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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은 알프스 이북의 서유럽과 다른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했다. 로마라는 역사적 전통과 지중해라는 지리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이 두 상황은 선례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을 로마 고전주의, 초기 기독교 건축, 비잔틴건축, 이슬람 건축 등으로 다양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북유럽의 로마네스크 건축과 분명히 다른 조건이었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이런 다양한 선례를 종합화하는 문제가 최우선이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이탈리아만의 대표적 특징을 낳았다.
로마 고전주의의 연속성이 제일 두드러졌다. 로마 문명의 본고장 이탈리아반도에서 발생한 양식이기 때문에 당연한 측면이 컸다. 서북 유럽의 로마네스크조차도 '로마다운'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건축의 특징이 일정 부분 남아 있는데 이탈리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로마의 초기 기독교 건축이 로마 건축을 그대로 받아들여 시작한 점에서도 그렇다. 물론 중세 때 새롭게 등장한 내용도 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관건은 로마 및 초기 기독교 건축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그 위에 서북유럽에서 발생한 중세 기독교 건축의 새로운 내용을 더하는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양면성이 있는 점에서 로마네스크 고전주의라 부를 수 있는데 베로나의 성 제노(St. Zeno, Verona, 1123~35)가 좋은 예다. 동시대의 특징은 외관에 사용한 추상적이고 서술적인 장식과 네이브 월의 교대 리듬이다(도 4-47, 4-48). 로마 전통은 납골당에 별도로 봉헌한 성인이 없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봉헌 성인이 없는 것은 중세 때 로마네스크의 분화가 일어나기 전 고대 기독교 때의 원형적 현상이었다. 실내도 마찬가지다. 네이브 월의 2단 구성은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의 전통인데 반해 더블 베이 기둥 체계 및 아케이드 위쪽 벽체에 넣은 띠 장식은 로마네스크 어휘이다.
도 4-47 성 제노
베로나, 이탈리아, 1123-35년.
ⓒ 임석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 4-48 성 제노
베로나, 이탈리아, 1123-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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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와 장식주의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초기-성기-후기'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영국은 연도에 따른 진행 상황의 변천을 규칙화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는 이보다 더 심해서 연도는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지역에 따라 특징을 구별할 수 있어서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눌 수 있다. 북부는 롬바르디아, 중부는 토스카나, 남부는 시칠리아가 각각 중심지였다. 이 가운데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양대 축을 이룬다.
롬바르디아의 로마네스크 중심지는 밀라노, 파비아, 파르마, 모데나 등이었다. 고전 기독교 전통을 기본 바탕으로 삼아 지역의 전통 장식 및 벽돌 조적, 롬바르디아 제1 로마네스크, 서북유럽의 초기 로마네스크 등을 혼합한 특징을 보인다.
밀라노의 산 암브로조(San Ambrogio, 네이브 1018~50, 천장 볼트 12세기)를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밀라노를 대표하는 주교인 산 암브로조가 386년에 처음 지은 뒤 카롤링거왕조와 로마네스크 때 두 차례의 큰 증축이 있었다. 1018년부터 1050년에 네이브 월을 증축하면서 원형 기둥을 콤포지트 사각 벽기둥으로 바꿨으며 12세기에는 천장을 볼트로 바꾸었다(도 4-49).
벽돌을 이용한 여러 가지 장식 기법으로 유명한 건물인데 이는 이 지역의 전통이었다. 로마 전통은 네이브 월의 2단 구성, 롬바르디아 밴드, 초기 기독교 건축의 안마당 구성, 아치 형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 4-50). 서쪽 출입구가 바실리카형이 아닌 신전 파사드인 점도 같은 전통으로 볼 수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로마의 개선 아치를 닮기도 했다.
로마네스크의 동시대 어휘는 구조 부재에서 나타났다. 천장을 리브 그로인 볼트로 마감했는데 네이브 월의 더블 베이 다발 기둥에 대응했다. 대응은 영국에서처럼 불완전했다. 주 기둥의 대응 기둥은 횡 방향 리브와 대각선 방향 리브 등에 비교적 정확하게 대응했지만 부 기둥은 올라오다 중간에 끊겨서 장식 어휘에 머물렀다.
파비아의 성 미카엘은 산 암브로조의 구성에 지역 장식의 특징을 더했다. 파사드는 단일 매스의 신전 파사드형으로 산 암브로조와 유사했지만 벽돌이 아닌 화강석을 주재료로 사용했다(도 4-51). 지붕 경사를 따라 깊게 판 아케이드는 지역의 전통 장식인데 출입구에서 반복되었다. 정문 출입구는 여러 겹의 아키볼트로 윤곽을 짰다. 아치형 창과 원형 창을 기하학적으로 사용했으며 네이브 월의 다발 기둥과 비슷한 기둥 다발을 네이브와 아일이 갈라지는 경계 부 외벽에 덧붙였다.
도 4-51 성 미카엘
파비아, 이탈리아, 1100년경-11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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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나 성당(Modena Cathedral)은 성 미카엘의 장식 어휘를 긴 측면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했다(도 4-52). 성 미카엘의 깊게 파인 아케이드를 블라인드 아치로 바꿨는데 세 개의 작은 아치를 한 세트로 삼아 이것을 다시 하나의 큰 아치 윤곽이 감싸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세 개의 작은 아치는 창을 이루며 실내에서 갤러리 층을 형성했다. 외관의 갤러리 층은 실내 구성을 반영하며 파사드와 측면의 전 폭에 걸쳐 형성되었다.
도 4-52 모데나 성당
이탈리아, 1099-1184년/12세기 말-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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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의 장식주의는 토스카나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시대적 산물로서 북부 이탈리아만의 독립적 현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장식주의는 이 지역의 중심 지역인 포 계곡을 따라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교역 벨트를 축으로 삼아 국가를 초월하여 유럽 전체에 걸쳐 나타나던 현상의 하나였다.
베네치아의 동방 무역에서 축적된 교역 루트와 자금력은 밀라노를 거쳐 알프스 이북 지역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이를 담당한 세력이 밀라노의 기독교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롬바르디아 로마네스크 교회의 장식주의였다. 장식 내용은 동물, 식물, 괴물 등 자연주의 장식과 성서, 역사 등을 기술한 서술적 장식 등 다양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도 구약, 신약, 동고트족의 왕, 카롤링거의 역사 등 다양했다.
토스카나 장식 고전주의
토스카나는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대리석 산지였는데 이런 전통이 로마네스크까지 이어지면서 대리석을 이용한 장식주의가 대표적 특징으로 나타났다. 대리석을 주재료로 사용했으며 흑백의 색깔 차이를 이용한 얼룩말 무늬가 대표적이었다.
화강석도 주요 재료로 함께 사용했다. 작은 아치가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나 블라인드 아치가 이런 장식을 담아내는 주요 부재였다. 벽체는 흑백이 교대로 나타나는 띠무늬로 장식하고 아치의 아키볼트는 같은 방식으로 점박이 문양처럼 만들어 전체적으로 얼룩말 무늬를 만들었다.
이런 장식 처리는 로마 시대부터 형성되어 있던 것이며 비잔틴을 거치며 모자이크 문양으로 발전했는데 토스카나 로마네스크는 이런 로마 전통을 받아들여 로마네스크의 기본 어휘에 접목해 자신들만의 대표적 특징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점에서 장식 고전주의라 부를 수 있다.
알프스 이북의 구조 제일주의와 대비되는 지중해 고전주의의 산물이었다. 사용하는 대리석이 흑백을 넘어서 핑크와 청록 등으로 확장되면서 얼룩말 무늬 이상의 색채주의가 함께 나타났으며 금박이 들어간 성화가 가세하면 더 그랬다. 이럴 경우 장식다움을 강화한 채색 장식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피렌체는 채색 장식주의의 중심지였으며 산미니아토알몬테(San Miniato al Monte, 11세기 중반~12세기)가 대표적 예다(도 4-53). 전체적으로 대리석을 이용한 화려한 기하 문양으로 장식했다. 페디멘트와 아치의 고전 어휘를 삼각형과 반원형 같은 기하 도형으로 단순화했으며 벽체에는 사각형과 원 등의 도형을 추가로 더했다.
도 4-53 산미니아토알몬테
피렌체, 이탈리아, 11세기 중반-1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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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벽체 중앙에는 성화를 그려서 장식 효과를 이용한 기독교 메시지 전달 기능을 살렸다. 작은 창 프레임 위에 예수, 성 미니아스, 성모마리아 등을 그렸다. 창은 하늘로 가는 관문을 상징하는데 건물에서 높은 곳에 위치해서 접근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피렌체 인근의 피사, 루카, 피스토이아, 프라토 등의 도시에는 장식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예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도시 전체에 대리석 장식 문양을 두른 로마네스크 교회들이 넘쳐나는데, 루카의 산미켈레인포로(San Michele in Foro, Lucca, 12~15세기), 피스토이아의 산조반니푸오르치비타스(San Giovanni fuor Civitas, Pistoia, 12세기 말), 프라토 성당(Prato, 12세기)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도 4-54, 4-55).
피사의 성당 단지는 토스카나의 장식 고전주의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예이기도 하다. 1063년에 피사 해군이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세우기 시작했는데 성당, 세례당, 캄파닐레의 복합단지가 되면서 1272년에 완공되었다. 캄파닐레가 피사의 사탑이다. 성당은 라틴 크로스로, 세례당은 원형으로 각각 처리하면서 기하학적 윤곽을 만들어냈다(도 4-56).
도 4-56 피사의 성당 단지(Pisa Cathedral complex)1)
이탈리아, 1063-12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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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이 정확히 축을 일치하며 단지 전체에 강한 기하학적 질서를 만들어냈다. 건물의 입면에도 전체적으로 기하 장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건축 어휘는 토스카나의 지역주의를 잘 보여주지만 기독교적 상징성에서는 동시대 보편성을 표현한다.
이 단지를 짓던 시기는 피사가 1차 십자군원정 이후의 새로운 기독교 질서 형성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시기였다. 1차 십자군원정의 결과로 새로 세운 예루살렘의 라틴왕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성당과 세례당은 예루살렘 인근의 템플 산 같은 성지 지역의 초기 기독교 유적의 어휘를 많이 차용해서 활용했다.
하람 알 샤리프 성역이 대표적 예다. 중앙집중형 건물인 바위 사원과 선형 바실리카인 알 아크사 모스크가 대표하는 지역인데 이 두 건물이 각각 세례당과 성당의 모델이 되었다. 이런 상징성은 로마네스크 때 형성된 기독교 역사를 대표하는 방식을 통해 동시대성을 표현한다. 성당과 세례당은 이런 상징성 위에 토스카나의 지역 장식주의를 더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예가 되었다(도 4-57).
도 4-57 피사 성당(Pisa Cathedral)
이탈리아, 1063-1118년/1261-12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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