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판화, 개화를 꿈꾸다＞ 1-6 개척자이자 선각자, 나혜석과 여성해방/목판화==김진하

[화각인김준권]

<1. 목판화, 개화를 꿈꾸다>

1-6 개척자이자 선각자, 나혜석과 여성해방

<1920, 신여자 / 1921,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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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화가로서보다 먼저 그 드라마틱한 삶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근대기 선각자이자 신여성이다. 최초의 여성화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과 여성의 권리주장, 자유연애, 이혼과 재혼, 그리고 다시 이혼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숱한 화제를 뿌린 개화기 대표적인 여성이었으니 숱한 남성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혜석에 대한 일차적인 접근은 화가와 개화기 지식인여성으로 좁혀야 할 것 같다. 무릇 한 인물의 후대평가는 그 인물의 객관적 사회적 활동과, 그로인한 영향, 그 다음에 개인적인 성격이나 인격을 보아야 하는데, 나혜석은 오히려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생활만 부각됨으로 정작 그의 사회, 역사적 가치가 폄하되었다. 그것은 젠더(Gender)로서의 ‘여성’이 아닌 섹슈얼리티(Sexuality)의 관점에서 ‘여자’로만 보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나혜석이 남성작가였다면, 그의 사생활보다는 작가로서의 삶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혜석은 일탈한 여성, 혹은 남성중심의 사회에 반기를 든 상대적인 입장보다는,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적 사고로부터 이탈하여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페미니즘의 선각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 출생이다. 호는 정월(晶月).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도일, 1918년 토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1년 서울에서 한국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1927년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 계열의 작업을 하고, 29년 귀국하였다. 그 뒤 화가로서의 정상적 활동은 1935년 서울에서 가졌던 소품전 이후 이혼과 정신장애, 반신불수의 비극 속에서 1948년 행려병자로 작고했다. 나혜석은 봉건적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한 페미니스트이자, 일제에 항거하는 선각자였다. 그러나 당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됨으로 작업의 중단 뿐 아니라 그 자신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지성과 재능의 소유자였다.

나혜석의 삽화는 1919년부터 시작되었다. 매일신보에 9회를 연재한 스케치형태의 삽화였다. ‘섣달대목’과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형식인데 명절에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1920년 나혜석은 여성잡지 <신여자>4월호에 ‘저것이 무엇인고’라는 제목의 한 칸짜리 목판삽화를 실었다. 이는 이 후의 '개벽‘에 실린 목판삽화와 더불어 우리 근대목판화사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것이다. 근대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목판화로서 당시 신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협소한 시각에 관한 것이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가는 한 여성에 대해서 아무런 이유 없이 “건방지다”라는 보수적인 기성세대와, 여성의 외모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청년을 그린 장면인데 당시 남성들의 편견에 가득 찬 여성관과 허위의식을 꼬집어 풍자한 것이다.

이어 6월호에는 ‘김일엽의 가정생활’이란 제목의 삽화를 게재한다. 4칸 만화의 형식을 띈 삽화인데 ‘이 짧은 밤에 12시까지 독서’, ‘부글부글 이것을 두고 시를 지어’, ‘손으로는 바느질, 머리로는 신여자 잘 살릴 생각’, ‘밤새껏 궁구하여 새벽 정신에 원고를 쓰고’ 라는 해설이 있다. 낮에는 밖에서 일하고 퇴근 후는 집안 일, 다시 집안일이 모두 끝난 후 늘 시간에 쫒기며 분주하게 글을 쓰거나 잡지사 <신여자>의 경영을 고민하는 김일엽의 일상을 묘사한 것들이다.

나혜석과 동갑이었던 김일엽(金一葉 1896∼1971)은 박인덕, 김활란, 나혜석과 더불어 1920년 당시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이자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던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는 한편, 동아일보사 문예부 기자, <불교(佛敎)>지의 문화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 및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던 신여성이자 시인, 수필가였다. 이 <신여자>는 철저하게 여성들만의 힘으로 자유롭게 여성의 계몽운동을 펼치려 했다. 창간호 후기에 “기고는 여자로 국한한다”라고 천명할 정도로 여성이 처한 문제를 철저하게 여성의 입장과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보고자 하였다. 그런 여성운동가 김일엽이지만 집안일에 치여 힘들게 문학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는 고군분투의 모습을 나혜석은 가부장제하에서의 여성의 지난한 일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즉 신여성이자 자각한 지식인인 김일엽조차도 아직 전근대적인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하물며 일반 주부들의 생활이야 오죽했으랴. 나혜석은 바로 김일엽의 가정생활을 통해서 여성에게서 현모양처만을 바라는 전근대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혜석의 여성에 대한 시각은 이후 1921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입센의 ‘인형의 집’ 삽화와, 같은 무렵 발표한 ‘인형의 집’이라는 시에서 적극적으로 개진된다. 그 시는 ‘노라’를 남편의 인형으로부터 해방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목판삽화가 1칸짜리 만평이나 카툰도 아니고, 그렇다고 4칸 만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4칸이지만 스토리의 연결보다는 분절된 방식으로 김일엽의 하루 생활을 묘사했는데, 이는 작가의 현실을 디테일하게 관찰하는 자연주의적인 시각과 그로부터 독자에게 자연스럽고 명료하게 접근하며 공감대를 넓히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이후 나혜석은 1921년 <개벽> 창간 1주년 기념특대호인 7월호에 ‘개척자’를 표제지 전체의 삽화로 게재한다. 개벽은 1920년 6월에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천도교의 개벽사(開闢社)에서 민족문화운동의 일환으로 국한문혼용체로 출간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잡지였다. 창간호부터 압수당하였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당할 정도로 ‘개벽’은 항일정신이 투철한 민족지였다. 당시 개벽은 1910년대 이후 활발했던 신경향파의 작품발표의 주 무대였고, 더불어 순수문학 진영의 중요한 작품들도 많이 발표되었다. 박영희·김기진·현진건·김동인·이상화·염상섭·최서해·김동환·나도향·박종화 등이 이 잡지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한 대표적 작가들이었다. 또한 개벽은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문학이론, 외국문학 등을 소개하였고 신인을 발굴해 내는 등 1920년대 문학의 활성화에 기여한 주요한 잡지였다.

이 개벽에 실린 삽화도 목판화였다. 곡괭이로 땅을 파서 나무를 심는 것인지, 아니면 나무 옆에서 경작을 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해뜰녘(혹은 해질녘)에 열심히 일하는 농민과 같은 기층민을 통하여 근대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 그리고 개벽이 지향할 문화의 개척에 대한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나혜석은 본디 유화를 중심으로 작업한 화가였다. <개벽>의 이 목판화와 매일신보에 연재된 드로잉 만화, <신여자>의 김일엽을 다룬 목판삽화는 유화와는 다르게 선묘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나혜석의 본 작업은 유화이고, 이 목판삽화는 일종의 보조적인 표현수단인 셈이다. 이는 유화에서 나혜석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량보다 목판삽화의 그것이 훨씬 단조로운 기술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반증된다. 즉 목판화의 새로운 맛이나 표현을 다작이나 실험을 통해서 구현하기 보다는 단순하게 이미지만을 만들어서 내용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자세 때문이라 여겨진다. 단조로운 기술은 다음과 같다. 붓으로 스케치한 뒤 목판면의 남은 부분을 정확하게 깎아내는 가장 원초적인 판법인데, 이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고판화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선묘 기법이다. 앞서 1909년 대한민보에 연재되던 이도영의 목판삽화와 판화 형식은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나혜석에게 목판화는 삽화를 위한 매체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목판화라는 장르에 독립된 시각이나 자세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본 작업인 유화보다는 목판화를 가볍게 삽화로만 활용하려는 작가의 판화에 대한 이해부족도 그 원인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다른 삽화가들의 대개의 삽화들이 펜이나 붓으로 간단하게 그렸는데 비해 나혜석은 굳이 불편하고 다소 복잡한 목판화로 삽화를 제작한 것을 보면, 더불어 에디션을 통한 상업성을 취할 수 없는 삽화에 목판화를 사용한 것은 아무래도 전통적인 목판화에 대한 어떤 가치를 인식해서 그랬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아무튼 나혜석의 시사만화 혹은 삽화로서의 이 목판화들은 일제강점기의 몇 안 되는 목판화의 대중적 매체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근대목판화 역사에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많은 화가들이 유미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입장에서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적당히 즐기는 딜레땅뜨적인 입장을 보인 경우에 비하면 나혜석은 시대와 작가,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혜석의 회화가 서구 인상주의를 수용하며 구체적인 동시대현실을 반영하지 못했음에 비해 이 목판화는 ‘개화’와 ‘자각’이라는 근대적 모더니티를 주체적 입장에서 드러내는 점에서 1920년대 초반의 시대상과 지식인들의 문화사상을 반영하는 주요한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