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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 와룡산 산행기>
산과 바다는 그렇게 서로 간지럼 태우는 듯이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박재삼 <천년의 바람>
벌써 여러 해 전에 지명이 ‘사천’으로 바뀌긴 했지만, 원래의 삼천포 사람들 못잖게 내게도 이 바닷가 작은 포구 도시는 여전히 삼천포일 뿐이다. 이 도시의 끝자락, 바다를 마주 한 작은 산등성이 하나가 노산공원이며 이 언덕바지에 시인 박재삼의 시비가 서 있고 비에 적힌 시가 바로 <천년이 바람>이다. 자연이 자연으로써 교환(交驩)하는 영원성을 보면서 사람됨을 새로 각성하는 도리를 적은 짧은 시인데 다도해의 바다 물결이 쉼 없이 물가 바위를 간지럼 태우고 해송과 동백이 바닷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이곳에 서면 이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의 음풍(吟諷)이 마치 무슨 잠언처럼 들리기조차 한다.
박재삼 시인은 나의 대학 선배이다. 그 인연으로 몇 번 사석에서 만난 일이 있으며 지병으로 고생하던 만년에는 내가 어느 문학지의 청탁을 받아 <실명소설 박재삼>을 쓴 일도 있다. 그래서 박재삼 시인을 떠올리면 저절로 삼천포가 생각나고 삼천포 지명만 봐도 시인이 떠올랐다. 대학에서 문학 동아리를 하던 때 나는 또 한 사람의 삼천포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내 대학 3년 후배 되는 정삼조 시인이다. 그 또한 박재삼 선배와 똑같이 삼천포에서 태어나고 자라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를 진학했으니 선후배 두 시인이 가지는 연분의 각별함이란 여느 사람이 쉬 짐작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소박 진중하기 짝이 없는 정삼조 시인은 대학을 졸업하곤 곧바로 고향 삼천포에 돌아가 교편을 잡았다. 지금 정삼조 시인은 노산공원에 세워지고 있는 박재삼기념문학관(올 11월 개관 예정)의 공사와 차후 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다.
<사진0. 정삼조 시인과 함께. 그가 재직하는 남해 물건중학교에서>
이런 인연들로 인해 청정해역을 두르고 있는 삼천포는 내게 더 살갑고 이쁘게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먼 곳을 내 발로 찾아간 것이 예닐곱 번이나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삼천포에는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려한 산세를 지닌 와룡산(해발 799m)이 바다와 더불어 포구 도시를 안고 있는 탓이다. 도심으로 들어가기 훨씬 이전부터 시선을 붙잡은 그 산을 바라보면서 어느 때 기회가 있어서 저 산을 오를 수 있을까, 나 홀로 요량해 본 것이 한두 번 아니었다.
문창산우회의 일 년 산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7월은 빼놓았다. 바쁜 여름 휴가철을 감안해서였다. 여름 계절학기도 끝나던 무렵이었다. 뒤늦게 산우회에 가담하였지만 산 오르는 재미는 누구보다 빨리 터득해 가는 김택중 선생이 내 방에 들렀던 차에 왜 7월에는 산행이 없냐고 불만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 훌쩍 떠나고 싶었던 내가 “우리 먼 산 한 번 뛰자”고 제의했고 그가 순순히 내 낚시밥(?)을 물었다. 쇠뿔도 단숨에 뺀다고 이강록 선생과 함께 술자리를 하면서 날짜까지 못 박아 버렸다. 이 선생도 적극 찬성이었다. 학교 선생들에게는 방학 중 평일만큼 부담이 적는 날도 드문 법이다. 그래서 직장 가진 다른 회원들은 엄두도 못낼 일이라 여겨 미안하지만 아예 알리지도 않고 사내 셋만 후딱 떠나기로 했다.
7월 22일(화요일) 오전 8시 선생 셋이 비래동에서 만나 대전을 떴다. 전날까지 태풍 ‘갈매기’로 인해 전국에 폭우가 내렸지만 이날은 간간이 햇살까지 구름 사이로 내비쳤다. 무주를 지나면서 문득 정삼조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폐 안 끼칠 테니 시간 되거든 저녁에 얼굴이나 보자”고 말했지만 이는 곧 ‘폐 끼치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란 통고와 뭐 다른가. 두 시간 반만에 사천 땅에 들어섰다. 사전조사에 의하면 와룡산 등산 코스는 네 개였다. 나는 그중 급경사가 있지만 진입로가 가장 짧은 와룡마을 들머리 코스(제3코스)를 택했다. 와룡마을에서 도암재, 새섬바위를 거쳐 정상인 민재봉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2시간 40분이라고 돼 있었다. 그러면 하산 1시간으로 잡고 넉넉히 4시간이며 되리라 요량했지만 동행들에게는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말하지 않았다.
산속 작은 마을인 와룡마을에 들어서고 보니 와룡산의 부채꼴 산세가 일목요연 시야에 잡혔다. 거대한 한 마리 용이 똬리를 틀고 앉은 형세. 인적 드문 농가들은 그 톼리 한 가운데 안겨 있는 셈이었다. 원점회귀 산행지로선 교과서 같은 형국을 취하고 있었지만 산세 관상에 앞서 나는 내심 낭패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준비한 먹을거리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진작 알고서도 딴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마을에 구멍가게 하나 없겠느냐는 심산에서였다. 그런데 정말 구멍가게 한 개가 없었다. 마실 것만 잔뜩 있고 씹을 것이 없는 산행은 자칫 큰 화를 초래할 수 있음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더위 속에 지친 데다 허기까지 덮치면 곧장 탈진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궁즉통(窮卽通)이라던가. 느티나무 그늘에 차를 세우고 우리가 행장을 꾸리고 있는 때에 한 촌부가 다가와 이런 저런 말을 걸며 관심을 보이는 것을 기화로 해서 찬밥 한 덩이라도 얻을 수 없겠느냐는 청을 놓았다.
여전한 시골 인심이라고나 할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촌부는 밭일하는 할머니를 불러내려 비닐봉지에 밥을 싸게 했다. 넉넉한 밥 뭉치에다 묵은 김장 김치까지 한 다발 싸주는 안주인의 후덕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까. 사탕이라도 사 드시라고 5천원 지폐 한 장을 쥐어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마다 하신다. 낚시 20년, 등산 10년의 내 떠돌이 경력에서 아직 한 번도 경험치 못한 것이 밥 얻어먹는 일이었는데 이 경험을 삼천포 와룡산에서 처음 했으며 밥보다 더 귀한 착한 인심을 덤으로 얻었다.
<사진1. 밥 얻은 집>
11시 7분, 산행을 시작한다. 후텁지근한 날씨. 바람 한 점 없다. 마을 뒤 제각(祭閣)까지 오르는 데도 금세 숨이 차고 땀이 흘러내린다. 잡초 우거진 봉분 뒤편에서 산길을 찾는다고 잠시 풀섶을 헤매다간 간신히 색 바랜 리본 하나를 발견하곤 억새를 헤쳐 나아간다. 이럴 땐 지팡이처럼 요긴한 것이 없다. 반바지 차림의 종아리를 훑는 풀들을 제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거미줄이며 벌레들도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잖아, 선두에 섰던 내가 땅바닥 색깔과 똑같은 보호색을 띤 살모사 한 마리가 산길 한 가운데 똬리를 틀고 앉은 양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지팡이 덕분이었다. 무심코 녀석을 밟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사람이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뱀이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없다. 조심스레 녀석을 우회해서 보행을 계속하면서도 나는 이 산의 야성성을 고마워했다. 마을의 촌부는 젊은 날 25분 만에 도암재까지 올랐다고 자랑했었는데 우리는 그 말이 무색하게 두 번이나 휴식을 취하며 한 시간 걸려 올랐다.
<사진2. 제3코스 산행 들머리의 제각.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새섬바위>
산 너머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도 합쳐지는 곳이라 도암재부터는 산길도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다. 그러나 경사는 더욱 가팔라진다. 핑계는 열대야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무튼 나는 며칠 동안 술에 취해서도 제대로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전 주에는 버릇처럼 하던 주말 산행도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무더위 속에 더욱 큰 짐이 되어 전에 없이 내 걸음을 디디게 한다. 허우적대는 선두의 꼴을 볼 수 없었던 듯 이강록 선생이 “제 페이스대로 한 번 가보겠습니다.” 하곤 나를 앞질러 나아간다. 차라리 산에서는 이러는 것이 좋다. 각자 자기 페이스대로 보행을 하는 산꾼들끼리 하는 산행이 가장 마음 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훌쩍 뒷모습이 사라질 줄 알았던 이 선생은 크게 앞서 나가지도 못하곤 이내 벼랑 아래의 그늘에 주저앉는다. 뒤따라오는 연장자들을 위한 엄살임을 어찌 알지 못하랴. 또 하염없이 쉬기로 하곤 담배를 피워 문다.
<사진3. 도암재에서. 뒤에 보이는 암봉은 천왕봉>
이곳, 암석들이 부서져 내린 너덜지대를 지나면 곧 새섬바위 절벽이 나타나게 돼 있었다. 새섬바위의 고도가 796m이니 799m인 정상 민재봉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새섬바위에서 민재봉까지는 평탄한 능선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12시를 겨우 넘긴 시각, 오늘따라 우리에게 남는 거라곤 시간밖에 없다, 놀며놀며 가자... 다 좋은데 산 아래의 운무 때문에 청정 남해 바다를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예부터 하늘이 인간에게 명(命)과 녹(錄)을 한몫 주는 법이 없다했거늘 산신령 또한 바다 신과의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산색 물색을 온전히 다 주지 못한다고 여길 도리밖에 없다.
새섬바위 벼랑을 오르는 일은 의외로 쉽다. 바위벽에 철근을 박아 안전 밧줄을 늘여놓은 덕분이다. 마침내 바위 꼭대기에 올라선다. 드러누운 용의 모습을 한 산세는 더욱 우람 선명하다. 삼천포 시가지가 흐릿하게 바라다 보인다. 바다와 바다에 뜬 섬들까지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들 스스로 기막힌 그림의 한 가운데 선 꼴이 될 텐데 아쉽다. 이곳에서 마주 보는 민재봉이 너무 멀어 보인다. 더 난감한 것은 그곳으로 이어진 봉우리들이 凹凸투성이라는 점이다. 저 봉우리들을 다 넘어서 꼭 정상까지 가야 하나? 또 일행들에게 사기를 친 듯싶어 나 스스로 회의가 들 정도다. 숲에서는 그나마 간헐적인 바람이 있었는데 막상 바위 꼭대기에 올라서는 바람 한 점 맞을 수 없다. 바위에서 뿜어지는 열기로 인해 더위는 더 극렬하다.
<사진4. 새섬바위에서. 멀리 정상인 민재봉이 보인다.>
두 개의 암봉을 더 타넘은 뒤 겨우 서너 사람 앉을 만한 숲그늘을 찾았다. 밥 먹을 시간도 많이 넘겼다. 허기를 지우기 위해 얻어 온 밥부터 먹어 치우기로 한다. 김택중 선생이 치약을 짜듯이 비닐봉지에 찬밥 덩이를 덜어내어 종이컵에다 채운다. 이강록 선생은 철쭉 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만든다. 갖춘 것 하나 없지만 이윽고 우리는 없는 것 하나 없는 복된 처지가 된다. 찬밥덩이를 녹여주는 묵은 김치의 그 기막힌 맛이란! 그 많은 밥과 김치를 다 먹어 치운 뒤 냉커피를 마시고 체리 열매로 입가심을 한다. 기척도 없던 골바람은 우리의 식사시간에 맞추어 찾아와 전신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렇듯 배부른데 골바람까지 따라 온다면 정상이 백 리밖에 있다한들 달려가 오르지 못하리.
우리는 금세 철쭉 우거진 능선 길을 빠르게 걷는다. 늦봄 철쭉 만발한 때 이곳에 온다면 또 꿈같은 꽃길을 걷는 흥취를 가질 수 있을 법하다. 정말이지 우리는 마을을 떠나서부터 이곳까지 오면서 산행객 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민재봉 오르막쯤에 이르자 8부 능선쯤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산이 그렇게 생겨서일까 아니면 우리의 기분이 그래서일까. 멀리서 봤을 땐 민재봉이 상당히 경사진 봉우리였는데 막상 걷다보면 평지를 걷는 느낌 이상이 아니다. 얼마 걷지 않았다 싶은데 금방 정상에 왔다고 여긴 것도 그 느낌 때문이다. 산행객이라고 여겼던 그들은 등산로를 정비하는 인부들이다. 정상에는 그들의 작업장비도 그대로 놓여 있다. 결국 우리는 오늘 이 산을 오른 유일무일한 산꾼들이지 뭔가.
정상에 섰지만 여전히 바다는 운무다. 사진 몇 장을 찍고 휴식용 평상에 앉아 오이를 씹는다. 미적지근한 캔맥주도 마신다. 돌아보면 우리가 디뎌 걸어온 산봉과 산봉들이 일열 횡대로 도열하고 있다.
<사진5. 정상 민재봉에서>
언제나 그렇듯 하산 길에서 걸음은 더욱 빠르다. 관목 가지와 억센 풀들이 사정없이 팔뚝과 종아리를 훑지만 거침없이 걷는다. 내가 챙긴 지도에는 사자바위(거북바위)까지 능선을 탄 뒤 산을 내려오는 것으로 돼 있는데 현장에서는 그 중간쯤에 갈림길 표시가 나타난다. 지도에 표시 안 된 청룡사 하산 코스다. 빨리 산을 내려오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주저없이 이 길을 택한다. 이강록 선생이 선두에 나서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중간중간 엄청난 규모의 너덜지대를 만난다. 나로서는 강원도 정선의 노추산 그리고 문경 주흘산에서나 봤던 그런 너덜지대다. 세월의 풍화에 못이긴 거대한 바위가 산사태 만들듯이 암석들을 쏟아 부은 자리다. 등산로는 그 너덜지대 가장자리로 이어진다. 김택중 선생은 너덜 암석을 디디고 선 채로 겁(劫)의 세월을 눈으로 만난 듯한 감개를 토한다.
<사진6. 하산길의 너덜지대>
너덜을 지나고 숲을 빠져 나오자 나지막한 절 지붕이 우리를 맞는다. 와룡산 청룡사다. 여전히 몹쓸 더위. 샘을 찾는데 쉬 눈에 띄질 않는다. 지나가는 스님에게 샘터를 묻다가 물은 사람이 먼저 놀란다. 그 맑고 이쁜 스님의 얼굴 때문이다. 저 거칠고 숨찬 너덜과 숲 아래에 이런 참한 비구니가 백일을 하루같이 부처님과 동침하고 있다니! 6시간의 산행. 온몸을 땀과 흙먼지로 덮은 지친 산꾼 셋은 홀연 나타난 스님 하나에 어이없이 눈을 빼앗겼다가 뒤늦게 샘물을 들이키고 손수건을 쥐어짠다. 비록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개안(開眼)과 같은 놀람은 뭍의 끝자락에 있는 산골에서도 여지없이 다가왔던 것이다.
절 길을 나와 마을로 난 포장길을 걷는 때에도 와룡산 산봉들은 먼데서 우리를 에워싼다. 마침내 우리는 활짝 편 부채 끝을 한 바퀴 다 돈 뒤에 부채 손잡이 쪽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산 뒤에 갖는 자신에 대한 경이감을 부추겨 주는 것이 이들 산봉들임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능소화 꽃송이들이 눈부시게 박혀있는 시골집 담벼락 너머 편엔 이제 우리들을 태우고 바닷가 횟집으로 데려다 줄 레간자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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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조 시인은 우리들을 바닷가 횟집으로 초대하여 정말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튿날에도 그는 우리들을 남해군 물건리로 데려가 바다낚시를 경험하게 해주었으며, 자신이 재직하는 학교에 가서 직접 농사지은 풋고추를 한 보자기 따주었다. 다시 삼천포로 돌아오는 길에는 창선대교 어귀에서 내려 그 소문난 멸치 쌈을 안주로 해서 낮술을 마셨다. 삼천포 시내에도 그의 밭이 있었는데 이곳에 들러서는 갓 캔 햇감자를 일행 마다 그득 안겨 주었다. - 그 후의에 대한 고마움을 우선 이곳에 간단히 적어 놓는다.)
<사진 7. 남해 물건리 봉돌해안>
<사진 8. 낚시를 마치고>
<사진9. 정 시인과 헤어지기 전, 노천 커피 한 잔씩 한 뒤>
첫댓글 지지난 해 남해 금산을 가던 중 잠시 머문 노산공원이 생각 납니다..
산행기도 잘 읽었지만 ......선생님의 인맥은 과연 어느정도 둘레인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남한의 국토를 둘러 볼것이 남았는지 의심이 드는군요. 멸치회....(산행기를 읽으면서 잿밥에 관심이 많은지...참...) 다음에 꼭 같이 먹고 싶습니다.
7월 은정에게 '이번달엔 산행이 없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