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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2. 28.
부처님 전 상서
법정
☞ 법정 스님의 "부처님 전 상서"는,
1964년 당신 나이 32세 젊은 청년 수행자 시절, 혼탁한 불교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당시 불교신문에 10월 11·18·25일 3회에 걸쳐《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에 연재한 수행자로서의 참회록입니다.
저가 처음 이 글을 접한 것은 1974년 해인사 승가대 시절 뜨거운 여름 경학원(도서관)에서였는데, 참고로 법정스님은 해인사 승가대학 2회 졸업생, 저는 15회 동문입니다.
<1편>
서 장
부처님! 아무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깊은 산속 나무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무심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묵묵히 지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울적한 마음을 당신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먼저 저는 당신 앞에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는 오늘 한국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를 드립니다.
당신의 제자 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팔아 무위도식하고 있다는 처지에서-.
오늘 우리들 주변이 이처럼 혼탁하고 살벌한 것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어리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 나라로 망명해버린 지 오래이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이들은 투쟁견고 시대의 나목 같은 군상들로 채워져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들이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마치 타락된 정치가들처럼 불신을 받고 있는 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은 나눔과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나눌만한 자비도, 거두어들일 만한 열매도 없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불모의 황무지에 밝은 씨앗이라도 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저는 이제 제 주변을 샅샅이 뒤져 헤치는 작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앓고 있는 자신의 질환에 대한 진단 같은 작업을-.
【교육의 장】
부처님!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기치하에서는 걸핏하면 3대 사업(교육·역경·포교)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만큼 그 일은 시급한 저희들의 과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긴요한 것이 당신의 혜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교육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이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껏 입으로만 축문처럼 외워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몇몇 사원에서 벌리고 있는 강원이나, 선방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의 뜻을 이어받을 눈 밝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낱 도량 장엄 정도로 차려 놓은 것에 불과한 인상입니다.
그것은 실로 교육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전근대적인 유물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현대적인 방법론도 구체적인 계획성도 부재합니다.
도제교육의 기초기관인 강당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그 방법이란 철저하게 훈고적인, 그러니까 한문 서당에서 상투 틀고 가르치던 그 습속을, 소중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물려받고 있습니다.
한 강사가 여러 클래스를 전담해 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으니, 전체 학인을 명령 하나로 통솔하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강사 자신의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편견, 그리고 강의받는 사람들이 섭취할, 건더기가 얼마나 있을는지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력 과목이라는 게 이조 중엽에 비롯된 것이라는데, 지금의 형편이나 피교육자의 지능 따위는 전혀 무시하고, 또 시대적인 요구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타성으로서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나마 얼마 동안의 배워 마친다는 정해진 기간도 없이-.
이처럼 <무모한 교육?>이 어느 다른 사회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종교>가 무엇인지, 혼미한 오늘의 현실에 <종교인>으로서 어떠한 사명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풍문으로나마 가르치고 배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깨우친 목소리를 듣기 위한 훈고적인 문서의 전달도 필요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소위 일체중생의 길잡이가 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종교교육이라면, 동시대적인 사명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 이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이 두뇌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심성의 영역일 것입니다. 메마른 심장으로서야 자신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웃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또 당신의 제자 된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비좁은 자기 나름의 소견에만 집착하는 이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선방이란 곳에서는 <불립문자>의 본래 의미를 곡해한 듯, 전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 교육도 없이, 선禪 자체에 대한 오해마저 초래하게 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선禪이 수행의 구경 목적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한 한낱 방편일진대, 보다 탄력 있는 시야쯤은 갖추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첫 문에 들어선 초발심자에 있어서는-.
<알음알이 내지 말라>라는 말과 <배우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는 그 의미가 분명히 다른 줄 압니다.
흔히 참선자가 선禪에 <참參/참구>하기보다는, 선禪에 <착着/어긋남>하기가 일쑤이고, 따라서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써 오히려 자기만족(자락自樂)을 삼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결함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만약 이 사회에 계신다더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이렇게 무모한 방법으로 가르치겠습니까?
어설픈 화신들
이러한 교육환경의 불합리성 때문에, 이 나라의 시정에 있는 절간에 가면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젊은 우리 사미승들이 그늘진 표정으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합니다. 절에서는 먹물 옷을 입고 절 문 밖에서는 세속의 옷을 입는-.
마치 낮과 밤을 사이하여 치장을 달리하는 박쥐라는 동물처럼. 부처님 앞에서 목탁을 치던 한낮의 손이, 해가 기울면 세속학원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일념에서 이처럼 어설픈 화신을 나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왕성한 향학의 욕구를 절간에서는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 학자금의 출처란 대개 떳떳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삼보에 기부한 깨끗한 재물이, 잘못 유용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낯을 익혀둔> 신도들이 떨어뜨리고 간 지폐에 의존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가 돈을 쥐여줄 때, 그것으로써 세속의 학업을 익히라고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할 수 없는 학자금으로 그 건전한 회향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주는 편이나 받는 편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악업만 익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모처럼 어린 마음으로 구도의 길에 들어섰던 그들이, 가르침의 도업을 이루기에 앞서 다시 세속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산사에서 간신히 이력 과정을 마친 학인들이 외전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하산한 뒤로는 거의가 불귀(不歸)의 승이 되고 맙니다. 미래를 기대해야 할 젊은 출가자들이 -.
이와 같은 불유쾌한 현상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모르는 체하고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 불교계에는 급조승이란 전대미문의 낱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승려라면 일반의 지도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질 여부는 고사하고 일정한 수업도 거치지 않고 활짝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기가 바쁘게 삭발과 의상 교체가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로서의 품위나 위엄이 말할 수 없이 진흙탕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낙후된 경제사회에서 부도가 나버린 공수표처럼-.
더구나 이들이 사원을 주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이 언제 수도 비슷한 거라도 겪어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가출 이전의 세속적인 행동 여지가, 그대로 재현될 따름입니다. 그래서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가끔 사이비승이란 기사거리와 더불어 세상의 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사원에서는 처음 입산하려는 사람의 학력이 학부 출신이거나, 좀 머리가 큰 사람이면, 더 물을 것도 없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가풍이나 되는 것처럼.
거절의 이유인즉, 「콧대가 세서 말을 잘 안 듣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다루기가 어려워서일 것입니다. 우선 지적인 수준이 이쪽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하나의 열등의식에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증으로서 인간적인 기본 교양도 없는 만만한 연소자는, 그나마 노동력이 필요할 때 틈타서 받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구도자로서의 자질과, 미래상이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한 고집들이, 수도장을 경영하는 동안, 당신의 가르침인 한국불교의 표정은 갈수록 암담할 수밖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 크게 설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종단의 의결기관인 중앙종회에서는 몇 군데 계획적인 수도장으로서 총림을 두기로 했다지만, 이러한 무질서가 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
▶법정 스님 ‘부처님 전상서’를 읽은 독자의 기고 글
“「부처님 전상서」를 읽고 전번 귀지에 실린 「부처님 전상서」를 읽었습니다. 답답해 견딜 수 없어 쓰신,
그 스님의 피맺힌 글을 읽어가면서 저는-.
가슴이 환히 트이는 환희에 가득 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준열한 자기비판, 가차 없는 자기진단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불교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결단코!
어떤 스님은 세 번을 내리 울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이 진지한 목소리가 이 땅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때, 모든 가슴은 다 같이 울 것입니다. 깊은 희오와 간절한 염원으로 해서.
또 한 가지, 마음 든든한 것은 귀지의 양심과 용기입니다.
다른 어느 기관지가 샅샅이 자기 집안의 멍든 곳을 들어내어, 파헤치고 뉘우치는 작업을 감히 게재할 수 있습니까? 누구 앞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우리만이 갖는 힘이요, 성심입니다.
오랜 세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겹쳐진 묵은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들어 고쳐야 할 시급한 질환이 있더라도, 그렇더라도 우리의 불가(佛家)는 살아있습니다.
적어도 내일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피맺힌 부르짖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뜨거운 가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건강한 기관지가 발간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지헌 합장 196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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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전상서
<제2편>
「... 부처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샤머니즘이 횡행해서야 되겠습니까? 마치 중세 유럽에서 치부에 여념이 없던 살찐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면죄부라는 부적을 팔던 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라고 필자는 우리 불교의 모습이 극히 위험스러움을 얘기하고 있다. 오늘의 불교가 가진 사명이 지극히 중차대함에 비추어 가차 없는 준열한 비판이 있음으로써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아픈 참회를 호소하며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특히 여러 독자들의 투고에 의하면 종단의 모든 불자들이 먼저 자기비판이 있어 모두가 정화이념을 실천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한 스님의 거짓 없는 「목소리」를 게재하여 성찰의 광장을 마련한다. <편집자>
【황색 의자】
부처님!
세상에서는 벽 감투란 말이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얻어걸린 높은 벼슬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에서는 오욕 중에 하나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을 여의었다는 당신의 제자들도 그 「높은 자리」에 앉아 버티기를 세속 사람들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을 요즈음 흔히 봅니다. 마치 그런 감투나 뒤집어쓰기 위해 불문에 들어온 것처럼-.
한번 그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 분수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노랗게 탐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권을 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마키아벨리즘의 무리들처럼, 말로라도 세상의 욕락을 떠나 출가 수도한다는 이름에게 무슨 「장」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나마도 솔직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일이 전혀 자의 아닌 타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개인의 수업을 온전히 희생하고 대중의 외호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보살의 화현 같은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오늘날의 사회구조로 보아 본의는 아니 나마, 그 긴 의자에 걸터앉아야 하고, 사원의 의무를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왕 출가의 길에 들어섰으면, 어디까지나 불제자 된 분수와 출세간적인 입장에서, 사심 없이 공정하게 집무해야 할 것임에도, 삼보의 깨끗한 재물을 함부로 탕진하고, 나아가서는 승려로서의 본분을 이탈한 채, 사회적으로 불미스러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례를, 그동안 드물지 않게 보아오고 있습니다.
기본재산이 좀 여유가 있거나 수림이 우거진 절은 서로가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꼴을, 우리는 불행하게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저의는 얼마 안 가서 결과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희사함을 치워라】
부처님!
당신의 성상이 모셔진 법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자비하신 당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입을 딱 벌린 채 버티고 있는 ”불전통“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의 위치는 바로 당신의 코앞입니다.
시정이나 산중에 있는 절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은 근래 사원의 무슨 액세서리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내려다보실 때마다 얼마나 난처해하실까를 당신의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 못 보고 있는 성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간판>까지 내걸고 있습니다.
「돈을 넣고 복을 비는 곳」이라고-.
45년 당신의 설법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계셨습니까? 복덕이라는 게 화폐로써 척도 할 그런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이 사교가 아닌 무상(無上)한 정법임에도-.
누가 보든지 낯 간지러운 이 괴물은 시급히 철거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상이 모셔진 코앞을 비켜서만 이라도-.
【극락행 여권】
부처님!
극락행 여권을 발급하고 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암흑의 계절 중세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집>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대찰들에서 버젓이 백주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야시장도 아닌데 이런 넋두리까지 겹쳐서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사가시오」하고-.
당신의 옷을 입고 당신이 말씀해 놓은 교리를 공부하는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당신을 파는 이런 짓을 얼굴 하나 구기지 않고 뻔뻔스레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교에서나 있음 직한 혹세무민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처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샤머니즘이 횡행해야 되겠습니까? 한동안, 마치 중세 유럽에서 한동안 치부에 여념이 없던 살찐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면죄부」라는 부적을 팔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짓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쪽에서는 종교정책의 한 불씨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 이 고장에서는 이 비슷한 일이 하도 많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서는 가끔 억울하게도 미신과 동일한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실로 낯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불사의 정체】
부처님!
불사라는 행사가 요즘에는 왜 그리도 많습니까? 걸핏하면 「백일기도」「만인 동참 기도」「보살계 삼림」「가사 불사」 탑에 물방울 정도 튀기는 「세 탑 불사」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위조지폐까지 발행해가면서 하는 도깨비놀음 같은 「예수재」등등.
이 밖에도 일찍이 보고 듣지도 못한 별의별 희한한 불사들이, 정말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잇따라 거행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불국세계가 도래하는 게 아니냐 싶게-.
불사라는 본래 뜻은 부처님의 교화를 가리킨 것으로써, 개안·상당·입실 등에 주로 쓰인 말인데, 요즘에는 흔히 승려들의 일용사에로 추락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불사의 본래 뜻에 합당한 불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흔히 불사란 이름을 내걸고, 실속은 엉뚱한 데 있는 불사(佛事) 아닌 「不事」를 자행하고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구도자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 떳떳할 수 있는 법다운 불사가 얼마나 될는지,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중이 돈이 아쉬우면 멀쩡한 축대라도 헌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결코 웃어넘길 수만 없는 가슴을 찌르는 통절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00 불사>라는 모임이 있을 때면, 으레 그 끝은 두둑한 「권선책」이 나돌기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몇 가지씩 결코 「희사」 일 수가 없도록 반 강요하는 눈초리를.
재화(財貨)를 다수 내놓으면 흔히 말하기를 「신심이 장하다」라고 합니다.
재화가 신심의 바로 미터일 수가 있겠습니까? 불사라는 미명하에 신도를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순진한 신도들은 교화를 입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출혈적인 혹심한 수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돈도 없는 사람은 절에도 나갈 수 없더라」라는 비 불교적인 서글픈 탄식이 나오는가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전체 승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가운데서 수도에 전념하는 의젓한 구도자가 몇이나 되는지, 관계기관인 중앙총무원에서도 집계를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반해서 포교당을 비롯해서 신도들을 자주 접촉하고 있는 절간에서는, 신도의 축원 카드가 어느 시청의 호적 사무 못지않게 질서 정연히 정비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극성스러운 곳에서는 카드에 금전 출납의 기록란까지 만들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이런 짓을 포교의 사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두꺼운 안면신경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이 허다합니다.
불사라고 당신의 이름을 팔아 자행되는 그 이면에는 얼마나 셈 빠른 타산이 오르내리는지, 부처님도 아시게 되면 얼굴을 붉히시리다. 속이 유리 속처럼 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이 어설픈 수작들은 휴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요즘 항간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파라독스가 떠돕니다. <큰스님>의 체중이란 법력이나 도덕의 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신도들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귀의한 순박한 신앙인들을 마치 하나의 재원으로 착각하고 있다니.
부처님!
불사(佛事)라는 말을 이 이상 더럽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불사(不事)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한 불사라면, 한시바삐 탐욕과 무지의 탈을 벗고, 또한 벗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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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전상서
<3편>
필자 법정 스님은 이 글을 마치는 끝에 가서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에서이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자학적인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다시 밝히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코 누구도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고는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병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목까지 잃고 있다면. 응당 우리는 내가 서 있는 발을 돌아보고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며, 또 자기의 생명을 깎아내리는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부처님에게 드리는 아픈 참회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자신(모든 불자를 포함한)의 방향과 진단을 하는 것이리라. <편집자>
【이 독살이를 보라】
사원이란 그 어느 특정인의 소유거나, 개인의 저택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상식입니다. 오직 수도자가 도업을 이루기 위해, 한데 모여 서로 탁마해 가면서 정진해야 할, 청정한 도량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원이 소수의 특정인에 의해 수도장으로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유행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네 <패거리>의 식성에 맞는 몇몇이서만 도사리고 앉아 굳게 문을 걸어 닫고 외부와의 교통을 차단한 채 거대해져 가고 있습니다. 전체 수도자의 광장이어야 할 이 수도장이-.
따라서 엄연하게 대중이 모인 회상임에도 대중의 의사가 무시되기 다반사이며 결코 건전한 것일 수 없는 개인의 협착한 소견이 전체 대중의 이름을 사취하여 제멋대로 행사되는 수가 많습니다.
종래로 우리의 청백 가풍인 <대중공사법>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으니, 이것은 곧 화합과 청백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디를 가나 구역이 나는 것은 <권속 관념>이라는, 그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악취-. 그래서 원융한 회중이어야 할 대중처소가 <독살이>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세속을 떠났다는 이 출세간에서까지, 튼튼한 빽이 없이는 방부조차 내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운수를 벗하여 훌훌 단신 수도에만 전념하던 납자들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정착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소위 독신 수도한다는 이 비구 승단의 회상에서 정화 이전이나 다름없는 냉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원은 마땅히 수행하는 이의 집이어야 할 것임에도-.
개인과 직위의 한계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선 사회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류들은, 이 한계마저 무시하고 개인이 의자의 힘을 빌려, 권력 같은 것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기가 예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녁노을만치도 못한, 하잘것없는 명예라는 것을. 더구나 제행무상을 뇌이고 하는 이 출세간에서-.
그래서 대중이 모인 회상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마음 내어 모처럼 찾아갔던 초학인들도, 발붙일 곳이 없어 되돌아가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저마다 <독살이>인 자기 영토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도의 빛은 바래져 가고, 사명감도 내동댕이치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가야 할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아닌 줄 분명히 알면서도-.
부처님!
이런 시시한 일들에 탐착하자고 저희들이 불문에 들어선 것이겠습니까?
머리의 크기와는 당치도 않은 감투나 뒤집어쓰고 우쭐거리자고 출가한 것이겠습니까?
어서 이 혼탁을
부처님!
당신에게 올리는 이글도 이제는 그만 끝을 맺어야겠습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높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좀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대개가 유쾌한 대열에는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자신부터 유쾌한 기분으로 쓸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입을 빌어서든지 이러한 자기비판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혼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귀촉도의 외침이라도 있어야겠습니다.
구도의 길에서 가장 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처세로서 위장할 것이 아니라, 시시로 자기 위치를 돌이켜 보는 참회의 작업일 것입니다. 자기반성이 없는 생활에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시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없는 종교라면 그것은 일고의 존재가치도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 지 1600년!
오늘처럼 이렇게 병든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물을 것도 없이 제자 된 저희들 전체가 못난 탓입니다.
늘 당신에게 죄스럽고 또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처럼 뛰어난 당신의 가르침이 오늘날 저와 같은 제자를 잘못 두어 빛을 잃고 또 오해와 비난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히다시피 저의 이러한 작업이 이웃을 헐뜯기 위해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입을 열면 벌써 그르친다는 말을 저는 늘 믿어오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입을 열어 한량없는 구업을 지은 것은 외람되게나마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고 싶은 저의 신념에서입니다.
한국불교의 건강은 저희들 제자의 한결같은 비원(悲願)입니다. 무관심처럼 비참한 대인관계는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무관심이 구도자의 주변에 뿌리내릴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
일체중생에게 주어진 당신의 자비가 무관심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주제넘게 큰소리로 지껄인 것입니다. 이 혼탁에서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비원(悲願)에서 버릇없이 당신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과감한 일대 혁명이 없이는 당신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는 영영 질식하고 말 것 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박차고 나섰던 저 혼미한 브라만들에 대한 부정의 결의가 없고서는-.
위의 글에서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제시하라는 뜻에서이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자학적인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한가지 밝혀드릴 것은, 얼마 전에 이 글을 쓰다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중단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저의 한 고마운 도반이 격려해준 힘을 얻어,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비 개인 그 여느 여름날처럼, 당신 앞에 가지런히 서서 도업(道業)을 같이하는, 청정한 인연에 조용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마하 반야 바라밀.
1964년 9월 어리석은 제자
법정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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