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0. 10(토)
■ 춘천 박씨 중시조 박항(春川 朴氏 中始祖 朴恒)
◇박항(朴恒 1227∼1281(고종 14∼충렬왕 7)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춘천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서 박, 신, 최, 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춘천박씨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춘천신씨, 춘천최씨, 춘천 허씨를 만나보지 못했다. 풍수학을 하는 사람들은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위치한 춘천박씨 중시조 박항의 묘소가 명당이기 때문에 27개 파까지 나뉠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고 말한다.
춘천박씨 중시조의 묘소를 답사해 보면 가문의 계승과 흥망성쇠가 풍수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음 리로 넘어가는 배후 령을 사이에 두고 마적 산을 좌청룡, 수리봉을 우백호로 삼아 유택을 마련했다.
묘소에서 바라보면 넉넉하게 펼쳐진 우두 벌 건너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과 수문장격인 삼악산이 박항의 묘역을 에워싸고 있다.
강원대 옥한석 교수는 박항의 묘소는 우두 벌을 향한 연소형(燕巢形), 봉의산에서 제비가 먹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오르는 형세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문제는 좌향이라고 했다. 혈처를 봉의산 쪽으로 더 틀었어야 된다는 분석일 것이다.
이 때문에 귀한 인물이 나기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춘천박씨는 중시조 이후 자손은 무수히 번창 했지만 특출한 인물이 드물다고 했다.
"박항 할아버지는 고려공신이었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이신벌군(以臣伐君) 하지 않는다는 어른의 유훈을 받아들여 세손들이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과장에 나가지 않았던 때문에 일세를 풍미할 만한 인물이 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고 보니 춘천박씨네는 절개가 뛰어난 집안이네요. 선조께서 평소 자손이 번 창 하기를 원했지 귀한 인물이 나기를 원치는 않았기 때문에 지관이 그런 자리를 점지해주었다는 설도 있던데..."
춘천박씨 종친회사무실에서 자주 만났던 박양민 총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두 벌을 가리켰다.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 물머리가 한눈에 들어오니 자손이 어찌 번창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춘천박씨의 시조는 신라를 처음 연 박혁거세라고....박 총무는 어깨에 힘을 준다.
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 신라 54대 왕)의 아홉 왕자 중 일곱째 왕자인 강남대군 언지(彦智)의 11세손인 박항이 춘천을 본관지로 하는 춘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박항은 고려고종14년(1227)에 춘성군 장본, 맥국의 도성이었던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 ; 조정의 문서를 작성 보관하던 관청)에 등용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스물일곱에 충주목사, 스물아홉에 경상전라 안찰사, 설흔 둘이든가 지금의 중앙부처에 해당하는 문하성 우언정을 역임할 정도로 관운이
좋았지요."
종친회 박양민 총무는 국민교육헌장 암기하듯 문중내력을 줄줄이 꾀고 있었다.
그는 단단한 외모처럼 중시조의 행장도 또박또박 짚어나갔다.
국자감관리, 중추원승선(정 3품직) 등 두루 요직을 거쳐서 박항의 나이 쉰둘인 충렬왕 4년(1278)에 동지밀직사(왕명 출납 관장하며 군사기밀 담당 종2품직)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환국했다.
왕을 무사히 호종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 반역자를 물리친 공신)이 되었고 중서문하성 평장사(平章事 :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 정2품직)를 거쳐 삼중대광(정1품직)에 올랐다. 충렬왕은 그간의 노고에 답하고자 박항을 춘성부원군에 봉했다.
작고한지 백여 년이 지난 공민왕 때 박항의 충효와 애국치적을 포은 정몽주가 상소하여 마침내 조정에서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고려에 처 들어와 군기와 군량을 징발할 때였다.
전쟁포로 다루듯 원나라 감독관 혼도와 홍다구 등의 횡포가 심했다.
이를 보다 못한 박항이 원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감독관의 횡포를 막았다.
많은 백성들이 그의 덕망과 지혜에 감복했다.
"춘천이 마침내 몽고의 침입으로 고립되자 백성들은 봉의산성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중과부적이었죠.
여러 날 버티다가 성은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몽고군에게 유린당했습니다." 삼백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때 박항의 부모도 놈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개경에 있던 박항이 비보를 듣고 급히 고향 춘천으로 달려왔다.
"이 부분이 좀 과장된 느낌도 들지만, 부모님의 시신도 찾을 겸 춘천에 당도한 중시조 어른께서 삼백여구나 되는 수많은 시신을 모두 수습
하여 장례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박 총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유포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막국수집이 보였다.
춘천박씨 중시조 박항의 큰아들 원굉은 아버지처럼 평장사를 역임했으므로 평장사공계라 불리고 둘째아들 원비는 예조판사를 지냈으므로 판사공계라 한다. 평장사공계는 13개 계파로, 판사공계는 14개 계파로 분파되어 모두 27계파로 자손이 번창했다.
"소풍 여러 번 왔었는데, 만천리 청목집 뒤편에 있는 박씨 묘 말입니다. 그 묘소도 춘천 박씨," "아닙니다. 청일 박씨 묘소입니다.
맏이, 평장사공계 원굉 어른의 묘소는 원래 3군단 본부 국기게양대 자리에 있던 것을 부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기린면사무소 뒷산으로 이장했죠. 동네사람들이 박 대감 묘라고 부르구요. 둘째, 판사공계 원비 어른의 묘소는 육로로 청평사 가는 북산면 청평리에 있습니다."
고려 말의 학자 익제 이제현은 말년에 청평산(지금은 오봉산이라 부름)에 들어와 문수사를 열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김시습도 그랬고 춘천부사를 지냈던 상촌 신음, 어우당 유몽인, 다산 정약용도 소양강을 따라 춘천에 오면 익제는 없지만 그가 살았던 청평산을 찾았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전해진다.
그 익제 이제현이 바로 박항의 손자사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싶다. 어디 그뿐인가.
영남학파의 대두 퇴계 이황의 어머니가 춘천박씨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황은 중시조 박항의 5대손인 사정공 치(治)의 외손자다.
좌찬성 이식(李埴)은 부인과 사별했다. 평소 청렴한 생활을 해온 터에 어미 없는 자식들만 남게 되어 집안은 더욱 썰렁했다.
그때 이황의 어머니, 춘천 박씨가 후실로 들어왔다. 아들 다섯만 있는 집안에 들어와 먼저 딸을 낳고 마지막으로 이황을 낳으니 이황은 7남1녀 중 막내가 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후실로 들어온 춘천 댁은 안동지방에서 알아주는 자모요 현부였다고 한다.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남편 이식을 잃는 비운을 맞이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낳은 자식만 몰래 빼가지고 도망가서 팔자 고쳤을 텐데....옛날 어르신들 생각하면 절로 머리 숙여지지요." 필자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하자 종친회 박 총무가 막국수 집에 들어가서 얘기 나누자고 재촉했다.
"요즘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대가 아니어서 퇴계나 어머니 모두 춘천에 자주 들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중에 전해지는 말로는 퇴계가 여덟 살 때던가, 열한 살 때던가, 어머니 따라 외가에 두어 번 들른 적이 있었고 관직에 있으면서 청평산 답사 길에 또 한 번 춘천 외가를 다녀갔다고 합니다."
퇴계의 외가는 지금 퇴계동 한주와 금호아파트 부근이었다고 한다. 춘천 외가에 들르면 앞개울(윗 무릉계)로 낚시를 나갔다.
한번은 하인들과 함께 개울로 갔다. 장난삼아 소여물을 개울에 뿌렸더니 물고기들이 먹이를 주는 줄 알고 모여들었다.
그 물고기를 춘천사람들은 공지천과 열결시켜 '공지어(孔之魚)'라고 부르는데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춘천민물고기 사랑회"에서는 그 물고기를 "두우쟁이", 멸종된 어종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경지가 높아지자 그의 호(號) 퇴계를 따서 금병산에서 발원해서 곰진내에 이르는 개울을 퇴계천, 외가동네를 퇴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동진을 비롯해서 민요연구로 이름난 강원대 박민일 교수, 춘천교대 총장을 지낸 박민수 시인, 강원도 자치행정국장을 지낸 박영환 등 우리 주위에서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춘천 박씨네 사람들은 많다.
◇ 도움말 주신 분 :종친회 박양민 총무, 글/소설가 崔鍾南, 사진/徐 英
기사입력일 : 2002-08-14 20:38 l 출처 : 강원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