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이다.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廢黜)되었다가 1480년 사사(賜死)되었다. 원래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와 부인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연산군의 생모이다. 1473년(성종 4)에 숙의(淑儀)로 봉해진 후
1476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질투가 몹시 심하여 여러 가지 부덕한 일을 많이 했고, 1477년에는 비상(砒霜)으로 왕과 후궁을
독살하려는 혐의가 발각되어 왕과 모후(母后)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미움을 더욱 받게 되었다. 그뒤에 1479년에는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진노를 사서 , 1479년 성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든 뒤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원자(元子:뒤의 연산군)의 어머니를 일반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되므로 정부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관청에서
생활비 일체를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를 그치지 않았다. 결국 이는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고, 원자가 성장하면서 인심도 폐비 윤씨를 동정하게
되었다. 이에 1482년(성종 13) 8월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의 대신·육조(六曹)·대간(臺諫)을 모아 의논하게 한 다음에
좌승지(左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사사(賜死)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 ·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종 시대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서서히 퇴폐 풍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 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 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중종)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이런 성장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융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런 계제에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 ·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일이 크게 벌어졌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먼저 정 ·엄 두 숙의를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후에 모두 죽여버렸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 ·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타살하였다. 연산군은 폐비윤씨를
복위시켜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祠)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 ·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浚)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김굉필(金宏弼) ·이주(李胄)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의 명신거유(名臣巨儒)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연산군이 이같이 큰 참극을 벌인 까닭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싫어했던 선비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이 무서운 사화는 그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 ·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사정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는 침체되었고, 또 연산군의 처사를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을 계기로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도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사화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일어났는데, 이것이 조선 선비사회에 분열을
일으켜 후일 당파싸움의 원인(遠因)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