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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10강 -1(2010.02.0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큰스님께 삼배 올리심) (입선죽비) (방선죽비) 큰스님 법문 이제 한겨울도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습니다. 오늘 임제록 마지막 시간이네요. 10회에 걸쳐서 임제록을 강의하게 됐습니다. 오늘까지 하면은 딱 아주 열번 째입니다.
오늘은 102쪽 임제록 행록, 行錄(행록). 처음 서문 할 때 조금 언급을 했던 행록이라고 돼있는 여기서부터 할 차례인데 흔히 행장이라고도 하고 뭐 약력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기록하는 사람들마다 다 그 특색이 있어서 이 행록에는 임제스님께서 공부하신 그런 모습들 또 내력들 또 선지식과의 어떤 만남에서 있었던 점검 또는 법거량 이런 것들이 주로 많이 실려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는데 뒷사람들에게 상당히 그 뭔가 참고가 되고 한번 읽어보고 싶고 또 뒷날 자료가 되도록 기록할려면은 저도 가끔 내 살아온 길을 메모는 하는데 누구와의 어떤 만남에서, 가벼운 만남도 있겠지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스승을 우리가 만나지 않습니까. 처음엔 부모를 만났고 그 다음에 형제를 만나고 또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서 학우를 만나고 그 다음 출가하면 또 이제 스승을 만나고 그 스승도 여러 스승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소상하게 잘 기록해 놓으면은 상당히 뒷날 그 사람만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행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도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애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은 다른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임제스님 행록을 통해서 우리가 많이 알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1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師初在黄蘗會下(사초재황벽회하)하야 行業純一(생업순일)이어늘
首座乃歎曰(수좌내탄왈), 雖是後生(수시후생)이나 與衆有異(여중유이)로다
遂問(수문), 上座在此多少時(상좌재차다소시)오
師云(사운), 三年(삼년)이니다 首座云(수좌운), 曾參問也無(증참문야무)아
師云(사운), 不曾參問(불증참문)이니 不知問箇什麼(부지문개십마)오
首座云(수좌운), 汝何不去問堂頭和尚(여하불거문당두화상)호되
如何是佛法的的大意(여하시불법적적대의)오
師便去問(사변거문)한대 聲未絶(성미절)에 黄蘗便打(황벽변타)하다
師下來(사하래)에 首座云(수좌운), 問話作麼生(문화자마생)고
師云(사운), 某甲問聲未絶(모갑문성미절)에
和尚便打(화상변타)하니 某甲不會(모갑불회)니다
首座云(수좌운), 但更去問(단갱거문)하라하니
師又去問(사우거문)이라 黄蘗又打(황벽우타)하야
如是三度發問(여시삼도발문)하고 三度被打(삼도피타)하니라
師來白首座云(사래백수좌운), 幸蒙慈悲(행몽자비)하야,
令某甲問訊和尚(영모갑문신화상)하야 三度發問(삼도발문)에 三度被打(삼도피타)니다
自恨障縁(자한장연)으로 不領深旨(불령심지)하니 今且辭去(금차사거)하노이다
首座云(수좌운), 汝若去時(여약거시)에는 須辭和尚去(수사화상거)하라
師禮拜退(사예배퇴)하니라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三度發問(삼도발문) 三度被打(삼도피타) 내가 이런 표현을 하는데 임제록의 大旨는 뭐냐. 삼도발문 삼도피타. 다음 페이지에 바로 나옵니다. 그렇게 제가 지어봤습니다. 사실 그 사건 속에 임제스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수처작주, 자기 주인공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그 탐구를 통해서 결국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의 주체, 절대 평등의 자리, 궁극적 자기 차원을 놓치지 않고 산다고 하는 것, 이것이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는 것인데 바로 삼도발문, 삼도피타, 세번 묻고 세번 맞다 라고 하는 여기에도 사실은 그것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禪的으로 표현을 해서 그렇지, 지금 뭐 논리적으로 풀면은 그 속에 다 그런 뜻이 포함돼 있죠. 어록의 특색이라는 게 그런 것입니다.
師(사) 初在黄蘗會下(초재황벽회하)하야, 師, 여기서 師는 항상 임제스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제스님께서 황벽스님 회하에 있었다, 처음.
行業(행업)이 純一(순일)했다, 참 좋은 표현이죠, 임제스님이 선원생활을 할 때의 그 어떤 태도, 마음가짐, 몸가짐을 한 마디로 표현한 글자 넉 자, 행업이 순일했다. 수행하는 업이 수행하는 일이 아주 순일했다. 뭐 강원에서나 선방에서나 또는 주지생활을 하나 포교활동을 하나 누굴 가르치나, 오로지 자기가 주로 하는 그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 그것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이게 순일이죠. 참 정말 좋은 말입니다. 행업순일.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이 수행업을 ‘행업’이라 이렇게 했는데 옛날에는 화엄경을 예를 들어서 어디서 공부를 많이 하면 ‘화엄업’ 그랬어요. ‘화엄종’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화엄업’ 이랬어요. ‘법화업’.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표현이 있어요. 참선하면 ‘禪業’이야, 선. ‘참선업’ 해도 좋고. 업 자가 그렇게도 씌였어요. 여기서도 근래에 우리가 이해하는 그런 업으로만 볼 게 아니라 그 수행하는 업이 아주 순일했다.
그러니까 首座乃歎曰(수좌내탄왈), 그때 수좌소임을 보고 있던 목주스님입니다. 이에 찬탄해 말하기를,
雖是後生(수시후생)이나, 비록 후생, 후배이지마는,
與衆有異(여중유이)로다, 대중들로 더불어 아주 특이한 것이 있다.
遂問(수문), 그래서 드디어 물었어요,
上座(상좌)는 여기에 있으면서, 在此(재차), 多少時(다소시)오, 얼마나 여기에 있었느냐?
師云(사운), 三年(삼년)입니다. 뭐 대중이 황벽스님 회하에 대중이 칠백명, 팔백명 내지 천명 이렇게 됐으니까 수좌소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이 언제 왔는지 일일히 기억할 수가 없죠. 삼 년됐다 이랬어요.
首座(수좌)가 말하기를, 曾參問也無(증참문야무)아, 그러면은 방장스님한테 가서 일찌기 참예해서 법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느냐.
師云(사운), 不曾參問(불증참문)이니다. 일찌기 참문하지 못했습니다. (대중 중의 어느 분이 '지난 번에 했어요'.) 했어도 행록이니까 따로 지나가는 거요, 다시 한번 훑어가는 거죠.
不知問箇什麼(부지문개십마)오. 교과 과정에서 한 게 아니에요 이게. 처음에 저기 서문할 때 인용을 조금 했을 뿐이지. 부지문개십마오, 어떻게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首座(수좌)가 말하기를, 汝何不去問堂頭和尚(여하불거문당두화상)호되, 당두화상, 조실스님, 방장스님에게 가서 묻되,
如何是佛法的的大意(여하시불법적적대의), 무엇이 불법의 명확한 대의냐 라고 왜 물을 줄 모르느냐, 그렇게 물으면 될 거 아니냐.
師(사) 便去問(변거문)한대,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황벽스님께 가서 물었어요.
聲未絶(성미절)에, 그 묻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黄蘗便打(황벽변타)하다, 황벽스님이 후두들겨 팼다 그랬어요.
師下來(사하래)하야, 師가 밑으로 다시 선방으로 내려오니까,
首座가 말하기를, 問話作麼生(문화자마생)고, 물으려 갔던 일이 어떻게 됐느냐.
師云(사운), 某甲(모갑)이 問聲未絶(문성미절)에, 내가 묻는 말이 끊어지기도 전에
和尚便打(화상변타)니다, 큰스님께서 문득 나를 때렸습니다.
某甲(모갑)이 不會(불회)니다, 그런데 그 도리를 모갑이 알지를 못합니다, 그랬어요.
수좌가 말하기를, 但更去問(단갱거문)하라, 다시 가서 한번 물어라 이왕 내친 김에.
師又去問(사우거문), 또 가서 물었어요.
黄蘗又打(황벽우타), 황벽이 또 때렸어.
이와 같이 三度發問(삼도발문) 三度被打(삼도피타), 세번 묻고 세번 때렸다. 어떤 기록에는 한번 갔을 때마다 이십 방망이를 후려쳤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기는 그 숫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마는.
여기에 뭐 선지식의 일거수 일투족이라고 해서 특별한 거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선지식의 행동에 의미가 있고 깊은 뜻이 있다면은 우리가 무심코 하는 그런 우리의 행동에도 사실은 똑같이 의미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다 같이 한마디로 표현하면은 절대 평등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농담 한 마디에도 사실은 우리 개개인의 궁극적 차원에서 표현된 것이다 이렇게 봐야 돼요.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삼도발문 삼도피타 하니라.
師來白首座云(사래백수좌운), 임제스님이 와서 수좌에게 말하기를
幸蒙慈悲(행몽자비)하야, 다행히 스님의 자비스러운 그런 가르침을 입어서
令某甲問訊和尚(영모갑문신화상), 모갑으로 하여금 화상에게 문신, 묻게 해서
三度發問(삼도발문)에 三度被打(삼도피타)니다,
自恨障縁(자한장연), 스스로 한탄하는 것은, 무슨 인연으로 장애의 인연이 있어가지고서,
不領深旨(불령심지), 깊은 뜻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今且辭去(금차사거)하노이다, 지금 또한 하직하려고 합니다. 아마 나는 황벽스님하고 또는 이 사찰하고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떠날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수좌가 말하기를, 汝若去時(여약거시), 그대가 만약 갈 때에는,
須辭和尚去(수사화상거), 꼭 화상, 큰스님한테 가서 하직인사를 하고 가라, 그랬어요.
師禮拜退(사예배퇴)하니라 그리고는 예배하고 그리고 물러났죠. 중국에도 옛날부터 걸망지고 그냥 소리 소문없이 잘 떠나는 그런 것이 있었나봐요. 그러니까 꼭 須辭和尚去(수사화상거), 꼭 가서 하직인사를 하고 가라, 이렇게 한 걸로 봐서는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다.
40-2 黄蘗(황벽)의 佛法(불법)은 簡單(간단)하다
首座先到和尚處云(수좌선도화상처운),
問話底後生(문화저후생)이 甚是如法(심시여법)하니
若來辭時(약래사시)에는 方便接他(방편접타)하소서
向後穿鑿(향후천착)하야 成一株大樹(성일주대수)하야
與天下人作廕涼去在(여천하인작음양거재)리이다
師去辭(사거사)한대 黄蘗云(황벽운), 不得往別處去(부득왕별처거)요
汝向高安灘頭大愚處去(여향고안탄두대우처거)하라 必爲汝説(필위여설)하리라
師到大愚(사도대우)한대 大愚問(대우문), 什麼處來(십마처래)오
師云(사운), 黄蘗處來(황벽처래)니다
大愚云(대우운), 黄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오
師云(사운), 某甲(모갑)이 三度問佛法的的大意(삼도문불법적적대의)라가
三度被打(삼도피타)하니 不知某甲(부지모갑)이 有過無過(유과무과)닛가
大愚云(대우운), 黄蘗與麼老婆(황벽여마노파)하야 爲汝得徹困(위여득철곤)이어늘
更來這裏(갱리자리)하야 問有過無過(문유과무과)아
師於言下(사어언하)에 大悟云(대오운),
元來黄蘗佛法(원래황벽불법)이 無多子(무다자)니라
大愚搊住云這尿床鬼子(대우추주운자요상귀자)야 適來道有過無過(적래도유과무과)러니
如今却道黄蘗佛法(여금각도황벽불법)이 無多子(무다자)라하니
儞見箇什麼道理(이견개십마도리)오 速道速道(속도속도)하라
師於大愚脅下(사어대우협하)에 築三拳(축삼권)한대
大愚托開云(대우탁개운), 汝師黄蘗(여사황벽)이요 非于我事(비간아사)니라
그 다음에 제목이 黄蘗(황벽) 佛法(불법)이 簡單(간단)하다 이런 말인데.
首座(수좌)가 先到和尚處(선도화상처)하야, 수좌소임을 보는 목주스님께서 먼저 이제 황벽스님한테 먼저 지름길로 뛰어가 가지고,
問話底後生(문화저후생)이, 여기에 법문 물으러 왔던 후배가,
甚是如法(심시여법)하니, 매우 여법한 수행자입니다.
若來辭時(약래사시)에는, 만약에 와서 하직인사를 할 때에는,
方便接他(방편접타)하소서, 방편으로 그 사람을 좀 잘 제접해 주십시오.
向後穿鑿(향후천착)하야, 향후에 앞으로 잘 다듬으면, 천착이란 말은 잘 가르치고 잘 지도할 거 같으면은,
成一株大樹(성일주대수)하야, 일주, 한그루의 큰 나무를 이루어서,
與天下人作廕涼去在(여천하인작음양거재), 천하사람으로 하여금 큰 아주 그늘을 드리우는 그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일러줬어요. 안그래도 수좌스님은 가까이서 지켜봤으니까 잘 알겠죠. 황벽스님은 그런 것까지 자세히 알 턱이 없습니다.
師去辭(사거사), 그런데 임제스님이 가서 하직 인사를 했어요.
黄蘗이 말하기를, 不得往別處去(부득왕별처거)요, 딴 데 가지 말고
汝向(여향) 그대는 꼭 高安灘頭(고안탄두), 고안탄두, 이거 지명입니다, 고안이라고 하는 곳에 ‘탄두’하면 나루터, 강가에 있는 大愚(대우)스님이 있어. 그 대우스님한테 가서 법문을 듣든지 거기서 수행하도록 하라.
必爲汝説(필위여설)하리라, 반드시 그대를 위해서 말해줄 것이다. 이렇게 대우스님을 지목해서 어디를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행업이 순일하고 착하고 아주 수행에만 관심이 있는 분이니까 다른 데로 갈 생각을 전혀 안하고 시키는 대로,
師到大愚(사도대우)한대, 임제스님이 대우스님 처소에 이른대,
大愚問(대우문), 대우가 묻기를, 什麼處來(삼마처래)오, 어느 곳에서 왔느냐.
師云(사운), 黄蘗處來(황벽처래)니다.
大愚가 말하기를, 黄蘗(황벽)이 有何言句(유하언구)오, 황벽스님이 무슨 말을 하더냐.
師云(사운), 某甲(모갑)이 三度問佛法的的大意(삼도문불법적적대의)라가, 세번이나 불법적적대의를 물었다가
三度被打(삼도피타), 세번이나 곧 얻어 맞았습니다.
不知某甲(부지모갑)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有過無過(유과무과)닛가,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허물이 없습니까, 왜 이렇게 나를 때렸는지 모르겠습니다.
大愚가 말하기를, 이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黄蘗(황벽)이 與麼老婆(여마노파)하야, 황벽이 그토록 친절하게 노파심절로 그토록 친절하게,
爲汝得徹困(위여득철곤), 그대를 위해서, 철곤, 저 문지방 안에까지 사무치게 철저히 가르쳤거늘, 이런 뜻이죠.
更來這裏(갱리자리), 그런데 다시 여기까지 와 가지고서
問有過無過(문유과무과), 허물이 있느니 허물이 없느니 이 문제를 묻는가, 이랬습니다. 힘도 없는 노스님이 육십 방망이를 그것도 친절하게 세번이나 후려쳤으니 얼마나 친절하게 가르쳤느냐 이 말이요. 자비심이 없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 사실을 대우스님은 환히 꿰뚫고 있는데 이 철없는 임제는 대우스님에게 와서 내가 무슨 허물이 있어서 이렇게 얻어 맞았느냐 라고 물었다면 그게 이제 토로를 하며 다 깨놓고 화반탁출해서 그야말로 황벽스님의 창자까지 다 드러내서 이야기를 한 거요 이게. 대우스님이.
그러니까 그 말에, 師於言下(사어언하)에, 임제스님이 바로 그 말에 大悟(대오),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元來黄蘗佛法(원래황벽불법) 無多子(무다자)니라, 황벽 불법이 별 거 아니구나. 無多子, 많은 것이 없다, 이걸 이제 ‘간단하구나’ 이렇게 제목을 내가 ‘황벽 불법이 간단하다’, 뭐 얼마든지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가 있어요. 황벽 불법 시시하구나. 황벽 불법 별 거 아니구나.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어요. 이 얼마나 건방스럽고 큰 소리입니까.
大愚搊住云(대우추주운) 그러니까 대우스님이 있다가 멱살을 잡고는 말하기를,
這尿床鬼子(자요상귀자)야, 이 床(상)에다가 오줌이나 싸는, 잠자리에서 오줌이나 싸는 이 어린 아이야,
適來(적래) 금방 와 가지고, 道(도), 말하기를, 有過無過(유과무과), 허물이 있느냐 허물이 없느냐, 이것을 말하더니
如今(여금)에 却道黄蘗佛法(각도황벽불법)이 無多子(무다자), 도리어 말하기를 황벽 불법이 무다자라고? 도대체 네가 무슨 눈이 열려서 그따위 소리를 함부로 하느냐 라고 그랬습니다. 이 요상귀자, 유명한 말이거든요. 오줌싸개 어린 아이라고 한 것은 말하자면은 황벽스님한테 갔다가 도로 또 대우스님한테 가라고 하니까 쫄쫄쫄 대우스님에게 왔으니까 또 이제 황벽스님에게 가라 하면 또 이제 그리로 가야할 판이라. 그러니까 어릴 때 잠자리에서 오줌 싸고는 키인가 덮어 씌워 가지고 가서 소금 얻어 오너라고 이렇게 하는 그런 예와 똑같이 한다 이거지.
儞見箇什麼道理(이견개십마도리)오, 그대는 지금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황벽불법이 무다자라 하니 지금 네가 무슨 도리를 봐서 그런 소리 하냐.
速道速道(속도속도)하라, 빨리 한번 대답해 봐라 말야.
師於大愚脅下(사어대우협하)에, 그 때 임제스님이 대우스님 옆구리에다가
築三拳(축삼권)이라, 주먹을 세번 그냥 죽어라고 쥐어 박아 버렸어. 그러니까 대우스님이 잡았던 멱살을 확 밀쳐 버리면서
托開云(타개운), 汝師黄蘗(여사황벽)이요 非于我事(비간아사)니라, 그대의 스승은 황벽스님이고 나에게는 관계되지 않는다,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내가 한 일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런 말을 이제 했어요. 왜 관계가 없겠습니까. 이걸 이제 뒷사람이 금방 나옵니다마는 호랑이 멱살을 잡은 것이 아니라 호랑이 멱살만 잡은 것이 아니라 호랑이 꼬리까지 잡았다, 이 두 사람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황벽스님과 대우스님을. 그러니까 임제스님 손아귀에 황벽스님도 들어오고 대우스님도 들어왔다. 참 복 많은 사람이죠. 이런 좋은 스승을 두분을 한꺼번에 이렇게 만나서 천하에 참 둘도 없는 임제스님이 됐습니다.
40-3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師辭大愚(사사대우)하고 却回黄蘗(각회황벽)하니
黄蘗見來(황벽견래)하고 便問(변문),
這漢來來去去(자한내래거거)에 有什麼了期(유십마요기)리오
師云(사운), 秖爲老婆心切(지위노파심절)이니다
便人事了侍立(변인사요시립)하니 黄蘗問(황벽문), 什麼處去來(삼마처거래)오
師云(사운), 昨奉慈旨(작봉자지)하야 令參大愚去來(영참대우거래)니다
黄蘗云(황벽운), 大愚有何言句(대우유하언구)오 師遂擧前話(사수거전화)한대
黄蘗云(황벽운), 作麼生得這漢來(자마생득자한래)하야 待痛與一頓(대통여일돈)고
師云(사운), 説什麼待來(설십마대래)오 即今便喫(즉금변긱)하소서
隨後便掌(수후변장)하니
黄蘗云(황벽운), 這風顛漢(자풍전한)이 却來這裏捋虎鬚(각래자리날호수)로다
師便喝(사변할)하니
黄蘗云(황벽운), 侍者(시자)야 引這風顛漢(인자풍전한)하야 參堂去(참당거)하라하니라
그 다음에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데
師辭大愚(사사대우)하고, 그 때 임제스님께서 대우스님을 하직하고
却回黄蘗(각회황벽)하니, 또 이제 황벽스님한테로 돌아갔죠. 이게 요즘 같으면 몇일 걸렸고 그 가고 오고 하는 지명은 어떻고 가는 과정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런 것도 자세히 기록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그대로 그냥 법만 적나라하게 드러내느라고 이런 것을 누가 각색을 해서 소설로 쓰면은 그 가고 오고 한 지역을 답사하면서 얼마든지 아름답게 또 사실적으로 멋지게 각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황벽스님께 돌아왔어요.
黄蘗見來(황벽견래) 便問(변문), 황벽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곧 묻기를,
這漢(자한) 아 이놈이 來來去去(내래거거), 왔다 갔다 그렇게 해서
有什麼了期(유삼마요기)리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언제 공부 마칠 날이 있겠는가.
師云(사운), 秖爲老婆心切(지위노파심절)이니다, 다만 내가 왜 왔다갔다 하겠습니까. 황벽스님께서 큰스님께서 너무 친절하시고 간절하시고 노파심이 아주 지극하시니까 내가 그래서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것 아닙니까.
便人事了侍立(변인사요시립)하니, 곧 인사를 하고, 마치고 시립이라, 옆에 떠억 시자처럼 섰어요.
하니, 黄蘗이 묻기를, 什麼處去來(삼마처거래)오, 어디 갔다 왔느냐.
師云(사운), 昨奉慈旨(작봉자지)하야, 지난 날 자비로운 뜻을 받들어서,
令參大愚去來(영참대우거래), 대우스님 있는데 가서 참예하게 해서 거기에 갔다 왔습니다.
黄蘗이 말하기를, 大愚有何言句(대우유하언구)오, 대우가 뭐라고 가르치더냐.
有何言句, 이게 참 중요한 거죠. 우리는 그 절에 뭐 어떻게 사느냐, 대중은 몇이 살았냐… 그 절 불법은 어떠냐, 이걸 물어야 옳죠, 사실은. 大愚有何言句(대우유하언구), 이 말이 그런 뜻입니다. 대우스님의 법은 어떻더냐. 어떻게 가르치더냐.
師遂擧前話(사수거전화)한대, 임제스님께서 드디어 앞에 있었던 대우스님과 있었던 그런 이야기를 다 들어 바치니까
黄蘗(황벽)이 말하기를, 作麼生得這漢來(자마생득자한래)하야 待痛與一頓(대통여일돈)고, 그랬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놈이 올 때를 기다려가지고서 한번 크게 죽어라고 한번 두들겨 패줘야 할텐데, 언제 한번 이놈의 대우가 오면은 한번 죽어라 두들겨 패줄 것인가, 이런 소리를 한 거요. 이게 그런 뜻입니다.
師云(사운), 説什麼待來(설십마대래)오, 뭐 기다릴 게 있습니까. 대우스님 기다릴 게 뭐 있습니까. 대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지금 바로 얻어 맞으십시오 하고, 이건 이제 대우스님을 때린다는 식으로 황벽스님은 말했지만은 오히려 때리는 것과 맞는 게 또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임제스님은 맞아라 이 말이요. 대우스님을 때릴 게 아니라 대우스님에 얻어 맞으십시오,
지금 即今便喫(즉금변긱)하소서, 곧 바로 얻어 맞으십시오, 이런 말이에요. 주는 것이 받는 것이여. 먼저 때리는 것이 맞는 것이죠 또. 그래서 그런 것들이 분별없이 아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합니다 말이. 그래도 이제 이런 차원에서는 뜻이 다 통하니까. 맞는 게 뭐 때리는 것이고 때리는 게 맞는 거죠. 황벽스님이 임제를 처음에 때렸을 때 그 어디 임제만 맞았습니까. 황벽도 때린 사람도 같이 맞은 거요. 어디 황벽만 때렸습니까. 임제스님도 같이 때린 거여. 이런 차원입니다. 여기에 뭐 너니 나니 하는 그런 분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서 곧바로 隨後便掌(수후변장)이라, 곧바로 손바닥으로 한번 후려쳤어.
그러니 黄蘗이 말하기를, 這風顛漢(자풍전한)이, 이 미친놈이 다시 와서 호랑이 수염을 잡는구나. 這裏(자리)에 捋虎鬚(날호수)로다,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있다가 便喝(변할)이라, 첫 할입니다. 할! 하고 그냥…어느 안전입니까. 황벽스님 앞에 할을 크게 했어요.
황벽이 말하기를, 侍者(시자)야 引這風顛漢(인자풍전한)하야 參堂去(참당거)하라, 이 미친놈을 데리고 가서 저 선방에 처넣어라, 선방에 처넣어라. 이렇게 한마디 탁 했습니다. 이게 황벽스님과 임제스님의 만남에서 이루어졌던 아주 역사적인 大사건이죠. 이로 인해서 정말 임제스님도 임제스님이 됐고 황벽스님도 임제스님을 통해서 더 빛났고. 대우스님도 사실 임제스님의 이 사건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고. 그래서 오늘날 한국 불교는 특히 선불교 입장에 있어서는 정말 임제스님을 그토록 높이 추앙하고 임제 이후에 임제 없고 임제 이전에 임제 없다, 이렇게 아주 최고봉, 이 불교의 천 육백 년 역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추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연원이 바로 이 장면이죠.
40- 4 호랑이 꼬리를 잡다.
後潙山(후위산)이 擧此話(거차화)하야 問仰山(문앙산)하되
臨濟當時(임제당시)에 得大愚力(득대우력)가 得黄蘗力(득황벽력)가
仰山云(앙산운), 非但騎虎頭(비단기호두)요 亦解把虎尾(역해파호미)니다
그 다음에 뒷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後潙山(후위산)이 擧此話(거차화), 이 이야기를 위산스님이 듣고는,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자기 제자, 위앙종를 건립하게 된 위산과 앙산, 자기 제자 앙산스님에게 묻기를,
臨濟(임제)가 當時(당시)에 得大愚力(득대우력)가 得黄蘗力(득황벽력)가, 대우의 힘을 얻었는가, 대우스님한테 가서 깨달았느냐, 아니면 황벽의 힘을 얻었느냐, 황벽스님 덕택에 깨달았느냐. 그러니까 앙산스님 대답이 아주 기가 막히죠.
非但騎虎頭(비단기호두)요, 비단 호랑이 머리를 탔을 뿐만 아니고
亦解把虎尾(역해파호미)니다, 또한 호랑이 꼬리를 잡을 줄도 압니다. 이렇게 이제 표현했습니다. 참. 우리 식으로 아주 재미없이 대답을 하면은 아 그 황벽스님의 힘도 입었고 대우스님의 힘도 입었죠,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을 이렇게 이제 앙산스님은 非但騎虎頭(비단기호두)요 亦解把虎尾(역해파호미)니다, 이렇게 정말 여운이 멀리까지 가도록 그리고 참 맛배기로 재미없이 말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맛있게 표현합니다. 이게 이제 선사들의 표현 방법이죠.
그래서 선시라든지 선문답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그걸 풀어놓고 보면은 다 알 수 있는 것인데 상징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하게 표현을 하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뭐 이런 것들은 우리가 법화경에서도 보아왔듯이 경전도 그런 상징성이 아주 뛰어나지 않습니까. 원래 불교의 오묘한 이치는 그냥 이렇게 바로 표현하면은 그 맛이 줄죠. 그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었어요.
41-1 소나무를 심는 뜻
師栽松次(사재송차)에 黄蘗問(황벽문),
深山裏栽許多(심산리재허다)하야 作什麼(작십마)오
師云(사운), 一與山門作境致(일여산문작경치)요 二與後人作標榜(이여후인작표방)이니다
道了將钁頭(도료장곽두)하야 打地三下(타지삼하)한대
黄蘗云(황벽운), 雖然如是(수연여시)나 子已喫吾三十棒了也(자이긱오삼십방요야)라
師又以钁頭(사우이곽두)로 打地三下(타지삼하)하고 作嘘嘘聲(작허허성)하니
黄蘗云(황벽운), 吾宗到汝(오종도여)하야 大興於世(대흥어세)하리라
소나무를 심는 뜻인데
임제스님께서 栽松次(재송차)에, 소나무를 심고 있을 때,
黄蘗(황벽)이 물었어요. 深山裏(심산리)에 栽許多(재허다)하야, 이 깊은 산속에 그렇게 소나무를 자꾸 심어가지고 作什麼(작십마)오, 뭐 할라고 하느냐.
師云(사운), 一與山門作境致(일여산문작경치), 한 가지는 이 산문에 경치가 아름답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二與(이여), 또 한 가지는 後人作標榜(후인작표방)이다, 그랬어요. 뒷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렇죠, 산에 나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또 나무를 심고 나무를 심고 하면은 그럼 한쪽에 베고 또 심고 베고 심고 그게 얼마나 멋진 본보기입니까.
단순하게 나무를 가지고 이야기 했지마는 나무를 심는다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공부한다는 의미고 공부를 그렇게 했지마는 뭡니까 나무가 그렇게 많지마는 왜 뭐할려고 심냐, 자네가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지마는 또 왜 공부하느냐. 아무리 공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을 더 빛나게 하는 일이고 산중의 경치를 위한 것이고 후인작표방이다, 뒷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공부했어도 또 공부 많이 하는 것, 이것이 이제 뒷사람들에게 보여 줄 게 그게 아니냐 이거요. 참 의미심장하잖아요, 멋지잖아죠. 선지식의 말은 이런 뜻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난 그전에 학인들한테 늘 하는 소리가, 학인하고 강사하고 다른 점이 뭐냐. 학인보다 강사가 공부를 두배나 더 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늘 그렇게 이야기하고 사실 그래야 옳고. 두배를 더 하는게 학인과 강사가 다른 점이다. 그렇습니다, 이게 공부를 했지만 또 하고 나무가 있지만 또 나무를 심는 것.
道了將钁頭(도료장곽두)하야, 말을 해 마치고는 괭이를 가지고
打地三下(타지삼하)한대, 땅을 세번이나 탁 탁 때렸어요.
그러니까 황벽이 그 모습을 보고는, 雖然如是(수연여시)나 子已喫吾三十棒了也(자이긱오삼십방요야)라, 자네가 세 번 땅을 쳐서 그 깊은 도리를 보였지마는 나에게 삼십 방을 얻어 맞은 격이다 그랬어요.
師又以钁頭(사우이곽두)라,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물러 설 분이 아니잖아요. 또 괭이를 가지고
打地三下(타지삼하), 또 세번이나 땅을 또 쳤어요, 앞에서처럼.
그리고는 作嘘嘘聲(작허허성)이라, 허허 하고 한번 크게 웃었어.
그러니까 황벽스님이 말하기를, 吾宗到汝(오종도여)하야, 나의 종풍이 그대에게 이르러서 大興於世(대흥어세)하리라, 세상에 크게 일어나겠다. 참 정말 이 두 분의 법거량이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모르겠지마는 황벽스님께서 이렇게 인가를 했습니다. 나의 종풍이 너 시대가 오면은 세상에 크게 일어나겠다.
사실 그랬어요. 황벽스님보다 임제스님이 더 우뚝이 높은 분이고 더 법문도 표현이 강렬하고 더 아주 극적인 그런 표현들, 정말 심금을 울리고 충격을 주는 그런 표현들을 해서 참 만고의 임제스님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뭐 죽은 뒤에 꼭 임제 문중에서 제명대사 이 일을 다시 한번 밝히고 임제 문중에서 영작인천지안목, 영원히 人天의 안목이 되어지이다, 라고 그렇게까지 축원을 하게 됐어요. 우리나라는 너무 임제스님을 좋아해요, 전통적으로 보면은.
41-2 仰山(앙산)스님의 預言(예언)
後潙山(후위산)이 擧此話(거차화)하야 問仰山(문앙산)하되
黄蘗當時(황벽당시) 秖囑臨濟一人(지촉임제일인)가 更有人在(갱유인재)아
仰山云(앙산운), 有秖是年代深遠(유지시년대심원)하야
不欲擧似和尚(불욕거사화상)이니다
潙山云(위산운), 雖然如是(수연여시)나
吾亦要知(오역요지)하니 汝但擧看(여단거간)하라
仰山云(앙산운), 一人指南(일인지남)하야
呉越令行(오월영행)라가 遇大風即止(우대풍즉지)하니라
(讖風穴和尚也(참풍열화상야))
앙산스님의 예언이라.
後潙山(후위산)이 擧此話(거차화)하야, 이 이야기를 들어서.
앙산에게 묻되,
黄蘗(황벽)이 當時(당시)에 秖囑(지촉), 다만 臨濟一人(임제일인), 임제 한 사람에게 부촉을 했는가,
更有人在(갱유인재)아 다시 다른 사람이 있느냐.
앙산이 말하기를,
有秖是年代深遠(유지시년대심원)하야, 다만 있긴 있어. 이 앙산스님은요 예언을 잘 하고 잘 맞추는 분이라. 역사적으로 아주 미래를 꿰뚫어보는 분으로서는 앙산스님을 제일로 쳐요. 연대가 심원이라, 연대가 너무 오래다 말여.
그래서 不欲擧似和尚(불욕거사화상)이니다, 화상에게 이 일을 들어서 바치고 싶지 않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위산이 말하기를, 雖然如是(수연여시)나 吾亦要知(오역요지)라, 비록 그렇다 하지만 나도 또한 알고 싶다.
汝但擧看(여단거간), 그대는 다만 거간하라 한번 들어서 이야기나 해 봐라.
앙산이 말하기를, 一人指南(일인지남)하야
呉越令行(오월영행)타가 遇大風即止(우대풍즉지)하니라, 또 한 사람 이야기인데 한 사람은 남쪽을 가리켜서 呉越令行(오월영행)이라, 오나라와 월나라에 거기에 행하다가 큰 바람을 만나면은 遇大風即止(우대풍즉지), 곧 그치게 될 것입니다. 아주 알듯 말듯한 이런 표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이건 이제 讖風穴和尚也(참풍열화상야)라 그랬어요. 풍열화상에 대한 예언이다, 讖(참) 자는 그런 뜻입니다. 뒤에 풍열화상이 나타나가지고 아주 크게 법을 드날렸다, 그런 이야기죠.
42 무슨 잠꼬대인가
師侍立徳山次(사시립덕산차)에 山云(산운), 今日困(금일곤)이로다
師云(사운), 這老漢(자노한)이 寐語作什麼(매어작십마)오
山便打(산변타)라
師掀倒繩床(사흔도승상)한대
山便休(산변휴)하니라
그 다음에 무슨 잠꼬대인가.
師侍立徳山次(사시립덕산차)에, 또 덕산스님을 모시고 있은 적이 있어요.
山(산)이 云(운), 今日困(금일곤)이로다, 금일 피곤하다.
師云(사운), 這老漢(자노한)이 寐語作麼生(매어자마생)고, 잠꼬대, 무슨 잠꼬대 소리냐. 멀쩡한 날에 피곤하다고 하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그러니까 덕산스님이 便打(변타)라 곧 때렸어요.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掀倒繩床(흔도승상)한대
山(산)이 便休(변휴)하다 했는데 승상은 보통 의자에 앉아 살았어요, 중국사람들은 의자에 많이 앉아 사니까. 특히 조실쯤 되면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좌선도 하고 평소 생활도 하고 그렇습니다. 우리처럼 땅바닥에 안 앉거든요. 승상이란 게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법상도 되고 그래요. 그 앉아있는 의자를 그냥 뒤흔들어서 엎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덕산스님이 변휴라, 그냥 곧 가만히 있어버렸다, 쉬어버렸다, 상대를 안해줬다 이런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고.
43-1 이곳에는 산 채로 埋葬(매장)한다
師普請鋤地次(사보청서지차)에 見黄蘗來(견황벽래)하고 拄钁而立(주곽이립)하니
黄蘗云(황벽운), 這漢困那(자한곤야)아
師云(사운), 钁也未擧(곽야미거)어니 困箇什麼(곤개십마)오
黄蘗便打(황벽변타)하니 師接住棒(사접주방)하야 一送送倒(일송송도)하다
黄蘗喚維那(황벽환유나)호대 維那扶起我(유나부기아)하라
維那近前扶云(유나근전부운), 和尚爭容得這風顛漢無禮(화상쟁용득자풍전한무례)닛고
黄蘗纔起(황벽재기)하야 便打維那(변타유나)하니
師钁地云(사곽지운), 諸方火葬(제방화장)이어니와
我這裏(아자리)는 一時活埋(일시활매)하노라
그 다음에 또 이곳은 산 채로 매장한다, 또 한가지 기록할 일이
師普請鋤地次(사보청서지차)에, 보청은 늘 울력이죠. 임제스님께서 울력할 때에, 서지차라고 하는 것은 호미로서 풀을 맬 때입니다. 풀을 맬 때
見黄蘗來(견황벽래)하고, 황벽이 오는 것을 보고는,
拄钁而立(주곽이립)이라, 괭이를 떠억 버티고 섰어, 가만히 서 있었어 황벽스님이 뭐라고 하는가 이제 떠보는 거죠. 또 법거량이기도 하고. 무슨 우리 같으면 세상 잡사나 너 어제 어디갔다 왔나 하고 그런 잡사나 이야기하겠는데 이런 사람들은 또 차원이 달라서 떠억 이렇게 한번 서 있어 봤습니다.
황벽이 말하기를, 這漢(자한)이 困那(곤야)아, 이놈이 피곤한 모양이지? 이렇게 말을 했어요.
師云(사운), 钁也未擧(곽야미거)어늘, 괭이도 아직도 한번도 들지도 않았는데,
困箇什麼(곤개십마), 피곤하기는 뭐가 피곤하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 황벽스님이 속았거든.
黄蘗스님이 便打(변타), 곧 임제스님을 때렸어.
師, 그러니까 때리니까 師(사) 接住棒(접주방)이라, 때릴 줄 알고는 때리는 그 몽둥이를 잡아가지고는,
一送送倒(일송송도)라, 한번 던져가지고, 던져버렸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는 때린 몽둥이는 던져버리고 황벽스님은 넘어뜨렸어요. 사람은 넘어뜨렸어, 땅에다.
그러니까 黄蘗스님이 있다가, 喚維那(환유나), 유나를 불러가지고,
유나야, 扶起我(부기아)하라, 나를 좀 일으켜 세워라, 이놈이 나를 이렇게 넘어뜨렸다, 그러면서 나를 좀 일으켜 세워다오, 이렇게 했어요.
維那近前扶云(유나근전부운), 유나가 가까이 와서 세우면서 말하기를,
和尚(화상)께서는 爭容得這風顛漢無禮(쟁용득자풍전한무례), 어째서 저 미친 놈 무례한 짓을 용서하고 이렇게 있습니까? 그렇게 유나가 못마땅해가지고 황벽스님에게 저놈을 갔다가 말이야 그냥 놔두느냐고 그랬어요.
黄蘗纔起(황벽재기), 그래 황벽이 겨우 일어나가지고는 오히려
便打維那(변타유나)라, 그런 말 하는, 자기편 드는 유나를 후려쳤다.
師钁地云(사곽지운), 그 때 옆에서 임제스님이 지켜보고 있다가 땅을 파면서,
諸方(제방)은 사람이 죽으면 火葬(화장)하지마는 我這裏(아자리), 우리 여기는 그냥 一時(일시)에 活埋(활매) 산 채로 묻어버린다. 아 이거 황벽스님 보고 참 기가 막힌 엄청난 말을 한 거에요. 딴 데는 사람이 죽으면은 화장하지마는 여기는 죽을 때까지 안 기다린다 말야, 바로 매장해 버린다, 산 채로. 황벽스님을 보고 이렇게까지 했습니다.
이게 황벽스님의 어떤 법을 이런 데는 드날렸다기 보다는 완전히 깡그리 땅에다 파묻어버린 그런 입장이 돼 버렸습니다. 아뭏든 이 도인 스님들의 법거량을 잘, 우리는 뭐 쉽게 쉽게 이렇게 보고 넘어갑니다마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잘 음미하고 사유하면은 또 거기는 그만치 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우리나라 어떤 선사도 이런 거만 좋아하는 선사가 한 분 있죠. 사실 이거 이 시대에 이런 차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지마는 이것을 못 알아 듣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별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이분들은 정말 인간적인 모든 경계를 다 초월한 입장에서 초월한 입장에서 이렇게 법거량을 하지, 정말 인간의 어떤 기본적인 명예욕, 재산욕, 온갖 욕심 다 가지고 그대로 속인처럼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것만 읖조린다면 그건 아무 의미없어요 사실. 최소한도 여기에 기록된 이 도인들은요 그런 차원 훨씬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의 어떤 명예욕이나 뭐 그런 것,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소리만 배워가지고 앵무새처럼 읖조린다면 그건 참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
八風不動이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도인을 모르지마는 도인을 알아보는 방법으로서 바람을 보내보면 안다. 여덟 가지 바람, 그 바람에 흔들리는가 안 흔들리는가. 여덟 가지 바람, 이해와 손해, 칭찬과 훼방, 명예 이런 거거든요.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 팔풍의 바람으로 흔들어보면은 비록 도인이 아니라도 우리가 그것을 보고 도인을 알 수 있다. 일찌기 그렇게 다 그 도인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다 이야기해놨어요. 역시 그것도 도인들이 다 해 놓은 거요.
43-2 진짜 도적은 도망갔다.
後潙山(후위산)이 問仰山(문앙산)호대
黄蘗打維那意作麼生(황벽타유나의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正賊走却(정적주각)하고 邏蹤人喫棒(나종인긱방)이니다
後(후) 潙山(위산)이 仰山(앙산)에게 묻되, 참 위산스님은 그 자기 제자 앙산을 너무나도 잘 점검하고 가꾸고 가르치고 한 것이 임제록에서도 잘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일일히 눈을 뜰 수 있는 큰 그런 법거량이 세상에 등장을 하면은 꼭 자기 제자 앙산에게 한번 시험하는 거요 그 문제를 가지고. 필요한 거거든요, 이게 아주 필요한 대목입니다.
앙산에게 묻되 黄蘗(황벽)이 打維那意作麼生(타유나의자마생)고, 황벽스님이 유나를, 임제를 때리지 아니하고 유나를 오히려 때린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仰山(앙산)이 말하기를, 正賊(정적)은 走却(주각)하고 邏蹤人(나종인)이 喫棒(긱방)이니다, 진짜 도적은 이미 도망가 버렸고 임제스님은 벌써 저만치 가버렸고 그 도적을 쫓아가는 순경, 나종인, 수라꾼, 형사, 순경이 오히려 방망이를 얻어 맞은 게 됐습니다. 참 이런 표현은 아주 멋지면서도 우리가 또 알아들을 수 있는… 이 앙산스님은 또 그래요, 표현이. 저 앞에서도 있었잖아요. 호랑이 머리만 잡은 것이 아니라 호랑이 꼬리까지 잡았다. 호랑이 머리만 탄 게 아니라 호랑이 꼬리까지 잡았다. 아 이런 표현 뭐 표현이 근사하지 우리가 모를 말이 아니잖아요. 요쯤만 되도 알아듣죠 사실은. 정적은 주각하고, 진짜 도적은 도망가버리고 순경만 오히려 방망이를 얻어 맞았다. 참 간단하면서도 멋진 표현입니다.
첫댓글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사바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사바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사바하 _()()()_
正賊(정적)은 走却(주각)하고 邏蹤人(나종인)이 喫棒(긱방)이니다. 고맙습니다._()()()_
八風不動이라사 道人..._()()()_
黄蘗與麼老婆하야 爲汝得徹困이어늘 更來這裏하야 問有過無過아...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_()()()_
黃檗云,五宗到汝하야 大與於世하리라...고맙습니다_()()()_
師云, 秖爲老婆心切... 참 아름다운 광경이 그려집니다 _()()()_
감사합니다,
도인 스님들의 법거량을 잘, 우리는 뭐 쉽게 쉽게 이렇게 보고 넘어갑니다마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잘 음미하고 사유하면은 또 거기는 그만치 참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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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一與山門作境致 二與後人作標榜 ... _()_
隨處作主, 자기 주인공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그 탐구를 통해서 결국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의 주체, 절대 평등의 자리, 궁극적 자기 차원을 놓치지 않고 산다고 하는 것, 이것이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는 것인데 바로 三度發問, 三度被打, 세번 묻고 세번 맞다 라고 하는 여기에도 사실은 그것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다시 음미 합니다.
諸方 火葬 我這裏 一時活埋 ...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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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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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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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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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