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31. 만성피로증후군에 스테로이드 사용
내과의원을 운영하는 P원장은 인터넷에 자신의 병원을 홍보하는 홈페이지를 만든 뒤 “만성피로증후군”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보고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에게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면역요법은 완치율이 90%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1천7백여 명의 환자들에게 부신피질호르몬을 과다 투여하였다.
19세 남자인 L군은 평소 아토피 피부염을 앓아오다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P원장의 주장을 접하게 되었고 혹시 자신이 이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P원장을 찾아간 후에 마찬가지로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았다. P원장은 L군에게 7개월 동안 스테로이드를 투여했는데 이후 L군은 수면장애, 시력장애, 전신쇠약 등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었고 특히 스테로이드 과다로 인한 쿠싱 증후군에 걸리게 되었다. 그동안 P원장은 이 스테로이드 치료가 의료보험 수가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일반 수가로 진료비를 받았고 그로 인해서 4개월 간 의사면허가 정지되기도 하였다.
<윤리적 고찰>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질병은 별다른 기질적 이상이 없이 피로감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질환으로 그 원인과 치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바가 없다. 이 사례의 문제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P원장은 “자신의 면역요법은 완치율이 90%”라는 식의 설명을 하였다. 현대 의학이 다른 의학과 다른 점은 개별 의사에 따라 고유한 치료법이나 특별한 비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원장이 자신의 치료법에 그렇게 확신이 있다면 이는 학회에 보고하고 동료 의사들의 검증을 받아 전체 의료계의 자산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의사의 전문직으로서의 의무 중 하나이다.
두 번째로 아직 원인과 치료법이 확실하게 정해진 바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아무런 검증 없이 위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면 이는 “학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의료행위”, 혹은 “과잉 의료행위”가 될 수 있다. 우선 환자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고전적인 원칙에 입각한 의료윤리의 “해악금지의 원리”는 잘 모르는 환자에게 무분별한 의료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도록 하고있다. 만약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치료를 하고자 한다면 동물실험이나 유사한 종류의 실험데이터 등 근거가 되는 자료가 있어야 하며, 확립된 치료방법이 아닐 때는 언제나 “임상시험(clinical trial)”에 준하여 시행하여야한다. 즉 환자에게 이 치료방법이 확립된 치료방법이 아님을 사전에 알리고 환자의 동의를 얻어 시술하여야 한다.
세 번째 장기간의 스테로이드 치료를 하면 환자에게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의사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술을 하면서 환자에게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침습적이거나 부작용이 예상되는 치료를 할 때는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하고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반드시 얻은 후 해야 한다.
네 번째 환자에게 쿠싱증후군이 생길 때까지 스테로이드 투여를 지속하였다면 약효와 부작용에 대한 세심한 관찰 등 의사로서의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쿠싱증후군이 생겨도 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종류의 만성신부전 등 스테로이드를 쓰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경우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L군은 아토피 피부염으로 P원장을 찾아왔고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하기 위해 쿠싱 증후군이 생길 때까지 스테로이드를 투여한 것은 의사로서 환자의 이득/위험(benefit/risk)비교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즉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마지막으로 자기 병원을 홍보하는 홈페이지를 만든 뒤에 만성피로증후군을 소개하고 자신의 치료법이 90%의 완치율을 보였다고 광고한 것은 과장 광고에 해당될뿐더러 속기 쉬운 상태에 있는 취약한 환자(vulnerable patient)를 기만한 것이다.
P원장이 이와 같은 시술을 한 것은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잘 확립되지 않은 질환을 사용하여 환자를 유치해서 비보험 수가로 진료를 하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행동은 의사로서는 절대로하지 말아야 할 비윤리적 행동이다.
<법률적 고찰>
이 사례는 과잉진료행위에 관한 사건이다. 의료법 제53조 제1항 제1호에서는 ‘의료인으로서 심히 그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한 때’에 1년 이하의 의사면허자격을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같은 조 제2항에서는 제1항 제1호의 범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령인 의료법 시행령 제21조에서는 의료인으로서 심히 그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의 범위를 들고 있는데, 그 중 제1호인 ‘학문적으로 인정되지 아니하는 진료행위’ 또는 제4호인 ‘불필요한 검사·투약·수술 등 과잉진료행위를 하거나부당하게 많은 진료비를 요구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판례에 따르면 이 경우처럼 아토피 피부염을 앓은 환자에 대해서는 ‘일반혈액검사, 적혈구 침강검사, 일반뇨검사, 혈액요소 및 크레아티닌 검사,혈장 전해질 검사, 혈당 검사, 칼슘 인 검사, 갑상선자극호르몬(TSH) 검사, 간효소검사, 단백질과 알부민 검사 등을 시행하여, 원고가 피고병원에 내원할 당시 나타났던 아토피 피부염 등 증상들의 원인을 파악하였어야 하고, 위와 같은 검사에 의하여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 비로소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진단하였어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례에서 P원장은 이러한 과정 없이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오진하여 스테로이드 처방을 하여 결과적으로 L군에게 쿠싱증후군에 걸리게 하였으므로 이는 의료과실에 해당하는 것으로 L군에 대하여 P원장은 민사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의료법 시행령 제21조와 관련하여 판례는 이 사례에서처럼 ‘만성치료증후군의 치료를 위하여 면역글로블린과 부신피질호르몬제 등을 투여하는 것은 현재까지 학문적으로 인정되지 아니하는 진료행위 및 불필요한 검사·투약·수술 등 과잉진료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있다.(서울행정법원 2001.10.19. 선고 2000구 1765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