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포집은 金萬英의 문집이다.
○호(號)가 남포(南圃)이며, 본관은 당악(棠岳/오늘날 해남으로 일명 해남김씨라고도 함)이다. 숙종 35년에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세마(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남평(南平)의 풍산사(楓山祠)에 향사(享祀)했다.(남평읍지) |
<원문>
錦江古有十一人禊。盖修蘭亭舊事也。以時世較之。當我中仁明三聖代。太平文明二百年餘。南中形勝。我州爲最。時則我高王父伯仲氏曁林正字鵬,羅主簿逸孫諸彥。約爲祓禊之會。鸞翔鳳翥則有朴銀臺筆。竹淸松心則有羅諫院詩。一代風韻。于可想矣。繼此之後。烟波,思庵二老先生耕釣之暇。公退之隙。相携父老。克修前事。久益敦厚。不幸島夷之變六載兵燹。盖自萬曆丁酉。修睦之信廢而未講。往在某年間。我大父公慨然囑鄕黨老少。略述古意。繼修其事。前修後昆雖未克盡會一席。而和厚之風。動曜州里。崇禎末時事艱憂。而先進父兄踵武而逝後。無有繼而述之者有年矣。皇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萬英自永平還鄕。鄕黨諸老袖一冊子來叩。余目之。卽我季父公與鄭上庠國賢重修舊禊券也。再拜敬閱。愴然久之。且諗于諸公曰社禊之會。盖祖于成周祓禊之禮。洛邑流觴之儀。魏晉之後。會稽之勝。雄鳴千古。而夷考其實則淸談而已。詩酒而已。安足爲名敎道哉。惟我錦江之禊。特以桃花爛春爲戒。則當日諸君子敦本尙義。講磨以仁之實可見矣。是以從遊長老之間。揖讓樽俎之列者。出而爲聖代羽儀則有二養相國。超而爲鳳翔千仞則有淸心高士。其薰陶德性。奬掖輔導於旅酬登降之際者。爲如何哉。今諸公刱百年之業。遵前賢之事。可謂美矣。抑未知春秋令日。把盃臨高。漂蕩風流而已耶。將揖遜進退。冬禮夏詩。克修古轍之能 一作務 爲耶。冠昏喪祭。慶吊之盡其情。勖善補過。出入而一乃心。釀出吾鄕黨禮讓之風。毋得罪於吾古先父兄諸君子之責。其不在吾社中諸公耶。抑有一說。惟古禊一十一員之子孫。居吾鄕者何限。而何故忘祖先一心交契之如金蘭。而相視之如秦越哉。此尤吾禊中所相誡者也。僉曰敬服吾子規。仍錄其語。弁諸卷首云。
<번역>
글/南圃 金萬英
번역/羅千洙(나주목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錦江古有十一人禊。(금강고유십일인계)/금강에는 예전에 11인 禊가 있어
盖修蘭亭舊事也。(개수란정구사야)/대체로 蘭亭의 옛 일처럼 행하는 것이니
以時世較之。(이시세교지)/세속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當我中仁明三聖代。(당아중인명삼성대)/우리 중종, 인조, 명종 세 어진 임금의 세상에서
太平文明二百年餘。(태평문명이백년여)/문명이 태평하기를 2백여 년
南中形勝。(남중형승)/남방의 형승이
我州爲最。(아주위최)/우리 고을이 가장 성대하였다.
時則我高王父伯仲氏曁林正字鵬,羅主簿逸孫諸彥。(시칙아고왕부백중씨기림정자붕,
나주부일손제언)/이때에 나의 고조부 伯仲씨와 함께 정자 林鵬, 주부 羅逸孫과 여러 선비들이
約爲祓禊之會。(약위불계지회)/禊祭의 모임으로 부정을 없애자고 약속하여
鸞翔鳳翥則有朴銀臺筆。(란상봉저칙유박은대필)/난새와 봉새가 나는 듯하다고 승정원의 朴公(朴祐)이 썼으며
竹淸松心則有羅諫院詩。(죽청송심칙유나간원시)/맑은 대나무와 소나무의 마음이라고 사간원의 羅公(羅逸孫)이 시를 지었으니
一代風韻。(일대풍운)/한 시대의 風采와 韻致을
于可想矣。(우가상의)/상상 할 수 있다.
繼此之後。(계차지후)/이 다음부터는
烟波,思庵二老先生耕釣之暇。(연파,사암이로선생경조지가)/연파와 사암 두 늙은 선생이 여유롭게 밭을 갈며 낚시질하였는데
公退之隙。(공퇴지극)/공직에서 물러나 여가로
相携父老。(상휴부로)/부로들과 손을 맞잡고
克修前事。(극수전사)/능히 앞일을 닦아서
久益敦厚。(구익돈후)/갈수록 돈후하여졌다.
不幸島夷之變六載兵燹。(불행도이지변륙재병선)/불행히도 섬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켜 6년간 兵火가 있어
盖自萬曆丁酉。(개자만력정유)/대체로 만력 정유년(1597년)부터
修睦之信廢而未講。(수목지신폐이미강)/친목을 도모하는 신의가 폐하고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
往在某年間。(왕재모년간)/지난 어느 해에
我大父公慨然囑鄕黨老少。(아대부공개연촉향당로소)/나의 대부공께서 개탄하는 모습으로 향당의 노소들에게 부탁하면서
略述古意。(약술고의)/옛 뜻을 간략히 기술하고
繼修其事。(계수기사)/修禊의 일을 계속하도록
前修後昆雖未克盡會一席。(전수후곤수미극진회일석)/앞에서 修禊한 후손들이 모두 다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하였지만
而和厚之風。(이화후지풍)/온화하고 돈후한 풍치로
動曜州里。(동요주리)/고을과 마을이 빛나도록 움직였다.
崇禎末時事艱憂。(숭정말시사간우)/숭정년 말(1644년)에 時事가 어렵고 근심되고
而先進父兄踵武而逝後。(이선진부형종무이서후)/앞선 부형들이 차례대로 돌아가신 뒤
無有繼而述之者有年矣。(무유계이술지자유년의)/그것을 계승하는 것이 없이 몇 해가 되었는데
皇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황명남도후이십일년을사)/명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간 뒤 21년 을사년(1665년)에
萬英自永平還鄕。(만영자영평환향)/萬英 스스로 영평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鄕黨諸老袖一冊子來叩。(향당제로수일책자래고)/향당의 여러 노인들이 소매 속에서 한 책자를 가져와 물었는데
余目之。(여목지)/내가 보니
卽我季父公與鄭上庠國賢重修舊禊券也。(즉아계부공여정상상국현중수구계권야)/나의 작은 아버지와 성균관의 정국현이 다시 수계를 하기 위한 옛 계첩이었다.
再拜敬閱。(재배경열)/두 번 절을 올린 뒤에 삼가 열람해보니
愴然久之。(창연구지)/창연한 빛이 오래도록 감돌았다.
且諗于諸公曰社禊之會。(차심우제공왈사계지회)/또 諸公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토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의 모임에
盖祖于成周祓禊之禮。(개조우성주불계지례)/대개 조상들은 낙양에서 삼월 상사절(上巳節)에, 재액을 털어 버리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禮로
洛邑流觴之儀。(락읍류상지의)/낙양의 삼월 삼짇날에 물가에다 술자리를 베풀고 재액(災厄)을 쫓던 풍속의 의전으로
魏晉之後。(위진지후)/위나라 진나라 이후
會稽之勝。(회계지승)/蘭亭이 있는 회계산의 훌륭한 일(勝事)은
雄鳴千古。(웅명천고)/먼 옛적에 크게 울렸지만
而夷考其實則淸談而已。(이이고기실칙청담이이)/그 실상을 평범하게 상고해 보면 한담(閑談)과 고론(高論)에 치우친 일 뿐이고
詩酒而已。(시주이이)/술 마시며 시 짓는 것뿐이니
安足爲名敎道哉。(안족위명교도재)/어찌 족히 가르치는 도라 이름 하겠는가.
惟我錦江之禊。(유아금강지계)/오직 우리 금강의 禊는
特以桃花爛春爲戒。(특이도화란춘위계)/특별히 따뜻한 봄에만 피는 복숭아꽃이 되지 말자고 경계하고
則當日諸君子敦本尙義。(칙당일제군자돈본상의)/修禊의 당일에 여러 군자들이 本을 두텁케 하고 義를 숭상하고
講磨以仁之實可見矣。(강마이인지실가견의)/仁으로 학문(學問)이나 기술(技術)을 갈고 닦는 실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是以從遊長老之間。(시이종유장로지간)/이로써 어른과 노인들 간에 쫓아서 교유하며
揖讓樽俎之列者。(읍양준조지렬자)/겸손한 태도로 예절을 갖추어 하는 공식적인 잔치의 반열에 있는 자가
出而爲聖代羽儀則有二養相國。(출이위성대우의칙유이양상국)/세상에 나가 聖代에 조정의 儀表가 되어 마음을 기르고(養心) 목숨을 기르는(養生) 相國이 있어
超而爲鳳翔千仞則有淸心高士。(초이위봉상천인칙유청심고사)/천길 높이 나는 鳳을 뛰어 넘는 淸心의 높은 선비가 있으니
其薰陶德性。(기훈도덕성)/덕성을 교화하고 훈육하여
奬掖輔導於旅酬登降之際者。(장액보도어려수등강지제자)/잘 도와서 좋은 데로 인도(引導)함을 장려하고 제사를 마친 뒤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며
서로 술을 권하는 자리에 오르내릴 즈음에는
爲如何哉。(위여하재)/어떠하였겠는가.
今諸公刱百年之業。(금제공창백년지업)/이제 諸公들이 백년의 업을 만들어
遵前賢之事。(준전현지사)/전에 어진 이들의 일을 좇으려 하니
可謂美矣。(가위미의)/가위 아름답도다.
抑未知春秋令日。(억미지춘추령일)/또한 알지 못하겠지만 봄 가을로 좋은 날에
把盃臨高。(파배림고)/술잔을 잡고 높은 곳에 임하니
漂蕩風流而已耶。(표탕풍류이이야)/둥둥 떠서 흘러가는 풍류뿐이겠습니까.
將揖遜進退。(장읍손진퇴)/장차 진퇴할 때 읍을 하고
冬禮夏詩。(동례하시)/겨울에는 禮를 닦고, 여름에는 시를 지으며
克修古轍之能一作務爲耶。(극수고철지능일작무위야)/옛사람의 발자취를 닦는데 능히 한번 힘쓰려는가.
冠昏喪祭。(관혼상제)/관혼과 상제에서
慶吊之盡其情。(경적지진기정)/경조사의 情을 다하고
勖善補過。(욱선보과)/착함에 힘쓰고 허물을 보완하면서
出入而一乃心。(출입이일내심)/나가고 들어옴에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釀出吾鄕黨禮讓之風。(양출오향당례양지풍)/우리 향당의 예의와 겸양의 바람을 빚어냈다.
毋得罪於吾古先父兄諸君子之責。(무득죄어오고선부형제군자지책)/죄를 짓지 않는 우리 옛 선대의 부형과 제군자의 책임은
其不在吾社中諸公耶。(기불재오사중제공야)/우리 社稷 가운데 있지 않은 제공들이다.
抑有一說。(억유일설)/또 한마디 말을 하자면
惟古禊一十一員之子孫。(유고계일십일원지자손)/생각건대 옛 계의 11인의 자손들이
居吾鄕者何限。(거오향자하한)/우리 고을 거주자로 어찌 한정하겠는가.
而何故忘祖先一心交契之如金蘭。(이하고망조선일심교계지여금란)/ 조상들의 금란지교 같이 한마음으로 사귄 정분의 옛날을 어찌 잊겠는가.
而相視之如秦越哉。(이상시지여진월재)/서로 보면서 秦나라와 越나라 같이 소원(疏遠)하겠는가.
此尤吾禊中所相誡者也。(차우오계중소상계자야)/이것이 더욱 우리 禊 가운데 서로 경계하는 바이다.
僉曰敬服吾子規。(첨왈경복오자규)/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그대의 규정을 공경하여 복종하려고
仍錄其語。(잉록기어)/거듭 말을 기록하여
弁諸卷首云。(변제권수운)/책머리에 얹는다.
<해설>
○時世(시세)는 세속,
○蘭亭(란정)은 중국 진(晉)나라 때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삼월 삼짓날 당시의 명사(名士) 41명과 놀았던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정자이다. 당시 왕희지를 비롯한 명사들은 수계(修禊)하며 물 구비에 잔을 띄워 술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고, 〈난정기(蘭亭記)〉라는 명문(名文)을 남겼다. 《古文眞寶 後集》 수계는 3월 상사일(上巳日)에 냇가에 가서 몸을 씻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그 해의 액운을 면한다 한다.
오늘날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난저산(蘭渚山)을 말한다.
○鸞翔鳳翥(란상봉저)는 난새와 봉새가 날고
○銀臺(은대)는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이다
○羅諫院(나간원)은 羅逸孫을 말한다.
○朴銀臺(박은대)에서 금강11인 현계원 중에는 박씨가 없다.
다만 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금강 11인 현계의 기록을 六峯 朴祐가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박우(朴祐)는 1476년(성종 7)∼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다. 광주(光州) 출신.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10년(중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병조정랑·장령(掌令)·집의(執義)·성균관사예를 거쳐 성균관사성·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직제학·좌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하여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때 권세가인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이 되어 내려왔으나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항(沆) 등이 재삼 초청하였으므로 마지못해 잠시 그들을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복직하였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그때 허항이 전날의 감정으로 모함하여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시 병조참의로 복직되니, 허항이 또한 모함을 하여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교화하여 왕이 표리(表裡)를 내려 포상을 하였다. 그로부터 해주 지방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뒤 성균관대사성·병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우윤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인종 때에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명종 때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성정이 곧아 웃사람에게 아첨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으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我高王父伯仲氏(아고왕부백중씨)에서 당악김씨 김만영의 고조부는
虞侯 金臼 棠岳人(우후 김구 당악인) 또는 幼學 金㪷 棠岳人(유학 김두 당악인)일 것으로 본다.
○烟波(연파)는 박개(朴漑) 를 말함.
1511년(중종 6)∼1586년(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대균(大均), 호는 인파처사(烟波處士). 좌윤 우(祐)의 아들이다.
향시에 합격하고 명종 때 선공감주부·참봉·고산현감(高山縣監) 등을 지냈다. 선조 때 암행어사가 되었고, 김제군수를 지냈다.
○思庵(사암)은 박순을 말한다.
○父老(부로)는 지방에서 사표가 되는 나이 드신 어르신을 높이 부르는 말 같다.
○後昆(후곤)은 후손
○上庠(상상)은 태학, 성균관을 말함
○鄭國賢은 누구인가.
자는 이빈(而賓), 1592년에 태어나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0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본관은 나주, 거주지도 나주였다.
○季父(계부)는 작은 아버지
○社禊(사계)는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토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成周(성주)는 낙양을 말함.
○祓禊(불계)는 삼월 상사절(上巳節)에, 재액을 털어 버리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
재앙을 떨어버리는 일. 《후한서(後漢書)》예의지상(禮儀志上)에 의하면, 음력 3월 삼짇날에 관민(官民) 모두가 동으로 흐르는 물에 가서 묵은 때를 씻었다 한다.
○洛邑(락읍)은 주 성왕(周成王) 때 주공(周公)이 낙읍에다 왕성(王城)을 경영했다. 즉 주나라의 도읍인 낙양을 말함.
○流觴(류상)은 삼월 삼짇날에 물가에다 술자리를 베풀고 재액(災厄)을 쫓던 풍속을 말한다.
○夷考(이고)는 평범하게 상고함.
○淸談(청담)은 위진(魏晉) 시대의 선비들이 유가(儒家)의 실천적인 이론을 등한히 하고 노장(老莊)의 공리(空理)에 빠져 한담(閑談)과 고론(高論)에 치우친 일.
○揖讓(읍양)은 예를 다하여 사양(辭讓)함, 겸손한 태도를 가짐,
○樽俎(준조)은 예절을 갖추어 하는 공식적인 잔치
○羽儀(우의)는 조정의 의표(儀表)가 된다는 말임.
《주역(周易)》 점(漸) 괘에 ‘홍점우륙 기우가용위의길(鴻漸于陸其羽可用爲儀吉)’이라 하였음.
○二養(이양)은 마음을 기르고 목숨을 기르는〔養心養生〕
○鳳翔千仞(봉상천인)은 천길 높이 나는 봉과 같으니
○薰陶(훈도)는 교화(敎化)하고 훈육(訓育)하는 것
○奬掖輔導(장액보도)는 잘 도와서 좋은 데로 인도(引導)함을 장려하고
○旅酬(여수)는 제사를 마친 뒤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며 서로 술을 권하는 의식이다. 《中庸章句 第19章》
○漂蕩(표탕)은 둥둥 떠서 흘러감
○揖遜進退(읍손진퇴)는 진퇴할 때 읍을 하고
○社中(사중)은 社稷 가운데
○金蘭(금란)은 금란지교(金蘭之交) 즉 쇠처럼 굳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이란 말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를 말할 때 金蘭之交라는 말을 쓴다.
○秦越(진월)은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두 나라 이름.
진(秦)나라는 서북쪽에 있고, 월(越)나라는 동남쪽에 있었으므로, 거리가 극히 멀었는데, 곧
소원(疏遠)한 것의 비유로 쓰임
○吾子(오자)는 친하게 사람을 부르는 호칭
|
첫댓글 원-진-공언-집-자강-계조-일손-창-사음-덕양
박개 .박순은 육봉의 아들임
당악인 虞侯 金臼, 幼學 金㪷 형제임
"남평(南平)의 풍산사(楓山祠)에 향사(享祀)했다"
현재는 김만영의 고향인 왕곡면 송죽리 귀업마을로 옮겼다고 합니다.
"皇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황명남도후이십일년을사)/명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간 뒤 21년 을사년(1665년)에
萬英自永平還鄕。(만영자영평환향)/萬英 스스로 영평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永平은 현재 나주시 남평면을 말함
김만영 (1624~1671)
"박우(朴祐)는 1476년(성종 7)∼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다. 광주(光州) 출신".
박우(朴祐)는 幼學 金㪷와 매부지간
4世 효정(孝禎)님의 사위로 금강11현인과 친밀한 관계로 처가쪽 선산에 묻히신듯~"
(당악김씨 카페내용임)
일반게시판 462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