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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임원십육지에 나오는 전라남도 명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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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남도청 홈페이지의 명승지
진도 - 신비의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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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남도청 홈페이지의 기타 명승및사적지
순천 -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
해남 - 대둔산 대흥사 일원
구례 - 지리산 화엄사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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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남 담양...
1. 담양군 금성면 금성산성과 그 일원- 담양호, 추월산,대나무테마골
2. 담양읍 담양죽물박물관,죽녹원
3. 담양읍 관방제림 , 담양순창간 국도- 메타세콰이어가로수
4.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 - 가사문학관 및 여러 정자들..
5. 남면의 가사문학권에서 떨어진... 봉산면의 면암정,송강정
6. 담양 남면의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 소쇄원
7. 고서면의 오래된 은행나무....
8. 창평의 국밥
9. 기타등등은 담양군 홈페이지에 더 자세하게 나와잇어요 ㅋㅋ-- 내가 담양 사람이걸랑..
5.기타 - 퍼온것..
1.소쇄원
소쇄원은 담양벌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광주호를 끼고 구비구비 돌아 들어 별뵈(성산)의 남쪽 골짜기에 있다. 이 별서를 경영한 양산보(1503~1557)는 한 시대 걸출했던 인물 조광조(1482~ 1519)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스승이 실권하여 화순 능주에 유배되고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덧없는 세상을 뒤로하게 되었다. 성리학자들의 은둔과 은일사상을 배경으로 1520년부터 1557년에 걸쳐 소쇄원을 만들었다. 사적 제304호로 지정된 소쇄원은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으로서 약 108,560㎡ 규모이며, 주인이 기거하던 제월당을 비롯하여 광풍각, 대봉대, 내원을 감싸는 담장 그리고 시원스런 계류의 흐름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은 대나무 숲길을 따라 밝고 어두움의 원리를 보여주며, 동쪽 언덕을 가로지른 담장의 ‘애양단’이라는 글은 북풍을 막아주고 열린 남쪽의 햇볕이 밝고 따뜻함을 말해준다. 소쇄원 공간의 중추를 이루는 광풍각은 계류에 더 가까이 하기 위해 축대를 쌓아 지어졌는데 주인과 방문객들이 온갖 풍류를 벌이던 곳이다. 양산보 주위에는 이종사촌인 송순을 비롯하여 사돈간인 김인후와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송시열, 이후백, 송인수, 유희춘 그리고 이웃 환벽당 주인이던 김윤제 등 풍류객들이 드나들었다.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등을 통해 학문과 사상이 시가문학이란 국문학 장르로 맥을 형성하면서, 송순의「면앙정가」와 정철의「성산별곡」 등이 지어져 담양은 우리나라 시가문학을 대표하는 산실로서 훗날 판소리 생성의 밑거름이 된다.
2.운주사
운주사는 지석천을 건너 능주벌을 가로 지르며 나주호쪽 낮은 산자락에 엎드려 있다. 근현대 소설이나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무대로 자주 등장하면서 세간의 궁금증을 유발하게 되었는데, 한 도량에 이처럼 많은 석불과 석탑이 세워진 곳은 여기 뿐이다.
산비탈이나 논두렁 밭이랑 바위틈 여기저기에 석불과 석탑에 대한 일반규범을 무시한 채, 만들다 만 공작물처럼 아주 파격적인 생김새로 흩어져 있는 천불천탑.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하층계급문화유산으로 꼽히며 풍수지리설의 시조인 도선국사가 이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지금은 석탑 21기, 석불 90여 구가 남아 있지만, 산등성이에 누워 있는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는 천불천탑에 대한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불상들은 부처님의 빛과 광명을 상징하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집단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불상제작 기법과 배치는 다른 사찰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천불천탑의 운주사는 인도네시아의 보도부두루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어깨를 견주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서 그가치가 높아 순례자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화순고인돌과 천불천탑의 신비를 주제로 운주사에서 해마다 무르익은 가을에 화순운주대축제가 열린다.
3.국립해양유물전시관
동북아시아 바다를 경영했던 선조들의 꿈과 지혜를 만나러 떠나는 목포, 왕인유적지 건너편에서 손짓하는 영암도기문화센터를 뒤로하고 무화과 특산지 삼호에서 영산호 방조제를 한숨에 달리면 목포해안의 박물관 밀집지역인 갓바위 문화거리에 도착한다.
우리 나라 유일의 국립해양박물관인지라 바다와 도로에 걸쳐 지은 건물의 위용이 위압적이다. 전시실에 들어 서면 바다에 잠들었던 옛선박과 바닷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역사로 깨어나 있다.
전시실 4개소와 기획전시실, 선박사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1976년에 발굴한 신안해저 유물선과 각종 해저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고려시대 목선과 고려청자 30,645점이 토제 목제 철제 유물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으며, 제2전시실에서는 14세기 중국 원나라시대 유물 2만 2천여 점이 돋보인다. 제 3, 4전시실에는 고려청자와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시대 도자기를 비롯하여 가야시대 토기, 조선시대 현자총통, 경주 안압지 출토 목선 등을 전시하고 있어서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동북아시아의 고대 해양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시대를 숨차게 거슬러 올라갔던 혼돈을 벗고 야외 수상전시관을 나서면, 목포항에서 울어대는 뱃고동소리에 콧날 시큰한 ‘항구의 이별’ 영화장면을 떠 올리곤 한다.
4.반남고분군
서울이나 광주 쪽에서 떠날 땐 13번 국도를 따라 황금벌 나주평야의 풍요를 한없이 누려도 된다. 영산강을 건너 나주와 영암의 구릉지에 일군 황토밭은 천연 모자이크로 채색되어 일본 홋카이도의 비에이(美英)처럼 온 들녘이 황홀하다. 빈 밭을 쟁기로 갈아 엎은 황토는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선홍빛 살을 드러내며 남도사람들의 의기처럼 일어선다.
반남면소재지를 지나 복암리, 덕산리, 대안리의 자미산 낮은 구릉에 분포된 반남고분군은 40여 기에 이른다. 이 일대의 고분군은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도굴 되거나 신촌리 6호 분은 1939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5 기의 옹관과 함께 토기, 유리구슬, 청동환이 출토되었다.
또한 9호분이 1917년에 발굴 조사된 것을 보면 12기의 옹관과 금동관 (국보 제295호), 금동신발, 금반지.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결과를 볼 때 백제가 들어서기 전 한반도의 막강 세력이었던 마한의 맹주국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신촌리와 덕산리의 고분이 고대 일본에서 유행했던 전방후원분 양식이며, 최근에 ‘倭’자가 발견되어 한일고대사 연구에 과제를 던져주고, 대형옹관 가마터가 이 근방에서 발견되어 반남고분군 연구의 실마리가 되고 있다.
반남고분군을 막 벗어난 지점에 자연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감나무 과수원, 유기농원을 찾아 먹단감 한입 베어 물고 강진으로 떠나자.
5.청자도요지
청자도요지가 있는 대구면으로 가는 답사길은 들과 강과 바다가 조화된 남도답사 1번지의 풍광답게 서정시의 고향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영랑생가를 나와 읍내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목리에서 탐진강을 건너야 한다. 이곳 목리(牧里)마을을 초지(草地)라고도 부르는데 소가 풀을 뜯는 지형의 강진지리 풍수에서 나온 지명인데, 강진 사람들은 우스갯 말로 “강진 옴천면장할래, 목리 이장할래?” 물으면 “목리 이장!” 한다는 것이다. 그 만큼 옴천면이 작은 반면 목리가 큰 마을이라는 뜻이겠지.
탐진강에 가로 놓인 다리 옆에는 초라한 비석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는데, 이곳에 첫 다리를 놓게 줄을 댄 어느 정치인의 공덕비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만 해도 자동차는 군동면 석교를 건너 20여 리를 돌아야 했고, 작은 농선에 의지하여 강너머 너른 들녘을 일구어 왔는데, 선거 때마다 ‘미끼’로 내세워 침튀기다가 주민의 숙원이 해결되었다는 우리네 정치문화의 단면을 보노라니 입맛이 쓰다.
강진만으로 불어 오는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칠량면소재지와 대구면소재지를 지나면 마량항에 닿기 못미쳐 왼편으로 청자박물관이 보인다. 고려청자는 9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1세기 말에는 은은하면서 맑은 비색과 유려한 형태, 화려한 문양이나 삼강기법에서 고려 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였는데, 강진 대구면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일대에 관요형태의 대규모 가마가 설치 되었다. 강진산 고려청자가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것만 하여도 국보와 보물급에서 40여 점이 넘어 우리나라 도자기 생산의 본바닥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곳에 고려청자 가마가 설치된 자연환경은 청자를 실어나를 바닷길에 직접 닿고, 풍부한 흙과 연료가 제공되었으며, 사회적 환경은 코 앞에 있는 청해진의 장보고가 동북아 해상을 장악하였고, 호남지방의 광활한 평야와 바다에서 얻은 경제력, 그리고 신라말 강진 무위사, 장흥 보림사,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 등 선종불교의 차문화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청자도요지에서는 옛가마터와 청자의 몸매를 감상한 다음에 반드시 흙을 주물러 천년을 거스르는 나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 청자의 신비를 재현하고 있는 청자사업소에서 곱게 구워 집으로 보내주면서 당부한다. “청자는 진열장의 보물이 아니라, 밥그릇, 물잔, 술잔으로 쓰다가 금가고 깨어지는 생활용기”라고.
6.땅끝
땅끝으로 가는 남도여행객들 대부분이 달마산을 숨가쁘게 빠져 나와 머나먼 여정을 재촉하는데, 여기에선 어란진항으로 살짝 비켜서 숨을 골라야 한다. 어부들의 지순한 삶을 엿볼 수 있고 살오른 생선횟집이 즐비하다.
송호해수욕장을 지나 발걸음을 빨리하면 땅끝전망대가 ‘한라산도 보인다’며 시선을 차단하고 나선다. 최근에 아파트 8층 높이로 선 전망대의 자태, 예술성이나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자봉 돌계단을 따라 땅끝 절벽을 흠집내고 세운 땅끝탑을 돌아 나오면 바닷가에 옹기종기 이마를 맞댄 갈두마을, 보길도행 뱃고동이 우는 부두에 서면 까닭 모를 설움도 밀려온다. 땅끝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국토종단 순례의 시발점이며 중심점이다. 분단된 조국에 태어나 깨어있는 함성이 메아리치고, 한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축제’도 성스럽다.
7.도솔봉
달마산 등줄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지점, 땅끝 소재지인 송지면 산정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달마산 송신탑 방향으로 더듬더듬 도솔봉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도솔봉으로 오르는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짙은 갈색바탕에 흰색글씨로 통일한 관광안내표지판 역시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산정리 마을 어귀에서 만난 트럭운전사에게 도솔봉 길을 물었더니,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고 자랑삼아 오른쪽 왼쪽 삿대질 하며 친절을 보이지만 서울에서 김서방집 찾기다. 운전솜씨 좋은 소형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만한 비탈길을 오지탐험대원 심정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하늘이 훤해지는 순간 송신탑 앞에서 집총한 초병을 곁눈질 하며 자라등 만한 봉우리를 걸어 오르면 바로 도솔봉!
완도 군외면에서부터 백일도, 흑일도, 땅끝을 지나 제주도와 경계한 보길도, 노화도, 진도, 벽파,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신비의 바닷길 해역이 발아래 엎드린다. 400고지 정도의 별로 높지도 않은 봉우리에서 이처럼 넓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다니, 도솔봉은 바다에서 뜨고 지는 해와 다도해를 거느린 소대장 쯤 되는가 보다.
한라산을 보았느냐고 묻지 말라, 도솔봉에 올라 보라.
8.송광사
송광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70여 간 규모의 전각들이 지붕을 맞대고 모여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로서 힘 좋은 절집이다.
순천 조계산 도립공원의 최고봉인 연산봉을 중심으로 병품처럼 둘러선 서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다.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 송광사, 가람배치의 가장 큰 특징은 스님들의 요사채가 대웅전 위쪽에 있다는 것이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16국사를 모신 승보종찰인데, 본래 국사는 한 나라의 사표가 되는 고승들에게 국왕이 직접내리는 칭호이며, 고려시대 국사의 칭호를 받은 15인과 국사제도가 없어진 조선시대에 그 공덕과 법력이 국사와 같다고 하여 종문에서 인정한 교봉화상을 합하여 16국사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사찰순례는 항상 역사 연대와 어려운 한자 앞에서 맥을 못추고 마는데, 이번 남도여행길에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한국불교 최초의 체계적인 정혜결사 운동이 일어났던 송광사 16국사 쯤 암기해 두었다가 아이들 방학숙제 도우미로 뽐내봄직 하다.
자신을 지혜의 소, 진심을 가꾸고 기르는 사람이란 뜻에서 항상 ‘소를 치는 사람(牧牛子)’이라 불렀던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진각, 청진, 진명, 원오, 원감, 자정, 자각, 담당, 혜감, 자원, 혜각, 각진, 정혜, 홍진, 고봉 등 16국사로 계승되었다.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한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정신이 집결된 곳이다.
송광사는 보물이 많다고 하여 삼다사찰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는데, 성보각에서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종제서(국보 제43호) 등 국보와 지방문화재 26점을 만날 수 있다.
9.낙안읍성민속마을
순천만에서 가장 좋은 썰물 때를 만나 갯벌탐사를 마쳤다면 이번 남도여행 코스가 옹골차다는 느긋함에 빠져도 좋다.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읍내로 접어 들어 열두방천을 따라 우회전 하여 서서이 진행하라. 이 벌교천을 가로 질렀던 ‘뗏목다리(筏橋)’가 지명이 되고 아마 그 자리에 세웠던 홍교(길이27m, 높이3m, 폭4.5m)가 지금은 보물 제304호로 대우를 받고 있는가 보다. 저 너머 왼편으로 벌교성당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다리를 넘지 말고 우회전 하여 낙안벌을 달리자.
낙안읍성을 찾아 드는 산비탈엔 배과수원이 탐스럽다. 일찍이 낙안배가 세상에 떳었는데 나주배에 밀려 겨우 명맥 만이 유지되고 있다니 ‘낙안군’이 없어지고 낙안면으로 격하된 영향도 컷으리라.
낙안읍성의 동문인 낙풍루 앞에 서면 평지에 돌로 쌓은 성이 제법 잘 복원되어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과 외모가 닮은 듯 하나, 성 안에는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108세대 약 300명의 주민이 조선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용인민속촌이나 제주민속마을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운영되는 시설이 아니라, 주민이 실제로 생활하는 ‘살아있는 민속마을’인 것이다. 낙안읍성이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얼마 전만 해도 성 안에 학교, 면사무소, 성당, 우체국 등 모든 공공시설이 있었으나 밖으로 밀려나고, 순수 민가와 관아 만 남아 있다. 그래서 민속마을에는 인위적으로 설치한 볼거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단조로움마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옛모습이 보존돼 허준, 임꺽정 등 TV연속극을 비롯해 사극 영화나 각종 CF촬영지로서 뜨는 건 예사고, 주민들 삶 자체가 남도체험의 핵심인 것이다.
낙안읍성의 면적은 67,490평이며, 성곽길이 1,410m, 폭 3~4m이다. 축성연대는 백제 때 파지성이었으며 고려 때는 낙안군의 고을 터였는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1397년 (태조6)에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다가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에 석성으로 넓혀 쌓았고, 1626년(인조 4년) 임경업 장군이 이곳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증축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 지형이 여인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고 있는 자태여서 미인이 많고 인정도 많다는데….
10.진남관
여수반도에 가면 무엇이 가장 볼거리냐고 묻는 관광객들이 많다. 내륙지방에서 온 관광계원 아줌마들은 돌산대교를 첫 째로 치기도 하는데, 한 때 남해대교, 진도대교 개통 이후 제일의 관광코스이기도 하였다지만 삼겹살이 있어야 등산 가는 안목 아닌가.
여수의 볼거리는 향일암 일출, 무술목 일출, 오동도, 거문도, 백도, 사도 등 열손가락이 모자라나 여수 볼거리의 으뜸은 단연코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여수항이다. 진남관에 올라 조망하는 여수항은 이른 봄 목덜미에 파고드는 햇살처럼 고운 나른함을 안겨 준다.
진남관은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사용하던 터에 1599년(선조 32년) 삼도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객사인데, 1716년(숙종 42년)에 불타버린 것을 이재명이 재건한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최근에 보물에서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진남관은 원래 역대 임금의 궐패를 봉안하던 곳으로 높이 14m, 길이 75m의 우리나라 최대 단층 목조 건물이며, 둘레 2.4m인 큰 기둥이 68개나 받치고 서 있어 그 위용이 남쪽 대해를 제압할 만 하다.
11.운림산방
운림산방은 첨찰산 아래 쌍계사 초입에 자리하며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허련)가 말년에 거쳐하던 당호를 말한다. 소치는 28세 때부터 지금의 대흥사인 두륜산방 초의선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통해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기에 이르렀다.
소치가 40세되던 1847년 낙선제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고,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며 시·서·화를 즐겼다.
소치는 1856년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 미산 허형을 낳았으며, 미산이 그림을 그렸고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그림을 처음으로 배운 곳이기도 하다.
운림산방은 소치로부터 미산, 남농, 임전 등 4대에 걸친 전통 남화의 창작산실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운림산방을 나서는 뜰 한가운데 연못엔 하얀 수련이 청초하다.
12.목포 자연사박물관
목포자연사박물관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의 도시 목포의 명물로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곳에는 대형공룡골격, 화석, 식물?곤충표본, 조류?포유류?어류 박제 등 생물지질학적 자연사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의 문화사, 예술자료가 보존,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앙홀, 지질관, 육상생명관, 수중생명관, 지역생태관 등의 내부시설을 갖춘 자연사관은 지구 46억년의 자연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수석실, 운림산방4대작품실, 서양화가 오승우작품관, 화폐전시실 그리고 목포의 예술과 인물, 춤과 노래 등을 소개하는 문예역사실은 지역문화의 역사를 살피는 소중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주민 문화공간, 가족 휴식공간, 평생학습 체험공간의 역할도 함께하여 가깝게는 우리지역민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높여 자긍심을 갖게 하고, 멀리는 우리 목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즐거움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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