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말하기를,
“어진 보좌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겼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7년(576) 원화를 받들다
전(傳)과 기(記) 몇 권을 지었다. 그 가운데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 남아 있다.
삼국사기 김대문 열전 中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등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됩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등장
화랑세기 필사를 한 분은 박창화씨 이며
필사는 일제강점기(일본 국내청 서릉부 정확히는 일본 황실 도서관 근무시절로 추측
만약 화랑세기 진본이 있다면 황실 도서관에 있을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책이 공개된 것은 필사자인 박창화가 이미 사망한 지 세월이 지난 1989년 2월이었다.
박창화의 제자 김종진의 아내 김경자가 생전에 박창화가 남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이후 등장한 필사본(모본)의
발췌본으로 칭해짐.)을 서울신문에 공개하였고,
6년 뒤 1995년 4월에는 일본 궁내성 용지에 필사 되어있는,
그 전 발췌본 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의 필사본(모본)이 공개되었다.
1.마복자
마복자는 성풍습 의식을 거론하는 분도 있지만
마복자는 성풍습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처왕의 7명의 마복자중엔 법흥왕도 있었다.
마복자와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과는 후견자와 추종자 관계이다
(아내가 임신하면 화랑가문에 들어가고 총애를 얻으면 남편이 사함을 올린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면 다시 들어가 세함을 바치고 총애를 받으면 물러난다)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
마복자 풍습은 사회적으로 약자의 성을 강자가 유린하는 것을 공인하고 당연시 하는 풍습으로
장기간에 거쳐서 그런 제도(풍습)가 유지된다면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조정대신의 처까지도 마복자의 풍습에 노출되어 있다면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
신라시대의 토우를 보면 자유로운 성의식을 엿볼수있습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 성생활이 문란하다.
기마 유목민족 기준으로 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계모라든지 형수 처제도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풍습을 봤을때,
종족보존을 위한 생활풍습이다.
(서라벌 군사연구소 이종학소장 충남대 교수)
남편 세종
미실부인의 정부
1. 사다함(사촌오빠)
2. 진흥왕
3. 진지왕
4. 진평왕
5. 진흥왕태자 동륜
6. 설원랑
(화랑세기 필사본기준)
신라-고려-조선-현대
성. 풍습 가치관에 대한 인식이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그이전과 그이후가 많은 변화를 맞이합니다.
조선후기 열녀문이나
인조시기 소현세자가 당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고
그 당시 심양에 조선인 노예시장이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노예한명의 가격은 소 6마리정도
(최대 50만 명까지 주장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다수는 조선으로 다시 못돌아왔지만
극소수는 조선으로 돌아왔고 그중 여성의 경우
화냥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필사본에 나오는 인물 검증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필사본에 나오는 인물 중 울주 천전리 각석에 나오는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 가운데 교차 검증된 예가 하나도 없다
(금석학 기준)
3. 용춘 용수 논란
삼국사기/삼국유사 기준 용수 용춘 동일 인물로 병기
그러나 필사본에는 다른 인물이며
용수 용춘에 붙은 관직에 있어서 동일인이면
있을 수 없는 관직과 호칭의 불일치성
삼국사기에서 "이간 용수"라는 호칭은
김춘추가 왕이 된 이후에 추존되었다는 점에서
동일인이라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황룡사 목탑을 중수하면서
목탑 건립 내력과 871년~872년까지의
중수 과정을 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새긴 것입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 칠주본기
이간 용수와 백제에서 온 대장 아비등에게
명하여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만들게 했다
(중략)
선덕왕 14년 (645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이다.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 622년 기록
"2월 이찬 용수를 내성으로 사신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열전
"629년 8월 이찬 임말리, 파진찬 용춘 백룡
소판대인 서현 등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게 했다."
삼국사기
"654년 여름 4월, 왕(김춘추)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로 삼았다."
김용수: 622년 이찬(2등급)
김용춘: 629년 파진찬(4등급)
지위가 오히려 떨어짐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근거라고 주장함
(필사본에서는 용수는 선덕여왕 즉위전에 요절했다고 나옴)
용수의 죽은 시기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타임라인상 문맥상 먼저 죽은게 아니라는 주장)
화랑세기 필사본
용수전군이 죽기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용춘)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즉 김춘추)이고, 부인은 곧 천명공주이다.
처음에 용수공은 천화공주를 아내로 맞았었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용춘)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선덕공주를 모시게 되자 제가 천화공주를 백룡공에 내려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용춘)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용춘)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4. 향가 VS 경주 월성 해자
진위 논란중 근거가 되는 주요 핵심 내용인듯 합니다.
향가는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에서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이후로 향가가 지어지지도 않았고
해독되지도 않았다.
다시 해독되어진 것은 1920년부터
1920년 이후 지어진것이라는 주장
이에 대한 반박주장도 있습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0127800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84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4년까지
나’구역의 석축해자와 ‘다’구역 1~5호 해자 총 6기의 해자를 발굴됩니다.
"친구인 무관이 사다함 어머니 금진과 정을 통하기 위해
밤에 경주 월성을 넘다가
구지(龜旨)에 떨어져 다쳤다. 그리고 죽었다. "
(溝 도랑구 池 못지)
구지라는 거는 도랑 못 을 의미
성 주변의 도랑 못이라면 성을 지키는 해자 기능
신라의 수도 경주의 월성에서
1984년에 발굴 조사가 있었습니다.
그걸 통해 경주 월성 주위에 해자의 존재가 발견
그 이전에는 존재자체를 몰랐습니다.
경주 월성을 넘다가 구지에 떨어져 다쳤다
실제 발견 된 구조도
성벽 하단부하고 구지하고 붙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벽이랑 구지가 약간의 이격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구조입니다.라는 주장
포석정 용도 논란
필사본 논란과 더불어
거론되는 포석정 용도 논란입니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이 홀로 보았다. 어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 스스로가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紀異第二)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中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5]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新羅本紀 第十二) 경애왕(景哀王) 4년 가을 9월(四年秋九月) 中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포석정의 용도는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당시에도 연회장소가 아닌 제사장소라는 일부의 주장도 있습니다.)
1998년 포석정 발굴에서 나온 유물이
600년대 즉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지고
그 유물도 놀이와 관련된 유물이 아니라
제사에 사용된 제기들 이였습니다.
그러면서
화랑세기 필사본에 포석사라고 기록되어 있는만큼
제사를 지낸 사당의 역할을 했던 것이라는 기록이 다시 거론됩니다.
1. 신라고사 - 신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
2. 삼국사 - 고려 초기에 편찬된 삼국시대의 역사서. (기전체)
3. 삼한고기 -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에 편찬이 추정되는 삼국시대 역사서
4. 제왕연대력 - 신라 역대 왕의 연대기 혹은 연표 (최치원 저)
5. 화랑세기 - 신라시대 화랑을 다룬 사서 (김대문 저)
6. 고승전 - 신라시대 불교를 다룬 사서 (김대문 저)
7. 계람잡전 - 삼국시대 설화집 (김대문 저)
8. 아도화상비 - 신라 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기록
9.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사서.
일본서기의 참고자료로 인용되며 가야 역사도 수록되있을것으로 추정
10. 유기 + 신집 - 고구려시대 역사서.
유기 100권을 신집 5권으로 개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게 죽간으로 된 유기 100권을 종이책 5권으로 옮겨 신집이라고 했을걸로 추
정..
11.고려실록 - 고려시대 실록. 임진왜란때 소실
1번부터 8번까지는 삼국사기 쓸때 김부식이 참고 백제 멸망의 순간을 알려줬던 예식진의 묘지명이 다름아닌 낙양 골동품 가게에서 발
견
진서론을 주장하는 학자분들보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학자분들 수가 많고
진서, 위서 논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