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과정에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즈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골고다 언덕만 지나시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옵니다.
아, 가시지 않으면 안될까요?
그 소중하고 귀하신 분이 왜 그렇게 가셔야 했나요?
베드로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던
내용입니다. 베드로 나름대로는 사랑의 표현이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3)
그렇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 돌아서가면 안되겠냐고, 다른 길로 가라고 속삭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십자가는 절대포기할 수 없는 단 한가지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베드로였지만 그렇게 무섭도록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시지 않으시면 나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내 속에 비록 십자가 고난에 대한 마음의 아픔이 있지만 당신의 사랑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골고다를 향하신 첫발을 내딛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 27:28~31)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기 전, 예수님은 온갖 희롱과 수모를 당했다.
홍포는 당시에 왕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만 입힐 수 있는 옷이었고, 면류관 역시 왕에게
씌우는 영광의 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셨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조롱이었고, 놀림이었다.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자칭한 예수님에 대하여 그들은 빈정섞인 조소를 했던 것이다.
채찍질로 인하여 이미 피투성이가 된 예수.
너덜너덜한 홍포를 입고,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
아무리 조롱을 해도 반항조차 하지 않는 무기력한 예수.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며 즐거워했고, 손가락질했다.
모든 인류가 영광을 돌려야 합당한 그 분께서는 그렇게 모욕을 당하셨고, 치욕을 당하셨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런 조롱 속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품으셨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이해할 수가 없는 그 사랑의 세계.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한 조롱이 끝나고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다.
해골이라는 골고다의 말 뜻이 의미하듯이 그 길은 처절한 길이었다.
예수님은 어젯밤부터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다. 겟세마네에서 밤새 기도하셨기에
그리고 밤새도록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심문당하셨다.
그것만 해도 힘드실텐데 수많은 채찍질을 당했다. 몸은 만신창이였다.
그러나 육체적인 힘듦보다도 더 어려웠던 것은 당신의 걸음 한걸음, 한걸음 속에
우리의 죄악들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에 놓여있었다.
그것을 지고 가는 길은 감히 상상도 못할 고통이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천근과 같이 무거웠다.
결국, 예수님은 쓰러지셨다.
겨우 다시 일어서서 걸어보았으나 몇걸음이 못되어 다시 쓰러지셨다.
예수님을 끌고가던 병사들도 그것이 엄살이 아니라 정말 끌고가지 못할 상황인 것을 알았다.
일단 십자가는 가지고 가야했기에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을
세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다.
구레네 사람 시몬. 명백한 구절은 없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그 때는
유월절이었기에 시몬 역시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길을 가던 중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게되고 구경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병사가 시몬을 붙잡더니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이다.
시몬은 난감했다. 어느 누구도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일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 27:32)절에 보면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스스로 지고 갔던 십자가가 아닌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 시간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영광의 자리였음을 시몬은 알지 못했다.
후에 (롬 16:13)에 보면 바울이 로마교회 사도들에게 문안할 때에 루포에게 문안함을
살펴볼 수 있는데 시몬은 루포의 아버지였다.
즉,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뒤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몬은 당시에는 왜 내가 이런 것을 지고 가나 하는 원망과 한탄이 있었겠지만 결국
그로 인하여서 가장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부분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한 복음의 경우에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 19:17)라고 단 한구절로 적혀있을 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요한에게는 그 아픔을 차마 다 기록할 수 없는 마음의 무거움이 있었다.
골고다 언덕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피와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차마 글로 옮겨
적을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 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어려워지는 그 길.
예수님은 그 길을 걸으셨다. 한걸음, 한걸음...
예수님은 끝도 보이지 않는 그 고통의 길을 걸으시며 한가지 생각만 하셨다.
바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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