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생가(우측)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랬다고 한다. 인도는 포기할 수는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포기할 수 없다고 . 그만큼 영국의 자랑인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그가 사랑하고 그의 삶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고장, 또한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동네, 그로 인해서 더욱 유명해진 마을, 게다가 덤으로 그로 인하여 먹고 사는(?) 동네, 스트렛포드 어픈 에이본(stratford upon avon). 다행히도 내가 살고 있는 버밍햄에서 1시간 거리에 있어 종종 갈 기회가 있었다.
원래 스트렛포드는 워릭셔 지방의 오래된 시장마을이었다. 그 지명이 말해주듯이 straet는 라틴말로 거리(street)에 해당하고, ford는 켈트말로 강(river)이라는 의미가 있단다. 2000년 전 에이본(avon) 강가에 정착하면서, 도자기를 만들고 주물을 녹이고 야금을 하여 강을 이용해 무역을 하며 생활하였다. 1400년 경에는 근방에서 유명한 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하여, 매주 시장이 열리곤 하였다. 지금도 시장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도 그 farmer's market를 구경할 수 있었다. 당시 무역상인들은 자기네들의 종교적인 동기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성십자 길드(Guild of the Holy Cross)를 조직하였다. 세익스피어가 어려서 다녔던 King Edward VI Free Grammar School 역시 이 길드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사진 : 당근 한나 살랑가 ~ 허벌나게 마시써분디...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마침 farmer's market이 열려 인근 동네사람들이 물건을 갖고나와 사고 팔고 하고 있었다. 지역생산자들이 직접 소비자들에게 팔되, 최고의 품질을 믿음이 가도록 책임지고 또한 하자있으면 반품도 되게 하려고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광장 장터에서는 집에서 만든 빵, 집에서 만든 포도주, 소세지, 과일, 유기농 고기 등등. 사진에서 보는 당근 파는 아저씨와 함께 찍은 사진 배경이 된 건물은 지붕이 수백년된 고가로 유명한 레스토랑이고, 광장 가운데 교회 첨탑같은 것은 옛날 길드를 기념해서 세운 탑같은 것이다. 나는 2월 19일에 버밍햄대학에서 단체로 버스로 구경 갔었는데, 그 다음 장날은 3월 5일이라고 했다.
사진 :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을 가진 펍, 곧 넘어질 것 같은데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국은 보존하는데는 뭔가 끝내준다는 느낌을 준다. 오래된 고풍스러운 집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살려서 현대에 재현할 뿐만 아니라, 그곳을 식당으로 활용하여 돈도 벌고, 꿩먹고 알도 먹는 재주를 가진 것 같다.
사진 : 맨좌측은 입구, 가운데가 셰익스피어 생가, 우측은 기념품가게(생가에 들렀다가 나올때는 기념품가게를 들러 주머니를 비우게 유도하는 것도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 셰익스피어 생가 건물
셰익스피어는 이 동네에서 1564년에 평범한 상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1564-1616). 감이 안 온다면, 우리 조선 땅에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쪼까 감이 올 것이다. 벌써 몇 백년이 지났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못잊어 하면서, 그의 체취가 묻어있는 이 고장을 순례하고 싶어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햄릿, 멕베드, 한 여름밤의 꿈 등등. 누구인들 셰익스피어를 모를까마는, 또한 누가 셰익스피어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문학의 심오한 깊이는 무궁무진인 것 같다.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저서는 물론 그의 삶의 흔적들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고, 또한 그의 무덤이 있는 이 마을. 그가 나고 자란 집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집까지도 소중히 보존되고 있는 영국의 시골마을이 어찌나 깨끗하고 아름답던지 지다던 이방인도 ‘아, 나도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체취와 함께 평화롭고 포근한 마을의 분위기가 좋아서였을까, 이 곳 집값이 런던과 비슷할 정도로 엄청 비?患?.
셰익스피어는 18세 때 자기보다 여덟살 연상인 엔 헤서웨이(Anne Hathaway)와 결혼한 후 잠시 있다, 그는 23살에 런던으로 간다. 거기서 고생을 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그는 시골학교 교사, 귀족의 심부름꾼, 극장의 허드레 일꾼 등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영문학하는 사람에게 들으니, 그는 극장 문 앞에서 말지기로서 말(馬)을 관리하거나 프롬프터(대사를 잊은 배우에게 대사를 알려주는 무대 뒤 역할)로 일했을 것이라고 한다. 30세가 되던 해부터 20여년간 전속극작가 겸 글로브 극장의 공동경영자로 때로는 무대에서 직접 배역까지 맡았다고 하는데, 이 동안에 40여편의 희곡과 시집을 펴냈다. 나는 문학은 잘 모르고,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세속적인 것이 무척 궁금했다. 셰익스피어의 생가에서도 그의 부인 생가에서도 해설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물었다. 그는 문학 이외에도, 현실 생활에서도 매우 현명했었다(clever)고 한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자였을 뿐만 아니라, 부인의 집안도 부유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30대 초반에 이미 많은 부를 모았고 유명인사로서 그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였다(Shakespeare has established himself as a man of wealth and importance by the time he was in his early thirties). 16세기 말에 그는 런던에서 극작가로서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159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33살 되던 해에는 그의 고향인 스트렛포드에서 가장 큰 집의 하나인 15세기 건물을 사들였다. 그 건물이 채플 거리(chapel street) 모퉁이에 있는, 지금 뉴플레이스로 불리는 곳에 있는 것은 것이다. 1602년 셰익스피어는 부동산보유권(tenancy, copy hold)을 획득하고, 다시 3년 뒤에는 스트렛포드 지방의 공터에 10 에이커의 땅을 사들였다.
그는 결혼 후 딸을 낳고, 곧 이어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런던에서 그는 극작가로서 성공하면서 많은 희곡과 시집을 펴냈지만, 11살 밖에 먹지 않은 외동 아들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은 후 삶의 마지막까지 비극의 세계를 그리는 작품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부모 보다 먼저 자식이 죽는 것을 ‘붕어(崩禦?)’라고 한다던가 ?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자식이 죽으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하던데...
여유당전서 500여권을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생각난다. 다산의 부인 풍산 홍씨는 결혼한 후 열 명의 아이를 갖고 9명을 낳았으나 6명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학연과 학유)과 딸 하나를 길렀으니, 그 괴로움과 고통은 어떠했을까 ? 부인은 유산을 한번 하였지만, 나머지는 주로 마마와 학질로 잃었다. 다산은 세 살 때 마마로 죽은 아들(이름은 농장)을 위해 유배지(전남 강진)에서 무덤에 함께 묻는 광지(壙兒壙志)를 고향(경기도 남양주)으로 보내 큰 아들로 하여금 무덤 앞에서 읽게 하였다고 한다. 애비로서 병든 자식을 옆에서 지켜주지 못하고 멀리 유배지에 홀로 버려져 있어야만 했던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상상을 하니 절로 가슴이 메이고 떨린다. 또한 홍씨부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 유달리 아버지를 따랐던 그 마마에 걸린 아이는 “아버지가 돌아오셔도 발진이 나고 아버지가 돌아오셔도 마마에 걸릴까”라고 했다는데 그 말을 부인이 전에 편지로 적어 보냈다는데....혹여 강진에서 사람이 오면 아버지가 보낸다고 했던 소라고동을 찾곤 했다는데....서울의대 다니던 외아들을 잃은 여류작가 박완서님이 다시 생각난다.
지극한 슬픔이 사람을 정신세계의 심연에 침잠하게 하여 인간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 ? 만일 세익스피어에게 아들의 죽음이 없었던들 그렇게 위대한 비극 작품의 탄생이 가능했을까 하는 헛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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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이 안나와요
시련속에 단련되는거 같습니다.
지극한 슬픔은 생을 더욱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게 합니다. 아무에게도 전할 수 없는 오롯한 초극 의지의 생활은 꽃이 피고 바람에 흔들리는 까닭을 알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