준비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두 달 뒤에는 세기말 최후의 날을 꿈꾸는 컬트 종교집단 옴진리교에 의해 도쿄 지하철에 독가스를 터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변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국제 시장에서나 현명한 유권자들은 한때 당연한 듯이 행해지던 정치 뇌물이나 기업과 정부의 뒷거래에 대해 이제는 엄격하게 대응하고 있다. 교착 상태의 경제나 일본 은행들의 거대한 손실, 주가 하락 그리고 지역 불안 등은 일본이라는 기업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1998년 초 일본 은행의 상황이 너무 악화되어 미국 정부에 의해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다. 일본 경제 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은 1998년 중반 여당 자민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결국 하시모토 수상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뒤를 이어 자민당 중진 케이조 오부치가 수상에 올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별로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예측하고 있다. 그는 2000년 봄에 과로로 순직했다.
출처 : Tong - justinKIM님의 | 지중해inBLUE ˚통
[출처] 일본풍경|오사카 Osaka |작성자 japanim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