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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봉선생 전(東峯先生傳)
권극립『權克立, 1558년(명종 13)~1611년(광해군 3)』
동봉은 안동인이니, 곧 우리 권태사(權太師: 權幸.안동권씨 시조) 19세 손이다. 고려말 조선 초 예천 부원군 일재공(一齋公)과 아드님 예천 방백(方伯) 동고공(東皐公)께서 여러 代에 걸쳐 영화를 누려 1代가 되니 벼슬로써는 가문의 으뜸이다. 또 4세 사과공(司果公)에 이르러 처음 영천에 살았다.
또 3세 지나서는 동봉공(東峯公)이 계신다. 공은 일재공(一齋公)과 동고공(東皐公) 선생과의 거리가 이미 7, 8세이다. 뿌리가 깊고 기원이 멀며, 그의 정기(精氣)의 두터움과 타고난 바탕의 순수함은 진실로 보통 사람과 달라서 일찍 경지에 이르렀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드시니, 이름은 극립(克立, 1558~1611)이고, 자는 강재(强哉)이다. 일찍이 주구봉(周龜峯)선생에게 배웠으니, 구봉선생은 신재공(愼齋公)의 아드님이시다. 공은 비록 신재공(愼齋公)에게 미치지 못하나, 구봉(龜峯)선생을 따라 배웠으니, 반드시 그분의 풍모에서 깨우침이 있고, 그분의 아취로 넓혔을 것이다. 같은 군 조지산과 공은 함께 구봉(龜峯)선생에게 같이 유학한 까닭에 지산공(芝山公)이 공과 더불어 한 편지에는 꼭 “문계(門契)”라 말하였다.
만력 임진년 왜란 때에 이르러 공과 향인들은 기룡산(騎龍山) 아래에 처음 들어갔다. 계사년 북쪽 30여 리를 돌아서 입암의 아름다운 곳을 얻었는데, 암중에는 예로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 공이 처음 이르러 그 동부의 그윽하고 깊음을 보니, 그늘진 숲은 얽혀 빽빽하고, 맑은 개울은 가운데에서 솟아오르고, 바위 기슭은 기이하고 가파르게 있었다.
마음으로 이곳은 단지 일시의 피난지일 뿐만 아니라, 집을 지어 노년을 보낼 만하다고 생각하고, 즉시 손윤암과 함께 바위 북쪽 넓고 평평한 곳을 정하여 집을 짓고, 동쪽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가 서로 마주 보는 면에 드러나 있었는데, 공은 곧 취하여 자호로 삼았다.
옥산 장(張)선생 역시 진원공(陳園公)의 파릉(巴陵)의 입장이 되어 부들부채와 짚신으로 청송과 영천 사이를 거처 없이 왕래하였다.
공은 쫓아서 사는 사람인 정사진鄭四震과 함께 한두 번 객사에 가서 뵈었다. 선생이 편지를 보내와서 “날마다 군섭과 함께함에 서책을 특별히 마음에 두면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가사를 처리함에 스스로 규모와 정도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짜 사업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공이 충신과 돈후의 자질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일상생활과 실천으로써 이를 말한 것이다. 편지하고 수개월 뒤에 장張선생이 입암 골짜기에 와서 놀았는데, 자주 여러 사람의 말을 칭함에 참으로 속임이 없었다. 마침내 함께 살겠다는 약속을 정하고, 흰 돌에 이름을 적어 바위 구멍에 이를 감추었다.
또 이를 위해 재의 이름을 명하여 “우란재(友蘭齋)”이라 하였다. 공은 손윤암, 정우헌, 수암 형제를 네 벗으로 삼았다. 네 벗은 공을 첫째로 하였는데, 공은 장 張 선생보다 5세나 젊었다. 그리고 네 벗이 번갈아 모시면서 강의와 토론을 하고, 물러나면 혹 옷깃을 바로잡고 서로 대하고, 혹 책을 펼쳐 함께 토론하고, 혹 신을 신고 돌 비탈길을 올라 바위에서 쉬기도 하고, 혹 다 함께 물놀이와 목욕을 하니, 산 밖에 일종의 명예와 이익과 득실 같은 것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하니 공이 자득한 바가 얕지 않은 것이다.
까닭에 장張선생의 입암기에 “지금 우리 벗들이 입암의 위에 나아가 각각 자신이 입지(立志)한 바를 생각하였는데, 내가 입지한 바는 곧 나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과 효제충신(孝弟忠信)의 도라고 일렀다.”라고 말하였다. 왜란이 이미 끝나자, 동시에 전쟁을 피한 사람들이 산에서 나왔다.
공은 입암에 살며 뜻을 이루고자 하고 장차 장선생을 위하여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이곳에서 살고자 하였다. 장선생 또한 옛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때때로 입암으로 와서 공과 우란友蘭이 되었으니, 탐구하고 토론하는 즐거움은 항상 이와 같았다. 박대암이 왜란으로 인하여 청송에 들어와 주방산 아래 머물렀다.
공은 매번 맑은 가을과 온화한 봄에는 문득 수레들 타고 가서 토론하고, 여러 날을 지내다 돌아왔다. 옥산 이우는 율곡선생의 아우인데, 청송(경북 선산의 옛 지명)에 와서 살았다. 편지로 인사 말하는 서명 자리에 꼭 도계(道契)라 칭하였다. 만년에 곽성재, 서락재와 더불어 서로 추앙하고 존중하며 왕래하였다.
일찍이 서락재와 함께 동해로 유람하였다. 세 번 자옥(紫玉)에 들어갔고, 두 번 임고(臨皐)에 갔다. 돌아와서는 낙제공(樂齋公)이 편지로 같이 유람한 여러 현자를 두루 서술하였는데, 공을 일컬어 학문이 두텁고 바탕이 순후하니 우리 무리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때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이 경주의 윤(尹)이 되어, 낙제가 그를 위해, 소개하여 공을 한번 보았는데, 바로 더불어 의기투합하여 마음을 허락하고, 공의 연원을 둔 학문과 선조의 업을 계승함을 감탄하고는, 평상시 속된 선비가 다가갈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름난 현자들이 서로 사모하고 마음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다.
신해년(1611) 갑자기 질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니, 계사년으로부터 산에 들어온 것이 대개 19년이다. 이때 장(張)선생이 옥산 옛집에 있으면서,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다. 그 대략은 “용모는 순박하고 수수하나 마음에 품은 것은 충신(忠信)의 덕이요, 그 말은 짧고 어눌하나 지키는 것은 올곧고 굳은 지조이니, 옥돌 속에 옥을 감추었고, 홑옷 속에 비단을 입었도다.”라고 말하였다.
또 “공은 매번 나와 같이 늙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고을이 멀어 공의 바람에 따를 수 없었으나, 해마다 꼭 한번 이르면 공은 매번 기쁘게 서로 맞이하였고, 온종일 공과 더불어 그 사이를 거닐었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이에 장(張)선생이 동봉공에게 깊이 있게 서로 허여했음을 볼 수 있도다.
장(張)선생은 세상의 학자들은 밖에만 힘쓰고 안은 버려둠을 걱정하여, 이들이 하여금 명성을 감추고 수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동봉공은 스스로 다스림이 이와 같았다. 장(張)선생이 죽음을 슬퍼하고 행적을 서술함이 또 이와 같았다. 이것이 동봉공이 동봉공이 된 까닭이다.
공은 좋은 자질을 받았고, 땅은 좋은 계곡과 산을 점유하였다. 또 한 때는 좋은 스승과 벗을 얻었으니, 만약 하여금 하늘이 백 세의 수명을 주어 더욱 그 뜻을 구하고 그 업을 궁구하게 했다면, 만년에 조예의 높음이 마땅히 어떠했겠는가? 어떻게 4년이 되지 않아 돌아가시어, 하여금 계산(溪山)의 뜻을 마칠 수 없고, 오두(烏頭)의 힘을 오래 할 수 없음을 알았으리오?
오호라! 공은 안에 쌓음이 두텁고, 문장은 간명하나, 아직 수백 년에 미치지 않았는데 문장과 서론이 적막하게 전함이 없구나!
념(濂)이 일찍이 듣기로 공의 증손자 목(穆)공이 공의 전후 문적과 행록을 모아서 실록을 적어 후대에 전하고자 하였다.
갑자기 화재를 만나 어머니의 빈소에 옮겨붙으니, 불 속으로 들어가 신주를 안고 죽었고, 남겨진 문적도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니, 진실로 슬퍼할 만하다. 입암은 동남지역에서 최고의 명승지로 공이 이를 드러내었다. 이후 엄숙하고 맑은 제사 지내는 곳이 되었고, 또 자손들이 인하여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에 살게 되었다.
공의 자식과 손자가 모두 장(張)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공이 남기신 뜻을 잃지 않았다. 증손에게도 효자가 있고, 현손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어, 모두 조정에서 거두어져 이에 정려로 표창되었고, 공로로 증직(贈職)되었다. 운손과 잉손이 번창하니 모두 학문과 품행과 고상한 뜻이 있어, 옛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이것은 동봉공이 자신을 맑게 하여 후세에게 물려준 것이니, 아! 숭상할 만하다.
지금 공의 6대손 제행씨가 선조의 행적이 이미 멀고 증명할 것이 없음을 근심하여, 공의 가문 계보와 생몰과 입암에 들어온 일의 경위를 기록한 것과 장선생이 이에 힘써 권장하고 부탁하여, 편지와 입암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 후대에 동봉공을 찾는 것이 이 책 속에 있을 것이다. 읽기를 두세 번 하고, ‘서낙재가 자연 속에서 나란히 하여’라고 칭송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강송하기를 다 하지 못하였다. 공의 50년 독서에 감탄하고서, 문득 그분의 말씀을 몸소 듣는 것 같았다. 마침내 책 중에 글을 열거하여 이를 위해 전한다.
찬왈
장선생은 이 말씀을 하였도다.
옥의 원석이 동봉공의 자질이요.
비단옷에 홑옷을 입음이 동봉공의 꾸밈이로다.
동봉공은 이러한 바탕과 학문이 있어.
이를 갈고 갈아 가라앉혀 온화하니
거의 빛나고 빛남에 가깝도다.
아! 둥근 달이 떨어짐이여!
끝내 떠오르는 달을 바라볼 수 없을까 하여
오래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네!
나란히 선 바위산 봉우리여!
사람은 이미 갔는데 바람은 그치질 않네.
공이 돌아가신 신해년(1611년)후 170년 경자년에 일월에 가문의 후손 권렴이 삼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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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東峯先生傳
東峯安東人。卽我權大師十九世孫也。麗季國初。醴泉府院君一齋及子醴泉伯東皋。重世奕葉。爲一代縉紳家冠冕。又四世司果公。爲甥於永川之永陽李氏而居永川。又三世而有東峯公。公之去一齋東皋已七八世矣。然根深而源遠。其鍾氣之厚。稟質之醇。固自殊凡而夙詣。年十六而娶。名曰克立。字曰強哉。生員鄭公琚。卽公之外舅也。世有科名行誼。又多蓄故書。公小少發軔有助焉。嘗學於周龜峯。龜峯愼齋子也。退陶先生嘗許愼齋以高世之士。公雖不及愼齋。從遊龜峯。必多有聞其風而博其趣矣。同郡曺芝山與公同遊學龜峯。故芝山前後與公書。必曰門契。至萬曆壬辰亂時。公與鄕人初入騎龍山下。癸巳轉北三十餘里而得立巖之勝。巖中古無居人。公始至見其洞府幽深。樾林糾鬱。淸溪中瀉。巖麓奇峭。心以爲此不但一時避兵之地。可以結茅送老。卽與孫綸菴卜築于巖北寬平處。東一巨峯相對呈面。公卽取以自號。于斯時也。玉山張先生亦爲陳園公巴陵之役。蒲扇草屨。往來棲屑於靑松永川之間。公與追棲人鄭四震。一再往拜先生于旅次。先生以書來曰日共君燮。加意書冊。持身處家。自有規模程度。此乃眞事業也。先生知公有忠信篤厚之資。故以此日用踐履處言之也。書後數月。張先生來玩巖壑。亟稱諸君之言眞不誣矣。遂定同棲之約。題名白石。藏之石窞。又爲之先命齋名曰友蘭。以公與孫綸菴,鄭愚軒,守菴兄弟爲四友。四友公首焉。公少先生五歲。而與四友爲之開函席。迭侍講討。退則或整襟相對。或披卷共討。或躡屐而攀磴憇巖。或聯袂而弄流濯淸。不知山外有一種聲利得失。是皆張先生引人著勝地之力。而公之所自得亦復不淺矣。故先生立巖記曰今吾儕就立巖之上而遊息焉。各思所以自立。吾之所立。卽吾仁義禮智之德。孝弟忠信之道云。而其二十八景所謂吐月峯。卽公所自謂東峯。故先生每以公爲巖中主人焉。倭燹旣熄。同時避兵之人。皆出山還頓。公則巖居成趣。且爲張先生與之終始仍居之。張先生亦自此還舊垞。而時來巖中。與公爲友蘭探討之樂則常如之。朴大菴因亂入靑松。留駐於周房山下。公每於秋淸春和。輒命駕往討。數日乃返。李槐山瑀。栗谷之弟。來寓靑松。自許八豪。而寒暄面簽。必稱爲道契。晩與郭省齋,徐樂齋相推重往復。嘗與樂齋爲東海之遊。三入紫玉。再到臨皋。旣歸樂齋以書歷敍同遊諸賢。而稱公厚學醇質。非吾輩所及。時李碧梧時發尹慶州。樂齋爲之介。一見公。卽與之投分許襟。歎公淵源之學繼述之業。非尋常俗士所可涯涘云。其同時名賢。相慕用傾倒如是。辛亥忽遘疾不起。自癸巳入山。蓋十九年矣。時張先生在玉山舊垞。于後親操文以祭之。其略曰其容則樸拙而所懷者忠信之德。其言則短訥而所守者貞固之操。可謂璞中藏玉。絅裏衣錦也。又曰公每請余同老。我以鄕遠。不能副公之望。歲必一至。而公每欣然相迓。日與之徜徉其間云。嗚呼。於此見張先生深相與於東峯也。張先生病世之學者務外遺內。要使之韜晦自修。而東峯之自治如此。先生之哀死述行又如此。此則東峯之所以爲東峯。而可謂善學張先生矣。公稟好資地。占好溪山。又得一時之好師友。若使天假以期頤之壽。益求其志。以究其業。則暮年造詣之高。殆不止爲東峯而止已。柰何知非四年而化。使不得了溪山之趣。不得久烏頭之力。嗚呼。公厚於內積而簡於詞華。未及數百年。文章緖論。寂寥無傳。濂嘗聞之。公之曾孫孝子公穆。有至性高識。年垂七十。齊衰在疚。裒聚公前後文籍行錄。欲記實傳信矣。忽値火延殯宮。赴火抱木主而死。遺文竟至蕩然。良可悲也。立巖之擅勝東南。公發之也。公旣公之於張先生。後爲張先生肅淸俎豆之所。又令子孫因居其洞壑。公之子若孫皆遊於張先生之門。而不失公遺旨。在曾孫有孝子。在玄孫有吉士。皆得上徹而有旌表焉。有褒贈焉。雲仍蕃鬯。皆有文行志尙。不隕其舊家聲。是東峯淑於身而裕於後也。噫可尙也已。今公之六世孫濟行。惕然於先蹟之已遠而無所徵也。紀公之世系生卒及入巖之始末。與夫奉先生周旋而得先生奬勉寄屬之見於手簡巖錄者來示余。噫後之求東峯者。在此卷中矣。余讀之再三。至徐樂齋所稱聯榻雲山。講誦不竆。嘆公五十年讀書之人。而怳然若親聽其謦欬也。遂敍列卷中語而爲之傳。贊曰張先生有是言矣。玉之璞其東峯之質。而錦而絅其東峯之文歟。東峯有是質有是文矣。磨礱之沈溫之。其庶幾乎彬彬。吁嗟望舒之霣其團兮。卒不得向吐月而長盤桓。立立兮巖與峯。人已去而風不泯。公歿辛亥後百七十年庚子陽月日。宗末後生濂謹敍。<끝>
厚庵集卷之七 / 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