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사랑 -겐지모노카타리를 읽고
일어일문과 4학년 여춘희 200447944
일본의 문학 그 가운데서도 고전문학을 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학기 일본 현대문학사 강의를 들으며 새삼 놀랐던 것은 우리 근대문학의 뿌리가 바로 일본의 근대문학이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화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신체시를 비롯해 우리 근대문학의 여러 분야에 끼친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나 엄청나다는 것은 크나큰 놀라움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력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동안 일본을 봐왔던 편협한 시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나라의 말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학기만에 그들 문화의 정수를 다 배울 수는 없는 일이라 안타깝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문학을 배움으로써 훨씬 생생하게 일본이란 나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공부한 우리의 고전문학도 무척 어려웠었는데 일본의 고전문학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어려운 고어로 씌여져 있지만 여러 작품들을 공부하면서 그 작품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옛사람들의 심상이 전혀 낯설지 않음은 긴 세월을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감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이미 천여년 전에 그들 고유의 가나 문자로표기된 작품들은 일본인 특유의 감성을 표현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이 섬세하고 우아한 문체를 남기고 있음은 부럽기조차 하다. 우리의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도 많은 시가 작품이 수록된 작품집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이 별로 없어 아쉬운데 일본은 양으로도 질로도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작품이 현재까지 전하는 점 또한 부러운 일이다.
<겐지모노카타리>는 일본 고전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조금이라도 일본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제목 정도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전부터 한번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그 양의 방대함에 눌려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차에 <한길사>에서 2007년 새로 펴낸 <겐지이야기> 가 있길래 우선 과제를 쓰기 위해 손에 잡히는 부분부터 읽어보았다. 줄거리 위주가 아닌 단락단락 나오는 작중 인물들의 내면을 표출한 시가를 중심으로 감상했다.
<겐지모노가타리>에는 특히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자신의 심상과 맞물려 표현한 내용이 많이 있다.
-저녁해 비치는 봉우리에
흐르는 실구름이여
내 슬픈 상복을 닮아
그런 잿빛인가
함께 그 분의 죽음을 애통해하기 위해-
평생을 그리던 후지쓰보 중궁이 죽은 후 아무도 없는 불당에서 혼자 남몰래 애통해 하며 읖조리는 위의 시는 지극히 절제된 슬픔이 마치 뜬구름처럼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후지쓰보 중궁의 죽음 이후 처음 맞이한 겨울에 관한 다음의 서술은 겨울이 시작되는 이즈음에 읽으니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눈옷을 입은 대나무와 소나무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계절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벚꽃이 피고 단풍이 드는 계절보다 눈에 반사되 는 투명한 달빛으로 보는 겨울 밤하늘의 정경, 신비로운 무채색의 세계가 마음에 저미어 내세의 일까지 생각하게 되니 그 정취가 한이 없구나.-
-겨울의 달밤을 무미건조한 정경의 예로 남긴 옛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천박하구나.-
위의 대목들을 보며 천년전 겐지라는 한 남자가 사랑의 상실로 인해 느꼈던 쓸쓸한 심상이 고스란히 전해져 옴을 느꼈다.
천황의 황자로 여자 못지않은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태어났지만 3살 어린 나이로 생모인 기리쓰보를 여의고 6살 때 외조모까지 여윈 겐지가 자라면서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리는 것은 그의 내면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더러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겐지의 타고난 천성이 아름다움에 약하게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움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는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정신적인 아름다움도 있다.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솔직함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리라. 더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아름다움을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면에서 겐지는 감정에 아주 충실하고 솔직한 (그러한 면이 많은 여성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겐지의 그 숱한 여성 편력의 근저에는 생모 기리쓰보에의 상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결코 해서는 안될 계모 후지쓰보와의 불륜도 무라사키부인과의 사랑도 두 사람 모두 생모 기리쓰보와 너무 닮은 모습이어서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의 평생을 억압지은 후지쓰보에의 사랑은 인간의 연약함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의 절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애잔한 슬픔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사에 흔치않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미 천여년 전에 이렇게 솔직한 작품이 쓰여질 수 있는 일본인들의 그 자유 분방한 사고방식 또한 내게는 놀라움이었다.
자칫 부도덕하고 외설스러울 수 있는 내용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음은 왜일까? 그것은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작품 속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삶과 죽음이 있고 자연스레 바뀌는 계절의 변화가 자주 등장한다. 신불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한낱 미물일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펼치는 애증과 희노애락을 작가는 결코 오만하지 않은 시선으로 때로 아름답고 때로는 슬프고도 가슴아프게 같이 동조하는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한 여성이 썼다기엔 방대한 스케일이지만 작품 곳곳에 섬세하게 표현되어진 사람과 사물에 대한 인식은 여성이 아니고서는 절대 표착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편안한 잠 이루지 못하고
한 겨울의 깊은 밤에 눈을 뜬 쓸쓸함이여
마저 꾸지 못한 꿈의 짧음에
아직도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내 가슴-
겐지의 이 시 또한 황족으로서의 고귀한 신분, 아름다운 용모, 사랑하는 여인을 모두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떠오른 상념에 쓸쓸함과 나약함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의식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현재로 옮겨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현재를 반추할 수 잇는 것도 동서양을 가림없이 시대의 좀 늦고 빠름을 개의치 않고 오랜 세월 관통해 내려오고 있는 불변의 진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같이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삶의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아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것이 비록 일본의 고전 문학일지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천년전 삶을 살았던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와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봄으로써 보다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교재는 2007년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펴낸 <겐지이야기>중 4권 제 19첩에서 22첩까지를 읽고 내용중 시가를 중심으로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