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성실성(圓成實性) ***
<청화큰스님 친필사진 참조>
*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원만히 갖춘 실다운 성품’으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친필은 청화큰스님께서 직절간명하게 설해 놓으신 금구성언(金口聖言)입니다.
첫째항은
“우주(宇宙)에 가득하여 있지 아니 한데가 없다. 편재(遍在)”
원성실성인 진여불성(아미타불)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하게 우주(宇宙)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평등하게 두루 가득 하다는 뜻입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지혜광명이 가득하다는 의미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합니다. 아미타불의 별칭입니다.
생명의 지혜 광명이신 무량광불은 무변무량(無邊無量)하여 시작점도 없고 끝점도 없이 평등하게 계시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도 충만하십니다. 이 자리를 떠나서 별도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 보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를 떠나서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고 당체(當體)를 바르게 보면 진여불성 아미타불(阿彌陀佛)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체종지(一切種智)가 허공(虛空)에 충만하므로 지혜광불(智慧光佛), 본래청정하기 때문에 청정광불(淸淨光佛),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에 환희광불(歡喜光佛),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기 때문에 무애광불(無碍光佛) 등등 열두 가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보살(菩薩) 차원으로 이름 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등,
공덕(功德) 따라서 이름은 다양하나 모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두 번째 항
“생멸변화(生滅變化)하지 않고 영생상주(永生常住)”
진여불성 자리는 우리 개개인의 본생명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의 본생명은 생멸(生滅)이 없이 즉 생사(生死)가 없이 영생(永生)한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각(大覺), 큰 깨달음의 가장핵심은 이것입니다.
본래 누구나 생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하고 아미타불의 제일 첫째가는 별칭입니다.
무량수불은 영원한 시간과 자비를 상징합니다.
1,2항을 종합해보면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무량광불로서 영원한 시간과 자비 그리고 무한한 공간과 지혜광명을 겸비한 바로 우주적 영생의 생명으로서 또한 우리 각자 각자의 참 이름입니다.
그래서 염불은 바로 우리 각자 각자모두가 아미타불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아(妄我) 가아(假我)이고, 참 나는 아미타불입니다. 본래 생사가 없는 영생의 생명이 우리 본생명입니다.
망아(妄我) 가아(假我)를 보고 생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는 본래 허망한 그림자입니다.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나 자신의 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아미타불(무량수불)임을 믿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참선이 염불선입니다.
나와 아미타불이 둘이 아님을 분명히 믿고 그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는 염불참선이 실상염불선입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무량수불이라고 믿겠습니까?
지금 우리 눈앞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우리 조상님들도 돌아가셔서 한 분도 다시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이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오래오래 염불참선을 하셔야 믿음이 오고 스스로 느껴지게 됩니다. 참고 오래오래 지성(至誠)으로 하시라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항은
“인연(因緣)으로 성립(成立)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가 아니라 (진실(眞實))”
금타존사(金陀尊師)님의 수묘게(數妙偈)에 이런 성어(聖語)가 있습니다.
‘연기약존(緣起若存) 연멸약망(緣滅若亡)’
인연이 있으면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참다운 존재가 아니요. 인연이 다하면 존재가 사라지지만 진멸(眞滅)이 아니다.
그러나 실상(實相) 실존(實存)은 즉 앞에서든 원성실성(진여불성)은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으로 이름 하여 무량광불, 무량수불로 생멸(生滅)을 떠난 진실(眞實)이라는 것입니다.
인연으로 성립된 허망한 가상가명(假相假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중론게(中論偈)에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
인연 따라서 생겨난 존재는 내가 말하기를 바로 공(空)이라 한다. 역시 가상가명이라 한다. 또 역시 바로 중도(中道)이다.
공가중(空假中) 삼체(三諦)가 원융(圓融)함을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표현한 것이 천태지의(天台智顗)선사의 법문 아니겠습니까. 일념삼천(一念三千)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지혜를 관하는 것이 반야바라밀다며 실상염불선 으로 가는 핵심이지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오온개공(五蘊皆空)’ 오온이 다 비어있고, 아공법공(我空法空)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법개공(諸法皆空)’이 되었을 때 제법(諸法)의 실상(實相) 자리가 보이지요.
즉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자리입니다.
또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사덕(涅槃四德)자리입니다.
비유를 들면 우리는 보통 대낮에는 푸른 하늘에 구름만 있지 별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밤하늘과 똑 같이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다만 햇빛이 강해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대낮에도 밤하늘과 똑 같이 별들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인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우리 인식기관 즉 안·이·비·설·신·의 육근은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무안이비설신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과(三科) 십팔계(十八界)가 다 무(無)라고 분명히 이르고 있습니다.
큰스님 설법으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안목(眼目)은 극히 제한(制限)되어 있고 상대적(相對的)인 것밖에는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즉 상대적이라는 말은 시간성(時間性)과 공간성(空間性)이 있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원화(二元化)해서 상대적으로 인식한 것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하다고 해서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일원화해서 한마음 한생명으로 바르게 깨닫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것만 인식되고 공간적으로 차별된 것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되고 차별화된 것만 존재로 인식 됩니다.
그래서 존재라고 인식된 것은 생멸변화해서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실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찰나(刹那刹那) 전변무상(轉變無常)하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을 항상 점유하고 있는 존재는 없고,
잠시 착각에 의해서 상(相), 잠시 존재 같은 모양으로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천차만별의 차별상으로 보이고,
때문에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상의(相依) 상생(相生)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인드라망 같이 서로 얼 키어 있을 뿐입니다.
이를 삼법인의 또 하나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합니다.
과학적으로 보아도 인간의 인식기관을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神經細胞)는 외부경계에 반응할 때 대상이 시간적으로 변화(變化)하거나 대상이 공간적으로 차별화(差別化) 되어 있을 때만 반응(反應)합니다. 주기성(週期性)을 갖고 경계(境界)가 분명해야 인식합니다.
여기서도 극히 일부만 제한된 것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라고 인식한 것은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차등이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입니다.
시간과 공간도 인간의 인식기관과 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에 불과합니다.
시간과 공간도 인간이 상대적으로 인식하여 잘 못 알고 있는 경험적 존재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각(知覺)의 속임수에 걸려있습니다.
인간은 착각된 자기 의식의 동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시공의 동굴 속에 가쳐서 살고 있습니다.
번뇌로 자신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나’라는 허구의 개념을 붙여 놓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데 우리가 여기에 붙들려 있으면 인생은 오직 고(苦)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허상인 인간을 허구의 시공 밖으로 빼내려고 노력하지만 헛된 노력에 불과합니다. 참다운 참선을 통해서 열반적정의 자리에 드는 것이 최상의 길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는 공간적으로 평등무차별하고 시간적으로 변화가 없이 영원하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 기관에는 포착 되지 않는 그 무엇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될 일은 인연 따라서 조건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식 되었더라도 그 본질은 그 상대적인 허상을 떠나서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무엇 본질은 보지 못하고 변화하는 모양과 차별화된 모습에만 집착해 있습니다.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가상가명(假相假名)에 집착해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열반적정의 세계는 소위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우리 업장(業障)을 녹이고 순수직관(純粹直觀)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성인이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충분히 십자가를 피하실 수 있었을 것인데 짐짓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은 육신과 정신이 참 생명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오온(五蘊)이 인간의 육신과 정신이 참나가 아니고 본래 무상(無常)한 무아(無我)의 존재라는 것을 증언하신 것이지요.
인연으로 생긴 것은 고(苦), 공(空), 무상(無常:諸行無常), 무아(無我:諸法無我)이고 실다움이 없고,
그러나 고·공·무상·무아인 텅 빈 자리가 바르게 보면 본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자리로 실상만이 충만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잘 못 본 것은 텅 비어 있지만 바르게 보면 바로 그 자리가 실상(實相)이 충만한 자리입니다.
우주 법계(法界)는 바르게 보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영원한 생명의 불성광명만이 충만(充滿)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항은
“일체(一切) 공덕(功德) 지혜(智慧)가 원만(圓滿) 구족(具足)”
진여불성 즉 아미타불은 법·보·화(法報化) 삼신불(三身佛)과 상락아정의 열반사덕(涅槃四德)과 오지여래(五智如來)가 원만히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존재가 이와 같이 무량공덕 즉 무량자비와 무량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믿고 염불을 하는 것이 바로 실상염불선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이와 같이 무량공덕 자리를 놓치지 않고 하는 염불입니다.
이부분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이 금타존사님의 보리방편문입니다. 삼신불과 열반사덕과 오지여래는 큰스님 친필법문과 함께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첫째항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의 의미
둘째항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의미
셋째항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의미
넷째항은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의 의미
1),2),4)항의 삼신불(三身佛)을 진실(眞實)한 실상(實相)인 3)항의 아미타불(阿彌陀佛) 일불(一佛)로 통관(通觀)해서 염념상속(念念相續) 염불(念佛)하는 것이 실상염불선입니다.
이것이 실은 순수염불이며 이것이 바로 최상(最上)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금타존사님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아미타불 염불선(念佛禪)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글 : 본정 김영동
|
첫댓글 예 감사합니다 감로왕여래
본정거사님 감사합니다 소중한 가르침 잘 읽고 공부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큰스님의 간략한 글속에 진여에 대한 설명의 핵심이 내재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본정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큰스님 설법 가운데서 제일 많이 거론하신 것이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을 총체적으로 간략히 큰스님 정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생명적으로 "아미타불"이라고 하셨고, 아미타불은 영원한 시간과 지비의 측면에서 "무량수불", 무한한 공간과 지혜의 측면으로는 "무량광불", 무량한 공덕, 완벽한 행복의 측면에서는 "감로왕여래", 이 셋을 독특하게 큰스님께서는 삼신일불 아미타불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염불은 부처을 염하는 것으로 부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해야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의 핵심적인 친필 유고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분들이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시고 염불 아니 부처님 공부를 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