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불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도 설움은 불려 애닳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에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가객 장사익에 대하여
성악가는 머리와 가슴의 공명을 통해 노래하고, 판소리 명창들은 단전의 들숨과 날숨을 통해 소리를 토해낸다. 그렇다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어느 부류로도 묶어낼 수 없는 ‘딴따라’ 소리꾼 장사익(55)의 노래는 어디로부터 퍼올려지는 것일까. 댄스도 록도 포크도 트로트도 아닌, 오직 ‘장사익 노래’라고 밖에 명명할 수 없는 그것들은 그의 정수리와 발바닥까지를 요동치다가 나오는 소리다. 요동의 와중에서 장식은 버려지고, 정직한 감정만을 걸러내 곧고 탁한 음색을 소름끼치게 뱉어낸다.
북한산 자락에서 인왕산을 마주 보는 상명대학 옆 홍지동에 새로 지은 그의 집. 2층 창문으로 구름 걸린 인왕산이 떡하니 보이는 집에서, 그는 뽕잎차를 손수 끓여 내왔다. 작년 추석 뒷날 구경이나 하자고 아내와 함께 이 동네를 찾았다가, 경치에 반해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고. 돈 한 푼 없이 빚으로 지은 집이지만 잠깐쯤 이런 데서 호강하며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며 수줍어한다. 집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면서.
거실의 창을 가득 메운 산은 인왕산. 널찍한 창틀속에 투영되는 바위산은 바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의 모델이 됐던 풍경이다. 정갈하게 갈무리 돼 있는 그의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 그냥 놓여 있지 않다.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의 공간에 놓여 있는 30여점의 흙뭉치도 사람의 시선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하나 하나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데뷔 무대 소문을 듣고 담양에서 순수 자연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토우도 빚는 송일근씨가 인사동에서 치른 전시회 ‘3학년 5반’에 나왔던 작품들이다.
마당에는 징, 풍경, 윈드 차임 등이 장승과 함께 즐비하게 도열해 쉬지 않고 바람의 노래를 들려준다. 뙤약볕이 기분 좋게 드는 1층 창문 옆에는 갖가지 동양란들이 소담스럽게 가꿔져 있다. 음악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인생 눈을 등짝에 인 채 한겨울을 나고 있는 북한산은 보기만 해도 시리다. 햇볕이 기분 좋게 쬐는 거실에서 그가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수상에 빛나는 태평소를 집어든다.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면서 뽑혀 올라오는 태평소 가락이 높푸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삽입된 덕분에 부쩍 친숙해진 ‘능게’ 가락이다. 그의 헌걸찬 목청을 닮아 귀가 쩌렁쩌렁 울린다. 만원 버스 속에도 핸드폰으로 귀엣말을 나누는 화에 배인 서울 사람들에게 “했시유”, “했쥬”라며 서슴잖고 내지르는 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풍성한 메타포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곡조에 그의 쉰 목소리는 오랫동안 잊었던 무엇을 찾게 한 듯 환상에 젖게 한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대중음악이 뭐 그리 감동적이겠냐고 ? 천만에 말씀이다.
친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장사익은 세속의 영달로부터 초연한 가객의 혼을 담고 있다. 그런 그의 노래를 듣고 나면 머리끝 한쪽이 시려오거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신선한 삶의 체험이 노래에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그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세속의 영달로부터 초연한 봉건시대 가객의 혼이 깃들여 있다. 하나 하나의 음과 낱말을 포착하는 기백은 어떤 탁월한 록 보컬리스트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며 여음과 여음 사이를 절묘하게 떠다니는 표현력은 어떤 절세의 재즈 보컬도 무력하게 한다. 그의 탁음은 민중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결코 귀족의 음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그의 노래를 한 번만 들어도 금새 알아 차릴 수 있다. 대중음악으로 그 만큼 폭 넓은 음색과 영역을 갖는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대개 그러한 가수의 노래는 [기법]이 아닌 [생활]이기에 생명력도 긴 편이다. 등등....그의 음악이 카리스마적인 것은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장타령을 부르든 혹은 귀에 익은 대전불루스를 부르든 장르에 상관없이 감동적인 이유는 노래의 전달이 가장 한국적이라는데 그의 카리스마가 있다. 들려주는 노래와 혼자 즐기는 노래의 차이라 할까? 듣고 나면 다들 미치겠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가 한국적(?)으로 노래하는 소리꾼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서울과의 첫 대면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1994년 11월 5일 홍대앞 ‘예’ 소극장의 작은 무대였다. 100명 정원의 무대에 이틀 동안 몰려 든 관객이 800여명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무대에 피아노(임동창), 꽹과리(이광수), 모듬북(김규영)이 자리 잡으니 문자 그대로 미어터졌다. 당시 구경 와 있던 음반사 직원의 요청으로 한달 뒤 만들어졌던 음반이 그의 데뷔 앨범이자 출세작 ‘하늘 가는 길’이다. 무대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라이브 무대를 먼저 가진 뒤 취입을 한다는 그 특유의 음반 제작 원칙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것도 재녹음과 편집 등 상식화돼 버린 과정들을 일체 생략하고 맨 첫 녹음(first take)으로 음반을 만든다. 장사익은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앨범이 아닌 공연장에서 자신의 신곡을 먼저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노래를 만드는 원초적인 작법은 ‘엮음’이었어요. 처음부터 곡 하나를 다 완성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불러보면서 서서히 곡 하나를 엮어가는 거죠. 제 노래도 처음엔 즉흥적인 흥얼거림에서 시작합니다. 그 후 수 차례 공연을 거치면서 하나의 노래로 완성됩니다. ”
그래서인지 그가 만든 노래엔 악보가 없다. 음표라는 건 음악을 옮기려고 도입한 기술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음악을 기록하는 행위는 음표 그리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음악 레코딩에 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해도 좋지만 요즘엔 라이브 앨범을 만들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 터져나온 노래, 청중의 환호와 박수도 함께 담긴 노래가 더 생명력 있지 않나 싶거든요.” 슬픔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 노래라고 정의하는 그가 93 년도 겨울, 인사동 허름한 국밥집에서 벽에 휘 갈겨있는 낙서를 보고 노래를 만든 것이 [국밥집에서]이고, 그 다음해인 94 년도 봄날 잠실 아파트 근처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꽃 한켠에 홀로 피어 있는 찔레꽃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만든 노래가 [찔레꽃]이란다. 충남 광천땅 촌놈 장사익이 우리에게 메시지처럼 들려준 그의 노래 [하늘가는 길]은 상여소리를 재해석한 노랫말이다 이렇듯 그의 노래는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읽어내는 탁월한 우리의 정서이다.
2집 ‘기침’에는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폐암으로 1년 고생하다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기억이 절절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돌아 누워도 돌아 누워도 찾아 오는/환장할 기침’. 신배승 시인의 시는 곧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을 시, 영안실에서 서정주의 시에 붙인 ‘황혼길’이라는 노래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새우 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길을 언덕 넘어 딸네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 잠이나 들까.’ 당시 우리 어머니 심정을 그대로 그린 시 같았어요.” 아들을 장가보낼 때도 자신이 직접 축가를 불렀다. 친구나 친구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갔을 때도 ‘결례지만 내가 고인을 위해 해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면서 상가집에서 추모곡을 불렀다. 맺힌 슬픔을 노래로 풀기 위해.그는 화제의 1집을 두고 “젊은 기운에 들떠 마구 만든 것”이라며 “수록곡들에 일관성 없이 극과 극을 달렸던 것 같다”고 평했다.
2집은 그 자체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도 자의식이 충만했던 작품이다. 자신의 노래가 반주에 끌려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싹트기 시작한 데다 병상의 부친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상황이라 매달렸던 작품이다. 대중적 반응은 적었지만 그 자신으로선 가장 애착 가는 앨범이다. 1998년의 3집 ‘허허바다’에서는 초창기의 활력을 되찾는다. 최선배(트럼펫), 김광석(기타), 김은영(해금), 김규형(모듬북), 노름마치(사물놀이) 등 한다 하는 잽이들이 그를 받쳐 주었다. 당연히 즉흥이었다. 그렇게 나온 ‘동백 아가씨’에 사람들은 다시 뒤집어졌다. 나 ? 풍류꾼이유
서울방송[SBS]에서 사극 임꺽정을 방송 할 때에 주제곡을 장사익이 불렀다. 이 노래를 녹음할 때 유명한 국악인 박범훈 선생이 처음 보는 장사익을 보고 물었더란다. [뭐 하는 사람이오 ?] 하고. 노래하는 가수냐, 혹은 국악인이냐, 그도저도 아니면 판소리꾼이냐 하는 질문이었는데 사익이 가만있다가 대답 했단다. [나 풍류인이유] ~ 훗날 사석에서 풍류인은 얼어죽을 풍류, 백수지라고 혼자 중얼 거렸다나 ..특유의 말투만큼이나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컵에 물이 차면 따라내듯, 채워지면 늘 해왔어요.” 음악 스타일에 변화가 없다는 일부의 볼멘소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풀 오케스트라와도 폼 잡아 봤지만, 결국 남는 것은 자연과 인생을 어떤 식으로 진실하게 노래하는가의 문제”라는 답이다.
그는 2001년 남아프리카에서 열렸던 ‘세계 NGO 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순서 앞에 아프리카인 70여명이 나와 민속 음악과 현대 음악이 혼합된 노래를 부르며 함께 흐드러지게 노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더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길 수 없다. 부족한대로 보여주자’고 작심한 그는 사물놀이와 기타의 반주로 1시간 반 동안 놀았다. 그를 더 감동케 한 사건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났다.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에 즉석 화음으로 화답해 오는 것 아닌가. 한국적 정서 노래하는 휴머니스트 가장 한국적 정서를 노래하는 그는 사실 대단한 페미니스트다. 그의 공연과 음반 사업 등 음악 비즈니스를 총괄해 주는 기획사 행복을 뿌리는 판의 대표이자 아내 고완선, 사물놀이 주자 오성남(38)씨이다 열살 연하의 아내 고완선에게 ‘백년가약서’를 자필로 쓰고 대청 마루에 액자로 걸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했다.
‘하늘 고완선과/땅 장사익은/금후 100년 동안/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늘 행복함을 유지키로/서약을 씁니다’ 한마디 말이 꼬리처럼 붙어 있다. ‘단, 100년이 경과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 조건을 변경합니다’. . 인터뷰 중 안산 시립 국악 관현악단에서 가야금을 탄다는 며느리의 이름 등을 시시콜콜 챙기려는 기자 버릇이 나오면 그는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묻는 이를 머쓱하게 한다. “쪽팔려”. 광수(28ㆍ국립국악관현악단 대금), 영수(26ㆍ목원대 국악과 4학년) 등 두 아들을 소개하다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가야금을 탄다는 며느리의 이름을 묻는 질문을 받고도 예의 “쪽팔려”다. 잔뜩 긴장한 사람을 눙치는 재주에는 당할 자 없다. “이 차 좀 드세유. 좋은 차유.”
또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사익이 욕심 없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노래 부르는 걸 불편해한다. 단 한두 명이라도 진심으로 자기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신명난다. 그는 무대라는 공간 자체도 고집하지 않는다. 음악은 ‘생활음악’이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희로애락하는 인간살이 속에서 자신의 노래를 뿜어낸다. 그것이 어느 곳이든 어떤 때이든간에.
마흔여섯에 데뷔한 늦깎이 가수
울음일 수도 웃음일 수도 있는 장사익의 노래에서 노랫말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시(詩)에 곡 붙이기 좋아하는 그는 ‘수석 찾듯이’ 시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어느 식당에 갔더니 마음에 닿는 시 한 수가 벽에 붙어 있었어요. 못잊겠어서 다음날 다시 갔더니 쓰레기통에 버렸대요. 쓰레기통을 뒤져서 건진 노래가 ‘국밥집에서’예요.” ‘여행’ 역시 평소 친하게 지내는 화가 남유소씨의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본 서정춘의 시(詩)로 만든 노래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나와 꼭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시를 훔쳐 거기 높낮이와 강약만 줘서 읊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시인이 쓴 시가 노랫말이기에 그 뜻이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에 쉽게 와닿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대중가요 노랫말도 좀 어려워야 한다고 얘기한다. “금방 가슴에 와닿는 노랫말은 또 금방 잊혀지기 쉬워요. ‘쿵짜자작작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잊고’ 같은 건 듣자마자 팍팍 들어오죠. 내 노래의 가사는 대번에 받아들이긴 힘들죠. 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이 제대로 나요.” 94년에 데뷔한 장사익은 ‘매미 같이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서, 산다는 일도 사는 의미도 모두 소멸될 것만 같아서’ 마흔여섯 늦깍이로 가수가 됐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평범한 생활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태평소를 불었고 유난히 큰 목청으로 노래도 썩 잘했던 그는, 문화선전대에서 복무한 군대 시절을 마감하면서 가수의 길을 택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꿈을 접고 직장 생활을 비롯해 독서실, 카센터 등 안해본 일 없이 전전했던 그는 쉰을 앞두고서야 운명처럼 노래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내 고향 충남 광양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들었던 상여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음력 3월이라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날렸어요. 그때 아버지가 그러데요. 나도 니 할아버지처럼 죽고 싶다고. 내가 왜? 하고 물으니까 꽃상여 타고 싶어서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일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날 처음 들었던 상여 소리가 날 노래하게 만든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요.”
소리꾼 장사익에게 노래는 이토록 오래 앓은 병이다. 그는 그 병 때문에 오랜 시간 방황했고 그 병 때문에 뒤늦게야 자기 인생을 찾은 셈이다. 무대위에서 죽겠다는 그의 나이 50 중반이 되었다. 데뷔(?)한지 10(?)년, 그 짧은 세월에 어느새 대중문화의 한 축을 지탱해주는 그에게 건투를 빌어본다. 그가 있기에 [문화의 힘]이 더욱 내공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은 새것을 찾지만 귀는 옛것을 찾는다 하였는가 ? !..(발췌)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불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도 설움은 불려 애닳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에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가객 장사익에 대하여
성악가는 머리와 가슴의 공명을 통해 노래하고, 판소리 명창들은 단전의 들숨과 날숨을 통해 소리를 토해낸다. 그렇다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어느 부류로도 묶어낼 수 없는 ‘딴따라’ 소리꾼 장사익(55)의 노래는 어디로부터 퍼올려지는 것일까. 댄스도 록도 포크도 트로트도 아닌, 오직 ‘장사익 노래’라고 밖에 명명할 수 없는 그것들은 그의 정수리와 발바닥까지를 요동치다가 나오는 소리다. 요동의 와중에서 장식은 버려지고, 정직한 감정만을 걸러내 곧고 탁한 음색을 소름끼치게 뱉어낸다.
북한산 자락에서 인왕산을 마주 보는 상명대학 옆 홍지동에 새로 지은 그의 집. 2층 창문으로 구름 걸린 인왕산이 떡하니 보이는 집에서, 그는 뽕잎차를 손수 끓여 내왔다. 작년 추석 뒷날 구경이나 하자고 아내와 함께 이 동네를 찾았다가, 경치에 반해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고. 돈 한 푼 없이 빚으로 지은 집이지만 잠깐쯤 이런 데서 호강하며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며 수줍어한다. 집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면서.
거실의 창을 가득 메운 산은 인왕산. 널찍한 창틀속에 투영되는 바위산은 바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의 모델이 됐던 풍경이다. 정갈하게 갈무리 돼 있는 그의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 그냥 놓여 있지 않다.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의 공간에 놓여 있는 30여점의 흙뭉치도 사람의 시선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하나 하나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데뷔 무대 소문을 듣고 담양에서 순수 자연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토우도 빚는 송일근씨가 인사동에서 치른 전시회 ‘3학년 5반’에 나왔던 작품들이다.
마당에는 징, 풍경, 윈드 차임 등이 장승과 함께 즐비하게 도열해 쉬지 않고 바람의 노래를 들려준다. 뙤약볕이 기분 좋게 드는 1층 창문 옆에는 갖가지 동양란들이 소담스럽게 가꿔져 있다. 음악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인생 눈을 등짝에 인 채 한겨울을 나고 있는 북한산은 보기만 해도 시리다. 햇볕이 기분 좋게 쬐는 거실에서 그가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수상에 빛나는 태평소를 집어든다.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면서 뽑혀 올라오는 태평소 가락이 높푸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삽입된 덕분에 부쩍 친숙해진 ‘능게’ 가락이다. 그의 헌걸찬 목청을 닮아 귀가 쩌렁쩌렁 울린다. 만원 버스 속에도 핸드폰으로 귀엣말을 나누는 화에 배인 서울 사람들에게 “했시유”, “했쥬”라며 서슴잖고 내지르는 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풍성한 메타포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곡조에 그의 쉰 목소리는 오랫동안 잊었던 무엇을 찾게 한 듯 환상에 젖게 한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대중음악이 뭐 그리 감동적이겠냐고 ? 천만에 말씀이다.
친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장사익은 세속의 영달로부터 초연한 가객의 혼을 담고 있다. 그런 그의 노래를 듣고 나면 머리끝 한쪽이 시려오거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신선한 삶의 체험이 노래에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그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세속의 영달로부터 초연한 봉건시대 가객의 혼이 깃들여 있다. 하나 하나의 음과 낱말을 포착하는 기백은 어떤 탁월한 록 보컬리스트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며 여음과 여음 사이를 절묘하게 떠다니는 표현력은 어떤 절세의 재즈 보컬도 무력하게 한다. 그의 탁음은 민중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결코 귀족의 음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그의 노래를 한 번만 들어도 금새 알아 차릴 수 있다. 대중음악으로 그 만큼 폭 넓은 음색과 영역을 갖는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대개 그러한 가수의 노래는 [기법]이 아닌 [생활]이기에 생명력도 긴 편이다. 등등....그의 음악이 카리스마적인 것은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장타령을 부르든 혹은 귀에 익은 대전불루스를 부르든 장르에 상관없이 감동적인 이유는 노래의 전달이 가장 한국적이라는데 그의 카리스마가 있다. 들려주는 노래와 혼자 즐기는 노래의 차이라 할까? 듣고 나면 다들 미치겠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가 한국적(?)으로 노래하는 소리꾼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서울과의 첫 대면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1994년 11월 5일 홍대앞 ‘예’ 소극장의 작은 무대였다. 100명 정원의 무대에 이틀 동안 몰려 든 관객이 800여명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무대에 피아노(임동창), 꽹과리(이광수), 모듬북(김규영)이 자리 잡으니 문자 그대로 미어터졌다. 당시 구경 와 있던 음반사 직원의 요청으로 한달 뒤 만들어졌던 음반이 그의 데뷔 앨범이자 출세작 ‘하늘 가는 길’이다. 무대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라이브 무대를 먼저 가진 뒤 취입을 한다는 그 특유의 음반 제작 원칙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것도 재녹음과 편집 등 상식화돼 버린 과정들을 일체 생략하고 맨 첫 녹음(first take)으로 음반을 만든다. 장사익은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앨범이 아닌 공연장에서 자신의 신곡을 먼저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노래를 만드는 원초적인 작법은 ‘엮음’이었어요. 처음부터 곡 하나를 다 완성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불러보면서 서서히 곡 하나를 엮어가는 거죠. 제 노래도 처음엔 즉흥적인 흥얼거림에서 시작합니다. 그 후 수 차례 공연을 거치면서 하나의 노래로 완성됩니다. ”
그래서인지 그가 만든 노래엔 악보가 없다. 음표라는 건 음악을 옮기려고 도입한 기술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음악을 기록하는 행위는 음표 그리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음악 레코딩에 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해도 좋지만 요즘엔 라이브 앨범을 만들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 터져나온 노래, 청중의 환호와 박수도 함께 담긴 노래가 더 생명력 있지 않나 싶거든요.” 슬픔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 노래라고 정의하는 그가 93 년도 겨울, 인사동 허름한 국밥집에서 벽에 휘 갈겨있는 낙서를 보고 노래를 만든 것이 [국밥집에서]이고, 그 다음해인 94 년도 봄날 잠실 아파트 근처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꽃 한켠에 홀로 피어 있는 찔레꽃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만든 노래가 [찔레꽃]이란다. 충남 광천땅 촌놈 장사익이 우리에게 메시지처럼 들려준 그의 노래 [하늘가는 길]은 상여소리를 재해석한 노랫말이다 이렇듯 그의 노래는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읽어내는 탁월한 우리의 정서이다.
2집 ‘기침’에는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폐암으로 1년 고생하다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기억이 절절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돌아 누워도 돌아 누워도 찾아 오는/환장할 기침’. 신배승 시인의 시는 곧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을 시, 영안실에서 서정주의 시에 붙인 ‘황혼길’이라는 노래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새우 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길을 언덕 넘어 딸네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 잠이나 들까.’ 당시 우리 어머니 심정을 그대로 그린 시 같았어요.” 아들을 장가보낼 때도 자신이 직접 축가를 불렀다. 친구나 친구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갔을 때도 ‘결례지만 내가 고인을 위해 해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면서 상가집에서 추모곡을 불렀다. 맺힌 슬픔을 노래로 풀기 위해.그는 화제의 1집을 두고 “젊은 기운에 들떠 마구 만든 것”이라며 “수록곡들에 일관성 없이 극과 극을 달렸던 것 같다”고 평했다.
2집은 그 자체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도 자의식이 충만했던 작품이다. 자신의 노래가 반주에 끌려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싹트기 시작한 데다 병상의 부친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상황이라 매달렸던 작품이다. 대중적 반응은 적었지만 그 자신으로선 가장 애착 가는 앨범이다. 1998년의 3집 ‘허허바다’에서는 초창기의 활력을 되찾는다. 최선배(트럼펫), 김광석(기타), 김은영(해금), 김규형(모듬북), 노름마치(사물놀이) 등 한다 하는 잽이들이 그를 받쳐 주었다. 당연히 즉흥이었다. 그렇게 나온 ‘동백 아가씨’에 사람들은 다시 뒤집어졌다. 나 ? 풍류꾼이유
서울방송[SBS]에서 사극 임꺽정을 방송 할 때에 주제곡을 장사익이 불렀다. 이 노래를 녹음할 때 유명한 국악인 박범훈 선생이 처음 보는 장사익을 보고 물었더란다. [뭐 하는 사람이오 ?] 하고. 노래하는 가수냐, 혹은 국악인이냐, 그도저도 아니면 판소리꾼이냐 하는 질문이었는데 사익이 가만있다가 대답 했단다. [나 풍류인이유] ~ 훗날 사석에서 풍류인은 얼어죽을 풍류, 백수지라고 혼자 중얼 거렸다나 ..특유의 말투만큼이나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컵에 물이 차면 따라내듯, 채워지면 늘 해왔어요.” 음악 스타일에 변화가 없다는 일부의 볼멘소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풀 오케스트라와도 폼 잡아 봤지만, 결국 남는 것은 자연과 인생을 어떤 식으로 진실하게 노래하는가의 문제”라는 답이다.
그는 2001년 남아프리카에서 열렸던 ‘세계 NGO 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순서 앞에 아프리카인 70여명이 나와 민속 음악과 현대 음악이 혼합된 노래를 부르며 함께 흐드러지게 노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더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길 수 없다. 부족한대로 보여주자’고 작심한 그는 사물놀이와 기타의 반주로 1시간 반 동안 놀았다. 그를 더 감동케 한 사건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났다.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에 즉석 화음으로 화답해 오는 것 아닌가. 한국적 정서 노래하는 휴머니스트 가장 한국적 정서를 노래하는 그는 사실 대단한 페미니스트다. 그의 공연과 음반 사업 등 음악 비즈니스를 총괄해 주는 기획사 행복을 뿌리는 판의 대표이자 아내 고완선, 사물놀이 주자 오성남(38)씨이다 열살 연하의 아내 고완선에게 ‘백년가약서’를 자필로 쓰고 대청 마루에 액자로 걸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했다.
‘하늘 고완선과/땅 장사익은/금후 100년 동안/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늘 행복함을 유지키로/서약을 씁니다’ 한마디 말이 꼬리처럼 붙어 있다. ‘단, 100년이 경과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 조건을 변경합니다’. . 인터뷰 중 안산 시립 국악 관현악단에서 가야금을 탄다는 며느리의 이름 등을 시시콜콜 챙기려는 기자 버릇이 나오면 그는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묻는 이를 머쓱하게 한다. “쪽팔려”. 광수(28ㆍ국립국악관현악단 대금), 영수(26ㆍ목원대 국악과 4학년) 등 두 아들을 소개하다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가야금을 탄다는 며느리의 이름을 묻는 질문을 받고도 예의 “쪽팔려”다. 잔뜩 긴장한 사람을 눙치는 재주에는 당할 자 없다. “이 차 좀 드세유. 좋은 차유.”
또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사익이 욕심 없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노래 부르는 걸 불편해한다. 단 한두 명이라도 진심으로 자기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신명난다. 그는 무대라는 공간 자체도 고집하지 않는다. 음악은 ‘생활음악’이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희로애락하는 인간살이 속에서 자신의 노래를 뿜어낸다. 그것이 어느 곳이든 어떤 때이든간에.
마흔여섯에 데뷔한 늦깎이 가수
울음일 수도 웃음일 수도 있는 장사익의 노래에서 노랫말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시(詩)에 곡 붙이기 좋아하는 그는 ‘수석 찾듯이’ 시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어느 식당에 갔더니 마음에 닿는 시 한 수가 벽에 붙어 있었어요. 못잊겠어서 다음날 다시 갔더니 쓰레기통에 버렸대요. 쓰레기통을 뒤져서 건진 노래가 ‘국밥집에서’예요.” ‘여행’ 역시 평소 친하게 지내는 화가 남유소씨의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본 서정춘의 시(詩)로 만든 노래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나와 꼭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시를 훔쳐 거기 높낮이와 강약만 줘서 읊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시인이 쓴 시가 노랫말이기에 그 뜻이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에 쉽게 와닿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대중가요 노랫말도 좀 어려워야 한다고 얘기한다. “금방 가슴에 와닿는 노랫말은 또 금방 잊혀지기 쉬워요. ‘쿵짜자작작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잊고’ 같은 건 듣자마자 팍팍 들어오죠. 내 노래의 가사는 대번에 받아들이긴 힘들죠. 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이 제대로 나요.” 94년에 데뷔한 장사익은 ‘매미 같이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서, 산다는 일도 사는 의미도 모두 소멸될 것만 같아서’ 마흔여섯 늦깍이로 가수가 됐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평범한 생활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태평소를 불었고 유난히 큰 목청으로 노래도 썩 잘했던 그는, 문화선전대에서 복무한 군대 시절을 마감하면서 가수의 길을 택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꿈을 접고 직장 생활을 비롯해 독서실, 카센터 등 안해본 일 없이 전전했던 그는 쉰을 앞두고서야 운명처럼 노래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내 고향 충남 광양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들었던 상여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음력 3월이라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날렸어요. 그때 아버지가 그러데요. 나도 니 할아버지처럼 죽고 싶다고. 내가 왜? 하고 물으니까 꽃상여 타고 싶어서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일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날 처음 들었던 상여 소리가 날 노래하게 만든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요.”
소리꾼 장사익에게 노래는 이토록 오래 앓은 병이다. 그는 그 병 때문에 오랜 시간 방황했고 그 병 때문에 뒤늦게야 자기 인생을 찾은 셈이다. 무대위에서 죽겠다는 그의 나이 50 중반이 되었다. 데뷔(?)한지 10(?)년, 그 짧은 세월에 어느새 대중문화의 한 축을 지탱해주는 그에게 건투를 빌어본다. 그가 있기에 [문화의 힘]이 더욱 내공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은 새것을 찾지만 귀는 옛것을 찾는다 하였는가 ? !..(발췌)
첫댓글 역시 장사익선생의 노래는 가슴 벅차다


진짜...장사익 노랠 들으면 가슴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그 무언가를 느끼게 되는 게..눈물이 다 나오더라..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