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의 일본군은 정유년 9월16일, 명량에서 소규모의 이순신 함대에 대패했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기세를 꺾고 명량 참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 일가를 몰살하는 특공작전을 계획했다. 직산에서 조명연합군과 대치 중이던 일본군은 정예의 칼잡이 50명을 선발했다. 9월 하순, 아산 백암리에 잠입한 일본 특공대는 이순신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근처의 마을도 모두 분탕했다. 특공대는 산으로 피신한 조선 백성을 발견했다. 조선 청년들이 가족을 깊은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특공대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무기도 훈련도 없는 청년들은 살인 전문가에게 처절하게 당했다. 어머니와 어린 조카를 피신시킨 청년 면(21세)은 장가도 들기 전에 일본군에게 참살되었다. 이순신의 부인은 처참히 살해된 아들을 무릎 위에 안고 통곡하다 기절했다. 그 장면은 바로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죽어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비통해 하는 피에타(Piet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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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막내아들 면은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해(1576년)에는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다. 당시 32세의 이순신은 초임 장교로서 12월에 함경도 최전방으로 최초 발령을 받았다. 솜바지를 입은 이순신은 춥고 배고픈 몸으로 천오백리 길을 가면서 몸이 무거운 아내를 돌보지 못하고 몸조리 잘 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늦은 나이로 무과 4등으로 급제하여 엄동설한에 아산에서 함경도 삼수(三水) 동구비보(董仇非堡)까지 650km를 행군했다. 그의 벼슬은 권관(權管)인데, 이것은 양반 무관의 최말단 종9품이며 현대의 하사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성 쌓을 수 없는 곳에 진(鎭), 진 설치할 수 없는 곳에 보(堡)를 두었다. “삼수 갑산을 가도...”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를 뜻한다. 삼수는 그만큼 험한 산간벽지이다.
명량에서 크게 이긴 이순신은 포탄, 화약, 화살이 다 떨어졌다. 작전상 진을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일본수군이 대패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200여척의 함대가 건재해 있었다. 그들은 해남의 전라우수영을 점령했다. 통제사가 우수영의 백성들을 산으로 대피시킨 직후였다. 이순신은 9월17일 당사도(무안군 암태도 동편), 어의도(목포 서편), 19일 법성포(영광군), 20일 위도(영광군), 21일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로 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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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10월1일 선유도에서 “아산 고향이 적에게 불타 버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이순신은 다음날 일찍 아들 회를 배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이틀 후 다시 남행을 시작했다.법성포, 어외도를 거쳐 9일에는 우수영으로 귀환했다. 일본군에 의해 분탕질 당한 우수영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보름 후, 아산에서 전령이 소식을 가져왔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10월14일 맑다. (전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여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중략)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후략)>>
사흘이 되었는데 슬픔은 더해갔다. 영내에서는 마음 놓고 통곡할 곳도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낡은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목 놓아 울었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 이순신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호부대설국욕(好赴大雪國辱), 잘 (준비하여) 나아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6개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당부한 말씀이 떠올랐다. 이순신은 밖으로 뛰어나와 영으로 달려갔다. 우수영 옥에 갇혀 있던 왜적 13명을 베었다. 왜적에 부역한 송언봉도 베었다. 상복을 입고 7일이 지났건만 비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적에게 붙었던 윤해, 김언경을 베었다. 보름이 지나도 마음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에 괴로웠다. 저녁나절에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 김신웅을 베었다. 선비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도 목 베었다. 열아홉을 베어도 나라의 치욕은 조금도 씻기지 않았다.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순신은 오직 이 일념으로 나날을 수군 재건에 힘썼다. 치욕과 통한의 정유년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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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유도를 답사합시다.
6월19일 무궁화호를 타고 군산까지 갑니다. 군산역에서 현지 교통수단(버스 또는 택시)으로 새만금방조제 위의 신시도까지 갑니다. 신시도에서 새로 놓은 다리를 걸어서 선유도를 답사합니다. 이 다리는 개통전이지만 인도는 사람이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1. 일시: 2016년 6월19일(일) 07:25 용산역 집합, 또는 07:30 영등포역 집합
2. 교통편
6월19일(월) 용산 무궁화호 출발(07:35)-->영등포(07:43)-->수원(08:02)-->군산 도착(10:41) -->(택시로 이동)--->미룡1주공아파트(11:36)--->(99번 버스로이동)-->신시도(12:25) 트레킹 시작
3. 도보 일정: 26km, 9.5시간 (19일 9km, 3시간, 20일 17km, 6.5시간)
19일: 신시도 출발(12:30) >신시도 초교(2.5km, 13:10) >(신시-무녀 연결교) >무녀도 초교(5.5km, 14:10) >무녀도항(6.5km, 14:30) >(무녀-선유 연결교) >선유도 우체국(8km, 15:00) >수군진 터 답사(9km 15:30) >선유도해수욕장 휴식(16:30) 민박
20일: 선유도 민박 출발(09:00) >(선유-장자 연결교) >장자도(2km, 09:30) >대장자도(4km, 10:10) >장자도(6km, 10:50) >(선유-장자 연결교) >선유도 등산(8km, 12:00) >(선유-무녀 연결교) >무녀도항(8.5km, 12:20) >무녀도 보건진료소(11km, 13:10) >(무녀-신시 연결교) >신시 초교(14km, 14:10) >신시도 버스 정류장(17km, 15:30) 버스탑승(16:00) >(버스로 이동) >군산역(17:00) >무궁화호 출발(17:32) >용산도착(21:00)
3. 소요 경비 예상(각자 부담): 10만원 내외
용산 --->군산역 열차 편도: 경로 10,200원, 일반 14,600원
군산역---> 미룡 주공 아파트 택시합승---> 99번버스탑승 -->(비응항 경유)--> 신시도: 버스 요금 및 택시 합승. 6,000원
석식, 숙박, 조식, 중식: 50,000원
다음날
선유도---> 군산항 여객선 편도: 9,800원 또는 신시도까지 걸어서 버스로 군산역까지
군산항---> 군산역 택시 합승 편도, 1인당 4,000원
군산역 --->용산역 열차 편도: 경로 10,200원, 일반 14,600원
5. 준비물: 신분증(배를 타고 나올 수도 있으므로). 섬에는 식당이 다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각자 즐기는 음료와 간식을 준비 바랍니다. 우산, 물, 트레킹화, 아웃도어 복장, 모자, 스틱, 방충마스크, 선글라스, 썬크림 등도 고려하셔요.
6. 기타: 참고자료 제공.
7. 참가 희망자는 금오랑(010-3160-2591)에게 문자로 연락 주시면 열차표 예매해 드립니다.
*폭우 예보 시 하루 전에 취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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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지도에서 미룡주공아파트-신시도는 시내버스 노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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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역버스시간표
군산 미룡주공1단지아파트 99번 버스 시간표
군산 미룡주공1단지아파트 99번 버스 시간표
역사적 사실 1. 군산진
조선시대의 군산진은 옥도면 선유도 선유 2구에 위치해 있었으며 건물터는 현재 산림청 소유이며, 주변터는 사유지이다. 선유도 군산진은 고려시대 대외교류의 관문으로 외교사절이 머무는 객관을 운영했으며 조선태조 6년에 수군 만호영을 설치하고 선조 2년에는 수군절제사가 파견됐다. 그 뒤 선조 30년 명량대첩이후 이순신 장군이 12일간 머물렀으며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는 화재로 소실됐다. 군산진은 5필지 9900㎡ 부지에 군산진 1채와 부속건물 9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군산진의 위치는 선유도우체국 대각선 맞은편이다. 파출소 7시 방향 건너편 밭뚝에 있다.
역사적 사실 2. 최양업 부제 난파
최양업이 부제 서품을 받고 최초로 고국 땅을 밟은 곳(북위 35°81′84.2″ 동경 126°47′93.6″)이 군산시 신시도이다.
최양업은 중국에서 부제서품을 받고 1847년 고국 선교를 위해 프랑스 배에 탑승했다.
1836년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신학도의 길을 떠난 최양업은 1842년 7월 마카오를 떠나 고국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선은 1839년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했다.(기해박해)
1847년 프랑스는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의 답을 받으려 했다. 최양업 부제는 프랑스 함대 통역관 매스트로 신부와 동승했다. 8월10일(음력 6월 30일) 함대는 고군산도 부근에 도착하였으나 글로와르 호와 빅토리외즈 호가 좌초했다. 함대 사령관 라 피에르는 8월 12일 북서쪽 2마일의 섬(현재의 신시도 배수갑문 안쪽으로 추정됨)에 560여명의 수병을 상륙시켰다.
최양업 신부는 총 6번의 귀국 시도를 했는데 신시도 방문이 4번째 시도였다. 만경현 고군산진은 프랑스 함대의 도래를 만경 현감, 전라 관찰사, 조정으로 보고했다. 전라감사는 만경 현령, 고부 군수, 위도 첨사, 여산 부사, 익산 군수 등으로 하여금 물과 식량, 연락선 등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면서 이들의 행적을 계속 감시했다.
고군산진에 속하는 신치도 해양에 도착한 뒤 좌초된 곳에서 ‘북쪽 혹은 북서쪽으로 2마일(약 3.2km)’ 혹은 ‘10리쯤’ 떨어져 있는 섬에 상륙해야만 했으니, '일성록'에는 이곳이 ‘고군산진 신치도(현 신시도)의 신치산 아래 남쪽 모래사장’으로 나온다.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입도한 신치도 남쪽 모래사장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좌표상으로 '북위 35도 81분, 동경 126도 47분 부근'으로, 바로 이곳에서 1847년 8월 12일부터 9월 12일(음력 8월 4일) 상해로 떠날 때까지 정확히 한 달 동안 체류, 프랑스 해군과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바로 그곳이 신시도 기념탑 부근이다.
프랑스함대는 대형 보트를 상해로 보내 구조를 요청했다. 이를 접수한 영국 다다러스 함 등 3척의 군함이 그해 9월 5일 신시도 현지에 도착했다. 함대는 일주일후인 9월 12일(음력 8월 4일) 신시도를 떠났다.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30일간의 신시도 체류가 끝났다.
최양업 부제는 이 30일 동안 프랑스 함대와 조선 조정간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천주교 신자를 접촉하고 싶었다. 하루는 고군산진(현 선유도) 고을의 관원들과 협상하고 돌아오면서 몇의 조선인들을 만나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고 물으니 '알고말고요 잘 압니다'라는 답을 얻었다. 그들의 가족 모두 대공소(현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의 대소공소)에 살고 있다는 답을 얻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접촉은 이뤄지지 못했다. 영국 함대와 프랑스 수병들이 철수 할 때 최양업 부제는 조선에 남기를 간청했다. 함대 사령관 라 피에르는 생명의 위험이 있다하여 거절했다. 최양업 부제는 천신만고 끝에 밟은 조선 땅 고국을 등지고 상해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