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꽃이 순명으로 피는 길]
살면서 이런 광영이 또 다시 있으랴. 죄 많은 가슴으로도 성인의 유해를 가슴에 품을 수 있다니! 성인의 향기가 분향처럼 피어오르는 길을 순례자로 걷는다.
대지가 30도 이상의 열기로 맞불을 놓아도, 가슴엔 청량한 샘물이 흐른다. 신앙선조들의 핏빛 정신을 본받으려 하니 낮아지고 비워진다. 믿음의 꽃이 순명으로 핀다.
가톨릭안동교구 7곳의 성지들을 두 해전 한 곳 한 곳 차로 다닌 순례는 그대로도 첫 느낌 신선함에 좋았다. 한편, 순교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고 마침내 참형을 당하신 상주 감옥까지 긴 순례의 길을 직접 발걸음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문경성지 카페를 세 번째로 두드리니, 2박3일 도보순례의 종주코스가 열린다. 문경 관아에서부터 점촌, 함창을 지나 상주 옥 터까지 걷는 ‘믿음의 길’이다.
70km에 달하는 길,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로 다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수면 아래 숨은 잠재력을 끌어당겨본다. 아직 뛰는 열정과 뒷심이 남아있음을 믿어본다.
첫째 날 아침 8시, 문경성당에서 순례의 시작 기도를 드린다. 문경성지 순례코스는 사제이신 정베드로 신부님께서 개척하여 다듬으셨고, 또한 어떤 팀이든 일일이 인솔하신다. 어린 양으로 목자의 뒤를 따르는 순한 마음이 어린애처럼 참 좋다.
이번 ‘믿음의 길’ 2박3일 순례는, 다른 성지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바로 ‘성인 유해 봉송’이다. 영광스럽게도 첫 번째로 목자에게서 유해를 받아 안는 순간, 분향처럼 피어오르는 성인의 향기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성 김대건 아드레아 신부님의 유해여서 더 크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다음에 이어받을 순례자와 마주 서서 성호를 긋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유해를 인계하며 그 향기를 간직한다.
건축학도이기도 하셨던 목자신부님은 순례 중에 성당건축의 철학과 그 의미도 상세히 해설해주셨다. 출발지 문경성당 독일 신부님 설계의 직선 위주 건축양식과 공간 여백의 함축미, 스테인드글라스의 조화 등과 순례지 성당 곳곳도 설명해주셨다.
문경온천을 지나면서 새재자전거길 표식이 나오자, 자전거 국토종주 완주 때의 두 바퀴로 걷고 달리던 감회에 젖는다.
연분홍 메꽃과 노란 금계국의 웃음소리, 빨갛고 하얀 접시꽃, 분홍 노랑의 낮달맞이꽃, 오렌지빛 참나리꽃도 그립다 속삭인다. 깔깔대고 웃으며 행복하게 걷는 길은 외어공소를 지나고, 오정산 등산로 근처 진남쉼터에서 쉰다. 약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김밥과 라면 등으로 점심을 먹는다.
햇발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달군 그 열기 속에서 발가락, 발바닥, 발등에 물집들이 터지고, 무릎 허리의 압박은 통증을 가세한다. 하지만 인내로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첫날 끝 지점인 신기성당의 목자 신부님 미사 강론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분, 힘드셨지요? 그 고통스러운 길을 혼자가 아닌 함께여서 해냈다고 믿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위로와 힘을 받으며 마음덩이들이 단단해지셨어요. 어쩌면 당시 순교자들도 그렇게 해서 당당하게 순교에 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둘째 날은 문경성당에서 다시 차로 신기성당에 도착해 걸음을 시작한다. 목자는 가로수 그늘과 숲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뽕나무 까만 열매, 새빨간 딸기와 앵두 열매의 달콤함도 맛보게 해주신다.
함창성당에 이르러 목자가 미리 준비해두신 점심식사의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더위를 식힌다. 함창성당은 성당 건축에 직선보다 곡선이 흐르고, 성가대 위 벽화 등 유리화가 햇살에 눈부시다. 이곳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성가 작곡가이신 구순의 구명림 수녀님을 만나 뵈올 줄이야.
낙동강 칠백리 경계석 앞에서 주저앉을 만큼 26km를 힘들게 걸은 날이었다. 발가락을 비롯한 고통의 향연에 걸음을 포기하고, 택시 편으로 목적지에 갈까 잠시 시험에 들었었다. 동료 순례자들 고통 대열에 합류하며, 어느 새 숙소인 퇴강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주인장이신 한의원 원장님이 시원한 수박을 선사해주시니, 그 짜릿한 달콤함이여! 지쳐서 늘어질 법도 하건만 순례자 동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방을 오가며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착착 호흡 맞춰 설거지를 한다.
아, 함께 고통을 감내하고, 어울려 만찬을 나누는 기쁨이여! 밤새 논두렁 밭두렁 맹꽁이들의 대합창과 뻐꾸기 외로운 하소를 들으니, 왜 이리 눈물이 날까.
셋째 날, 발걸음 죽인 이타의 소리가 알베르게의 새벽을 연다. 누구를 위하기에 이틀 내내 피곤에 지친 몸이 이토록 남을 위한 아침 식사준비를 하는 걸까. 주일 아침, 미사가 진행 중인 퇴강 성당 마당에 섰다. 퇴강마을은 거의 대다수가 교우들이어서, 성당에서 출발해 마을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 또한 성스러웠다.
사벌역을 지나 순례자 성당이라는 사벌성당에 도착했다. 성당 지붕과 성당 문손잡이가 조개껍질 모양으로 독특하다. 이곳에서 준비해온 주먹밥 점심과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다. 도심을 통과하니, 포장도로, 찻길 언저리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한 잔에도 무시로 시원함을 입혀본다. 오늘 동행해주신 헤드빅 수녀님의 상주 아리랑 콧노래가 부는 바람에 구성지다.
드디어 ‘믿음의 길’ 3일 간의 종착지인 상주 옥 터에 들어선다. 경당에선 이 믿음의 길 위의 순교자이신 박상근 마티아 복자께서 어서 오라 반겨주신다. 우리들 순례 발걸음을 속속들이 다 아신다는 눈길을 보내주신다. 주일미사 겸 드린 파견미사에서 신부님의 두 번째 강론말씀 역시 진한 향기로 남는다.
“나는 보았습니다. 그 길고 아픈 길을 웃으면서 기쁘게 걷는 모습을요. 순교자들이 결코 우리에게 순교의 고통만 강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즐기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순례의 길에 동참하기를 바라셨을 것 같습니다.”
순례자들의 완주 소감 또한 가슴을 울렸다. 신앙의 힘든 고비를 만나고 갈림길에 섰을 때, 순교의 정신으로 이겨나가겠다는 믿음들이 굳어졌다. 숱한 순례자들을 이끄시느라 고되신 목자 신부님의 뒤만 보며 따라 걸었다는 울림에도 목이 메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오랜 간병으로 힘들던 혼자만의 고통이 벗겨지는 감격에 눈물이 쏟아졌다. 성경 속 시편을 이용해서 감사기도 드렸다.
“주님,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대체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삶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며, 순명으로 걸어가려합니다. 아멘!''
*추신 : 나의 폰에 담긴 두서없는 사진들 올리며, 순례 동료들이 찍은 좋은 사진들을 기대해봅니다.
* 성지순례 전날 밤 문경성당의 기도
* 순례 출발하는 문경성당의 아침
* 연분홍 메꽃, 십자 지팡이와 놀고
* 그래도 남녘의 들판은 싱그러웠다
* 연꽃마을에선 낚시꾼 세월을 낚고
* 순례자들의 땡볕속 거침없는 행군
* 아, 일년을 기다린 열매들 낙과가
* 접시꽃 당신이 순례자를 환영하고
* 배고플 때 함께 따먹은 새빨간 딸기
* 잘 거둔 양파는 햇살에 곱게 마르고
* 뽕나무 열매 실컷 따먹은 길의 흔적
* 여름 한창인데, 성급한 가을단풍이
* 함께 그림자 벗 삼아 걷는 순례길
* 첫째날 종점, 둘째날 시점 신기성당
* 신기성당 본당신부님, 흰둥이 함께
* 점촌성당 기도석의 사명 선언문
* 함창성당 올갠지도의 구명림수녀님
* 셋째 날 시점인 퇴강 성당에서
* 퇴강성당 십자가의 길 제 1처
* 십자가의 길은 성당 밖 마을로 향해
* 순례자 성당인 사벌성당 중앙 벽화
* 남성동성당 종탑이 눈을 시원하게
* 중앙 입체십자가 가시월계관 형상
* 믿음의 길 순례 종점 상주옥터 경당
* 상주옥터 경당에서 드린 파견미사
* 왕산역사공원에서 목자의 설명안내
* 김대건 신부님 성인 유해를 품고
첫댓글 따스한 언어로 함께했던 순례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을 보면서 다시금 그 순간들과 함께해봅니다 ^^
베르띨라 자매님.
'따스한 언어라' 고
표현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70km가 넘는 장거리
도보순례가 거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혼자가 아닌
함께였다는 것!
절절이 실감한 순례였죠.
무거운 배낭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 가듯
부단히 걸어내던 그 모습
참으로 갈채감이었어요.
근사한 풍경들
추억의 장면들
담아내느라 고생한
그 마음에도
박수 보내 드려요.
순례 기간 내내 보여주셨던 그 열정 ㆍㆍ
정말 대단하시고
자매님의 글을 읽다보니 당시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다시 한번 보여짐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주님 은총 가득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마르티노!
은루 랑 잘 지내시죠?
발가락 물집일랑
쓸림 상처랑
잘 치료되셨는지요.
두 분
부부의 호흡은 정말
보기만 해도 상큼했어요.
나란히 성지순례 떠나온
첫마음부터
예사롭지 않다 했는데
순례 내내 두분의
서로 위함과
공동체에는 둘이 함께
짝이 되어 도움을 주는
비둘기 한쌍의 모습
오래 기억될 거에요.
주님 축복
가득히 내리시는 가운데
행복한 나날되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