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초판1쇄 발행 2014년5월19일
초판24쇄 발행 2016년6월3일
지은이 한강
펴낸곳 (주)창비
제1장 어린 새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제2장 검은 숨
이곳에 너는 없었어.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중략)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 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내 창백한 얼굴을 나는 들여다봤어. 더러운 내 손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더이상 나는 학녀에서 제일 작은 정대가 아니었어.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꿈 속으로 숨을 수 있다면.
아니, 기억으로라도.
누나한테 가자.
하지만 누나가 어디 있을까.
나를 죽인 그들에게 가자.
하지만 그들이 어디 있을까.
너에게 가자.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졌어.
한번에 수천개의 불꽃을 쏘아올리는 것 같은 폭약 소리. 먼 비명 소리. 한꺼번에 숨들이 끊어지는 소리. 놀란 혼들이 한꺼번에 몸들에서 뛰쳐나오는 기척.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는 채, 서서히 조여오는 거대한 얼음 같은 새벽빛 속에서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
3장 일곱개의 뺨
그녀는 일곱대의 뺨을 맞았다.
뺨 하나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핀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보였을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아직 어린애 같은 좁은 어깨에 총을 메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너를 발견하고 그녀는 놀라며 불렀다. 동호야, 왜 집에 안 갔어? 장전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던 청년 앞으로 그녀는 끼어들었다. 이 애는 중학생이에요. 집에 보내야 해요.
뺨 여섯
검열을 어떻게 통과할 생각이지?
......동호야.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4장 쇠와 피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 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봐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랏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5장 밤의 눈동자
달은 밤의 눈동자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달이 무섭잖아요 언니, 당신의 말에 모두 까르르 웃었다. 세상에, 너같이 겁 많은 앤 처음 본다. 누군가 말하며 복숭아 조각을 당신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떻게 달이 다 무섭다니.
6장 꽃 핀 쪽으로
가을비가 지나가서 하늘이 유난히 말간 날엔 잠바 속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무릎을 짚음으로 절름절름 천변으로 내려간다이. 코스모스가 색색깔로 피어 있는 길,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죽은 지렁이들에 쇠파리가 꾀는 길을 싸묵싸묵 걷는다이.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중략)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그들이 수유리 집에 온 것은 초여름 새벽이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 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정대. 동호. 진수. 선주누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드라마 <오월의 청춘>이 떠올랐고, 영화 <화려한 휴가>가 겹쳐졌다.
오월의 청춘에서 등장했던 중학생 정대
화려한 휴가에서 나오던 이요원이 트럭에서 방송하던 장면.
"광주 시민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 주십시오"
영화를 본 후에 방송하는 이요원의 목소리가 귀에 오래도록 남았었다.
광주5.18민주화운동.
이렇게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두환이 사망한지도 얼마 안되었으니, 그야말로 오래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올 해 광복절에 들었던 생각도 그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제 겨우 광복 72주년이라니.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지 100년도 안되었다니...
그런데도 우리와는 먼 사건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게 안타깝다. 이번 KBS 기미가요 사건을 보면 더 울화가 치민다. 일제시대를 물고 늘어지라는 것은 아니지만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이고, 같은 민족이면서 정치색때문에 국민을 탄압한 사건을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