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좀 열려 있나? 정원 쪽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싸늘한
바람이 내 볼에 와닿는다. 눈꺼풀 위로 비치는 희미한 아침햇살. 고요한,
동시에 은은한 빛깔마저 감도는 주변 색채.
아침은 그렇게 살짝 나를 찾아왔다.
아침, 인가. 어젯밤에 아키하가 내 병간호를 하고 있는 동안 잠이 들었다
가 그대로 아침까지 자버린 듯 하다. 몸은 침대 위에 가로누워 있었고 몸
여기저기가 미묘하게 무겁다. 그래도 어젯밤보다는 확실히 회복되어 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 -
"아, 너 이자식 이제야 일어났겠다?"
- 눈 앞에 알퀘이드의 얼굴이 보인다.
" - !?"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렸고 덩달아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입은 벙긋벙긋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만 뱉
어내고 있다. 정말로 -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내
눈 앞에 알퀘이드가 있고 여기는 내가 쓰는 방이며 시각은 이제 막 아침 아
홉시 정도를 지나고 있고, 거기에 알퀘이드가 신발을 신은 채로 침대 위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 정도 밖에 머리 속에 들어와 있지 않다.
"너, 너, 너, 너"
"거짓말쟁이. 내일 또 보자고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어지간히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것일까, 알퀘이드의 붉은 눈동자는 여느 때
의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아니다.
아니 - 꼭 그렇지만도 않을라나. 이렇게 가까이서 알퀘이드의 눈동자를 바
라보고 있노라니 오히려 평상시보다 선명하게, 아름답게 느껴진다. 알퀘이
드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 - 자, 잠깐 알퀘이드. 어째서, 어째서 네가 아침부터 남의 방에 있는 거
야......!"
나는 최대한도로 작은 목소리로 알퀘이드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런 상
황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질러버려 혹시나 히스이가 방에라도 들어오게 되면
그걸로 모든 것은 디 엔드다. 상황은 아직 혼돈 속에 빠져있었지만 그 정도
의 이성쯤은 차릴만큼 차리고 있다.
"어, 어쨌든 저리로 좀 가봐...! 남의 방에 아무렇게나 들어와서 자는 사람
깜짝 놀라게 하면 그게 얼마나 왕재수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태도가 그게 뭐야. 내가 이런 곳까지 온 이유가 다 시키가 약속을 깨버렸
기 때문인 거 아냐. 남은 밖에서 쭉 기다리게만 하고 자기는 방 안에서 쿨
쿨 잠들어 있으면, 그게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야?"
알퀘이드는 정말로 기분 나쁘다는 듯 날 째려본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에 잠긴다. 아, 그런가. 어젯밤에 알퀘이드랑 만나기로 했던 약
속을 내가 깨버렸었던가.
" - 우움"
이제야 겨우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된다. 동시에 알퀘이드가 왜
이리 화를 내고 있는지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 남이 쓰는
방에 신발 신고 함부로 막 들어오다니, 대체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있는 거
야 알퀘이드 이자식은. 창문이 빼꼼히 열려져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거기
로 몰래 숨어들어온 모양이군.
"...그래, 약속을 깬 건 나니까 그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미안하게 됐어. 하
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에 허락없이 침입해 버리는 건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
안 드냐?"
"여기, 시키네 집이잖아."
알퀘이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한다.
"그리고 나, 사실은 훨씬 더 많이 화나있어.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다 기다
리고 있다가 약속이 파토난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내가 머리 꼭대기까지 화
가 났었는지 알아? 진짜, 절대로 이대로는 못 끝내 하면서 시키 방까지 가
서 시키 목덜미를 아주 갈기갈기 찢어발기려고까지 했었어."
알퀘이드는 나를 노려본 채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키, 잘 들어? 나 그런 거 절대로 못 참아. 스스로도 침착해지자 침착해
지자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돼서 미
쳐버릴 것 같아지니까."
아직도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퀘이드의 붉은 눈동자엔 나에 대한 비난의 물
결이 비치고 있다.
"아아 - 확실히 그거, 못 참을만도 할 것 같은데."
내 목이 아직 무사하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그렇
게 맞장구를 친다.
"그치? 그래서 몰래 여기까지 숨어들어왔었는데 시키 자고 있으니까 좀 더
있어볼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무슨 변명을 하나 일단 들어나 보고 싶었
으니까. 그래, 할 일도 없고 해서 시키 자는 모습이나 좀 보고 있었어...
응, 시키 자는 모습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 보였어. 죽은 듯이 잠들
어 있어서, 이젠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 할 정도로 말
야."
"...하아. 불안했으면 그냥 깨워버리면 좋았잖아. 난 너 밑에 깔려있는게
더 불안하단 말야."
"그치만 자는 애 깨우는 것도 왠지 좀 그래서...내가 어떤 모습으로 자고있
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키 같은 모습으로 잠잘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했었어. 시키는 어째서 이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잠잘 수 있는 걸까 하
고 아까부터 쭉 생각하면서 시키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어. 그랬더니 말야,
아까첨에 그렇게까지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도 점점 사그라들더니 조금 있
다가 시키가 눈을 뜨더라구."
"...너, 그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응. 중간에 몇 번인가 이 집 사람들이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안 들키게 조
심했으니까 괜찮아. 아까도 시키 깨우러 어떤 여자가 방까지 찾아왔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쫓아보내 버렸어."
알퀘이드는 아주 기분 좋다는 듯 깔깔대며 웃어댄다.
"어이, 쫓아보내 버리다니...대체 뭘 - "
"심하게는 대하지 않았어. 봐봐, 전에 흡혈귀한테 매료의 마안이란게 있다
고 말한 적 있었지? 그 여자한테는 [시키는 벌써 학교에 갔다]라고 암시를
줘서 돌려보냈으니까 내 기억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을 거야."
"기억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니...너..."
거참, 정말 민폐덩어리 아냐? 뭐...그래도 알퀘이드는 자기 나름대로 우리
집 가정환경을 생각해서 그렇게 해준 모양이긴 하지만.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어젯밤엔 정말 미안했어, 알퀘이드. 변명 같이 들릴지는 잘 모르
겠지만 나 두 번 다시 너랑 한 약속 안 깨도록 할게. 응, 약속해."
알퀘이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단언한다.
"반성하고 있어?"
"응, 반성 중이야...약속 깨면 나중에 어떤 무서운 보복이 나한테 돌아올지
이제 확실히 알았어."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두 손을 들어올려 항복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나.
그러자 조금 전까지의 기분 나쁘다는 듯한 기색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퀘이
드는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서야 겨우 알퀘이드는 침대에서 몸을 내린다.
"...거참, 남의 침대 위에 함부로 막 올라오기나 하고. 시트에 발도장 찍히
면 나중에 세탁할 때 얼마나 힘든지 생각이나 해봤냐?"
투덜투덜 불만을 쏟아내면서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알퀘이드는 방 한
가운데 부근에서 느릿느릿 침대를 빠져나오는 날 바라보고 있다.
"...근데...너, 거기서 뭐하냐?"
"뭐하긴, 시키가 옷 갈아입는 거 기다리고 있잖아. 설마 그런 차림으로 밖
에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 당연히 잠옷입은 채로 외출할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 어라, 알퀘이
드?"
"응. 오늘은 하루 종일 시키랑 같이 행동하려고 해. 약속 어긴 대신에 그
정도 쯤은 해줄 수 있지?"
알퀘이드는 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오늘 하루종일이라니 -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학교도 가야 - "
"뭐야. 반성하는 중이라고 말했으면서 나 팽개쳐두고 학교나 가겠다는 거야
시키?"
" - 윽"
아픈 데를 찌르다니. 난 -
<1. ...할 수 없지, 알퀘이드가 하자는 대로 하지 뭐 - 선택>
" - "
흘끔 시계 쪽을 본다. 시각은 오전 9시를 이미 훌쩍 넘겨버린 뒤다. 이제와
서 학교에 간다 하더라도 이미 지각일테고 - 솔직히 말해 학교에 가는 것보
다 알퀘이드랑 함께 다니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고......
"알았어. 오늘 하루 동안은 너랑 같이 다녀줄게. 근데 해 떠있는 시간에 거
리에 나가봤자, 사자들 어슬렁거리고 있을리도 없고 뭐 그런 거 아냐?"
"그런게 무슨 상관이야. 거리를 산책하는 정도라면 낮이라고 무슨 상관있겠
어?"
"......? 뭐야, 어젯밤에 흡혈귀 찾으려다 못한 거, 지금부터 하려던게 아
니었어?"
"응. 물론 밤이 되면 거리를 또 찾아봐야지. 하지만 하루 종일 시키한테 거
들어달라고만 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적어도 낮 시간 정도 쯤은 좀 쉬러 돌
아다녀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야 뭐, 나도 그러는게 편하고 좋긴 한데. 하지만 단 둘이서 거리를 돌아
다니...그거 설마..."
속칭, 일반적으로는 데이트였던가 하는 그런 거 아냐?...흡혈귀인 알퀘이드
한테 그런 생각이 있을리 없으니, 아마 '나 데리고 어디 놀러 좀 데리고
가'라는 의미로 말한 거겠지만...나로서는 그러니까 - 좀 마음에 준비란 것
도 좀 필요하고 그리고...
"......? 왜 그래 시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졌어?"
" - 우으"
재빨리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알퀘이드에게서 시선을 피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알퀘이드랑은 지금까지 몇 번 씩이나 단 둘이 있어보고 그랬었다. 하
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긴급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였고 남자와 여자이
기 이전에 서로 협력하는 관계인, 그런 사이였었다. 때문에 - 알퀘이드를
속으로는 예쁘다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도 그걸 머리로 의식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아무런 위험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알퀘이드와 둘만이서 함
께 있게 된다면 알아서는 안 될 것에 눈을 뜨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왠
지 망설여지는 -
"시키? 시키, 그냥 학교 갈래...?"
"...학교를 왜 간다고 그래. OK 했으니까 오늘은 너랑 같이 지낼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몰라도, 거리 산책 정도라면 별 문제는 없을테
니까."
"좋아. 그럼 빨리 나가자."
알퀘이드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 통해왔을 빼꼼히 열려진 창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옷 갈아입을게, 거기서 밖에나 좀 보고 있어."
"응? 나 불렀어?"
"아앗, 불렀지만 안 불렀어! 됐으니까 그냥 밖에나 나가있어. 금방 갈게."
"응,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지금까지 진짜 진짜 오래 기다렸으니까
더 이상 나 기다리게 하지마, 시키."
알퀘이드는 마치 고양이 같은 날렵한 몸동작으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
다. 정원의 나무가 하나 둘 휘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알퀘이드는 정원의 지
면을 밟지 않고 정원 나뭇가지를 발판으로 삼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저런 몸놀림이라면 내 방에 아무도 몰래 숨어들어오기는 누워서 떡먹
기나 마찬가지겠구만.
"...감탄하고 있을 때냐, 지금...나도 히스이한테 안 들키게 빨리 밖으로
나가야지."
잠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후 방문을 조금 열고 복도
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 빠른 발걸음으로 뒷문을 통해 저택을
나섰다. 다행히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
퀘이드는 나를 등진 채, 뭐라고 뭐라고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기다렸지? 자, 그럼 일단 가보자구 알퀘이드. 계속 이렇게 저택 근처에만
서 있으면 코하쿠 씨한테 들킨단 말야."
"에? 아, 응...그럼 빨리 가지 뭐."
방금 전까지의 그 딱부러진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알퀘이드의 대답에선 어
딘가 우물쭈물한 듯한 느낌이 든다.
"왜 그래, 너 답지 않잖아. 나 기다리는 동안에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아무 것도 아니야..."
'또' 부분에 액센트를 실어 알퀘이드에게 말을 걸었지만 알퀘이드의 대답은
이번에도 어딘가 좀 우물우물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왠지 -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설마, 낮이라 몸에 좀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야? 그다지 무리해 가면
서까지 외출할 필요는 없으니까 힘들면 그만두자."
"으응~~몸 상태는 괜찮은 편인데...잠깐 이 집 담장을 보고 있으려니 어젯
밤 일이 떠올라서 말야."
"......어젯밤 일? 공원에서 계속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 말야?"
알퀘이드는 알듯 모를듯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 어젯밤에는 여기 이 담장을 전력으로 뛰어넘어서는 그대로 시키네 방
까지 숨어들어갔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니 어딘지 좀 이상한데 싶어서 말
야. 나 왜, 어째서 어젯밤에 그렇게까지 화 나 있었던 거지? 그깟 약속 한
두 가지 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안 지킨 적도 많았는데 말야."
알퀘이드는 팔짱을 끼고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아, 그래! 시키 너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맨날 나보고 바보바보 바보소
리만 그렇게 해댔으니까 시키 너라면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겠지?"
"야......"
알퀘이드 본인이 모르는 걸 타인인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런 걸 알 리는 없
지만 뭐, 굳이 대답해 보자면 -
<2. 그야 네가 날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 선택>
"...그건 네가 날 싫어해서 그런게 아닐까? 약속시간도 제대로 지키지도 않
고, 예전에 한 번 너한테 심한 짓도 한 적 있었잖아."
...내가 알퀘이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일단 한쪽에 고이 모셔두고
냉철하게 그 원인을 분석해 본다.
" - 정말 그런 걸까? 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가져본게 이번이 처음이
라 잘은 모르겠지만..."
라며 알퀘이드는 잠깐 말없이 가만히 서있나 싶더니 잠시 후 고개를 들더니
"...저기, 시키는 나 싫어......?"
라고, 물어본다.
"나, 나......? 난, 그러니까 - "
"..............."
알퀘이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얼굴만 바라본다.
"난 - 싫어하지 않으니까, 알퀘이드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어쨌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구나. 그럼 나도 시키랑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겠네."
납득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알퀘이드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의문은 풀리셨습니까? 그럼 어서 출발해 보실......근데, 알퀘이드. 너 어
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우웅, 잘 모르겠으니까 시키 가자는 데로 갈게. 어디 괜찮은 데 좀 없을
까?"
...자기가 먼저 산책하자느니 어쩌느니 말해놓고선...뭐, 어쩔 수 없지 -
나도 알퀘이드가 즐거워 할만한 데가 어딘지 딱히 짐작되는 곳은 없긴 하지
만, 어쨌든 둘이서 같이 놀만한 곳에 데리고 가볼까.
자아, 그럼 -
<1. 정식 코스다. 영화관에 데려가야지 - 선택>
---------------------------------------------
--------------------------------------
우선 정식 코스랄까 안전빵이랄까, 가만히 보면서 앉아 있으면 적어도 심심
할 일은 없을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 근처는 언제나 사람이 많네?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퀘이드는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있다.
" - "
여기까지 오는 도중 - 이랄까,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우리쪽으로 향해온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알퀘이드가 그리 쉽게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미인이기 때문
일 것이다. 나도 조금은 그런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긴 하지만 주위의 그런
반응이 나로 하여금 쓸데없이 알퀘이드를 의식하게 해버려 난처하다.
알퀘이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태도변화 없이 날 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나 혼자서만 알퀘이드를 한 사람의 여자로서 느끼고 있는 탓에 아까
부터 계속 핀트에 안 맞는 엇갈린 소리만 하고 있다.
"듣는 거야, 시키? 이제 우리 어디로 갈 건지 물어보고 있잖아."
"아 - 저기, 이게 저 그러니까, 이런 데에 온 커플들은 대부분 영화관으로
들어가."
손가락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영화관을 가리킨다.
"영화관...흐응~~영화 보잔 말이지?"
...공주님께서는 영 마음이 내키시지 않는 눈치시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여자 흡혈귀 어딜
좋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불평 한 마디 들을
각오 정도는 해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마음에 안 들면 여기서 따로따로 다니면 되는 거지
뭐."
"뭐, 불만 같은 건 없긴 하지만..."
알퀘이드는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쉬고는 내 뒤를 따라온다. 힘없이 축 처
진 알퀘이드의 두 어깨가 나를 [능력없는 놈]이라고 탓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내내 뒤통수가 따갑기만 하다.
"그럼 표 사올게, 뭐 볼래? 어디보자...지금 하고 있는게 연애물이랑 연애
물이랑 연애물인데......뭐야 이 영화관..."
나까지 다른 데 가고 싶어졌다.
"아무거나 보자. 다 똑같은 내용 같으니까."
"그래. 그럼 대충 골라볼까?"
사람들이 얼마 줄서지 않은 곳에 서서 영화표 두 장을 샀다.
"받아. 그 표를 영화관 안에 들어갈 때 보여주면 돼. 들어갈 때 영화표 반
을 찢을텐데 원래 그렇게 하는 거니까 거기서 또 화내고 그러지마."
"그 정도 쯤은 나도 다 알아. 시키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여자인
줄 아는 거야?"
"아......아니, 그냥 뭐...인간사회에 대한 지식이 얼마 없지 않은 건 아닐
까 해서..."
"그런 지식 쯤 다 알고 있다고 전에 안 말했던가? 나, 영화관이 뭔지 정도
는 안다구."
알퀘이드는 고개를 홱 하고 돌리더니 영화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실패야...역시 흡혈귀들은 영화관 같은데 가도 영 재미없다고 생각하
는 모양이다.
- 영화관을 나섰다. 알퀘이드랑 둘이서 본 영화는 연애물로, 보다가 졸 정
도로 지겨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것
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프랑스 영화였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는 그
런 장면들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쪽에 중점을 두고 만든 작품이었
다.
영화관을 나선 후 알퀘이드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걷고만 있다.
"........."
...어색한 침묵. 액션물이나 호러물 같은 거라도 봤더라면 그래도 얼마만큼
은 알퀘이드도 신나했을지도...
"저기, 알퀘이드"
"응, 정말 재밌었어 시키!"
에, 에에에에에에에......!?
"응? 재미있었다니, 알퀘이드?"
"정말이지 듣는 거랑 보는 거랑 이렇게 다를 줄은~~영화관이 어떤 데인지는
지식으로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거 다 쓸데없는 망상일 뿐이었어."
...알퀘이드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다.
"일단 주변이 어둡다는 게 참 좋았어. 막 큰 소리가 들리고 그러는데 전혀
시끄럽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시키가 옆에 앉아있다는 것도 즐거웠어. 그치
만 그런 것들보다 내용이 정말 재밌었어! 참 뭐랄까, 지어낸 이야기를 그런
수준으로까지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니까? 영화속의
섬세한 배경에 비하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 같은 건 정말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었고, 어쨌든 정말로 깜짝 놀라버렸어."
"......아, 그, 그러세요...?"
"어머? 시키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재미없었던 거야?"
"아니, 재미없다기 보다는 그...좀 평범해서 말야. 그것말고 더 재미있는
영화도 있으니까."
"거짓말. 아까 우리 본 영화, 얼마나 재밌었는데!?"
"뭐...일반적으로는 아까 본 영화 같은게 괜찮다 어떻다 그래도 그냥 단순
하게 더 재미있는 영화들도 얼마나 많은데. 지금은 시즌이 지나서 상영하진
않고 있지만 대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은 아까 그 영화보다 몇 배는 더 재미
있다구. 솔직히 말해서, 순위를 매긴다면 아까 본 건 중하 랭크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였어."
"......깜짝"
"......참 감정표현도 보는 사람 알기 쉽게 하는구나, 알퀘이드."
놀랐다기 보다는...어처구니 없다는 느낌일까.
알퀘이드 이자식...보기 전까지만 해도 막 화난 것같이 쌀쌀맞게 굴고 그래
서 나중에 꼭 뭐라고 뭐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만 겨우 이 정
도 밖에 안 되는 영화에 애들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기나 하고.
"...아쉬운걸?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말 괜찮은 영화 하나 하고 있었는
데.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려오는 건데."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알퀘이드를 즐
겁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그래...타이밍이 안 좋았구나, 나랑 시키."
실망이 큰 듯 알퀘이드의 두 어깨가 축 처진다.
"정말이네, 왠지 자꾸 헛방만 치는 것 같아."
실망이 큰 듯, 내 어깨도 힘없이 축 처진다.
...응, 정말이지...알퀘이드가 즐거운 듯 웃음짓는 모습을 조금만 더 보고
싶었는데.
오후 2시가 좀 넘어 슬슬 고파지는 배를 채우려 적당한 패스트푸드 점을 찾
아 들어갔다. 알퀘이드가 이런 종류의 음식물을 먹을 수 있을지 어떤지는
의문이었지만 알퀘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한참 노려보더니 결국
엔 내가 고른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
자리에 앉아 알퀘이드를 마주대한다. 알퀘이드는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살
피더니만 익숙한 손놀림으로 프라이드 포테토를 입으로 가져간다.
"...헤에~~제법 잘하는데? 난 또 너, 이런데 처음 오는 건 줄 알았지."
"응, 이런데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전부터 뭐하는 곳인지는 알고 있었지
만 그런 어디까지나 지식으로서 알고 있었던 거였으니까."
"지식으로서라...아, 뉴스를 본다는 소리는 잡지 같은 것도 보고 있다는 소
린가."
"우웅~~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 걸맞는 상식 정도는 필요
하잖아? 그래서 일어날 때에는 그 시대의 정보를 머리 속에 떠올려 가며 행
동해. 뭐, 보통은 하루 이틀이면 승부가 나버리니까 결국 쓸데없는 짓이 되
어버리지만."
"......?"
알퀘이드는 가끔, 이렇게 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한다.
"흐응~~쓸데없는 짓이라니, 어째서?"
"그야 금방 잠들어버리니까지. 다음에 언제 눈을 뜨게 될지 나로서도 알 수
가 없으니까 기껏 배워둔 지식을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어. 볼일이 끝나면
바로 잠들어버리는걸...응, 하지만 그거, 왠지 손해 본 듯한 느낌이야. 나,
지금까지 세계를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했어. 이렇게 인간들이 모이는 장소
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도 그걸 경험하지 않았던 거야."
"그렇구나...하지만 알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냐? 방금 전에도 전에도
시켜본 적 있는 것처럼 메뉴를 보고 주문하고 그랬었잖아."
"그야 당연하지. 그런 식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식을 습득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지식은 겨우 거기서 머무를 뿐이야. 경험이란 이론을 능가하니
까. 몇 억 개나 되는 단어를 알고 있다한들 실제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 것
도 손에 넣을 수가 없잖아."
알퀘이드는 하아 하고 은근한 한숨을 내쉰다.
"그런 걸까나......이론은 경험을 보충한다 라든지, 그런 반대개념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이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아...얼마 전까지의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지만."
알퀘이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뚜렷한 이유도 없으면서 자꾸만 어두
워져 가는 그런 알퀘이드의 얼굴을 보는 건 싫다.
"과연 그럴까? 난 그냥 이론만으로 경험을 보충할 수 있는 사람과 경험으로
이론을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가지 사
람들이 있으니까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와아앗, 시키가 진지한 이야기를 했어!"
"이보쇼, 알퀘이드 씨. 댁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시니까 나도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말 좀 중간에 끊지 마시게."
모처럼 네가 자기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응, 나 다 알아. 시키,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고 싶을 때 나하고 같이
있어준다는 거 말야. 평소에는 나한테 막 소리나 지르고 그래도 좀 심각해
지겠다 싶을 땐 이렇게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잖아."
알퀘이드는 밝은 표정으로 소리내어 웃는다.
...흥.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마 알퀘이드 제멋대로의 착각일테지만...역시 알퀘
이드한테는 이런 순수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방금 시키가 했던 말, 가만히 생각해봤어. 나 정말 좁게만 생각했
어. 스스로가 이렇게 하자! 하고 결정해 버리면 나,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돼. 나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없어, 내 생각만 옳은
생각이야 라는 식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그래 - 수많은 생각들이 있
기에 내가 못하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는 엄청나게 많이 있는 거야."
알퀘이드는 왠지 차분해진 어조로 자신을 반성한다.
"아, 그치만 아무리 반성하고 그래도 내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긴 하지만
말야. 나, 지금의 나를 제일 좋아하는데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옳은 생각이
라고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알퀘이드는 미소지은 얼굴로 시원스럽게 말을 한다 싶더니 또 주변을 두리
번 두리번거리며 바라본 뒤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문다.
한 입, 두 입.
흡혈귀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정크 푸드를 먹어치워가는 알
퀘이드.
"........."
어째서일까.
햄버거를 먹는, 아무리 미화시켜 생각해 봐도 결코 우아하게는 보이지 않는
행위를 알퀘이드가 하니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왜그래......?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기만 하고. 아, 설마 이거 이렇게 먹
는 거 아니었어......!?"
서둘러 햄버거를 쟁반 위에 되돌려놓는 알퀘이드. 종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는 알퀘이드였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가 뭐라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먹는 거 맞아. 그렇긴 하지만...네가 그렇게 먹으니 어딘
가 좀 이상해. 안 어울리니까 먹지마."
햄버거를 햄버거 답게 한 입 베어물면서, 스스로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
지 알 수 없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어울리다니, 대체 무슨 의민데?"
"이미지 상의 문제야. 너처럼 입이 작은 녀석한테 패스트푸드는 하나도 안
어울려. 얌전히 앉아서 감자나 집어먹는 건 별 문제 없으니까 내 것까지 다
먹어."
알퀘이드 쪽 쟁반 위에 내 프라이드포테토를 얹어놓는다.
...나 스스로도 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됐어. 그런 것만 먹고 있으면 뭘 먹는다는 기분이 안 든단 말야."
알퀘이드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햄버거에 입을 갖다댄다. 이번엔 내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아까보다는 평범한, 뭐 이 정도라면 참아낼 수 있는 범위다.
...그건 그렇고, 햄버거를 먹는 흡혈귀라...무엇인가를 먹어 활동하는데 필
요한 영양분을 얻지 못하면 생물은 살아갈 수가 없다. 예전에 알퀘이드는
피를 빨지 않는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알퀘이드의 영양원은 우리
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평범한 식사인 건가...?
"...저기, 알퀘이드."
"뭐야, 심술쟁이 씨."
"아니, 이제 뭐라고 안 그런다니까.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말해도 돼?"
"응 - 뭔데?"
"저기 말야, 너 흡혈귀지? 그럼 제대로 식사한다고 할 수 있는 음식물은 혈
액 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알퀘이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역시 너무 실례되는 질문이
었던 모양이군. 알퀘이드 표정도 순식간에 딱딱해지지......않네.
"저기 말야, 시키. 기본적으로 난 식사를 안 해. 확실히 이렇게 뭔가를 먹
고 있으면 자신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분 상의
문제야. 난 식사를 하는, 다시말해 영양분을 보충하는 방법이 시키랑은 달
라. 식욕이야 있기는 하지만 그건 성욕이랑 비슷해. 먹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지만 난 그다지 식사 자체를 중요시하고 있지 않으니가 반전충동에 휩
싸이는 일도 거의 없지."
너무도 간단하게, 알퀘이드는 혈액식사설을 부정했다.
아아, 결국엔 이런 소리로군. 알퀘이드는 정말로 피를 안 마셔도 괜찮은 모
양이다.
"그래 - "
다행이야. 알퀘이드가 식사를 하기 위해 인간을 죽이거나 하는 그런 녀석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야. 아씨, 알퀘이드도 처음부터 [난 피를 빨지 않는
흡혈귀야"라고 말해줬었더라면 나도 처음부터 순순히 알퀘이드한테 협력했
을텐......데......
"......어이, 잠깐! 너 그럼 흡혈귀가 아니잖아!"
"흡혈귀야. 시키도 하루 종일 굶고만 있으면 배고파서 못 견디게 되지? 신
소인 흡혈종 - 내 경우에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최상급의 음식물이
혈액이야. 그래서 [활동한다], [욕구를 충족시킨다]라는 행위를 위해서라면
이런 것들로 대용품을 삼을 수 있단 소리지. 하지만 이 문제가 시토 - 인간
에서 흡혈종이 된 흡혈귀에 이르면 문제가 달라져. 그들은 자기 자신이 존
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의 혈액이 필요하니까 말야."
"......? 아, 에, 음, 그러니까 너한테 있어서 공복감을 채우기 위해 가장
적당한 재료가 혈액이라는 소리로군...하지만 알퀘이드, 너 피를 빠는게 싫
다고 했었지? 예를 들어 인간한테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 것
처럼 알퀘이드도 피 맛이 싫다거나 뭐 그런 소리야?"
오랜 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까 풀어낸 듯 회심의 기분으로 의견을 말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건 내멋대로의 추측에 지나지 않은 듯 했다.
"......모르겠어. 피가 무슨 맛인지, 나 모르니까."
" - 에?"
"난 흡혈종으로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전에 한 번 말했었지? 피가 어떤 맛인
지 몰라. 그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도 아직 잘 몰라. 단 하나 알고 있는 건
- 피를 빤다는 사실은 피를 빤 상대를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않게 된다는 것
뿐이야."
알퀘이드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날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저기 시키. 만약...만약에 새나 물고기한테 시키 같은 인간이랑 비슷한 지
성과 수명이 있다고 치면 시키는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있겠어? 아무리 지성
이 있다 하더라도 먹을 건 먹을 거니까 아무런 느낌 안 들고 먹을 수 있겠
어?"
" - 아니, 그건..."
먹을 수 있 - 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지성을 가진 생명체는 그렇다치고 지성을 갖지 않은 다른
것들이라면 먹을 수 있을걸.
"그래, 그거야. 내가 피를 싫어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야...뭐, 시키가 말했
던 것처럼 뭐가 좋고 뭐가 싫다 이런 게 있을지도 몰라. 나, 되도록이면 피
는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 그래, 만약 인간에게 나와 동격의 지성과 가
치관이 없었더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피를 빨았을지도 모르겠어. 살아
가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자연계에서는 당연한 섭리
인걸."
알퀘이드는 '그렇지?'하는 시선으로 찬동을 구한다. 그것을 - 다른 그 누구
도 아닌 알퀘이드에게 들었다 해도 난 그걸 부정할 수밖에 없어. 긍정은 하
고 싶지 않아.
"분명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인간과 넌 비슷한 존재잖아...그러니까
그런 비유는 들지마. 만약 어찌어찌해서 이렇다면 같은 이야기는 별로 좋아
하지 않으니까."
"그래? 난 IF가 좋은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생
각을 했을 땐 무슨 답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IF......만약에, 인가.
그럼 만약 - 알퀘이드가 다른 흡혈귀들처럼 피를 빠는 그런 녀석이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녀석과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인가.
"왜 그래, 시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잖아. 아, 혹시 화장실 가고 싶어
서 그래?"
"......야. 남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냐?"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내가 아무리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본다 한들 피
를 빨고 빨지 않고에 관한 문제는 알퀘이드한테 있어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인 모양이다.
"그래 -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긴가."
"뭐야, 아까부터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기나 하고. 그런 거 남자답지 못해,
시키!"
또 뾰루퉁한 표정으로 고양이처럼 소리를 지르는 알퀘이드.
"별로 혼자서 숨기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도대체가 그렇게 혼자서 뭐 숨기
기만 하고 그러는 건 오히려 네 쪽이잖아. 맨날 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나 하면서 혼자서 재미있어나 하고."
"재미있어 하 - 그런 거, 아냐."
좀 전까지의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얌전한 태도
로 돌변해 버리는 알퀘이드. 사실을 듣고 기가 죽어버린 듯한, 그런 시선을
내게 향한다.
"...뭐야, 정말로 내가 머리 싸매고 골머리 썩히고 있는 걸 재미있어 했단
말야? 대체 애가 장난치길 좋아하는 건지 비밀주의를 선호하는 건지...뭐,
어차피 난 너랑은 다른 생물이니까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그, 그런게 아니라......! 나, 시키한테는 제대로 다 얘기해주고 있단 말
야. 이것저것 숨기는 구석이 많아 보이는 건 시키가 제대로 잘 안 들어서
그러는게 아닐까......?"
"흐~~응~~ - 그럼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네? 뭐든지."
"응. 우리, 서로 협력하는 그런 팀 사이잖아."
OK.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을 물어보도록 할
까?
<3. 자아 그럼 알퀘이드의 취미, 사고, 경력 및 쓰리 사이즈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 선택>
- 흠.
이런 벌건 대낮부터 패스트푸드 점에서 알퀘이드랑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두 번 다시 있을 리도 없을테니 흡혈귀 사건이랑은 상관없는 상식적
인 질문이나 하지 뭐.
"그럼 질문. 알퀘이드, 네 취미라든지 옛날 일이라든지 쓰리 사이즈라든지
가르쳐줄래?"
"그런 걸 듣고 싶은 거야? 별 걸 다 물어보네, 시키."
"별 걸 다가 아냐. 난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아주 조금만이
라도 알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욕구 아니겠어?"
"아, 그건 나도 동감. 그래 - 그런 거라면 괜찮아. 하지만 취미라든지 옛날
일이라든지, 나 그런 거 말할게 없는걸. 쓰리 사이즈도 재 본 적도 없고 시
키 같은 인간들처럼 자신의 나이나 키 같은 걸 기록한 적도 없고 말야."
"그게 뭐야. 알퀘이드는 자기 자신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거야?"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우선적이지는 못하지. 필요한 건 시토..
...흡혈귀를 사냥해내는 능력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마을에 오기 전의 일이라든지 그런 건 있을 거 아냐. 난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라구."
"이 마을에 오기 전이라......음, 8년 쯤 전의 이야기려나? 그땐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서 흡혈귀를 사냥하고 있었어. 프랑스의 외딴 시골마을에
흡혈귀가 둥지를 트는 바람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도(死都)로 변해버렸었
어. 이틀 만에 [적]을 찾아 그 마을을 지배하고 있던 여자 시토를 처리하긴
했었는데 - "
왠지 기분 나쁜 일이라도 떠올려버린 듯, 알퀘이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중간
에 말을 끊는다.
"8년 전, 인가...그럼 그때부터 최근까지 알퀘이드는 뭘하고 있었는데?"
"뭘 하긴, 성에 돌아가서 자고 있었지. 내 역할은 시토를 사냥하는 거야.
그 이외에 존재할 의미가 없으니까 시토가 다시 표면적으로 활동할 때까지
는 계속 잠들어있을 뿐 아니겠어?"
"무슨 - "
계속 잠들어있을 뿐이라니, 그거 설마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건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
"......잠깐 기다려봐. 성이라니, 그 성을 말하는 거야? 설마 설마 하고 물
어보는 건데 알퀘이드 네 집은 신데렐라 성 같은 그런 성인 거야......!?"
"신데렐라 성?"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퀘이드.
"아 - 아니, 신데렐라 성이란 표현은 좀 안 어울리려나. 에, 그러니까, 요
컨대 너, 그......공주님, 이야?"
"응, 일단은 그렇긴 해. 옛날엔 머리도 자르면 안 된다고, 왕족답게 좀 행
동하고 다니라고 엄청 잔소리 들었었는데."
" - "
...할 말이 없군요. 그러고 보니 네로 놈도 공주였던가 뭐라던가, 하여간
그런 소리를 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
"공주님, 이십니까..."
몰래 알퀘이드의 모습을 훔쳐본다. 확실히 터져나오는 숨마저 멎게 만들어
버릴 정도의 미인이긴 하지만 이 철부지 꼬맹이 같은 계집애가 공주님이라
니, 왠지 이미지가 안 맞는구만.
"......뭐, 제멋대로인 점은 확실히 공주님 이미지이긴 하지만."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몰아쉰다.
"뭐야, 시키가 말해달라고 해서 말해줬더니 듣는 태도가 그게 대체 뭐야!"
공주님께서는 울컥하며 나를 노려보신다. 뭐...알퀘이드도 자기 자신을 공
주님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고 하니 이 일은 머리 속에서 깨끗하
게 지워버리지 뭐.
알퀘이드는 투덜투덜 화가 난 채 햄버거를 먹는다. 알퀘이드의 식사가 끝나
고 그런 알퀘이드의 기분이 제법 나아질 타이밍에 맞춰 다음 장소로 이동하
기로 했다.
---------------------------------------------
------------------------------------------------
점심 식사를 마치고 큰길가를 이곳저곳 적당히 둘러보고 다니던 우리는 어
째서인지 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도 이제 막 저물려 하고
있는 시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퀘이드가 [시키네 학교에 좀 가보자]라
며 말을 꺼냈고 그걸 내가 차마 거절하지 못한 때문이다.
"말해두겠는데 학교 안에는 못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난 오늘 하루
결석한 사람이고 또 알퀘이드는 학교 관계자도 아니니까."
"알았다니까? 시키 힘들게 하는 짓은 안 할테니까 안심해."
빼꼼히 교문 앞에 서서 학교 안을 살펴보는 알퀘이드.
"어머......?"
알퀘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알퀘이드의 등 너머로 교정 쪽을 바라본다.
"어.....어라?"
이번엔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교정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시각은 아직 저녁 여섯시가 되기 전 무렵이다. 이런 시간이라면 체육계 특
별활동을 하는 녀석들이 아직 운동장에 남아있어야 할텐데 -
"시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아아, 어떻게 된 이유에서인지 학생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운
동장 쪽 뿐만 아니라 교사 쪽에도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시키, 안에 아무도 없는데?"
알퀘이드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대충, 알퀘이드가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군...
"안 돼."
매몰차게 잘라말한다. 하지만 알퀘이드는 내가 하는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
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으면 나 안에 들어가봐도 아무도 화내는 사람 없겠지? 후훗...우
리, 타이밍 아주 좋을 때 온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절대로 안 된다니까."
"헤에~~생각보다 넓은데? 교사도 제법 크고, 이 정도면 꽤 쓸만하겠어."
...이상한 일이야...알퀘이드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게 아니라 교정
쪽에서 들리고 있잖아...
"시키~~, 여기 이 문 안 열리는데 부수고 들어가도 돼~~~?"
엄청난 고속이동.
알퀘이드는 이미 교사 출입문 앞에 서서 유리문을 박살내려고 소매를 걷어
붙이려 하고 있는 참이다.
"이......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너어어어어어어어!"
전속력으로, 출입문을 박살해려고 하는 알퀘이드를 향해 달려나섰다.
"아, 왔네?"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으신지, 알퀘이드는 활짝 웃는 모습이다.
"......야. 남의 학교에 와서 뭐가 그렇게 좋으셔? 재밌는 데라면 여기 말
고도 다른데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적당히 데려다줄게 다른데 가자."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시키 네 학교,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알퀘이드.
"시키, 나 교사 안에 좀 들어가 보고 싶어. 거기 그 출입문 자물쇠 좀 죽여
주지 않을래?"
"죽, 죽여주지 않을래라니...너 - "
"내가 하는 것보다 시키가 하는게 훨씬 더 깨끗하게 되고 좋잖아? 시키가
베어낸 자리는 다른 그 어떤 칼들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절단면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 누가 발견해도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간 거라고 생각할걸?"
주머니 속에서 나이프를 꺼내든 후 스윽 하고 자물쇠를 잘라낸다. 아니, 잘
라낸다기 보다는 [죽이며 자른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려나.
"됐어. 여기로 들어가자."
창문을 열고 신발을 신은 채 교사 안으로 들어간다.
"............하아..."
뭐...예상대로랄까 무슨 약속 같은 거랄까, 알퀘이드가 맨 처음에 안내하라
고 가리킨 곳은 우리 교실이었다.
"근데, 시키는 여기서 뭘 배워?"
"뭘 배우냐니 -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배우는 걸 배우고 있지. 역사 공부에
서 우리 나라의 문화에 대한 깊은 조예(造詣)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사물의
상태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물리랑 수학도 배우고. 아, 언젠가 다른
외국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때를 대비해서 영어 같은 것도 배우고 있어."
"그렇구나. 난 또 효율적인 인체해부술이라든지 칼 종류를 다루는 법이라든
지, 그런 것들을 배우는 줄 알았지."
알퀘이드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다.
"알퀘이드. 너, 처음부터 여기가 뭐하는 데인지 알고 있었지?"
"아하하, 정답입니다~~"
짝짝짝짝 박수까지 쳐댄다.
......평소에도 알퀘이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엔 특히 더 심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곳에까지
일부러 찾아들어와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지?
"시키."
"뭐야. 갑자기 그런 표정해가지고. 역시 여기 무슨 이유가 있어서 데려오고
그런 거야?"
"아니, 딱히 여기 온 데에 대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난 그저 여기서의 생활
을 듣고 싶었을 뿐이야."
"......여기서의 생활, 학교 생활 말야?"
"응. 시키는 여기서 하루의 절반이나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그렇게까
지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모두 활용해 본 적 있어? 시키는 스스로에게 불
필요한 지식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러지 않아?"
"아아 - ?"
알퀘이드의 지금 이 질문은 지금까지 해왔던 질문들 중에 가장 무슨 소리인
지 알기 힘든 질문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배운 기술들을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한 적도 있을 거
아냐. 그런 거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뭐, 확실히 그렇긴 하네. 수학을 배우고는 있지만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건 셈하기 정도의 레벨이고 말야. 나라의 역사라든지 영어 같은 걸 배운다
쳐도 그걸 앞으로 사용할지 안할지도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뭐야, 시키 다 알고 있었잖아? 하지만......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쓸데없
는 짓들을 하는데? 인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으니까 그런 짓들을
하고 있을 시간 같은 건 얼마 없을텐데 말야."
"시간이 없다라...뭐, 뚜렷하게 정해진 목적 같은게 지금은 없으니까. 그런
게 생길 때까지는 이렇게 쓸데없는 시간이나 보내며 살아갈 뿐이지."
"말도 안 돼. 스스로 무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그
걸 일상의 굴레처럼 반복해서 하고 있다니...응, 난 도저히 못 믿겠
어."
알퀘이드의 목소리에서 매우 낙심한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난 그 이유
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일상의 굴레라...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말야 쓸데없는 시간
을 보낸다는게 그렇게 안 좋은 일일까?"
" - 에?"
"좀 그렇게 지낸다는게 뭐가 어때서 그래.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학교에서
밖에 써먹을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또 나름대로 일상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아냐. 언젠가 나이가 들어 그저 할 일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을
때, '아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쓴웃음 지으면서 떠올려낼 수 있는
일들이라면 그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거야."
"......모르겠어. 그런 추억들 자체가 쓸데없는 것들인데도 그걸 즐겁게
회상해낼 수 있다는 거야, 시키는?"
"아아, 그 부분이라면 괜찮아. 나 자신에게 있어 그다지 기억해 내고 싶어
하지 않는 추억은 떠올릴 수 없도록 만들어져있으니까, 인간이라는 생물은.
애초에 인생 자체가 그런 것들로 꽉 채워져 있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
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쓸데없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난 별로 심각하
게는 안 받아들여.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자신을
끝없이 속이면서 살아가는게 살아가는 당연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까 말야."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잘 알면서 시키는 그걸 끝까지 계속해 나가......몰
라, 난 그런 일은 못해. 지금까지도 필요한 것 이외에는 한 적이 없었으니
까."
"무슨 소리야. 그럼 오늘 있었던 일들은 다 그 모양 그 꼴 아냐. 알퀘이드
의 목적은 흡혈귀를 찾아내는 거였지? 그럼 나랑 같이 거리를 다닐 필요는
없었던 거 아냐?"
"......그래.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서 그런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는 시
키한테 질문해 봤지만...더 더욱 모르게 돼버렸어."
- 씰룩.
"예이예이, 이거 참 죄송하게 됐군요. 그래, 전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는
그런 인간입니다~~"
"............아 - 응...미안, 시키가 무슨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지는 나도
잘 알아. 인간이라는 생물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에 가치기준을 개인이 아
닌 전체에 두고 있어. 때문에 개개인의 잘못도 전체가 올바르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우린 처음부터 개체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잘못은 절
대로 용서받을 수 없어. 자기 이외의 의사를 결코 스스로에게 반영시켜서는
안 돼. 그렇기에 - 무익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쭉 배워왔어."
......조용히, 그리고 마치 참회라도 하듯 알퀘이드는 입을 열었다.
" - 하지만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정말로 잠깐 동안, 겨우 7일 밖에 안
지났는데...내 생각이 정말로 올바른 걸까? 지금 나, 너무 즐거워. 이렇게
하는게, 이렇게 살고 있다는게 단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다는 생각...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
"알...퀘이드?"
"나,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지금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 깨어있던 적이 없었
으니까 - 사실은 벌써 오래전에 잠들어서 내가 꾸고 싶어하는 꿈을 꾸면서
잠들어있는 건 아닐까?"
......알퀘이드는 조용히, 텅 비어버린 듯한 눈동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 "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알퀘이드의 모습은 마치 스크린에 비친 허상처럼 흐릿하다.
"......어떻게 됐다니, 뭐가 말야. 너, 그냥 평범하게만 보이는데."
"겉보기에는 그럴지는 몰라도 안은 달라져있어...즐거움, 괴로움...그런 쓸
데없는 감정들이 지금 엄청나게 커져있다구. 에전엔 무시해왔던 것들이 무
시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곧 어떻게 되어버렸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
그리고 말야, 난 평범하지 않아. 시키랑은 다르게 흡혈귀니까."
알퀘이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던 것 같은...마치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사이로 몸을 감추듯.
" - 지"
왠지, 이상해.
이런 건, 이상하다구.
저녁 노을이 머무는 교실. 붉은 태양빛을 받으며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고
개숙인 소녀.
그런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너답지 - 않아."
그래, 너답지 않아. 넌 흡혈귀니까 - 그런, 평범한 여자애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외로운 구석은 보이지 말란 말야.
"무시할 수 없다느니 쓸데없는 짓을 한다느니,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
느니 - 그런 거 그냥 신경 끊고 내버려두면 되는 거 아냐? 자신에 대해 너
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었지? 뭘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지는 잘 모
르겠지만 너한텐 아무 문제도 없어. 다른 누구한테도 - 불편한 짓 한 적도
없고."
"그럴까? 나, 시키한테 맨날 잔소리 듣고 그러는데 그런 건 다른 거야?"
" - 난 예외. 토노 시키는 알퀘이드를 죽인 죄가 있으므로 너한테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니는 건 자업자득이란 말씀이십니다. 알겠어? 난 내가 좋아서
너하고 같이 다니는 거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피해라든지 그런 건 생각하지
마."
"..............."
알퀘이드의 시선은 여전히 어둡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정말로, 난처
해진다.
뭉클한 마음이 들어 이대로, 껴안아버리고 싶어지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얼굴 좀 펴라, 알퀘이드. 뭐...넌 제멋대로에 사람 이
야기도 제대로 안 듣는 그런 문제있는 녀석이긴 하지. 하지만 그거 말고 다
른 부분은 의외로 정상적이야. 어디 뭐 이상하게 된 데도 없고 평범한 여자
애들이랑 다른 데도 없어. 그러니까 - 웃어. 네가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내 기분도 이상하게 되어버리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그 정도로 제멋대로야?"
살짝 내 안색을 엿보며 알퀘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아마 이 공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 자각하고 계시지
못했던 듯 하다.
" - 크, 아하하하하! 무슨 소리야, 너한테서 '제멋대로'라는 말을 빼면 남
는 건 뼈 밖에 없다구 뼈 밖에!"
어딘가 지금 내뱉은 말이 모순되어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무심결에 큰 소리
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
- 알퀘이드가 그렇게 수줍은 표정 지으면서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단 말야.
".....................!!"
아, 화났네.
"시키 바보! 남이 진지하게 상담 좀 하려고 했더니...뭐야 이 바보야!!"
"그러~~니~~까아~~, 난 너한테 하는 것 빼고는 다른 사람한테는 친절하게
대한다고 말했었잖아. 너한테 그렇게 대한 게 지금이 처음인 것도 아니구."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가면서 알퀘이드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방금
전까지의, 세상 다 산 것 같은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정말로 알퀘이드다운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도 뭐, 역시 넌 밝고 활달하게 있는게 제일 나아. 나도 왠지 좀 마음
이 놓이는데?"
"에......? 어, 어째서 시키가 마음이 놓이는데? 맨날 나한테는 쌀쌀맞게
굴고 그러잖아, 시키."
"아 - 그러고 보니 또 그렇네?"
꾸벅 하고 생각에 잠긴다.
이상한데...나도 왜 마음이 놓였는지 잘 모르겠어...아까는 그냥 알퀘이드
가 그렇게 풀죽어 있는게 보기 그래서 어떻게 좀 도와줘야지 하고 생각했었
는데 -
"............"
말도 안 돼.
확실히 알퀘이드는 얼굴도 예쁘고 썩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같
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다고도 생각한다구...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야기가 어딨다고 그래. 정신차려 시키! 이 녀석은 흡혈귀란 말야.
"진짜 웃기지도 않는 사람이네.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른단 말야?"
"......시끄러, 난 잘 몰라도 돼. 처음부터 내가 어디 좀 이상하다는 건 알
고 있었어. 항상 기억 속이 애매한 건 그 때문이라구."
"그래...그래서 시키는 맨날 멍하니 있는 거구나?"
진심으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알퀘이드.
"..............."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대충 내뱉은 변명거리를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믿
어버리니 딱 화부터 내기도 전에 정말로 그런 거 아냐? 하고 스스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버린다.
" - 자아"
언제까지고 교실 안에 있을 수는 없어. 적당히 밖에 나가지 않으면 학교에
남아있는 교사들에게 발견될 지도 몰라.
"야, 슬슬 나가자. 더 이상 볼 일도 없잖아?"
"응, 그렇긴 하지만......시키?"
응? 하고 시선을 던진다. 알퀘이드는 잠깐 하려했던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집어삼켰다가 내게 이상한 질문을 물어온다.
"시키는 말야, 즐거운 일 같은 거 있어?"
"......너, 오늘 열있는 거 아냐?"
"말장난 하는게 아냐. 나, 시키의 몸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구. 시키도
잘 알고 있잖아? 자신의 몸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거 말
야."
" - !?"
- 두근.
가슴의 흉터가 꿈틀대는 것 같다.
"너 - 뭐, 사람은 언젠가 죽지."
"시키의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죽게 되겠지만 말야."
......알퀘이드의 눈이 매섭다. 하지만 누구의 몸에나 죽음의 선은 있으니
까, 따라서 죽음에 이르기 쉬운 부분은 엄청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혼자만이 - 그런, 죽음에 이르기 쉬운 몸을 갖고 있는 게 아냐.
"대답해봐. 그렇게 불안정한 육체로 즐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시키?"
" - 너, 정말 바보 아냐?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다만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게 있다면.
8년 전, 내가 죽을 뻔 했을 때 아주 잠깐 동안. 아마 병원 수술실에서 수술
을 받고 있을 때였겠지만 그때 난 새카만 그런 곳에 있었던 것 같다. 꿈일
지도 모르지. 단지 그때, 나는 내가 죽는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죽음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선생님
과 만났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게 너무나도 기뻤어.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이지만...세계는 이렇게나 평화롭고 이
토록 즐거운 곳이었구나...비록 즐거운 일들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인간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거야.
그러니까 - 이렇게, 이 모든 것들이 무익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살아가
지...그렇기 때문에. 즐거운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것이 정녕 용서받지 못
할 행위가 아니라면 난 즐겁다고 대답할 수 있을 거야.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족하고 있어. 죽음이라는
무(無)보다 확실하게. 다른 누구에게 배울 필요도 없이 그것 하나만큼은 알
고 있어.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그건 정말로 엄청나게 멋진 일이
라는 사실을 -
" - 그냥 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의 삶이 즐거웠으니까 앞으로도 잘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걸걸, 아
마...뭐, 이쯤 하면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을라나?"
이제 겨우 17년 정도 밖에 살아보지 못한 토노 시키이기에 그렇게 대단한
대답은 할 수 없겠지만...
"그래, 그게 시키의 마음이구나...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라
...그래,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즐거울 수 있기에 그걸 저버리지
못하는 거야...난 그게 마음에 걸려서 계속 이상한 질문 물어보고 그랬었는
데...일단은 그 정도 대답으로 괜찮을지도."
" - 뭐야. 아까 그거,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어?"
"응. 그치만 일단 속은 다 시원해졌어. 그러니까 이 마을에 둥지를 틀고 있
는 흡혈귀를 쓰러뜨릴 때까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어. 그때까지 시키랑
함께 싸울래."
알퀘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미소짓는다.
" - "
흡혈귀를 쓰러뜨릴 때까지, 인가.
"......그랬지 참. 나하고 너, 그런 관계였었나..."
오늘 하루,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냈기에.
그토록 당연한 대전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 - 저기말인데, 알퀘이드."
그저, 아무런 생각한 것도 없이.
"다 끝난 다음에 - 흡혈귀를 쓰러뜨린 다음에 말야. 우리 헤어지기 전에 다
시 한 번 이렇게 만나지 않을래?"
라고, 정말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에 - ? 그게 무슨 소리야?"
"알퀘이드의 목적이 달성되면 딱 한 번만 더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해보자,
하고 했어. 나랑 너, 결국엔 서로 협력하는 사이라 이렇게 함께 있는 거 아
냐. 그러니까 - 정말로 아무런 의무 같은 것도 없어져버린 다음에, 그냥 아
무런 의미도 없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해봤어."
- 그런게 아니라.
그저,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 사이로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흡혈귀 같
은 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아주 평범한 추억을 만들어주면 틀림없이 알퀘이드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것 뿐이야.
" - 네가 정 바쁘다면 뭐 굳이 안 만나도 상관없어. 나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말야."
마음 속과는 정반대의 소리를 한다.
알퀘이드는 잠시 동안 멍하니 두 눈 크게 뜨고 날 쳐다보더니 잠시 후 끄덕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응 - ! 다 끝나면 또 학교 오는 거다, 시키!? 아무 이유도 없지만 틀림없
이, 틀림없이 정말로 즐거울 거야 - "
석양빛으로 물든 교실 안.
알퀘이드는 솔직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와 그렇게 약속했다.
......결국 학교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완전히 서산 너머로 진 뒤였
다. 7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 다소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달리 할
일도 없는 관계로 흡혈귀 찾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자아.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알퀘이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알퀘이드 쪽으로 몸을 향한다.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이제 막 해가 졌을 뿐인데?"
"그건 그렇지만, 일찍 시작한다고 달리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낮에
충분히 잘 놀았으니까 밤에는 그래도 잘 좀 해봐야되지 않겠어? 알퀘이드,
한 번 정한 약속은 끝까지 잘 지켜보자구."
"시키, 이상하게 진지하게 나오는데? 지금은 그렇게 나오면서 어제는 왜 약
속을 깨버리셨을까?"
"야...그거 어쩔 수 없는 일 아냐? 어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단 말야. 정
말로 자기 직전까지는 공원에 가려고도 했었다니까."
그래, 아키하가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몸을 이끌고 공원으로 나섰을
거다.
"흐~~응,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어딘지 좀 뜬금없는 표정으로, 알퀘이드는 또 남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소
리를 한다.
"그러자니, 뭘 말야?"
"그러니까 시키, 어제 공원에 가려고 했었지? 아직 시간도 좀 있는 편이니
까 어제 못했던 거라면 지금부터 해도 되잖아?"
알퀘이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만치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정말
공원으로 향하려는 모양이다.
" - 잠깐, 기다려봐, 야......!"
달려나가는 알퀘이드를 놓치지 않으려 나 역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봐, 이러쿵저러쿵 해도 잘 따라오잖아 시키."
알퀘이드는 즐겁다는 듯 소리 높여 웃는다.
"......바보, 널, 혼자 냅두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가니까, 그렇지...
..."
공원까지 뛰어오느라 흐트러졌던 호흡을 가다듬는다.
"역시 요 시간대에는 사람이 많네? 여기저기서 사람 기척이 나서 좀 신경이
쓰여."
"......그러니까. 어째서,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 거야, 너란, 녀
석은......"
"그래? 나, 시키 목소리 잘 들리는 같은데?"
"......그래. 다 들리는데, 무시하는 거라면, 엄청 죄질이, 나쁘군"
"무시한 거 아냐. 그냥 시키가 짜증내고 그럴 때 말대꾸하면 꼭 꼭 [바보]
소리 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라구."
"......그래. 그거, 나한테도,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하아, 하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학교 앞에서부터 공원까지 대략 6km 정도. 뛰었다기 보다 빨리 걸었다고 하
는 편이 맞긴 하지만 그 정도 거리를 내달린 심장은 좀처럼 제 페이스를 되
찾지 못하고 있다. 알퀘이드가 빨리 달려서가 아니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알퀘이드로서는 오히려 느린 편에 속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제 일으
켰던 빈혈의 후유증 탓인지 내 몸이 원래 상태가 아니었던 것 뿐이다.
"괜찮아, 시키? 무리하지 말고 벤치에서 좀 쉬지 그래?"
"......그러지. 좀 쉬었다가 거리 쪽으로 갈 테니까 말야, 알퀘이드."
"핏. 시키가 진짜로 할 마음이 들었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단 말야. 네로랑 싸울 때도 그랬지만, 흡혈귀는 자신들의 시간이
아니면 함부러 활동하지 않는다구. 흡혈귀들은 좀 더 밤의 기운이 짙어지지
않으면 활동하지 않으니까 가만히 여기서 시간 좀 보내고 있어야 돼."
" - "
그런 건 미리미리 좀 말해주지 그랬냐...
- 벤치에 앉아 멀뚱히 시계를 바라본다. 공원의 시계는 이제 막 9시를 지나
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차츰 사라져갔으며 밤은 점점 깊어만간다.
알퀘이드는 어째서인지 벤치에 앉지 않고 심심하다는 듯 요 앞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인다. 어느새 공원에 도착한지 2시간 가까운 시간
이 흘렀다.
" - 후우"
몸은 이미 본 페이스를 되찾았고 주변에는 사람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밤
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알퀘이드, 이제 그만 가도 되지 않을까?"
"응, 딱 적당한 것 같아."
내 의견에 동의하고 있긴 하지만 알퀘이드는 아직 그리 썩 내켜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아까부터 왜 그래, 알퀘이드.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 - 그런게 아니고...시키가 말했던 그 붕대 감은 남자가 좀 신경 쓰여서
말야."
뭔가를 생각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 알퀘이드는 한숨을 내쉰다.
"아, 그러고 보니 시키. 나, 어제 여기서 어떤 남자가 말 걸어왔다~"
" - 하아?"
"그러~~니~~까아~~, 여기서 어떤 남자가 나한테 말 걸어왔었다니까."
"...아니, 두 번 안 말해줘도 되긴 한데...너, 붕대맨에 대해 생각하고 있
었던게 아니야?"
"했었어. 그러니까 생각났다는 거잖아. 시키가 붕대맨한테 습격당했던 것처
럼, 나한테도 어떤 남자가 말 걸어왔었지 하고 말야."
"......그렇군. 그거 참 잘됐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너 미인은 미인이
니까 말야. 혼자서 그렇게 멍하니 서있고 그러면 제대로 된 신경구조를 가
진 남자라면 한 번쯤 말도 걸어보고 그러겠지."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렇게 내 감상을 피력한다. 가끔 너무나도 정직한 내
이런 모습이 미워지기까지 한다.
"그래? 나도 처음에는 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전에 시키가 했던 말
이 떠올라서 말야. 나, 그냥 가만히 서있어도 눈에 띈다며. 그래서 가만히
상대가 어떻게 나오나 좀 보고 그 사람이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알았
어."
"......잠깐만. 너...설마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너한테 말 건 그 녀석한
테 또 뭐 이상한 짓 하고 그런 건 아니지?"
"으응,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잠깐 좀 이야기하다 헤어졌을 뿐이니까
...시키가 전에 했던 말을 생각 못했으면 큰일날 뻔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잘했어 알퀘이드. 너한테도 '분별'이란게 있었구나?"
"당연하지. 날 화나게 하는 건 시키 정도 뿐인걸."
왠지는 모르겠지만 알퀘이드, 상당히 즐거운 듯한 목소리다. 그야 뭐, 그
어떤 누구라도 [살해당하면] 머리 꼭대끼까지 화가 치밀어오르는게 당연하
겠지만.
하아...한숨을 쉬며 공원을 한바퀴 훑어본다...한 달 전. 이 마을에 연쇄살
인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시간에도 공원에는 젊은 커플들이나 밖
으로 놀러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을텐데. 지금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와 알퀘이드 뿐이다.
가만히 앉아 지금 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대체 언제부
터 토노 시키는 이러한 일상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버린 것인가 - ?
"아. 시키, 저기봐."
갑자기 알퀘이가 내게 말을 건넨다.
"왜, 뭐라고 있어?"
"응. 봐봐, 저기 저 시계. 이제 딱 좋은 시간이 됐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알퀘이드는 공원의 시계를 가리킨다. 그쪽을
바라보니 - 시계바늘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의 시간. 밤 10시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
...어젯밤.
내가 지키지 못했던, 만나자고 했던 시간.
" - "
왠지 말문이 막혀버린다.
어째서 이런 사소한 일에 나는 찡한 감동을 받으며.
어째서 이런 사소한 일에 이녀석은 이다지도 기쁜 듯한 표정을 짓는 걸까.
......정말 이해가 안 가. 오늘 하루 동안 알퀘이드와 거리를 걸었어. 알퀘
이드가 진짜 흡혈귀인지 하나도 실감이 안 나서...
"......하나만 물어보자."
- 하지마, 시키.
"응, 뭔데?"
"......저기, 너 말야."
- 그런 말같지도 않은 거 물어보지 말라니까.
"응, 내가 뭐?"
"......정말로, 흡혈귀인 거야?"
-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거냐, 넌.
"흡혈귀인 거 - 시키,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이제와서라니. 이제야 겨우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라구."
라고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나.
"하아...시키, 참 머리 속이 유연한 건지 딱딱한 건지...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지만 그거 엄청난 모독이라구.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한 건지
좀 이야기해줄래?"
근거 같은게 있을 리가 있냐. 하지만 - 그와 마찬가지로 네가 흡혈귀라는
증거도 없잖아. 그러니까 -
"...그치만 너, 피 보는게 싫다면서. 그런 흡혈귀가 어딨어? 너, 전에 자기
가 제몫도 다 못하는 흡혈귀라고 한 적 있는 거 같은데 피도 못 빠는 흡혈
귀는 그 정도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알퀘이드와 시선을 맞춘다. 약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와 알퀘이드는 서
로 떨어져 있다.
알퀘이드는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빙긋 하고 미소를 지어보
인다.
"그치? 나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었어. 알퀘이드 브륀스타드는 정말로 흡
혈귀일까요? 하고 말야."
라며 알퀘이드는 웃는다.
......마음이 놓인다. 왠지 방금 질문에 알퀘이드가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알퀘이드가 농담하듯 받아넘겨줘
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 - 그치? 알퀘이드는 아무리 봐도 흡혈귀 같지가 않아."
라며 알퀘이드는 웃는다.
"그럼 시험해 볼까?"
라며 알퀘이드는 웃음 지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한다.
"시험해본다니 - 에?"
"내가 정말로 피를 빨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볼까? 만약에 피 빨면 나중
에 칭찬 같은 거 해줄 수 있어, 시키?"
" - !?"
알퀘이드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를 향하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알퀘이드의 발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 온다. 방금 한 말이 농담이란 건 서
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아.
"자 - "
잠깐, 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터져나오지 않았다. 알퀘이드가 능력을
써서 그런게 아니라 - 나 스스로가 그 말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기 때문이
었다.
알퀘이드는 점점 다가온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고개 숙인 채로 조금씩.
나는 -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알퀘이드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 -
"시키는 내가 제몫도 못하는 흡혈귀라고 말했지만"
머리 뒤쪽에서 울리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
또각. 발걸음 소리가 바로 곁에서 멈춘다.
- 사실은 말야. 피를 빠는 건 아주 간단해.
그런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턱.
알퀘이드의 체중이 목덜미에 실린다.
" - "
목이 꽁꽁 얼어붙은 듯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목덜미 쪽에
알퀘이드의 숨결만이 와 닿을 뿐.
- 그것이, 마치 불꽃처럼 뜨거웠을 뿐...
"알 - "
이름을 부르려다 멈춘다.
스스로의 의사로 그만두었다.
알퀘이드의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곧 내 곁에서 멀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
으니까.
" - "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알퀘이드의 숨결이 느껴진다. 어깨를 잡고 있는 흰
손가락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 무서워, 해.
텅 빈 내 사고 속에는 공포도, 다른 그 무엇도 존재치 않는다. 그저 알퀘이
드만이 미미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목에 와 닿는
숨결만이 떨리는 알퀘이드의 몸에 겹쳐간다.
작고 미약한 숨결에서 거칠고 빠른 숨소리로.
"알 - 퀘이드?"
"농담 - 이었는데"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내 어깨를 붙잡은 손가락은 더 이상 떨
리지 않는다. 그 대신 - 마치 새 발톱이라도 되는 양 어깨죽지에 깊숙히 파
고 들었다.
" - 윽!"
고통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알퀘이드의 손톱에 실린 힘은 약해지지
않는다. 떨어지려고 애쓰는 나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엄청난 힘으로 날 붙들
고 있다.
"알퀘 - 미안, 장난이 좀 심했나봐. 너 놀려서......미안하니까. 비켜 -
주지 않을래?"
"시 - 키"
알퀘이드의 손가락이 내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 안 돼.
이성이 경종을 울리며 두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고는 알퀘이드의 몸을
밀쳐내려고 한다.
그 전에.
두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내달린다.
"............으윽!!!"
두 팔이 움직이지 않아. 양 어깨에 파고든 알퀘이드의 손톱이 한층 더 세게
어깨를 잡고 있는 바람에 팔이 마비돼 버렸어.
" - , - , ㅡ "
...목덜미에 닿는 알퀘이드의 숨결이 어지러워진다.
미쳤어.
알퀘이드의 이가 목덜미에 닿으려 한다.
" - 안 돼......!"
어깨를 붙잡은 새하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다음 순간. 비명 같은 숨소리
를 내몰아쉬며 알퀘이드는 내게서 멀리 떨어졌다.
하아 - 하아 - 하아 -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공원에 울려퍼진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나와 - 눈 앞
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알퀘이드의 것이었다.
"시 - 키"
온몸을 떨면서, 마치 숨을 쉴 수가 없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알퀘이
드는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본다.
하얀 손가락은 내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붉은 피가 손끝을 타고 손바닥
으로, 그렇게 다시 팔로 흘러내린다.
"아 - "
그 광경을 괴로운 듯이,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한 모습으로 알퀘이드는
바라보고 있다.
"......알퀘이드, 방금, 그 - "
말을 건넨다. 알퀘이드는 손바닥으로 흐르는 핏줄기에서 시선을 옮겨 날 바
라본다.
"시 - 키?"
"......아아, 여기 있어. 방금, 그 - 장난한 것치고는, 도가 지나친, 것 같
은데..."
정말 단순히 좀 심한 장난을 친 것 정도로 해두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던 것 같았다.
"시키 - 나, 너무 - "
알퀘이드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다.
"목이 - 말라서 - "
몸은 한층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알퀘이드는 금방이라도 - 무너져내릴
것만 같이 불안정하게 보였다.
"부탁이야 - 오늘밤엔, 시키는 집에 가."
"야, 알퀘이드......!?"
그대로 알퀘이드는 달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저만큼 가버렸
다. 수 시간 전처럼 내가 따라올 수 있도록 적당히 달리던 때의 속도가 아
니었다. 내가 전력으로 뛰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스피드로
알퀘이드는 밤거리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 무슨"
집에 가라니, 그런 걸 보고서 바로 그리 간단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냐.
"알퀘이드 자식 - 그렇게 힘든 몸으로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바보.....
....!"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어.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역시 밤의 거리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 알퀘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거리는 너무도 넓었고 그 어떤 단서가
될 만한 것 하나 없이 어떤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
깝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이곳저곳 찾아다니기 보다는 알퀘이드가 향했
을만한 곳을 예상해서 모든 걸 걸고 거기만 집중적으로 찾아보는 편이 찾아
낼 수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거다.
그렇다면 -
<2. 번화가를 찾아보자 - 선택>
- 번화가를 철저하게 뒤져보자. 알퀘이드는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그
렇다고 어디 가서 몸을 쉬고 있을 그런 녀석이 아냐. 알퀘이드는 '시키는
집에 가'라고 했어.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난 안 가'라는 소리가 되겠지. 알
퀘이드는 혼자서 흡혈귀 찾기를 계속할 생각일 거야. 그렇다면 - 번화가 쪽
으로 가서 내가 먼저 그 흡혈귀인지 사자인지 하는 놈을 찾아내 버리겠어.
알퀘이드는 찾을 수 없겠지만 안경만 벗으면 사자를 구분할 수는 있게 되니
까.
" - 좋아"
안경을 벗고 다소간의 두통을 참아내면서 번화가 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
다.
"윽 - "
지끈, 관자놀이에 통증이 내달린다. 그다지 일부러 의식해가면서 [선]을 보
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맨눈인 채 거리를 걷기만 해도 아무래도 뇌에 부담이
가해지는 모양이다.
"제길 - 안경까지 벗었는데 아무 데도 안 보이잖아."
......번화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선]을 하고 있다. 예전에
봤던, 전신이 마치 낙서들도 도배되어 있는 것 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찾
아볼 수가 없다.
"......아윽..."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안경을 벗고 있는 한 두통은 점점 더 심해
져만 갈 거다. 하지만 -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보냐.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 번 번화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 하아, 하아 - "
너무 오랫동안 달린 피로감과 두통 탓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번
을 달리고 또 달려봐도 사자는 커녕 다른 이상한 사물들조차 보이지 않는
다. 이마에 손을 대 보니 이상할 정도로 열이 달아올라 있었다. 악성 감기
에 걸려 40도에 가까운 열을 내뿜고 있는 모양이다.
"......제길, 아직은 - "
혼잣말을 되뇌이며 순회를 재개한다. 그때 -
"............아"
요 근처가 아닌, 좀 더 떨어진 곳에.
빌딩과 빌딩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뭔가 불꽃 같은 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게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죽음의 [점]이 퍽 하고 튀어올라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
" - 저건"
......틀림없어. 예전에 알퀘이드가 사자를 쓰러뜨렸을 때랑 같은 거야. 알
퀘이드 이자식 - 그런 몸을 해갖고서 역시나 혼자서 싸우고 있었군......!
" - 찾았어......!"
피로감도 두통도 모두 잊고 골목 쪽으로 달려나간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목. 빌딩과 빌딩 사이에 있는 좁다란 길을 달려간다.
[죽음]은 사방으로 흩어지고는 이내 사라져버린다...제법 많은 수의 사자와
싸우는 걸까, 이 정도의 죽음의 양은 어딘가 이상하다.
" - 큭"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건.
목적한 골목 뒤쪽으로 가까이 감에 따라 끼익 끼익 하고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는 내 등골이었다.
"하 - 아"
마치 뼈를 톱으로 조금씩 썰어내는 듯한 느낌. 그건 나 스스로에게서 발해
내보내지고 있는 아픔이다.
본능이 부르짖고 있다. 이 앞은 위험하니까 지금 당장 돌아가라고.
"시끄러 - "
하지만 그런 사실 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어. 이 죽음
의 양은 보통이 아냐. 이 안쪽. 골목 뒤켠에서 무엇인가, 엄청난 일들이 일
어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와서 물러설 순 없어. 알퀘이드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어. 만
약 - 여기서 내가 도망치듯 물러나 버린다면 알퀘이드는 멋대로 죽어버릴
거야.
그러한 예감이 머리 속에서 내내 지워지지 않았고 나 자신 스스로가 죽음이
충만한 그 장소에 발걸음을 옮겨 들어가고 있었다.
" - !?"
의식이, 얼어붙었다.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지면에 나뒹굴고 있는, 몇 사람이나 되는 인간의 형체. 얼굴이 없고 팔이
으깨어졌으며 창자가 사방으로 찢겨흩어져 있는, 온몸을 시뻘건 색으로 물
들인 시체들. 벽도, 바닥도, 그리고 머리 위의 달 마저도.
여긴, 그저, 붉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마지막 한 사람이었는지 온몸이 낙서로 도배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 그
것은 그녀의 손에 절명했다.
한 손으로.
사자의 머리를 벽에 처닥고는 마치 토마토 으깨듯 박살내 버린다. 그래도
아직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녀는 머리가 없는 시체의 몸뚱이를 세로로 찢고
는 그대로 노면에 처박아 버렸다.
"알 - 퀘이드"
달빛과 붉은빛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중심에 알퀘이드가 있었다. 알퀘이드
는 내가 있는 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달을 쳐다보며 - 활홀한, 거친 숨소
리를 연신 내뱉을 뿐이다.
" - "
말을, 걸 수가 없어. 등골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정점에 달해있다.
톱은, 벌써 뼈를 썰어내 버린 모양이다.
- 끼이, 끼.
의식이 비명을 내지른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라고.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외쳐대고 있다.
그때.
알퀘이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알퀘이드의 눈은 평소의 붉은 빛깔이 아닌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게 아냐. 그저 내가, 그 [눈]을 본 것
에 지나지 않아.
두, 근.
온 몸의 피가 용솟음쳐 오르고 의식이 멀어진다.
- 가장 처음에 느낀 건 압도적이기까지 한 위기감.
여기 있으면 안 돼. 저것의 앞에 있어서는 안 돼.
죽을 거야.
절대 못 이겨.
저 [생물]은 레벨이 너무도 달라. 레벨이 높고 낮은 것하고는 상관없이 레
벨이라는 판단기준 그 자체가 우리와는 너무다 다르다구. 저 앞에서는 그저
- 그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틀림없이 죽을 거라구.
두, 근.
몸 속의 모든 혈관이 팽창한다.
처음엔 공포.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완전하기까지 한 살의.
왜냐하면 저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까. 그러니까 죽여. 빨리 죽이
라구. 여기서 죽여버려. 어서 죽여. 이 피의 맥동에 따라 저걸, 이 자리에
서 파괴해 버려 -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를 죽이라며 온몸이 비명
을 내지르고 있다. 이런 모순이 있을 수가 - 죽임당할 줄 뻔히 알면서 상대
를 죽이란 말야? 죽기 싫으니까 죽이라면서, 여기 가만히 서서 죽으라고 한
단 말인가.
"카 -, 아"
......안 돼. 난,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저 눈 - 저 금빛 눈을 봐서는 안
돼.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퀘이드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
어.
두근, 두근, 혈액이 끓어오른다. 거스르기 힘든 피의 약동.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성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것이 있다.
"크 - 하아, 아 - "
무엇 때문에 죽이고 싶은 거지?
죽고 싶지 않으면 죽기 전에 죽이란 말야?
아니, 그런 건 전혀 이유가 되지 않아.
살의에 이유는 필요치 않아.
이제 그만 자신한테 솔직해져 보지 그래, 토노 시키.
아주 오래 전에 - 넌, 저 여자를.
"입 - 다물어"
아니, 입다물어할 쪽은 이 이성(理性) 쪽이라구.
확실히 그렇지.
난 그냥 녀석이, 알퀘이드를 원할 뿐이야. 생각해 내봐, 그때의 감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거 다 알고 있었잖아.
저 생물을 이 손으로 죽여 살인자로서의 동정을 잃은 바로 그 순간부터 - !
"아 - 아"
그래, 모든 걸 원해.
마음도 몸도,
눈물도 타액도,
피도 육체도 죄도 벌도 욕망도 초조함도 -
"하 - 아......!"
호흡이 거칠어져.
의식을 가눌 수가 없어.
알퀘이드의 눈동자에 먹혀들어가.
흐릿하게 흔들리는 금빛 눈동자.
그건,
죽여도 다 채워지지 않을 정도의.
" - 시키!?"
알퀘이드가 내 존재를 눈치챘다. 알퀘이드는 내가 그 눈동자에 홀린 듯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곧 눈동자를 원래 색인 붉은빛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이제와서...그런 짓 해봐야 너무 늦었어.
나이프를 손에 들고 알퀘이드를 밀쳐 넘어뜨린다. 알퀘이드에 몸에는 아무
런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아 매우 손쉽게 힘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마치 말
을 타는 듯한 자세로. 한 손을 여자의 머리에 두고, 나이프를 든 다른 한
손을 머리 위로 힘껏 치켜든다.
남은 일은.
그 가슴 사이로 이 일격을 찔러넣는 것 뿐.
"진정해 - ! 그건 네 의사가 아니잖아, 시키......!"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머리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닥쳐 - !"
목을 조르는 팔에 힘을 가한다. 알퀘이드는 괴로운 듯 거친 숨을 내몰아쉰
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저렇게나 강인하던 생명이 지금은 팔 하나조차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있어.
"시 - 키"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알퀘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두근.
심장이, 흥분된 피로 맥동한다.
"하아 - 하아 - 하아 - "
호흡이 어지럽게 흐트러진다.
시야가 바르게 보이지 않는다.
몸이 뜨거워 - 지금 당장 벗어나고 싶어.
"하아 - 하아 - 하아 --"
몸을 움직인다.
여자의 배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린다.
알퀘이드의 두 발을 벌리고 그 사이로 몸을 들이댄다.
"......!"
불안한 눈동자로 날 쳐다본다. 그 시선이, 더욱 내 머리 속을 어지럽게 만
들어버린다.
"하아 - 하아 - 하아 - "
충혈되어 있어. 생식기는 터져버릴 정도로 발기했고, 난, 지금 당장 이 여
자를 범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붉게 상기된 뺨. 부드러운 목줄기. 내 밑에 깔린,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
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여자의 육체.
"하아 - 하아 - 하아 - "
약동하는 피의 흐름이 온몸에 전해져 온다.
"하아 - 하아 - 하아 - !"
금색의. 영혼마저 빨아들일 것 같았던 눈동자.
머리에서 팔을 치운다. 그리고 그대로 여자의 가슴에 만진다. 몸을 만진다.
발을 만진다.
옷 아래의 흰 배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그 차가온 체온을 느껴본다.
"하지마 - 이런 거, 시키답지, 않아......!"
열기를 머금은 목소리.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붉은 눈동자.
그리고 내 의식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응......!"
필사적으로 수치심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알퀘이드는 필사적으
로 두 팔로 날 밀쳐내려고 한다. 그런 알퀘이드의 두 팔을 모두 붙잡은 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지면에 눌러버린다. 못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양손의 자유를 잃은 알퀘이드는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듯
한 포즈로 날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 - 큭"
그 모습이 더 없이 매혹적이다. 나도 두 팔은 쓸 수 없다. 두 팔을 놓으면
알퀘이드는 틀림없이 내 머리를 베려들 거야.
그 긴장감. 상대를 범한다는 사실보다 서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짐승처럼 끓어오르는 성욕에 박차를 가했다.
" - 그, 그만 - 그만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 - "
그런 흔해빠진 대사를 마지막까지 지껄이게 놔둘 것 같냐. 난 내 온몸 중에
유일하게 자유로운 입으로 알퀘이드의 옷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숨소리를 내뱉는 입으로 거칠에 알퀘이드의 옷을 벗긴다.
"......응, 시키, 제발, 진정 - !"
약하게 움찔움찔 경련까지 일으키면서 아직도 그따위 저항이나 하고 앉았고
말야.
- 하, 아.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내 숨소리가 알퀘이드의 배 위로 흐른다.
"아 - 응............!"
상당한 민감체질인지, 겨우 그 정도 한 것 가지고 알퀘이드는 몸을 비틀어
댄다.
...두근두근거리는군.
옷을 벗겨내며 그녀의 흰 살결을 혀로 핥는다.
"시키, 안 돼 - !"
알퀘이드의 두 팔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보지만 지금은 내가 훨씬 더 세다.
저항하게는 안 내버려둬. 그대로 옷을 계속 벗긴다. 중간에 가슴의 융기된
부분에 옷이 걸렸지만 억지로 웃도리를 잡아채버렸다.
두 개의 가슴이 상하로 흔들린다. 아름다운, 틀림없은 여자의 증거가 거기
있었다. 그대로 한쪽 가슴을 물었다.
"아아 - !"
알퀘이드가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 튕겨오른다.
상관없어. 뜯겨나가기 직전까지 꼭 물고 있다가 마치 맛이라도 음미하듯 혓
바닥을 놀린다.
"시......키........., 그만......!"
알퀘이드의 목소리에 미약하게 열이 달아오른다. 핑크빛 유두가 딱딱해진
다. 수컷들의 발기랑 마찬가지인 듯 알퀘이드의 유두는 건드리면 건드릴수
록 이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딱딱하게 일어나기만 한다.
"응 - !"
그런 사실이 스스로도 부끄러운 모양인지, 알퀘이드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눌러 참는다.
"시키 - 이런 짓하고, 나중에 - "
알퀘이드가 하는 소리 따위는 무시한 채 그녀의 가슴을 계속 핥는다.
"응......아 - !"
알퀘이드의 머리가 덜컥하고 흔들린다. 힘을 주면 준 만큼 도로 퉁겨져 오
르는 가슴의 감촉. 새하얀 가슴은 점점 부풀어올랐고 조급하게 무언가를 바
라고 있기라도 한 듯 붉은빛을 띠기 시작한다.
세차게 빨아올리듯 가슴에 입을 댔다.
"......읏......으응......아, 응 - "
달아오른 목소리.
땀으로 범벅이 된 여자의 육체.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괴로운 숨을 내몰
아쉬고 있다. 부드러운 유방을 혀로만 유린한다. 의미는 없다. 그 비슷한게
있다면 그저 핥고, 적시고, 마구 괴롭히고 싶은 그런 욕구들 뿐.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든 흰 유방은 희미하게 반짝
반짝 빛을 내뿜고 있는 것 같다.
"...하악......그, 그만......절대로......이런 짓......용서 안 할...거,
야......!"
이를 악물고내는 듯한 소리. 아직도 수치짐을 모조리 버리지 않은, 그런 어
중간한 목소리는 기분만 잡칠 뿐이다.
유두를 깨문다.
"응, 큭 - !"
알퀘이드의 몸이 다시 한 번 꿈틀하고 튀어오른다.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높이. 마치 가슴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튀어올랐다기 보다는 터져올랐다라
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어차피 정성들여 애무할 것도 아니다. 그대로 고개를 움직인다.
"그, 그만......시키, 제발 - "
혀를 유두에서 가슴 사이로.
"거기, 그렇게 하면, 나, 정말 - "
새하얀 살결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듯 강렬하게, 맨 피부를 빨아댄
다.
"하아 - !"
알퀘이드의 두 팔이 마구 요동친다. 그걸 힘으로 억누르면서 다시 혀로 핥
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쇄골로, 거기서 목덜미 쪽으로 적셔들어간다.
"아냐......시키......는, 나, 안 좋아......하는데......!"
그런 거 몰라.
그딴 거 하나도 안 들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든 알퀘이드의 육체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다. 그
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그녀의 육체는 땀으로 젖어들어 특히 더 아름답게 보
인다.
- 두근.
혈류가 아파와.
남근은 지금 당장이라도 알퀘이드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해.
"하아, 하아, 하 - 아"
참을 필요는 없어.
하고 싶으면 하면 되잖아.
알퀘이드의 목덜미에서 떨어져 하복부의 수풀 쪽으로 입을 옮겼다.
".........!!!"
한층 더 강렬하게 알퀘이드의 몸이 요동쳐댄다. 이대로는 그녀의 두 손마저
금방이라도 풀려날 것만 같다. 그 전에. 움푹 파인 배꼽보다 훨씬 더 아래
쪽의, 금빛으로 물든 수풀림의 한가운데. 핑크빛으로 떨고 있는 살짜기, 부
풀어오른 그 부분을 혀로 핥는다.
두 장의 벽을 가르기라도 하듯 혀를 안쪽으로 찔러넣고 윗부분에 있는 둥근
융기를 가볍게 삼킨다.
"아 - 그, 그만 - !"
전신이 활처럼 세차게 꺾이는 알퀘이드. 여성의 성감대 중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깨물은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온몸을 혀로 핥기만 했을 때의 감각
이란 그야말로 다른 차원의 쾌감이라 할 수 있다.
가만히 보니. 알퀘이드의 그 안쪽은 점막과 점막 사이로 촉촉히 물기를 머
금어가기 시작한다. 무르익은 과실이 그런 싱그러운 자기 자신을 자랑이라
도 하는 것 같은 촉촉하고 달콤한 향기. 아직 이물을 삽입하기에는 윤활유
가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여자를 제대로 한 번 안고싶다는 생각은 내 머리 속에 조금도 자리잡고
있지 않으니까.
난 그냥 - 이 여자의 몸을 원할 뿐이야.
" - 시, 키"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안 듯 알퀘이드의 목소리는 매우 가늘어져
있다. 저항할 뜻도 없는지 그저 젖어있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다.
" - "
젖은, 눈동자.
그건.
울고 있다, 는 소린가.
"큭.........!"
두통이 인다. 빨리 계속하라고 본능이 외쳐대고 있다. 여기서 그만두면 반
드시 죽어. 여기서 이 여자를 꼼짝못하게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틀림없이
어떤 비겁한 수작을 써서 날 죽이려 들 거야 - 라고 심장이 사납게 날뛰어
댄다.
" - "
울고 있어.
어째서 - 울고 있는 거지.
나같았으면, 절대로 울리거나 그러지 않았을텐데.
두통이 인다.
계속하라고 외친다.
- 내가 망설이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뭘 해야 하는지 이미 결정돼 있잖아.
나는 알퀘이드가 -
<1. 싫어하는 짓은 절대 못 해 - 선택>
- 못해. 알퀘이드가 싫어하는 짓은 두 번 다시 할 수 없어. 난 한 번, 이
두통에 눌려 그녀를 죽인 적이 있었어.
그러니까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져서 알퀘이드에게 눈물을 보이게 하는 짓
만큼은 아무리 두통 때문에 내 머리가 박살난다하더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거 아냐 -
"하 - 아!"
알퀘이드에게서 떨어진다. 두통도 사라졌고 심장박동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마음 속에 가득하던 흉폭한 생각들도 사라지고 난 이제서야 겨
우 지금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돌이켜 본다.
" - 무슨 - 짓, 을"
나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있어.
알퀘이드를 쓰러뜨린 기억.
머리를 잡아누르고 나이프로 찌르려 했던 기억.
...그리고 그 다음에 있은 능욕행위를.
" - "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퀘이드는 옷을 고쳐입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나는 - 어떻게 사과하면 되
지? 미안해, 같은 소리로 용서받을만한 일이, 아냐.
" - 알퀘이드, 나 - "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정작 사과해야 할 쪽은 오히려 나니까."
알퀘이드는 어색하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그렇게 답했다.
"무 - 무슨 말 하는 거야, 잘못한 건 내쪽이라구. 내가 - 좀 더 똑바로 정
신차리고 있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소용없어. 시키의 힘으로는 견뎌낼 수 없었을테니까. 시키는 내 [마안]을
본 거란 말야."
"에 - ? 마안이라니...네로 때의, 그 눈 말하는 거야......?"
"......그래. 나, 아깐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로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
로 갈증을 느꼈고 혼자서는 해결조차 할 수 없었어. 그래서 - 사자들을 찾
아내 어떤 충동을 파괴충동으로 바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던 거야. 그때
난 나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 그때 여기 온 시키가 내 마
안을 보게 된 거야."
"......확실히 내가 이상하게 된 것도 알퀘이드의 금빛 눈동자를 보고나서
부터이긴해도 - 하지만, 그냥 한 번 본 것 뿐이잖아. 난, 나 스스로 - "
"그게 아냐. 시키, 내 마안은 매료의 마안이라고 해서 쳐다본 상대를 내 노
예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시키가 나한테 성적욕구를 느낀 것도 틀
림없이 그 때문일 거야."
" - 그건 - 아니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알퀘이드한테 조종당하지 않고 있어도.
난 알퀘이드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이번 일은 내가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야...미안해, 시키. 시키 마
음이랑은 상관도 없이 시키 몸을 마음대로 조종해 버려서."
알퀘이드는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이야기한다...그런 식으로 사과하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데.
나한텐 조종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어. 오히려 - 그걸
기회로 삼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었단 말야. 그런데...
"알퀘이드, 나 - "
"사과하지마...시키, 이건 사고였어. 나도 잊어버릴게, 시키도 잊어줘. 그
렇게 하는게 틀림없이 서로를 위해 도움이 될 거야."
라고 말하곤, 알퀘이드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알퀘이드......?"
" - 오늘밤은 이걸로 끝내기로 하자. 이걸로 사자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니까
더 이상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도 무의미해."
"...그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시체의 산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래. 남
들이 보면 큰일이라구."
"걱정할 필요 없어. 한 번 흡혈종이 된 것들의 유체는 남지 않아. 흙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거들은 소멸하게 되면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
야. 잠시 지나면 각자 모두 티끌로 돌아갈 거야."
알퀘이드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왠지 힘없는 듯한 발걸음으로 골목길
을 빠져나갔다.
"..............."
그런 알퀘이드를, 지금의 나로선 막아설 수 없었다. 내 두 손에는, 아직 알
퀘이드의 감촉이 남아있다.
" - 바보. 뭐 이런 바보자식이 다 있어."
홀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참극의 무대가 된 후미진 골목 안에서 참회라도
하듯 저 하늘의 달을 바라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