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민특위에 스며든 부적격자들, 친일파 청산 좌절의 한 원인” |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으로 본 반민특위 사람들 |
김지형(민족21편집장) |
1949년 결성된 반민특위 구성원들의 면모가 생생히 담겨 있는 분석서가 처음으로 나왔다. 그런데 반민특위 구성원들의 적지 않은 수가 부적격자나 친일파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친일파가 친일파를 잡으려 했다?
도둑이 도둑을 잡는다? 허튼 소리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그것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이런 사례가 있었다면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반민특위라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국회 차원에서 추진된 친일파 척결을 위한 기구가 아닌가. 그렇다면 ‘친일파가 친일파를 잡으려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최근 경북대 허종(38) 박사가 펴낸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에는 반민특위 내부에 반민특위 자체를 반대한 부적격자 내지는 친일파까지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발효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묶여 법정으로 끌려갔다. 1949년 2월 끌려가는 친일파들, 앞에서 세번째가 3.1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 2장과 3장에 따르면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하는 조사위원의 자격은 ‘국회의원 가운데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지키고 애국의 성심을 가진 자,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 들로 돼있다.
그런데 이 책은 반민특위 구성원의 적지 않은 수가 오히려 그 정반대인 ‘친일파’들로 구성돼 있음을 밝혀 냈다. 이런 내부 여건이 친일파 척결 실패를 낳은 한 요인이 된 셈이다.
‘자격 조건’ 갖춘 조사위원 2명뿐?
반민특위 중앙조사위원 11명 가운데 김상덕 위원장 등 절반 가량인 6명은 일제시기 독립운동 경력자였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일제시기 관료 출신 및 친일단체 활동 인물도 있었다.
부위원장 김상돈의 경우 일제시기 약 10년간 정회(町會) 총대(總代)로서 일제 행정의 하부 보좌기관장으로 일했다. 충북 책임자였던 박우경은 군농회와 축산조합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김준연은 일제시기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일제말 ‘황국신민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화숙 출신이다. 그는 한민당 부당수 겸 선전부장으로서 반민법 제정에 소극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반민법 초안대로 시행될 경우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적을 이롭게 할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적용 범위를 대폭 완화하고 처벌도 관대히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반민특위의 성공여부를 좌우하는 요소가 바로 조사위원들이라는 점에서 ‘부적절한’ 인물들의 존재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허종 박사는 조사위원들 가운데 김상덕, 김명동 등 정도만이 반민법에서 규정한 자격조건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의 구성원들 역시 독립운동 경력자와 친일 경력자들이 혼재돼 있다. 중앙사무국 직원 37명 가운데 독립운동 경력자는 강명규, 서상렬 등 5명이다. 그러나 몇몇은 일제시기 행적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제1조사부 조사관 하만복은 부산 사상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한 자본가이자 지주였다. 2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로 구성된 경남지주봉공회 위원으로 활동한 친일 경력 소유자라는 점에서 조사관으로는 부적격자라는 지적이다.
반민특위는 조사위원과 조사관, 특별검찰부의 특별검찰관 등의 신변을 보호하고 반민 피의자의 체포를 담당하기 위해 특경대(사법경찰관리)를 두었다. 즉 반민특위의 무장력은 곧 특경대라고 할 수 있다.
특경대의 대장은 오세륜, 부대장은 이병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세륜 대장이 일제시기 경찰 출신이라는 점이다. 오세륜은 당시 경찰로서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의 추천으로 특경대장이 되었다. 이후 일제시기 경찰 경력이 들통나 해임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인 활동은 없었다고 한다.
반면 이병창 부대장은 임정 독립군 파견대 출신이며 1946년 4월 조직된 우익 청년단체인 광복청년회 특무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중앙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활동했다. 중앙사무국의 인력으로는 친일파의 실태 파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지방의 조사부를 신설했다. 도 조사부 책임자, 조사관, 서기는 각각 도지사, 국장, 주사와 같은 대우와 보수를 받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한 지위였다.
100명이 훨씬 넘는 각 도 반민특위 구성원들 가운데 일제시기 독립운동 경력자는 김철호, 권계환, 이해명 등 11명으로 확인된다.
▲ 1948년 10월 전남 광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에 설치한 투서함에 투서하는 모습.
그러나 일제 협력자들도 있었다. 충북 조사관 신정호는 만주국 관리 출신이다. 친일단체인 만주 공주령 조선인청년회 간부와 협화회 선계청년단 조직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전남 조사관 신용근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전남도청 관리를 지냈다. 황해·제주 조사관 강성모 역시 제주도에서 면서기를 지내고 시귀포면 의회 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다.
이런 사실은 반민법 조사관 자격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설사 친일 행위가 경미했다고 하더라도 친일파 처벌을 목적으로 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는 부적당했으며 반민특위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훼손했다는 지적이다.
특별재판관, 일제 판사 변호사 출신
반민특위 중앙 조사위원들과 지방 조사관들이 친일 혐의자를 샅샅이 가려내면 특경대 등이 체포하였으며 이들을 특별검찰부에 넘겼다. 그후 특별재판부의 재판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특별검찰부를 이끌었던 특별검찰관은 국회의원 5명, 법조계 2명, 일반사회분야 2명으로 배분되었다. 특별검찰관장은 당시 검찰총장인 권승렬이 선출되었으며 검찰차장은 검찰관 후보였던 국회의원들 가운데 최다 득표자인 노일환이 맡았다.
중간에 사퇴한 사람을 포함하여 특별검찰관을 역임했던 14명 가운데 일제시기 독립운동 경력자는 곽상훈, 서성달, 심상준, 신현상, 정광호 등 5명일뿐 나머지 특별검찰관들의 뚜렷한 경력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에는 일제시기 판사, 법원 관리, 도청 관리를 지낸 인물도 있었다. 김익진은 7년 동안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낸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종성도 법원 관리를 하다가 변호사를 지냈으며 조병한 역시 도청 관리를 지낸 경력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특별검찰관으로는 부적당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한민당 등 우익정당과 독촉국민회 등 우익단체 소속이지만 이의식과 서용길 등은 중간파 계열로 분류된다.
이의식은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녕의 아들로서 한독당과 민주독립당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서용길은 한민당의 극우노선에 반발해 탈당, 민중동맹과 민족공화당(김약수 계열)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따라서 특별검찰관들 내부에서 친일파 처벌에 관한 입장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노일환 특검차장은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파 처벌에 앞장섰다.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들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노 의원은 이후인 1949년 6월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또 김웅진, 서용길 의원 등도 친일파 청산을 강력히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곽상훈 서성달 의원 등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처벌의 완화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검찰부의 설립 자체를 반대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당면의 시급한 과제는 친일파의 처벌이 아니라 정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와 같은 부절절한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특별재판관을 거쳐간 사람들은 모두 22명이다.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 경력자는 신간회 집행위원장을 지낸 김병로, 신간회 출신 김장렬과 중국에서 활동한 신현기, 고평 등이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일제시기 변호사와 판사를 지냈다. 서순영 등 8명은 일제가 실시한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이나 변호사 시험을 통과해 변호사로 생활했으며 김찬영은 일제 초기에 판사를 지냈다.
특별재판관 중에서도 친일파는 있었다. 김찬영은 친일단체인 유민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노진설은 시국대응전선사사상보국연맹의 본부간사 출신이다.
특히 이춘호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민족자결의 미망(迷妄)을 청산하고 내선일체의 사명을 구현하겠다’는 전향서를 발표하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낸 자였다. 최국현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후생부장을 지냈고, 정홍거는 친일화가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구성된 후계회 회원이었다.
이처럼 특별재판관 가운데 독립운동 경력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오히려 친일파로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친일파를 심판하는 특별재판관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사사건건 ‘반민특위 활동의 위법성’과 ‘반민법의 완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특별재판부 설치를 반대했던 인물들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는 자기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구성원 대다수 우익 정당 단체 소속
▲ 반민특위 기슴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때의 모습이다.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의 성공 열쇠는 반민특위 구성원들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허종 박사는 친일 경력 등으로 얼룩진 자들이 반민특위 내에 적지 않았음을 밝혔다.
후임 특위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인의 경우, 법무부장관 재직 중에 이미 친일파 처벌에 반대했으며 부위원장 송필만은 처음에 조사위원으로 추천되었을 당시 반민법의 약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부결된 자였다. 이들이 특위 핵심 간부가 된 이상 향후 반민특위 활동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인은 특위 해체를 골자로 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말았다.
결국 제헌의회가 주도한 친일파 처단의 실패는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의 방해 책동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반민특위 내부 구성원들의 자격 결함이 스스로의 권위와 도덕성을 훼손시켜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의 공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살펴본 것처럼 조사위원, 조사관,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 특경대에 이르기까지 반민특위 내부 곳곳에 친일파를 비롯한 ‘부적격자’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실패하게 된 데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허 박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미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모든 분야를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제헌국회 소장파들이 반민특위를 만들기는 했지만 반민특위에서 활동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친일파들로부터 견제를 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심지어는 친일파까지 반민특위 구성원으로 가세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조건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반민특위 구성원의 대다수가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 정당이나 독립촉성국민회의 등 우익 정치단체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얘기였다. 반민특위라는 그릇은 훌륭했으나 그 그릇에 담을 음식 재료들의 일부는 이미 썩어 있었던 것이다.
책 소개|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허종, 선인)은 몇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우선 그간의 반민특위 연구를 집대성한 종합판 격이라는 점이다. 해방후 각 정치세력의 친일파에 대한 인식, 반민특위의 구성과 활동과정을 소상히 담았기 때문이다. A5 판형 434쪽에 200자 원고지 20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2002년 2월, 경북대 사학과)으로서 각종 자료에 기초해 반민특위를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특히 생존해 있는 반민특위 관련자들에 대한 꼼꼼한 증언도 이 책의 큰 자산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사 연구서가 대개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무수한 이름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들이 표로써 깔끔히 정리돼 있는 점이 특징이다.
책의 말미에 첨부돼 있는 〈별표1〉도 흥미롭다. 반민특위에 의해 취급된 친일파 혐의자 653명의 명단과 심사 결과를 정리한 표이다. ‘처리내용’난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관이다. 상당수가 기소유예, 기소중지, 무혐의, 무죄 등이다. 또 이 표에는 특이한 항목이 하나 있다. ‘1950년 이후 경력’난이다.
저자는 왜 이런 난을 마련했을까. 이 항목의 내용만을 쭉 일람하면 저자의 의도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친일 혐의자 653명의 상당수가 반민특위라는 ‘고비’를 넘어 이후 정치인, 관료, 군경, 사업가, 지식인, 문화인 등으로 활동했다는 명백한 증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반민특위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분석, 정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반민특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신상을 자세히 드러내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같은 반민특위 구성원의 실태와 성격을 통해 저자는 반민특위 활동이 좌절되는 하나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반민특위의 실패가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의 방해와 억압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반민특위 구성원 내부의 문제점 또한 적지 않았다는 예리한 지적이다. |
반민특위 출범부터 소멸까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헌 국회는 1948년 9월 7일, 전문 3장 32조로 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고, 9월 22일 정부가 이를 공포하였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박흥식을 제1호로 체포하며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민특위는 이후 1년 동안에 걸쳐 전국민적 기대 속에 총 682건의 사건을 취급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던 친일파들과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승만은 3권 분립에 어긋난다며 반민법의 공포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거듭 담화를 발표하여 반민특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지지를 배경으로 경찰은 반민특위 관련자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을 기도했고,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를 습격하기까지 했다.
이후 공소시효기간을 1년 1개월이나 단축한 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특위활동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이 자리를 메꾸어 반민특위의 활동은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682건의 사건 중 체형판결이 내려진 것은 12건에 불과했으며, 그 중 5건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고, 실형으로 복역한 사람들도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기간 동안 모두 석방되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