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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내향성의 해결책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1-5).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 속에는 구원의 계획이 놀랍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한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하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 밖의 세상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한 가지 메시지는 구원의 방식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교회 자체가 필요로 하는 중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을 믿고 나서도 자주 소위 '천박하고 비참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어려운 문제들과 당황스러운 일들이 많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별다른 행복과 기쁨도 없는 삶, 말하자면 연속적인 갈등의 삶,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히려 패배를 피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는 큰 이유는 그들이 성경에 펼쳐져 있는 이 위대한 구원 계획에 대한 진리를 보고 깨닫는 일을 이런 저런 이유로 중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보통 그리스도인에게 늘 따라다니는 시험과 범죄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그릇된 방식으로 쳐다보는 경향성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확증하라는 권면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르게 우리 자신을 검토, 확증하는 것과 내성적이 되어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늘 당신 자신만을 바라보고, 당신 자신의 마음에만 빠져 있고, 당신 자신에 대해서만 주로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제가 제안하는데, 그 내향성을 해결하는 방법은 성경에 펼쳐져 있는 모습 그대로의 구원의 계획을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기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 속에 그것이 분명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또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이 계획의 여러 부분들과 전체를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심에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팎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다거나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장 교활한 방법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궁극적인 답변을 줄 수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런 식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대해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좋다. 당신 마음대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복음으로 인해 이런 저런 유익을 얻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모든 비판에 면역이 잘 되어 있다." 물론 저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식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매우 난처한 위치에 빠뜨릴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신앙을 비판하는 공격들에 대하여 전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느낌이나 현재의 모습에만 기초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수많은 공격들, 특히 심리학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들에 대해서 말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이 매우 똑똑하고 미묘한 자기 설득의 한가지 형식이라고 주장합니다. 개인의 문제들을 어떤 다른 차원으로 올려 떠넘겨 버리는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훌륭한 심리학이다. 그리고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써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모든 위대한 용어들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순전히 심리학적 이론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전혀 옳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이른바 크리스천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 같은 거짓된 교훈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체험에만 근거하여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확신을 줄 수 없습니다. 멋진 심리학적 논증에 대하여 우리가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실로 이 시점에서 제가 무슨 느낌을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또는 설사 제가 어둠과 흑암 속에 빠져서 완전히 용기를 상실한 입장에 있다고 할지라도 제 외부에서 전개된 역사 속에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었던 어떤 일로 인해 제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입장을 느낌에 기초하지 않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느낌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느낌은 왔다가 가 버립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을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런 체험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평안과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느낌이 듭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단히 놀라운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기도할 때도 참 자유롭게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 날에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왠지 풀이 죽은 느낌입니다. 생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의 주장의 근거를 여러분의 체험이나 감정에 두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매우 불행한 삶이 되고 말 것이며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참으로 연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 드립니다만 해답은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 이런 축복을 누리기 원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으로 영위하고 싶으시다면, 구원과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사실들에 의지하면서, 다음의 찬송가 가사를 여러분의 고백으로 삼으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주예수뿐일세
우리 주예수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에드워드 모에트(Edward Moet)
우리는 여기에 펼쳐져 있는 구원의 계획과 체계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바로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공부해 왔습니다. 우리는 구원 계획의 위대한 목적과 의도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전반적인 구원 개념에 큰 오류가 있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차원에서나 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차원에서만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우선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 크게 부적절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어쩌면 거짓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움입니다. 우리의 최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계획을 여러 부분에서 살펴보면서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세우신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회의에서 그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업의 역할이 어떻게 분담되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자께서 그 구원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성자께서 그 과업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성자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친히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영광이 궁극적으로 나타난 때는 오순절에 초기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께서 그곳에 강림하시던 때입니다. 이 사실이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버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며, 특히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 즉 구원자의 역사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신 오순절 날에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가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한 곳에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 곳에선 성부께서 성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성부와·성자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에 결국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 사실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에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런 다음에 기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 이란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은 모두 성령이 강림하실 것이라는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14장에서 이 사실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제 곧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낙심천만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 17). 이 말씀에 이어 예수님은 성령강림에 대하여 자세하게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요한복음 17:1에서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것처럼, 성령의 강림이 이 위대하고 극히 중요한 구원 계획의 일부로써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모든 것보다 가장 놀라운 측면에 속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게 되었듯이, 영원한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논의하시는 가운데 인간 구원의 계획을 함께 세우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구원의 위대한 체계를 다시 말씀하셨고, 성자께서는 그 계획을 몸소 이행해야 한다는 결정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께서 성자의 행하신일을 완성해야 한다는 결정이 동일하게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삼위일체의 경륜'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 역할을 분담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창세기에 묘사된 태초의 창조 사역 자체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인 것을 발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에 뒤이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이나옵니다.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 창조 행위를 시행하는 이는 여전히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살펴보고 싶은 점은 이 사실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아버지께서 성자를 보내십니다. 성자의 위대한 임무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버려 두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의 궁전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영광과 권능이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게 하기 위하여 영위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후 지상 교회에 성령을 내려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의 임무와 사역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진술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보지 못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자가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6:14에 묘사된 성령님에 대해서 읽을 때 다른 곳에서 성자에 대해서 읽는 것과 똑같은 내용을 발견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이는 성자께서 성부에 대해서 하신 말과 똑같은 내용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중대한 사상은 성령의 주요 역사가 다름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인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하신 위대한 약속 속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발견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령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 38). 요한은 이것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명하신일을 완수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때까지는 성령께서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하노라. 너는 그 약속을 백성들에게 보내라.”
이 사실은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 사실을 좀더 객관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설명도 중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진위를 시험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은 과연 그가 삶과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너무 크게 강조하다가 성자 예수님을 무시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매우 좋아하며 자기들이 이런 저런 은사를 받은 것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당신은 방언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치유의 은사를 받으셨나요?" 등인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은사들을 내려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지 않거나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있다면,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세력은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탁월한 은사를 줄 수도 있습니다. 사탄도 성령의 은사와 거의 비슷한 모조품 은사를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치유의 능력을 지닌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강력한 현상들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성령의 은사인지 아닌지를 알아 보는 궁극적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육체로 임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는가? 그가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특별한 기준으로 삼아 모든 영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까? 제가 볼 때 이것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이를 세 가지 주요 제목으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을 드러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서신에서 영광의 주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7,8).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없애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도록 사람들을 교사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철학자들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그와 같은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탁월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황하신 적이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그저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요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불행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의 지성적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장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도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결코 알거나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라야 분변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으며 그들의 총명이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불신앙은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입증해 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이것은 단순한 지성적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이 단순히 지적 능력이나 재능의 문제라면 구원의 방식은 결코 공평한 것이 못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다른 보통 머리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유리할 것이고, 머리가 나쁜 사람들은 그 진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머리가 나쁘거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구원이란 소수의 머리 좋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 모두 똑같은 수준에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거나 파악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크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가장 무식한 사람이나 가장 비지성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교육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 큰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그리스도의 인성(the Person of Christ)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그 어떤 사람에게라도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 주실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밝혀 주실 뿐 아니라 그분의 사역을 밝혀주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침돌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3). 저 소위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특별히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초대 교회 제자들의 설교는 주로 나사렛 예수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강력하게 설득시키는 설교가 주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단순히 바리새인들의 사주를 받은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없는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일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루어진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철학자들은 이것을 어불성설(語不說)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전 2:12).
저는 여기에서 단순하고 평범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속죄의 문제를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나무에 매달려 다름아닌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이해하십니까? 그 일이 여러분에게 진실로 인식되고 있습니까? 그 일이 여러분에게 깊은 의미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일 때문에 여러분이 걸려 넘어집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성령의 조명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진리를 밝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펼쳐 보여 주심으로써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오순절 날 베드로가 한 설교의 내용을 읽어 본다면 베드로가 하고 있던 일이 바로 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밝혀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의 가르침도 밝혀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2, 13).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령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해 준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한 이야기들을 너희들이 밝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 성령님을 충만히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곧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있어서 아주 해로운 방법은 여러분의 본성적인 두뇌를 가지고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다시 고린도전서 2장을 읽어 보시고 이런 것들이 다른 영역에 속해 있
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 속해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가 잘 이해되지 않아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런 문제를 논하고 있는 철학 책을 읽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거나 본성적인 지능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적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영역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 유일한 소망은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 주셔서 우리의 눈에 영적인 안약을 발라 주셔서 그 복되신 진리를 향하여 우리의 눈이 뜨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밝히 드러내 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기도 합니다. "나는 죄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내가 죄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인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깨우침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밟았던 가장 선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악성에 대해서 가장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영적으로 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미워하게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데도 아직 성령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그 일을 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줍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강력히 증거하십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당치 못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려고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있는 어느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거나 그 구원의 감격이 부족하다면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촉구하고 싶습니다. 성령 충만의 은사를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이 축복된 확신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이 그것을 얻기까지 하나님을 편히 쉬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조치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시며 그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순전하고 진지하게 구한다면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몇 개월 동안, 아니 수년 동안 계속해서 기도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은 어쩌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왔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이 증언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십시오. 성령님은 그런 일을 하시라고 보내심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맺어 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각 능력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한 연합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셨듯이,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이 축복된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완전케 하십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리고 나서 성령님은 계속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23).
이런 일들이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입니다. 그 일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인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리려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전적으로 상상에 불과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도무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초상화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그림들은 인간 본성적인 마음의 노력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원한다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속사람 속에 그려 주실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것을 느끼게 하고 그리스도가 존재하심을 확신케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께 간구하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면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며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형상화됩니다.
실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처소를 마련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이런 뜻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떠나고자 한다. 그런데 너희가 불행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러나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 줄 것이다. 그가 너희와 언제나 함께 하셔서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는 너희 안에 계실 것이고 너희는 그와 함께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인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능력을 주셔서 주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일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1세기의 무식하고 평범한 몇 몇 어부들이 어떻게 그 고대 세계를 뒤집어 놓았는지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 의심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해답만이 있습니다. 즉 성령님이 강하신 권능으로 오순절에 그들에게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따지거나 논증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들이 웅변과 설득력을 가지고 달려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강한 권능이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하는 가운데, 자기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헬라 철학자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일부러 피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2, 4-5).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이 권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성령님은 이 권능을 초대교회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에 무수한 무명의 신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평소에 미련한 것 같은 사람들을 능력으로 변화시키셔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존 번연은 그의 저서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평생에 얻었던 가장 큰 축복과 도움은 어느날 오후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함께 모여 뜨개질을 하고 있던 무식한 여자 세 사람의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집에서 밖으로 나와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보다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권능을 가장 미련하고 비천한 신자에게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게 하실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어떤 변화들을 일으키셨는지를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런 방법으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계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을 가슴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전도자이든지 어떤 존재이든지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의 일과 휴식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니는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오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저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무슨 일을 해 놓으셨는지를 우리가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들임을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장차우리에게 올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