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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중국에는 황하와 양쯔강, 두 개의 큰 강이 있는데, 문명이 처음 싹튼 곳은 북쪽의 황하 유역(화북 지방)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황하 유역의 기름진 황토 지대에는 한족(漢族:중국민족)의 조상들이 나타나 조·수수 따위를 재배하면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한 그들은 개·돼지 같은 가축을 길렀으며, 나무와 돌로 만든 연모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칠고 투박한 회도(회색토기)와 함께 아름다운 채도(채색토기)도 만들어 썼다. 회도는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토기로, 그 중에는 다리가 3개 달린 '삼족토기'도 있다.
기원전 2000년경에 이르자, 황하 하류 지방을 중심으로 큰 마을이 여러 곳에 생겨났다. 이들 마을은 차츰 읍이라 불리는 도시 국가로 발전해 갔다. '읍'은 토성(土城)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나라(國)라는 한자의 □은 토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발전과 함께 토기 제작기술도 늘어, 얇으면서 광택이 나는 흑도(흑색 토기)를 만들어 썼다.
중국 문명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皇帝)는 오제 가운데 첫 번째 황제(皇帝)이다. 황제는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렸다. 황제가 죽은 뒤에는 요임금이 천자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다가 순임금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백성들을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으며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후세 임금들의 모범이 되었다. 순임금도 천자의 자리를 우(禹)에게 물려주었으며 우의 아들 계 때에 세습왕조(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음) 체제로 바뀌면서 하왕조가 이어졌다. 하왕조는 17대에 걸왕에 이르러 멸망하였다. 걸왕은 악명 높은 폭군으로 유명했다. 걸왕은 '매희'라는 미녀에게 빠져 술의 연못과 고기의 숲인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매일 잔치와 놀이에 정신이 팔려 정치는 엉망이었다. 충신들이 옳은 말을 하면 목을 베었다. 은의 탕왕은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죽이고 은나라를 세웠다. 하나라는 4백여 년 이어오다가 멸망했다. 하왕조가 실제 존재했던 나라인지 아닌지에 대한 연구가 그 당시의 유물을 통하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은나라
황하유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도시국가(읍)는 얼마후 하나의 왕조에 통합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중국 최초의 왕조는 은(殷)왕조다. 은왕조도 처음에는 도시 국가의 하나였으나, 청동기의 사용 등으로 점차 세력이 커져 기원전 1500년경에는 황하의 중류와 하류 지역을 지배하는 커다란 나라가 되었다.
은나라 도읍지였던 은허에서는 제기(祭器)·무기 등의 청동기와 함께 문자가 새겨진 귀갑(거북의 등껍데기)과 수골(짐승의 뼈)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것은 은나라 왕들이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신(神)의 뜻을 묻는 점을 치는 데 쓴 것이었다. 곧 귀갑이나 수골 안쪽에 작은 구멍을 파고 불에 태우면 겉에 금이 생기는데, 이 금의 생김새를 보고 일의 성패나 길흉을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새겨진 문자는 점괘의 내용을 적은 것이며, 갑골문자(귀갑·수골에 새겨진 문자라는 뜻)라고 한다. 이 갑골 문자가 발달하여 오늘날의 한자가 되었다.
은나라 왕들은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여 제사 의식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점을 쳐서, 곧 신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실시하였다. 왕이 죽으면 거대한 지하묘를 만들어 장사 지냈으며, 그도 조상신의 대열에 끼었다. 은나라에는 순장의 풍습이 있어서 산 사람이나 가축을 왕의 시체와 함께 묻었는데, 많을 때에는 순장자가 1,000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은나라 왕들의 권력이 강대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이미 달력도 만들어 농사에 이용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여전히 석기나 목기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왕이나 귀족·관리들에게 많은 공물(진상품)을 바쳐야 했다.
□ 주나라
은왕조의 뒤를 이어 주(周)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였다. 황하의 상류 지역인 위수 분지에서 일어난 주나라도 처음에는 은 왕조를 받드는 도시 국가의 하나였다. 주나라는 차차 세력이 커져 문왕 때에 이르러서는 서방 여러 왕후(王侯)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 기원전 1100년경 주의 무왕(武王)은 마침내 은 왕조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시안부근인 호경에다 도읍을 정하였다.
주 왕조는 정복한 땅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곧 왕족과 공신들을 제후로 삼아 그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대대로 그 땅을 다스리게 하는 제도다. 한편 제후들도 자기의 영지를 일족이나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주나라의 봉건 제도는 핏줄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왕은 수도 부근만 직접 통치하고, 각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제후들에게는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지웠다. 공납이란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고, 군역이란 군사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왕과 제후 밑에는 경·대부·사로 불리는 귀족들이 있었으며, 이들이 지배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들 지배층 사이에 핏줄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종족(씨족)을 형성하고, 조상의 제사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풍습이 생겨 널리 퍼졌다. 이를 종법제도라 하는데, 혈연적인 봉건제도를 밑에서 받쳐 주는 구실을 하였다.
또 주나라에서는 장자 상속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동성 불혼의 법도 만들었다. 씨족의 질서와 단결을 유지하기 위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법속은 뒷날 중국 가족 제도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농민들은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사(社)를 중심으로 씨족적인 촌락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였다. 은나라 때보다 청동기 문화가 한층 발달했지만, 일반 농민들은 여전히 석기·목기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 춘추전국시대
주 왕조는 기원전 8세기경부터 차츰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제후들의 세력 확대로 봉건 제도가 흔들리고, 이를 지탱하던 종법제도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770년에는 서쪽으로부터 사나운 유목민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호경에서 동쪽 낙읍(지금의 뤄양)으로 옮겼는데, 그 이전을 서주(西周), 그 이후를 동주(東周)로 구별하여 부른다. 그리고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년)와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로 구분된다.
춘추 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천자로서의 위력이 없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된다.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수가 마침내는 10여 개국으로 압축되었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라 하는데 이 오패는 제의 환공, 진의 문공, 초의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라는 설과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대신 송의 양공과 진의 목공이라는 설이 있다.
첫 번째 패자 제의 환공은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으로 패자가 되어 B.C. 651년 규구에서 제후들을 모아 희맹하였다. 진의 문공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성복의 대전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초나라 성왕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천토에서 희맹하였다. 초의 장왕은 필의 전투에서 진을 물리치고 패자로서 인정받았다. 그후 천하의 형세는 진과 초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이 서로 견제하는 4강의 시대로 접어든다. B.C. 546년 송나라 수도에서 '미병회담'이 열려 일종의 정전협상이 체결되면서 중원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이때 장강 남쪽에서 오나라, 월나라가 일어났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 손무 등의 계책을 써 중원의 초나라, 진나라, 제나라를 위압하고 월나라를 제압하였다. 월왕 구천도 범려의 계책을 써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와 와신상담의 복수전을 흥미롭게 펼친다.
B.C. 453년 강력했던 진나라가 한·위·조 세나라로 분리되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춘추 시대에는 패자들이 힘이 약한 주나라 왕실을 존중한다는 관념이 있었으나, 전국 시대에는 이러한 관념이 없어지고 오로지 힘과 힘이 대결하는 약육강식의 양상이 펼쳐진다. 전국 7웅은 위의 세 나라 외에 진·초·연·제의 7국이다. 이 가운데 초기에 패자의 자리를 다툰 것은 위·제·진 세 나라였다. 제나라는 유명한 병법가 손빈의 계책을 써 위나라 장수 방연을 마릉의 싸움에서 패사시키고, 진의 효공은 법가인 공손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일대 정치개혁을 실시하여 천하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져갔다.
부국강병의 추구와 권모 술수가 소용돌이치며 명군과 명신들, 명장과 맹장들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근 2백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나라의 힘은 점점 쇠약해져 차례차례 진나라에 멸망해 버리고 B.C. 221년 제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대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제자백가 >
인류의 정신사를 더듬어 볼 때, 인류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이 최초, 최고로 고양되었던 시기는 아마도 기원전 6∼5세기, 각 국이 고대제국으로 나아가는 대변혁기를 꼽아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등 동서양의 위대한 철인들은 모두 이 시기에 활약했다. 이 시기에 인류는 비로소 자연으로부터 독립, 자아를 확립해나갈 수 있었다. 생산력의 비약적 발달은 분업을 촉진, 생산에서 자유로워진 전문적 지식인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때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우리가 산업화 이후 전통적 가치가 무너지고 혼란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수립에 골몰했던 것처럼, 당시의 중국도 제2의 농업 혁명 이래, 씨족 공동체적 질서에 기반한 주의 봉건제도와 예교문화가 이미 중심적 위치를 상실한 상태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위해 치열한 탐색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저마다 통일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각 국 군주의 경쟁은 사상의 발달은 더욱 촉진, 그 결과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열었다.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사상의 황금시대, 이름하여 '제자백가' 시대로 부르는데, '자'는 교사를 존대하여 부르는 명칭이고, '가'는 직접적으로는 저술가, 확대해서 사상의 한 흐름을 이룬 학파를 일컫는다. 춘추 말기에 최초의 교사로 등장한 공자는 주대의 봉건적 질서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던 반면, 전국 초기의 묵자는 반전론을 주장하면서 만인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혁신적인 철학을 개창했다. 한편 허무주의자요 문명비판론자인 노자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가 순리에 맡기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각기 뛰어난 제자들에게 이어져 후대에 계승, 중국 사상의 원천이 되었으나, 실제로 중앙 집권적 통일국가를 지향하던 당시의 군주들에게 채택, 구현되었던 사상은 역시 법가의 사상이었다.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이름은 공구. 그의 신분은 명확치 않으나, 아마도 귀족 중에 다소 낮은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주왕실의 전통이 강했던 노나라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제사용기를 갖고 놀았다고 하는데,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했다. 그는 세상의 어지러움은 전통의 예문화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 그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았던 주공과 같은 성인 군주가 출현, 이 난세를 수습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는 실제로 어진 정치를 펼칠 군주를 찾아 14년간 전국을 주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서 후세를 교육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유교의 경전이 된 <오경>은, 말하자면 그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교과서를 기초로 뒷날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제자는 모두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학업을 익힌 후 관리로 등용되기를 바라는 평민들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과 '예'. 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예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이러한 덕목이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는 첫 번째 장이다. 그는 이 가족애를 보다 큰 사회단위로 차츰 확산, 어진 정치를 펼 것을 주장했지만, 이러한 가족중심의 설명방식은 그의 사상의 가장 커다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가족으로부터 최초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애착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족으로부터 출발하는 공자의 구체적 접근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가까운 것에 치우치는 것을 당연시했으니 평등한 사랑은 아니었다. 아울러 보수적인 그의 사상은 신분제의 철폐로 나아가지 않았다.
공자의 '인'은 전국 중기의 맹자에 의해, '예'는 전국 말기의 순자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맹자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왕도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순자는 성악설에 의거, 환경과 후천적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니 법의 중요성도 크게 부각되었다. 한비자와 이사는 순자의 제자였다.
묵자의 이름은 묵적. 그 역시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는 낮은 신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초기에 공자의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공자의 인이 차별적인 사랑임을 깨닫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겸애설'로 일컬어지는데, 겸애란 다른 사람의 신체, 가족, 국가를 자기의 것과 똑같이 여기는 것이다. 빈번한 전쟁은 각 국 군주의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전쟁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상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사상의 실천에 앞장섰다. 직접 신성한 노동에 종사했으며, 근검절약의 생활을 실천했다. 그의 평등의식과 검증을 욕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은 귀족적 신분제, 운명론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갔다.
도가의 '도'다. 도란 사물의 근본을 따져나갈 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생성근원으로, 천지만물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천지만물이 벗어날 수 없는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 이 도를 제외하면, 우주적 존재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허무해서,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대립조차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어서 도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모든 인위적인 노력은 도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무위자연'만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며, 문명 이전의 원시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면 그때에 인간은 가장 행복할 것이다.
매우 난해하면서도 또한 매우 매력적인 도가의 사상서인 <도덕경>과 <장자>는 그 풍부한 상상력과 낭만적인 언어 구사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번역되는 책의 하나이다. 대개 유가는 지배층의 철학으로, 도가는 피지배층의 철학으로 발전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중국사람들은 '공인으로서는 유가, 개인으로서는 도가'라고 하듯이, 고도의 긴장 생활을 요구하는 유가와 이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도가는 상호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기 현실적인 정치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했던 사상은 역시 법가이다. 당시의 군주들은 제가의 사상에 모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구현한 것은 법가의 사상이었다. 이회, 상앙, 신불해 등의 관료들은 모두 법가의 선구자들이며, 진의 통일도 이사 등의 법가적 실천에 의해 이루어졌다.
법가의 사상을 완성한 사람은 전국 말기의 한비자이다. 그의 이름은 한버, 본래는 한자라고 불렀으나, 당나라의 명유인 한유와 구별하기 위해 한비자라고 부른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의 상황을 직시,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채택해야 하며, 규범으로서의 법과 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서의 술을 강조했다. 그는 동학이었던 라이벌 이사에게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
이외에도 일종의 논리학인 명가, 세계를 음양의 2원적 원리에 의해 설명하는 음양가, 우주만물이 '목화토금수'로 구성되었다고 주장, 이의 운행으로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 오행가, 외교와 변설을 중시하는 종횡가 등도 출현했다. 병가의 서적인 <손자병법>은 전국시대의 실전경험에서 출발한 고도의 전쟁이론서이자, 심원한 인생철학을 담은 명저로 오늘날까지 널리 애독되고 있다. 손빈은 친구 방연의 모략으로 두 다리의 힘줄을 잘리는 형벌을 받은 후 저술에 몰두, 이 책을 남겼다.
□ 진나라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이륙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육안으로 확인되는 인류의 건조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만리장성을 꼽을 것이다.
오늘날 북경 교외의 팔달령으로 오르는 장성은 관광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장성의 입구에는 「장성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을 어찌 사나이라 하리」라고 씌어진 모택동의 글귀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성에 이르는 계단을 약 40분 오르면, 해발 1,015m의 정상에 다다른다. 그 정상에서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준령의 물결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 장려함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에 축조된 것이다. 본래 장성은 토성이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위치가 변하기도 하고 보수, 확장이 거듭 되었으니, 그 총연장을 합치면, 아마도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본래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이무렵 중국 북방을 위협하던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흉노는 아시아 최초로 기마술을 터득한 유목민족으로, 놀라운 기동력으로써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장성은 서쪽의 감숙성 임조에서 시작, 황하 북쪽을 휘돌고, 음산을 따라 조나라와 연나라 때 이미 축조되었던 성벽을 연결, 동쪽으로 요령성 양평에 이르는 것으로 현재의 것보다 훨씬 북방에 이어져 있었다. 비록 기존에 있던 성벽을 연결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엄청난 대역사였다. 성벽은 단순히 높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이도 대단해서 성벽 위로 5필 정도의 말이나, 10열의 병사가 동시에 보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리장성을 중국통일의 상징물로, 또 진시황이라는 전제군주의 위대한 권력의 화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찌됐든 만리장성의 완성으로 진시황의 중국통일의 과업은 마침표를 찍게 된 셈이다. 만라장성은 중국적 세계를 북방의 유목민족과 구별하는 북방한계선이 되었고, 만리장성 이남으로 표현되는 중국의 영역은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중국의 명칭이 진에서 유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진시황-그의 이름은 정政. 기원전 259년 장양왕 자초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살, 정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머니 태후와 여불위에게 맡겨졌다. 여불위는 대상인 출신으로 일찍이 정치적 야망을 품고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자초에 접근, 곤궁한 처지에 있던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공작을 통해 그를 즉위시켰다. 그는 자초가 자신의 애첩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그녀마저도 자초에게 내주었는데,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가 바로 진왕 정. 그렇다면 여불위는 진시황의 실부가 되는 셈이다. 그가 학자나 변론가 3천 명을 빈객으로 우대하고, <여씨춘추>라는 일종의 대백과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니 그의 재력과 권세는 가히 천하를 호령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왕 정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기원전 238년 성인 의식을 치르고 친정에 들어가자, 냉철하고 과단성있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상인 출신이었던 여불위의 중상책은 다시 억제되고, 상앙 이래의 전통적 개혁정책이 강해되었다. 낙양에 연금되었던 여불위는 마침내 전도를 비관하여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재상으로 등용된 이사는 강력한 법치로써 통일을 추진하였다. 진시황은 하루에 30kg의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도 함양으로부터 지방 각지로 뻗어나가는 방사선의 도로망이 정비, 황제의 명령이 전파되었고, 또한 도로건설의 과정에서 반란군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성벽이나 진지 등이 제거되었다. 전국의 토착부호 12만 호가 강제로 수도에 이주당했으며, 민간 소유의 무기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을 5차례에 걸처 순행하고, 태산등 명산에 올라 거대한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통일국가 속에서 문자, 도량형, 화폐 등도 통일되어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그런데 진시황을 폭군의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사상통일책이었다. 강력한 무력과 엄격한 법으로 통일은 일단 성취되었으나, 이미 춘추이래 발달한 각 지역의 독자적 문물과 창의적인 생각, 비판적 언론이 문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랬다.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 사상서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의 소지도 금지되었으며, 관리가 아니 사람의 자유로운 학술토론도 금지되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관에 수거되고 잿더미로 화했다. 옛 서적에 대한 논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 당하는, 이른바 갱유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말렸던 그의 장자 부소도 멀리 변방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독재적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한나라
<한왕조의 개막과 체제 정비>
항우와의 5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둔 유방은 기원전 202년 즉위식을 거행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방은 한나라의 개조(開祖)라는 뜻에서 보통 한(漢)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낙양에 돌아온 고조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신들을 모아 놓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유방은 술잔을 높이 치켜들고 군신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지 그대들은 숨김 없이 말해 보아라."
왕릉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시고, 항우는 인자하여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성을 공략하여 승리한 뒤에는 공적이 있는 자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어 천하와 더불어 승리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어진자와 능력 있는 자를 질투, 의심하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 차마 땅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공을 모두 자기 것으로 했습니다. 이것이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고조는 한 잔 술을 들이키고 말했다.
"그대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군진의 장막 속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패를 판가름짓는 일은 내가 장량보다 못하고,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로하며 보급을 원활히 하는 일은 내가 소하보다 못하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은 내가 한신보다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천하의 인걸이오. 나는 이들 셋을 잘썼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인데 이 사람마저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항우는 천하를 잃게 된 것이오."이 말에 군신들은 모두 탄복했다.
고조가 황제에 즉위한 뒤 최대 인건으로 삼은 것은 바로 도읍지의 문제였다. 처음에 고조는 주 왕실의 융성을 이어받고 싶었고 또한 대부분의 군신들이 낙양의 장점을 들어 낙양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낙양을 수도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량이 이에 반대하며 말했다.
"낙양이 비록 장점도 많고 교통도 편리하긴 하지만,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기 쉬고 피신처가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진나라 도읍이었던 관중은 기름진 평야가 천 리에 걸쳐 있고 천연의 요새지로 인구도 많고 물자도 풍부합니다. 그 안쪽에는 파·촉의 땅이 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병자루처럼 좁게 트인 동쪽으로는 적은 병력으로도 백만 대군을 견제할 수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천하의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장량의 판단을 믿은 고조는 즉시 서쪽으로 옮겨 관중 근처인 장안에 새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궁전 미앙궁을 짓기 시작했다. 장안은 양자강 중류의 남군을 남단으로 하고, 황하 하류의 유역에서 황하 분류인 제수에 걸치는 동군을 동단으로 하는 지역으로서 천하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여 여러 왕국을 제압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와 더불어 고조는 소하를 비롯하여 숙손통(淑孫通) 등에게 한나라의 여러 문물과 제도를 제정하게 했는데 그 대부분은 진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다만 지대의 과도한 수탈과 그에 따른 수년에 걸친 전란 때문에 도탄에 빠져 있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도의 운용은 오히려 민심의 향배에 맡기고 커다란 범주만을 규제하는 방침을 택하였다. 특히 진대의 연좌법이나 삼족주멸법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조세도 진대 말기에는 수확의 반 이상을 거두던 것을 수확의 15분의 1로 경감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고조는 한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는 신하들 143명에게 제후, 왕의 봉직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우선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삼았고, 게릴라전으로 명성을 떨쳤던 팽월을 양왕(襄王)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신들 서로에게 평등한 상을 주기 위해 왕국을 많이 만들었다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한나라의 영토가 모두 분리되어 버려 다시 전국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은 형세가 되었고, 진나라가 시작한 군현제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결국 한 고조는 주나라의 봉건제의 장점과 진나라의 군현제의 장점을 살린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국제란 군현제와 봉건제가 절충된 것으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북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인 한신 등 7인의 왕과 소하 등 제후에게 분봉하여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러한 군국제를 추진하게 된 데에는 진나라가 군현제를 통해 너무나 급격하게 중앙집권을 추진했기 때문에 단명에 그쳤다는 고조의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유(劉)씨 성(왕족)이 아닌 이성(異姓)의 제후왕들은 한왕조에게 커다라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유방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하나씩 하나씩 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초왕으로 있던 한신이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에 빠졌다. 고조는 한신을 심문했고 그 결과 무죄임이 판명되었지만 한신의 작위는 회음후로 격하되었다. 한신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역시 세상에서 하는 말이 옳구나. 날쌘 토끼가 잡히면 그것을 쫓던 개는 살망 먹히고,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도 치워 버리다더니…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내가 죽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겠구나." 그 후로 한신은 고조를 원망하여 항상 병을 핑계삼아 조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황제의 순행에도 수행하지 않았다. 고조 10년, 조나라의 재상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신은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하다가 탄로가 나서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숙청당한 공신은 한신만이 아니었다. 한신보다 앞서 연왕(燕王) 장도가 숙청되었고 조왕 장오도 선평후로 격하되었다. 한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인 장군 팽월, 경포도 차츰 숙청되었다. 공신들이 숙청당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유씨성을 가진 인물이 자리잡았다. 이제 고조는 철저하게 황족에 한하여만 왕을 세우고 다른 성씨의 왕은 폐해 나갔다. 이렇게 고조는 건국 공신의 허물을 찾아내서 차례로 죽이고 그 뒤에는 모두 유씨 일족을 왕으로 하여 황제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황금시대를 이룩한 무제>
기원전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이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니 이가 바로 전한의 황금 시대를 이룩한 무제이다. 무제가 새로 즉위했을 무렵에는 앞선 황제들이 닦아 놓은 사회 경제의 기반이 이미 탄탄했다. 이전의 황제들이 조세와 노력을 경감하고 토지의 개간과 증산을 장려하는 등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북방 흉노의 침입에 대하여서도 화친 정책을 펴고, 또 대규모의 토목 건축 등도 삼가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무제가 이렇듯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기반 위에 과감한 정치를 펴게 되자 전한 왕조는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제가 첫 번째 시도한 것은 중앙집권 강화였다. 16세기 즉위한 무제가 22세 때에 있었던 일이다. 이제 무제도 제위에 오른지 6∼7년이 지났으니 황제로서의 위엄과 정치적 역량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힐 만한 연륜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요 관직의 임명은 승상 전분이 혼자 처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무제는 전분의 독주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전분이 중요 관직에 임명할 사람을 추천했다. 이에 무제는 침착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말했다. "승상이 지금 추천하고 있는 인물들은 승상이 이미 다 임명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소. 이미 임명해 놓고 나에게 추천하는 형식은 온당치 못하오. 실은 나도 임명하고 싶은 사람이 좀 있으니 그리 아시오." 이후 무제는 중요 관직에 대한 임명권을 점점 확고하게 장악해 나갔다. 그는 이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조정의 권력을 강화했다.
경제면에서도 무제는 화폐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게끔 하였고, 또 당시 중요한 상품이던 소금·철·술 등을 정부가 전매하도록 했다. 또한 균수법과 평준법을 시해하였다. 균수법이란 것은 각 지방의 경제적 중심지에 관리를 두어 그 지방의 특산품이나 잉여 산물을 세금 대신 싸게 납부시켜, 그 물품의 수요가 많은 수도 장안이나 그 밖의 지방에서 비싸게 팔아 그 이익을 정부 국고에 납입하는 방법이다. 평준법이란 것은 물가를 평균한다는 뜻으로서 정부 주도하에 물자의 물가가 떨어졌을 동안에는 물자를 보관해 두었다가, 물자가 부족하여 값이 오르면 모아두었던 물자를 파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정부는 직접적으로 대량의 물자를 보유하고 물가를 조절하였으며, 동시에 정부의 수입도 증가하였다.
사상면에서도 무제는 유가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의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일찍이 혜제, 여후 시대에는 전국 시대부터 진대에 걸친 전란을 거쳤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져서 백성들은 휴식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문제, 경제의 통지방침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자 이에 적합한 통일된 사상체계가 필요했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을 받아들여 오경박사(五經搏士, 다섯가지 유가 경전에 관한 학자)와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치했으면, 유교적 덕목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를 개설함으로써 유교 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로부터 유학을 공부하여 이에 통달하는 것이 곧 관리가 되는 정당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특히 동중서는 유가의 사상에서 인정하는 인간사회의 차별적인 질서가 하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천하통일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이고, 군주는 나라의 근본으로 높이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천자의 지위는 무엇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만약 그 다스림이 좋지 않으면 하늘이 재해를 내려 천자에게 경고한다.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천자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마침내 하늘은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한다. 유가의 사상에 종교성을 부여하고, 여기에 음양오행(陰陽五行)적인 천인론을 가미함으로써 군주권을 합리화시킨 동중서의 유교사상은 당시 시세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유교사상은 무제가 유교이념을 표방한 이래 2천여 년이나 계속된 중국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로 변화하고 가지각색의 유파를 만들어 내었지만, 중국의 기본적인 정통 사상으로 존중받아 왔다. 이렇게 내정을 굳건히 다진 무제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그 동안 화친 정책으로 일관해 오던 흉노와의 관계를 강경책으로 전환시켰다. 흉노는 몽고 고원에 거주하는 기마 유목 민족으로 전국 시대부터 자주 중국 본토에 침입해 왔다. 일찍이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구축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았으나 진나라가 멸망한 후 흉노의 세력은 더욱 더 강대해졌다. 흉노족은 끊임없이 서쪽으로, 동쪽으로 한나라를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해 갔다. 무제는 위청, 곽거병 등을 시켜 흉노족을 토벌하게 했는데, 모두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같이 한나라가 흉노 원정에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한나라 국력의 신장, 위청·곽거병과 같은 명장의 활약, 흉노의 내부 동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전에 흉노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건의 서역 여행은 큰 의의를 갖는다.
처음에 계획한 장건의 서역 여행은 서역 제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철저히 무찌르기 위한 것으로 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당시 흉노에게 격파당한 월지는 돈황에서 멀리 북쪽으로 도망하고는 절지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던 무제는 월지와 동맹을 맺어 흉노를 격파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월지에 보낼 사자를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건이 자원하였던 것이다.
장건이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해 황화 서쪽 변경 지방에 이르렀을 무렵 그는 뜻밖에도 흉노에게 사로잡혔다. 흉노는 장건 일행을 심문하여 그가 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고는 장건을 억류하였다. 장건은 10년 동안이나 흉노에서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흉노족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고 완전히 흉노가 된 것처럼 행세했다. 장건은 이렇게 해서 흉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했다.
장건 일행은 서쪽으로 수십 일 동안 여행을 계속해서 대완(중앙아시아 동부 페르가나 지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완에서 강거국을 지나 월지에 도착하여 월지왕을 설득했다. 그러나 월지왕은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하였다. 장건의 동맹 체결은 무산되고 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귀국길에 오른 장건 일행은 곤륜산 남쪽 기슭을 따라 이른바 서역 남로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카슈가르·야르칸트·우전·누란에서 차이담 분지를 지나 농서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누란에서 돈황으로 빠지는 길이 정상이었으나 돈황은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피한 것이었다. 차이담분지의 야강족은 장건이 월지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자립국이었으나 막상 들어가 보니 이미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장건은 이곳에서 다시 흉노에게 억류당하고 말았다. 그는 1년 후 흉노의 내분을 틈타 도망칠 수 있었다.
기원전 126년, 장건은 무려 13년 만에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왔다. 월지와의 동맹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그의 보고에 의해 한나라는 서역의 정세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긴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흉노의 세력권 안에 있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초원, 사막, 산악, 호수, 도로 등을 기억하여 머리 속에 그려 놓았던 것이다. 장건의 지리적 지식 덕분으로 그 후 한나라의 군대는 정복길에서 물이나 군량 부족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흉노를 토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장건의 역할은 흉노를 토벌한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장건의 서역 여행으로 인해 처음으로 오손, 야랑, 대완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전해졌다. 차츰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국간의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 심지어 로마(대진국)의 문물도 교류하게 되었다. 그 후 한나라와 서역과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져 이른바 비단길(실크로드)이 개통되기에 이르렀다. 이 길을 통해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사자, 공작, 향로, 상아, 산호, 유리 등이 중국에 전래되었고, 중국의 바단, 칠기, 약재 등이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비단길은 바로 한 무제 때 장건이 처음 개척한 것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중국문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유교가 떠오른다. 유교는 한무제 때 국교로 채택된 이래, 역대왕조의 지배이념으로서 흔들림없는 지위를 누렸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의 향촌 사회에도 깊숙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진이 몰락하자 한 초기에는 다시 제자백가의 사상이 부흥했으며, 휴식의 정치에 힘입어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이 풍미했다. 진의 가혹한 법치, 그리고 오랜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자 이에 적합한 통일된 사상체계가 요청되었다. 마침내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경박사,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치했으며, 유교적 덕묵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를 개설함으로써, 유교 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기원전 136년 조정에 처음으로 설치된 오경박사는 오경 중에 1경씩을 전공했으며, 처음에 50명의 관선학생으로 출발한 태학의 졸업생은 후한 말에 이르면 3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효렴제에서 시작한 중국의 관리등용법은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학자적 관료로서의 중국적 지식인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공자는 일찍이 인간의 차별성을 전제로 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동중서는 이 도덕규범을 다음과 같이 치환했으니, 이것이 삼각이다.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이다. 남편은 부인의 근본이다」
동증서는 유가의 사상에서 인정하는 인간사회의 차별적인 질서가 하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주장, 천하통일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이고, 군주는 '나라의 근본'으로 높이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군주와 신하는 본과 말, 즉 줄기와 가지의 관계라는 것이다. 유가의 사상에 종교성을 부여하고, 여기에음양오행적인 천인론을 가미함으로써 마침내 군주권을 합리화시키는 대 성공한 동중서의 유교는 무제에게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그렇다고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곧바로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아니며, 무제가 반드시 유교로서만 통치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사기>나 <한서>의 혹리전에는 한무제 때의 법가적 관료에 의한, 이른바 '유혈 십리에 미치는' 주살이 거듭 기록되고 있다.
얼핏 법가와 유교는 서로 상충하는 사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교이념을 표방한 중국의 역대왕조들 중에서 어떤 왕조도 법가적 통치를 포기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 두 사상은 상호보완적으로 왕조의 지배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의 전제왕조를 2천년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교는 군주의 전제권력을 합리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득에 의한 자발적인 복종'을 실현, 권력행사의 절약까지를 가져다주었다.
유교의 경전으로 사서오경이 있다. 사서란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오경이란 <역경(주역)>, <서경(상서)>, <시경>, <예기>,<춘추>를 일컫는다. 처음에는 오경이 중심이었으나, 송대에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하면서 사서가 경전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경은 공자가 편찬하거나 저술했다고 전해지는데, <주역>은 고대의 64괘에 의한 점술서이며, <서경>은 노나라에 전해진 주공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다. <시경>은 운대 이래의 시 305편이 담겨져 있고, <예기>는 고대의 예에 관한 학설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춘추>는 공자가 정리한 노나라의 편년체 역사서로, 간단한 연대기적 기록 속에 깊은 뜻이 함축, 이에 대한 해설서인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이른바 춘추 3전을 낳았다.
사서 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으나 점차 중요시되면서 이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대학>은 유교 교학의 강령들이 담겨져 있고, <중용>은 불교에 대항할 만한 유교경전 중에서는 가장 철학적인 책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 공자가 강조되면서 점차 유교 최상의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맹자>는 말 그대로 맹자에 대한 기록인데, 맹자는 당 중기 한유에 의해 공자의 계승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나라 이후 당대까지는 이른바 훈고학이 성행했다. 훈이란 경전에 서술된 말을 난해한 것은 쉽게, 옛날의 용어는 현대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즉, 언어를 연구하여 고전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훈고학의 발생에는 진시황의 분서사건도 한몫한 셈이다. 당태종의 명으로 공영달이 <오경정의>를 편찬, 여러 유파의 해석을 통일했는데, 과거제의 시행과 더불어 일종의 국정교과서로 채택, 유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했다. 공영달은 공자의 32세 손이라고 했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했다.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면을 흡수, 훈고학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개념을 중심축으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을 설명하고, 이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 정이 형제의 사상을 계승, <사서집주>를 편찬함으로써 성리학을 완성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성리학을 주자학, 혹은 정이 형제의 이름을 함께 정주학이라고 부른다.
신유학, 유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이라는 이름은 왕수인의 호 양명에서 유래하며, 명대에 유행했다. 왕수인도 처음에는 성리학에 심취했으나, 성즉리설을 비판, 심즉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주만물의 이치가 내재하고 있으며, 마음의 양면은 앎과 실천이다. 그는 앎과 함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 즉 지행합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주관적이고, 실천은 이에 기초한 도덕전인 것이었기 때문에 성리학과 함께 관념주의에 빠질 위험은 있었다.
고증학은 명말 청초에 일어나 청대에 성행했다. 창시자인 고염무, 황종희 등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종래의 학풍을 비판, 과학적인 고증과 박학을 통한 실천으로 세상에 도음이 되는 실질적인 학문, 즉 실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 근대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나지게 고증에 치중,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청의 한족 회유책에 이용당한 경향도 있다.
<후한의 창업>
후한을 창시한 광무제 유수는 유난히 높고 코와 이마 중앙의 뼈가 해 모양으로 두두룩하여 관상가들이 귀인의 상으로 말하는 융준일각의 인상을 가졌다고 한다.
어느 날 채소공이라는 사람이 유수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유수를 보고 말했다.
"유수는 후일 천자가 될 것이다."
채소공은 도참(미래의 길흉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마침 한자리에 있던 사람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국사공 유수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가 말한 유수는 바로 광무제 유수와 동명이인으로 당시 왕망 정권의 고관이었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 유수는 화를 벌컥 내었다.
"손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내가 천자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시는 것입니까?"
어린 시절 유수의 성격과 포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서기 17년 남양 지방에서도 왕망의 신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유수의 형 유연은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군대는 즉시 불어나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숫자로 군대가 불어나자 이를 통솔할 인물을 추대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여러 장수들은 한왕조의 혈통을 이은 유씨를 천자로 세워 백성의 여망에 부흥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남양 출신 호족들과 여러 장수들은 유연의 명석함과 지나친 결단력 등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현을 세워 경시장군이라 칭하고, 유연을 대사도, 유수를 장군으로 삼았다. 이후 유현은 경시제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듯 남양 봉기군이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추어 나가고 있을 때 유수의 3천 명 군대는 왕망의 40만 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정부군은 40만 대군이었으나 명령계통과 질서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유수의 군대에게 순식간에 격파당했다. 이 싸움은 천하의 대세를 가름하는 운명의 일전이 되었다. 양다리를 걸치고 천하의 형세를 곤망하고 있던 사람들은 왕망의 대군이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해서 왕망 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데 남양 봉기군 내부에서도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경시제 유현이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인 것이다. 무능할 뿐 아니라 인덕마저 없었던 유현은 항상 유연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양 봉기군은 이 사건으로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으나 유수의 은인자중한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유수는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경시제에게 가서 사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형 유연의 장례의식도 거행하지 않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었다. 그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만 말할 뿐 승리한 싸움의 공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경시제 유현도 곤양의 싸움에서 수훈을 세운 유수에 대해서는 트집잡을 일이 없었다. 경시제는 오히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유수를 파로장군에 임명하고 무신후에 봉했다. 이흑고 남양 봉기군은 일제히 장안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왕망은 불타는 궁전을 버리고 도망가다 결국 살해되었다. 이 때가 서기 23년으로 신은 건립된 지 겨우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 것이다. 경시제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으나 정치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퇴폐적이고 향락한 생활에 바져 있기만 했다. 따라서 그는 점차 인심을 읽어 왕망에게 고통을 당했던 장안의 시민들도 오히려 왕망 시대를 그리워하기조차 했다고 한다. 이 때 왕망 정권을 타도하는 데 협력해 왔던 적미군은 유분자를 천자로 추대하고 관중으로 진격하여 서기 25년에 경시제를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다. 그러나 20만에 달하는 적미군 역시 통제가 없고 멋대로 약탈을 하여 경시제와 마찬가지로 신망을 잃었다.
한편 일찍이 경시제의 명령을 받아 황하 이북에 주둔하고 있던 유수는 하북 일대를 완전히 진압해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25연에 유수는 장수들에 의해 추대받아 황제로 즉위히거 연호를 건무라고 하였다. 유수는 먼저 적미군을 진압한 후 마지막 남은 반란군 농의 외효와 촉의 공손술을 섬멸하였다. 이리하여 황망 시대에 굉장한 기세로 폭발한 농민의 대반란군과 도적떼들의 반란군은 마침내 광무제 유수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낙양을 수도로 삼아 한 제국을 재흥시켰다. 광무제가 세운 이 한나라를 유방이 세운 한나라와 구별하기 위하여 역사상으로는 동한 또는 후한으로 부른다.
<황건의 난>
농민들은 부패한 정권과 잇따른 경쟁 속에서 서서히 몰락해 갔다. 호족(지방의 대주주)과 부패한 관료세력에 의해 토지겸병과 조세의 징발은 날로 심각해졌으므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계속 증가하였으며, 메뚜기 떼와 홍수, 가뭄 등으로 인한 거듭된 대기근은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 오두미도 등의 도교적 신흥종교가 유행병처럼 번져갔다. 이 태평도는 하북 거록현의 장각이라는 사람이 황제, 노자의 도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모아 만든 신앙단체였다. 태평도는 병자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부적에 적신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주술로 신도를 모았다. 장각은 10년 동안 신도의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자 신도들을 36방으로 조직했다. 1개의 방은 규모가 큰 것은 1만 명에서 작은 것은 6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는 각 방에 거사라 불리우는 두목을 두어 통솔하니 그 조직이 흡사 군대와 같았다.
서기 184년에 일어난 황건의 난은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이다. 중국의 전통적 오행설에 의하면 불에서는 흙이 생성된다. 이들은 화덕에 해당하는 한나라는 곧 몰락하고 이어 토덕에 해당하는 황건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 굳게 믿고, 머리에 새 세상을 상징하는 황색 띠를 동여매었다. 그래서 황건적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태평도의 봉기는 사전에 밀고자가 있어서 계획이 누설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정보다 앞당겨 봉기를 감행했다. 장각은 자신의 칭호를 천공장군이라 하고, 동생 장보를 지공장군, 장량을 인공장군이라 칭했다. 그런 후 각 지방에 지령을 내려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각 지방의 관청을 불지르고 부락을 점령하였다. 각 지방의 관리들은 이들에 대항하기보다 도망치기에 바빴다.
조정에서는 중신 회의를 열어 하진, 황보숭, 노식을 파견해 이들 황건군을 토벌하는 한편, 유생들의 금고를 해제했다. 황건군들이 유생들과 결합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 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장각이 거느리는 황건적의 중심세력은 하북 지방에 있었으나 하남 동부의 영천 부근에도 강력한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노식을 하북에 파견하고 황보숭과 주준을 영천에 파견했다. 황보숭은 장사에서 파재가 거느리는 황건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온 사람이 당시 기도위였던 조조였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조조의 첫 등장이다.
한편 하북에 파견된 노식은 장각을 광종현성까지 패주시키고 그곳을 포위하여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해임되고 말았다. 노식이 해임당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부 사정이 있었다. 토벌군에는 황제 직속의 감찰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이 관직은 모두 환관이 담당하였다. 군사령관은 보통 감찰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보내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으나 강직한 관리인 노식은 뇌물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노식의 토벌군에서 감찰을 담당했던 환관은 앙심을 품고 낙양에 돌아와 연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광족현의 도적은 쉽게 격파할 수 있는데도, 노식은 참호를 굳게 파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도적이 저절로 궤멸하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다음과 같은 처분을 내렸다.
"사형은 면하되 죄소이니 그를 소환하도록 하라."
이렇게 노식은 해임되고 말았고, 해임된 노식의 후임에는 동중랑장 동탁이 임명되었다. 이것이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동탁의 첫 등장이다. 동탁은 노식의 후임이 되어 광종현의 황건군을 공격했으나 결국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또한 소환되고 말았다.
3얼에 편성된 황건적 토벌군은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장각의 동생 장량을 광종현에서 격파했다. 이 즈음 장각은 병사했는데 그의 묘는 파헤져지고 시체의 목은 잘려져 낙양에 보내졌다. 그리고 11월 황보숭은 장보의 군대를 하곡양에서 격파하고 장보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황건군은 지역을 나누어 작전을 펼침으로써 통일적 지휘체계가 없었고 또 작전 경험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황건군을 토벌한 공을 세운 황보숭은 환관의 모함에 의해 장군의 권한을 몰수당하고 식읍도 삭감당한 반면, 실제로 전투에는 참가하지도 않은 장양을 비롯한 12명의 환관들은 환제의 측근으로서 작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 삼국시대
<삼국 시대를 연 영웅의 출현>
후한 왕조는 황건군 봉기의 충격을 받아 통치 기반이 이미 흔들리고 있었는데, 영제가 죽자 외척과 환관 두 세력은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렸다. 서기 189년 14살 밖에 안 된 황태자 변이 즉위하였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후한의 전례에 따라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고 하태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하진은 정권을 잡자마자 환관 건석을 죽여 버렸다. 환관 건석은 당대 최대의 실력자였는데, 영제가 죽기 전 영제에게 하진을 죽이자고 하다가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때마침 원소가 환관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하진에게 권했다. 선비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여러 대에 걸쳐 선비들의 세력을 누르고 있는 환관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전에 두무가 환관들을 없애려 하였지만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도리어 환관들에게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군권을 장악하였으니 마땅히 천하를 위해 그 자들을 소멸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진은 결단을 내릴 수 없어 하태후를 찾아가 의논하였다. 그러나 하태후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섭정을 하자면 유생들과 상대해야 하므로 환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과 둘째,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과 동생 하묘 등이 환관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이유로 환관을 제거하자는 계획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앞서 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하진에게 권고한 바 있는 원소는 사방에서 용감한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원소는 또 하진에게 비밀리에 각지의 병마를 수도로 불러들여 환관 숙청에 동의하도록 태후를 위협하자고 했다. 하진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는 각지의 세력 중에서 특히 동탁의 병력이 제일 강하니 그를 불러들인다면 실수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즉시 사람을 보내 동탁에게 속히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올라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소식은 재빨리 환관들의 귀에 전해졌다. "곧 손을 쓰지 않으면 큰일 날 것이오."
몇몇 환관들은 급히 상의한 끝에 황궁 안에다 무사 몇십 명을 매복시켜 놓은 후 태후의 조서라고 속여 하진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하진은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환관들에게 포위되어 살해되고 말았다.
하진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곧 사촌동생 원술과 하진의 부하 오광을 시켜 황궁을 치게 하였다.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궁궐문을 때려 부수고 난입하여 환관이란 환관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거세된 남자들은 수염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수염이 없는 사람은 무조건 환관으로 오인되어 죽음을 당했다 이 때 죽은 환관의 수는 2천 명에 달했다 한다.
한편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동탁은 이 틈을 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달려가 낙양을 장악해 버렸다. 동탁은 본래 농서(지금의 감숙성 일대)의 호족으로서 농서 일대에서 세력을 뻗쳤는데, 황건적의 난이 있은 후에 황건군을 무찔러 병주목이란 지위에까지 올랐다. 원래 중원을 점령할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하진이 부르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3천 인마를 거느리고 급히 낙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낙양을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9세의 협을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이다. 동탁은 이어 하태후를 독살시켜 버렸다. 이제 조정 안에서 자신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모두 없애 버린 동탁은 스스로 승상이 되어 제멋대로 정권을 휘둘렀다. 얼마 후 동탁은 더 높은 지위인 상국이 되었다. 전한 건국의 공신인 소하가 상국이 된 이래 전한·후한을 통틀어 상국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금기를 동탁은 스스로 깨뜨린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동탁에게는 황제 앞에서 허리를 굽힌 채 빨리 걷지 않아도 되고, 칼을 차고 황제의 단에 올라도 된다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이는 바로 동탁이 활제의 권위를 능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도의 귀족, 부호의 저택을 마음대로 불사르고 재물과 부녀를 약탈하는 등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러한 동탁의 횡포가 날로 극심해지자 원소는 이에 반대하여 낙양을 떠났고 원술도 남양으로 떠났다. 병력을 집결시키고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었던 군벌들은 명망이 높은 원소를 맹주로 하여 동탁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들 연합군은 함곡관 동쪽에서 모였기 때문에 관동군이라고 불렀다. 그 세력이 날로 강대해지자, 중원에 위치한 낙양은 수비하기에 불리하였다.
그래서 동탁은 계속 낙양에 있다간 관동군의 위협을 받아 고립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헌제를 데리고 낙양을 떠나 함곡관을 앞에 둔 견고한 요새지이자 전부터 자기의 세력 범위였던 서쪽 장안으로 향했다. 낙양을 떠날 때 동탁은 수백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낙양에 있던 궁전과 민가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낙양 주위 2백리 안팎은 개와 닭조차 살아 남을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동탁은 자기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난 관동 연합군이 제각기 이해타산만 따지며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스스로 태사라 칭하고 헌제에게 자기를 '상부'라고 높여 부르게 하였다. 그는 자기의 남동생들과 조카들을 모두 다 장군, 교위로 봉하였고, 백성들에게서 긁어모은 금은보화와 양곡을 잔뜩 쌓아두었다. 동탁은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이 정도의 재물이라면 잘하면 천하의 패자가 될 것이고, 못하더라도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년에 동탁은 사도 왕윤과 자기의 오른팔이라 믿었던 부하 여포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동탁의 시체가 효수되자 이를 감시하던 군사가 동탁의 시체가 너무 살찌고 기름진 것을 보고는 그 배꼽에 커다란 심지를 꽂고 불을 당겼다. 그러자 기름이 지글지글 끓으며 불이 타올라 며칠 동안을 계속 탔다고 한다. 이 때 동탁의 부장 이각과 곽사는 동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공격해 왕윤 등 1만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각과 곽사 사이에 정권 다툼이 일어나 장안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사람의 그림자도 끓겼다. 이각과 관사에게 인질처럼 끌려다니던 헌제는 196년에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궁전은 모두 불타 폐허가 되었고 잡초만 무성했다. 헌제는 환관이 살던 초라한 집에 잠시 몸을 위탁했으며 수행한 대신들은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생명을 유지해야 했다.
이렇게 동탁이 죽자 관동 연합군은 투쟁 목표을 상실한 셈이 되었다. 각지의 군벌들은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몰락해 가는 황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헌제가 이렇게 곤경에 빠지자 천하의 대세를 관망하고 있던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 헌제를 허창으로 모셨다. 헌제를 맞아들인 조조는 원래 세력이 강대했을 뿐만 아니라 천자의 권위까지 업게 되어 군웅 가운데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한편 관동군의 맹주로 추대된바 있는 원소는 황하의 중하류 지역에서 군벌과 호족들을 복종시켜 당시 최대의 군벌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조조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원소와 조조의 대결은 200년 황하 근처 관도(하남성 중모현)에서 있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관도의 대전'이다.
이 때 원소는 보병과 기병이 10만 조조는 오직 2만여 명에 불과 했다. 원소는 땅이 넓고 장수가 많았으며 훈련된 병사와 풍족한 식량을 보유하고 있어 겉으로 강대한 것 같았으나 원소의 성격은 교만하고 우유부단했으며,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이 부족하였다. 조조는 비록 병력이 적고 힘이 약했으며 후방 또한 안정되지 않았으나, 대세를 보는 눈이 뛰어나고 사람을 보는 데 탁월했으며, 부하의 정확한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고 전투에 있어 승리의 기회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이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원소의 군대를 완전히 대파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궤멸되어 10만의 군사 가운데 7만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 자신은 기병 9백 명의 호위를 받아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을 정도였다. 원소는 2년 후 죽고 그의 아들들이 잠시동안 조조에게 저항했으나 형제간의 불화로 세력이 약해져 얼마 후 조조에게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다.
이로써 조조는 당시 중국의 13주 가운데 연주,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다섯 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의 거의 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조조가 차지한 주들은 인구가 많은 중원 지역이었다. 조조가 이렇게 중원 지역을 통일해 나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다른 두 주역 손권과 유비 역시 양자강 중·하류 지역에서 그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손권은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단단히 다져 놓은 강남의 기반 위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유능한 신하인 장소, 주유, 노숙 등의 보좌를 받았고, 또 여몽 등 능력 있는 장군을 등용해 병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하여 손권은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에 이르는 세력을 모두 병합하고 기세를 떨쳤다. 당시 손권이 정복했던 영토는 북으로는 조조의 영토에 접하고 있었고, 서로는 형주에 자리잡고 있던 유표의 영토와 경계를 이루었다.
이에 비해 유비는 황건적의 난 때 관우, 장비 등과 함께 황건적 토벌군에 가담했으나 겨우 안희현의 현위가 되었을 뿐이었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출발이 너무 늦은 셈이었다. 유비는 출발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지 못해 근 20년 동안 이리저리 유랑하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했다. 형주의 유표는 유비가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을 겉으로는 큭 환대하였으나,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천하를 겨루는 따위의 용맹과 기백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유표에게 권했다.
"조조가 원소와 싸우는 틈을 타서 우리는 중원으로 진출하여 그 배후를 찌릅시다."
그러나 유표는 끝내 이것을 거절하였다. 유표는 소수의 병력을 유비에게 주어 시야(하남성 서남쪽)를 지키게 했다. 유비가 큰 뜻을 품고 일어난 후 신야에 오기가지는 이미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뒤였다. 그러나 유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세 번이나 예를 갖춰 찾아가는 서의 보임으로써 제갈공명이라는 뛰어난 인재를 얻고는 세력을 떨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었다.
<적벽대전>
관도의 대전에서 원소를 물리친 후 8년 째 되는 208년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공격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와 강동을 집어삼키고 전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는 형주의 유표가 이미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이 유표의 뒤를 이은 때였다. 유종은 조조의 백만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겁에 질려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그러자 유비가 있던 신야 일대는 조조군과 유종의 군사에게 완전히 협공당한 형세가 되었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때는 이미 조조군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유비는 강릉을 향해 퇴각했다. 강릉은 군사상 요지일 뿐 아니라 병력과 물자의 중요 보급 기지였다.
유비가 강릉을 향해 퇴각한다는 소식을 접한 조조는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의 뒤를 추격했다. 조조는 주야를 쉬지 않고 3백 리 길을 하루아침에 달려 곧바로 장판파(지금의 호북성 당양현 동복)에 도달해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대패하여 처자를 버리고 도망쳐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는 지름길을 따라 급히 하구(지금의 호북성 한구)로 도망쳤다. 하구에는 유표의 장난 유가 주둔해 있었다. 유기의 병력과 유비의 군사를 합치니 약 2만 명이 되었다.
조조의 백만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강동의 손권은 군사를 시상(강서성 구강시 서남쪽)에 주둔시킨 채 정세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조조군의 남하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으나 확실한 대책이 없어 우선 노숙을 파견해 상태를 점검하도록 했다. 북으로 올라가고 있던 노숙은 남하하고 있던 유비를 당양에서 만났다. 노숙은 유비에게 순권과 연합할 것을 제의한다.
"양자강 남안의 번구(호북성 악성현)까지 일단 후퇴하여 그 곳에서 순권의 군사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다까?"
이에 유비는 제갈공명을 시상에 있는 손권에게 파견해 손권과 대책을 논의하게 했다. 제갈공명은 손권이 아직 대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조조는 형주를 집어삼키고 사해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장강을 따라 내려와 강동에 육박해 있습니다. 손 장군께서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강동의 힘을 기울여 중원의 조조와 싸울 자신이 있으시면 즉시 조조와 관계를 끊으십시오. 만약 그만한 용기가 없으시다면 어찌 전 병력을 철수시켜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으십니까?"
손권이 즉시 방문했다.
"유비는 어찌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으십니까?"
"유비는 한 왕실의 후손으로서 그 인덕은 세상에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까짓 조그만 일로 어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손권은 주먹을 불끈 쥐며 결단을 내렸다.
"오나라 땅에는 10만의 정예군이 있습니다. 어찌 조조 따위에게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길은 오직 하나뿐이오."
공명은 적과 아군의 형세를 상세히 분석해 손권에게 설명하고, 조조군의 치명적인 약점과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손권에게 말했다. 공명의 설명을 들은 손권은 안심하며 결의를 다졌다. 마침내 조조와 일대결전을 벌이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지자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 노숙을 찬교교위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수상부대와 공동작전을 펼쳐 조조군과 싸우도록 했다. 마침내 조조군과 손권·유비의 연합군은 적벽 부근(호북성 가어현 양자강 연안)에서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게 되었다. 강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의 병사들은 모두 북방 출신이어서 남방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으로 신음하고 배멀미로 고통을 받는 등 사기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병사들이 물에 적응 못하자 조조군은 전선을 모두 쇠고리에 연결하여 한덩이로 만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였다. 이 때 주유의 부장 황개가 주유에게 계책을 올렸다.
"조조군은 전투선을 연결하여 배의 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그 진퇴가 자유롭지 못합니다. 화공법을 쓴다면 일거에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는 황개의 계책을 받아들여 우선 몽충(폭이 좁고 길다란 배로 적선과 총돌해 침몰시키기에 알맞은 배)과 투함(지금의 전함과 비슷함) 10척에 마른 섶과 갈대를 가득 싣고 기름을 부은 후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포장으로 덮고 그 위에 기를 꽂았다.
준비가 완료되자 황개는 우선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항복하러 가겠다는 날짜와 시간에 황개는 맨 앞에서 전함들은 거느리고 조조군을 향해 떠났다. 강 중간 지점에 이르자 황개의 전함들은 일제히 돛을 달고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조조의 군사들은 황개가 거느린 전함들을 바라보면서 좋아서 소리 질렀다.
"봐라.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
조조의 진영 1킬로미터까지 접근했을 때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려 각 배에 실은 섶과 갈대에 일제히 불을 지르게 했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황개의 전함들은 맹렬한 불꽃을 휘날리며 쏜살같이 조조의 함대는 도망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조조의 전함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강언덕까지도 붉게 물들며 사방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조조군은 물에 빠져 죽는 자, 불에 타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적벽 일대는 일시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이 틈을 탄 주유의 장수들이 정예 기병을 이끌고 조조군을 마구 무찔러 대니 조조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조조도 겨우 목숨을 보전한 채 허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만약 적벽의 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하고 손권·유비가 패했더라면 중국은 이 시점에서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벽대전을 계기로 유비는 제갈공명의 계책에 따라 곧바로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촉한을 세웠으며, 손권은 강동을 굳게 지킨 채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를 세웠으므로, 조조가 세운 위·유비의 촉·손권의 오, 이 삼국이 한동안 팽팽히 정립하는 형세가 이어졌다.
□ 진나라
삼국을 통일한 진무제(晋武帝)는 위나라가 종친세력의 약화로 권신이 발호아여 망한 것을 교훈삼아 사방의 요지에 일족들을 왕으로 봉하고, 각 지방의 무기를 국가가 회수하고 군대를 해산하여 지방 자사(자사)들은 행정권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권적 봉건제도는 제왕들의 할거를 초래하였지만, 지방의 무력 약화로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중국의 북변에는 흉노, 갈(갈), 선비(선비), 저(저), 강(강)의 오호(오호)가 있었는데, 세력이 강해진 그들의 남침위기 속에 무제가 죽고 혜제(혜제)가 즉위하자 황후 가씨(가씨)는 황태후 양씨(양씨)를 살해하고 가씨 일족을 정권에 끌어들이고, 종친들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싸우게 하였다.
그러자 조왕윤(조왕윤)이 가황후를 죽이고 혜제를 폐위하여 자신이 제위에 올랐다. 이에 반발한 다른 제왕들이 군사를 일으켜 조왕 윤을 죽이고 혜제를 보위시켰다. 그러나 공을 세운 제왕들간에 다시 내분이 일어나 291- 306의 16년 간에 걸친 팔왕의 난(팔왕지왕)이 일어나 화북 일대가 전란에 휘말렸다. 이와중에 성도왕(성도왕) 영(영)이 흉노 유연(유연)의 힘을 빌리려 그를 부르자 유연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켜 한왕(한왕)이라 자칭하고는 기주, 청주, 예주, 서주 등을 점령하였다. 또한 유연의 아들 유총(유총)이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회제)를 사로잡자, 민제(민제)가 장안에서 즉위하여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유요(유요)가 다시 공략하자 투항하여 진은 50면만에 멸망하였다.
이에 사마씨의 일족인 사마예(사마예)가 옛날 오나라의 도읍지인 건업에서 즉위하니 그가 동진(동진)의 원제(원제)이다.
남북조시대
남북조의 시대 구분에는 동진 왕조가 성립한 때부터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설과 동진 왕조가 멸망한때부터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설이 있다. 저는 후자의 설에 따라 서술하였으며 문화의 소개는 편의상 욕조시대 (오.동진.송.제.양.진)에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남조는 동진 왕조에 이어 강남 지방에 세워졌던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의 4개 왕조를 말하고, 북조는 오호 십육국의 혼란을 통일한(439) 북위(北魏, 386~534)를 비롯하여 동위(東魏, 534~550), 서위(西魏, 535~557), 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7~581)의 다섯 왕조를 가리킨다.
연대적으로는 북위가 북부 중국을 통일한 439년부터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되어 남북조로 갈라졌던 중국이 통일된 589년까지의 약 150년 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특징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이에 따라 사회의 혼란이 극심하였다는 점이다.
남조의 지배 계급은 북부 중국에서 이주해 온 귀족들로서 전통있는 문화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고, 북조의 지배 계급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민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남조에서는 문학. 예술이 크게 발달한데 비하여 북조에서는 한문화의 섭취에 힘썼으나 특별히 발전된 것은 없었다.
남북조 모두 불교가 융성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남조의 양무제는 즉위 초에는 명군으로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으며 남조시대 불교를 공전의 전성 시대로 만들어 '황제 보살'로 불려지기도 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부정 부패를 막지 못해 자신은 물론 국가까지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대의 문화는 육조 문화라 일컬어 중국 문화의 중심이 되는 황하 유역으로부터 강남 지방(양자강 유역)으로 옮겨져 화려하고 정교한 육조 문화를 이룩하였다. 문학에는 전원시의 창시자이며 귀거래사. 도화원기로 유명한 도연명, 서도에는 황희지, 회화에는 화성고개지 등의 명인이 배출되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 수나라
<대륙의 동맥 대운하의 건설>
후한의 몰락 이후, 분열의 상태가 자그만치 370년간 지속되면서 다시는 오리라 믿기 어려웠던 중국사회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581년 외척 양견이 북주의 왕위를 찬탈, 수나라를 세우더니, 마침내 589년에는 진을 멸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했다. 그가 수 문제다.
문제는 통일의 힘으로 발휘되었던 백성들의 측정할 수 없는 열기를 토대로 정치에 힘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당제국의 기초가 되었던 각종 제도들은 바로 문제가 북조의 각 제도를 수렴하고 정비해낸 것들이다.
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와 조용조의 세제, 문벌에 의한 9품관인법에 대신하여 중소 지주층의 관계진출의 길을 연 과거제, 3성 6부의 중앙관제 등이 실시되었다. 주, 군, 현의 지방행정 조직이 간소화되어 주현제로 정착하게 되었고, 인보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의 개혁에는 물론 지방 문벌귀족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다. 18년이 경과하자 수의 호적 대장에 등재된 호구수가 400만 호에서 500만 호로 불어났다. 수도 장안의 창고에는 조정이 60년을 족히 사용할 만한 곡물과 피륙이 쌓이게 되었다.
수 양제는 문제의 둘째 아들로 어린 시저부터 뛰어난 용모와 재능으로 양친의 사랑을 독점했다. 그는 13세에 이미 진왕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형 양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일설에는 문제도 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다. 문제가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면, 양제는 대운하를 개통하여 남북 문물교류를 활발히 함으로써 오랜 남북 분열을 통합하고 통일을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진의 상징물이 만리장성이라면, 수의 중국 재통일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대운하를 꼽을 수 있다.
남북조 이래 강남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이미 중원을 능가할 정도로 증대됨으로써 대운하의 완성을 재촉했다. 특히 양자강 유역의 쌀을 수도인 장안과 동도 낙양 등의 소비도시에 직송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양제는 대운하의 완공으로 보급로가 정비되자 곧 바로 고구려 대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형으로, 주요 강들은 3천m가 넘는 서쪽의 산지에서 발원, 동으로 흘러간다. 대운하는 이들 주요 강 이른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단강, 즉 5대 강의 하류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605년부터 610년까지 4차 공기로 나뉘어 건설된 대운하는 북으로 북경, 남으로 항주에 이르는 장장 2천km의 거대한 물길이다, 이로써 실핏줄처럼 얽혀 있던 각 강의 지류들이 서로 연결, 중국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관류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관용 수로로 출발했던 대운하를 따라 점차 민간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활발한 사람들의 왕래는 중국 내 문물의 교류를 더욱 촉진, 사회의 통합을 재촉했다. 물론 이러한 결실은 거대한 중국의 다른 문물이 그러하듯이 백년쯤 지난 당대에 맺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리장성처럼 대운하도 역시 그동안 역대왕조에서 개별적으로 추진되던 것을 통일국가에서 완결을 본 형태지만, 이 운하의 건설에 바쳐진 백성들의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운하의 양 언덕에는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었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서, 복수 복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참으로 고대의 웅대한 문화유산들은 오로지 전제국가들이 무수한 노동력을 강제 징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운하의 건설에 매월 100여만 명, 만리장서의 보수, 축성에 10만 명 동도 낙양과 이궁의 건설에 200만 명이 동원되었다. 가령 강남의 훌륭한 목재 한 개를 낙양에 운반하려면 2천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야 했다. 낙양은 동주시대 이래 중요성은 인정되었지만, 대개 역대왕조에서 천혜의 군사요충지이자 관중의 곡창지대를 거느린 장안의 세에눌려 있었다. 그러나 강남의 경제가 개발되고 대운하가 건설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남북의 운하가 합류하는 낙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지금도 낙양 주위에는 큰 건물이 들어갈 정도의 대형 곡물창고들이 발굴되고 있다.
웅장한 낙양성은 전국에서 수집한 진기한 동식물들로 가득했다. 장안에도 전한시대의 장안성 동남쪽에 거대한 대흥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장안의 서원은 둘레 2백 리의 거대한 궁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안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인공산을 조성했다. 거대한 인공산 위로는 궁전, 망루 등이 장관을 이루었다.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면 색색의 비단으로 꽃과 잎새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았고, 임금이 배라도 탈 양이면 얼음을 깨뜨려 앞길에 꽃을 흩뿌렸다.
또 장안에서 강도(양주)에 이르는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이궁을 지었다. 양제는 운하 양옆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사이로 거대한 운하를 따라 뱃놀이를 즐겼다. 순행을 빙자한 수만 척 배의 행렬은 2백 리에 달하고, 노를 젓는 사람만 8만 명, 황제가 탄 이른바 용선은 4층에 길이 600m, 12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운하의 양쪽 언덕에는 호위병사들의 황금 갑주가 눈부시게 빛났으며, 군대의 휘황한 깃발이 하늘을 덮고, 대행렬의 그림자가 강물에 출렁거렸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제왕의 화려한 생활은 중국의 고대제국에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 당나라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618년 이연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때 후량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의 흥기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정치】 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진양에서 반란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방면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 등과 더불어 거병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618년 수의 양제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를 협박하여 선위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당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세민이었는데, 형이며 태자인 건성과 동생 원길이 시기하자, 세민은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의 난이라 하며, 세민이 곧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이던 돌궐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하게 되어 국위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의 치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후광은 뒤를 이은 고종 때까지 미쳤으나, 고종이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이었던 무씨를 황후로 세움으로써 이른바 여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기 아들인 중종과 예종을 폐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주로 개칭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로서, 재위 16년간은 악랄한 책략과 잔혹한 탄압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반대파의 쿠데타로 황제에 복위한 중종은 국호를 당으로 복구시켰으나 황후 위씨 또한 실권을 쥐고 중종을 독살한 뒤, 권력을 휘두르는 등 무후시대의 정정이 재현되었다. 위씨 일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예종을 복위시켜 당조(唐朝)를 명실공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자가 이융기, 즉 현종이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사회안정에 힘써서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어 당의 최성기를 이루었다. 현종의 치세는 선천(先天) 1년, 개원 29년, 천보 15년을 합쳐 45년간(712∼756)인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이 만발하여 서울 장안(長安)은 명실공히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번영은 궁중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일 뿐, 그 이면에는 균전제(均田制)의 모순이 격심해지고, 농민은 변경으로 강제 출병되고 중세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의 천보시대에는 당조 와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랜 통치에 권태를 느낀 현종은 양귀비(楊貴妃)를 얻어 연유를 일삼고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을 재상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는데, 755년 평로 등 3지구의 절도사를 겸하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의 제거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뤄양에 이어 장안을 점령하였다. 현종은 쓰촨에 피란하고 그 도중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부장 사사명에 이어진 이 반란은 9년 동안 계속된 끝에 이민족의 도움으로 겨우 그 예봉을 꺾을 수 있었으나, 조정측에서 완전히 평정할 힘은 없었다. 이 반란으로 균전법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 중국사회는 몰락의 첫발을 내디뎠으며, 반란 후 당조의 정치체제도 일변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부장들은 허베이·산둥을 점거, 조정으로 하여금 절도사의 지위를 승인하게 하였다. 또한 반란 중에 조정에서 전국 곳곳에 절도사를 둠으로써 번진체제가 전국에 미쳐 조정 자체가 하나의 번진으로 격하되는 듯한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번진의 절도사란 몇 개의 군진을 관할하는 지휘관인데, 현종 때 모병제가 실시되자 많은 병사를 마음대로 모집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어 대종·덕종 때는 이들의 횡포와 반란에 시달려 덕종은 조명을 거역하는 허베이 제진의 토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도】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과거의 제도를 집대성,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3성(省) 6부(部)를 두어 국정을 관장하였고, 지방은 10도(현종 때는 15도)로 나누어 그 밑에 주(州:郡으로도 개칭)·현(縣)을 두었다. 도는 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으로,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으나 후에 순찰사를 두어 지방의 감찰임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주에는 자사(刺使),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일반민은 향(鄕:500家)·이(里:100家)·인보(隣保:5家) 제도에 따라 조직되어 현의 지배를 받았다. 이의 책임자인 이정은 민호의 가족 수와 토지를 호적에 올려서 토지의 환수, 부세의 징수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다. 일반민의 대부분은 이른바 균전농민(均田農民)으로 나라에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직접 국가에 조용조를 바쳤다. 이 밖의 의무로서 병역·잡요가 있었으며, 병사로 뽑힌 자는 병역기간 중 국도의 경비, 변경의 방위, 향리에서의 동계교련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그 지방의 절충부에 소속되어 있어서 부병이라 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데는 고관의 자제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조의 관위(官位)에 따라 임명하는 은음제와 학과시험에 의한 선거로 하였다. 이러한 여러 제도와 국가통치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이라는 독특한 법체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이 중 율은 금지법, 영은 행정법규, 격은 증보개정법규, 식은 시행세칙이다. 그러나 율령제도도 후기에 와서는 무너지고, 농정의 기반을 이루었던 균전제도 역시 지배층의 장원제에 의해 유명무실화하여 조용조제에 대신해서 대토지의 사유를 인정하는 양세법을 제정하였다. 국방의 근간을 이루던 부병제도 역시 현종 때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에 대신해서 실시한 병제는 절제사의 세력을 비대화해서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을 약화시켰다.
【문화】 유학(儒學)에서는 공영달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에 관한 주석을 정리·종합해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 《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수서(隋書)》 《진서(晉書)》 및 《남북사(南北史)》와 같은 전대의 왕조사가 편찬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독자성을 고양하고 여기에 선종의 학설을 도입한 한유·이고의 고문운동은 후대의 송학을 앞지르는 선구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이었다. 당대의 문학은 귀족문학으로서 시(詩)·문 모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문학사상 초당(初唐:국초에서 현종까지 약 100년간)·성당(盛唐:현종∼숙종 50년간)·중당(中唐:代宗∼文宗 70년간)·만당(晩唐:문종∼唐末 80년간)의 4기로 나누고 있다.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중당기에 한유·유종원(柳宗元)이 출현, 고문(古文)을 부흥하여 종전에 형식미(形式美)만을 추구하였던 변려체(儷體)를 배제하자는 고문운동이 일어났으며, 《유선굴(遊仙窟)》 《회진기(會眞記)》 《이혼기(離魂記)》 《이왜전(李娃傳)》 등 문어체소설(文語體小說)이 나타나 문장의 묘미를 보여 주었다. 특히 관리를 임용하는 선거에서 작시(作詩)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시는 공전절후의 성황을 이루어 오언 및 칠언의 율시와 절구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두보의 2대 시성을 비롯하여 시화일치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 정로이별을 읊은 고적·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원진(元),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온정균)이 나왔다. 산문 분야에서는 수대의 괴기전설을 원류로 하는 전기소설이 많이 나왔다. 음악분야에서는 한(漢)나라 이래의 아악(雅樂:궁중음악)·속악(俗樂:민간음악) 및 호악(胡樂:西域音樂)이 정착되고 특히 호악이 번성하였으나 말기에 가서는 서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호악도 쇠퇴하였다. 또한 음악연주도 궁중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어 신속악조(新俗樂調)라고 하는 음악이 흥성하였다. 서화(書畵)·조각(彫刻) 등의 미술에 있어서도 수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켰으나, 중기 이후 크게 변모한 면도 있다. 종교에서는 특히 불교가 발전하여 수 이래의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이 종래의 여러 교의(敎義)를 집대성하고, 현장(玄)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경전(經典)의 번역사업을 일으켜 법상종(法相宗)을 확립하였으며, 당과 인도 사이에 승려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 황소의 난 *
안사의 난 이후 번진 세력의 발호와 환관의 발호 및 환관파와 조신파와의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마침내는 당왕조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당의 희종(僖宗) 중화 원년(881) 1월 8일 이 날은 당나라 수도 장안의 역사에 대서특필할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이날 아침 당나라 제18대 황제 희종이 장안의 서문인 금광문을 빠져나와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장안의 동문 춘명문으로부터는 반란군의 수령 황소가 대군을 거느리고 금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위풍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장안의 백성들은 조수처럼 길 양쪽에 밀려들어 반란군을 환영했고 태극궁에서 연금 생활을 보내던 궁녀 수천명도 거리에 뛰쳐나와 황소를 환영하였다. 반란군의 장병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보면 의복과 금품을 나눠 주는 등 이날 하루는 장안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축제의 날이었다. 황소는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하였으나 과거 시험에는 낙방하였다. 황소의 집은 소금을 밀매하고 있었는데 왕선지 또한 같은 소금 밀매업자였다. 874년 왕선지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황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다.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충해로 인하여 고향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자들이 속속 그들의 휘하로 모여들어 삽시간에 수천명의 군사를 모을 수가 있었다. 왕선지와 황소는 일정한 거점을 정해두고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공격하는 작전을 폈기 때문에 토벌하는 관군측에서는 포착하기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을 겼었다. 당시 천하는 크게 소연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왕선지.황소 두 사람뿐이 아니었고,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은 절서 낭산진의 장교 왕영도 반란을 일으켰고 섬주.염주.하중 지방에서도 병란이 일어나 천하는 점점 소연해졌다.
대부분이 북방 출신인 황소군의 장병들은 영남의 풍토에 익숙지 못해 병사하는 자가 잇달아 발생하여 10명 가운데 3,4명이 죽는 상태에 이르렀다. 황소는 부하들의 권유에 따라 공격 방향을 북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북쪽으로 돌아가 큰일을 도모하자."
이것이 황소군의 구호였다. 큰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시시하게 절도사 따위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황소군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황소의 북벌군은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계림에서 상강의 흐름을 타고 형주.영주를 지나 담주를 격파하였다. 이 곳에서 정부군 10만명이 소멸되어 시산혈해를 이루었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황소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니 지나는 곳마다 속속 황소군에 항복하였다.
황소는 장안에 남아 있던 황족 전원을 몰살하고 12월 임진일에 함원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칭하였다.
대제 금통 4년, 즉 883년에 이르러 황소군의 전력은 눈에 띌 정도로 약화되어 장안의 남.서.북은 모두 당군에 의해 봉쇄당하게 되었다. 동쪽(낙양)으로 통하는 길은 원래 황소군의 부장 주온(朱溫)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소군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주온이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낙양과의 교통도 차단당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장안은 점점 고립 상태에 빠지고 물자마저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주온의 배반은 황소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당왕조에게는 천병만마나 다름없는 큰 힘이 되었다. 당왕조에서는 주온에게 요직을 내리는 한편 전충(全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하였다. 이후부터는 주온을 주전충이라 일컫기로 한다.
주전충이야말로 당나라에 이어 5대 10국의 하나인 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인물이다. 장안에서 탈출한 황소는 추격하는 주전충.이극용과 1년 이상 싸웠으나 패배를 거듭함으로써 거의 전멸 상태에 빠졌다. 금통 5년(884) 6월 황소는 겨우 1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태산 동남 낭호산으로 도망쳤으나 호랑곡 전투에서 패하여 자결로써 일생을 마쳤다. 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어 그후 23년간 겨우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이 23년 동안은 번진(절도사) 세력이 강성하여 환관들을 모조리 죽이고 살아 남은 조정 중신들도 모두 황하에 던져 죽임으로써 당왕조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907년에 이르러 선무 절도사(하남성.산동성.안휘성 일대의 장관) 주전충이 당왕조 최후의 황제 애제(哀帝)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의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양(梁)이라 하니 이 나라를 역사상 후량(後梁)이라 부른다.
이렇게 해서 당왕조는 고조로부터 20대(代) 290년 동안 이어오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송나라
송의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명군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영명한 점으로는 당태종 이세민을 능가한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조광윤은 제위에 오르자 문치주의로 무인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뒤를 이은 동생 태종도 태조의 유업을 이어 중국 통일의 여세를 몰아 후진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바쳤던 연운 16주의 수복을 꾀하여 요와 싸웠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진종.인종 시대에는 국력이 신장되고 번영하였으나 요와 서하의 침입을 받는 등, 인종 말년부터는 급격한 군사비의 지출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그 뒤를 이은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부국 강병을 위한 신법(新法)을 단행하였으나 구세력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 없이 폐지되고 말았다. 그후 12세기 초엽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북부 중국에 침입하여 1127년에는 송나라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흠종이 포로가 되어 연행됨으로써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이때까지의 9대 168년 간을 역사상 북송이라 하고,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강남으로 난을 피하여 임안(항주)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이은 후부터를 남송이라 한다. 남송은 금나라를 물리치기 위하여 주전파인 악비 등이 분전하며 한때는 유리한 형세를 형성하였으나 강화파인 진회 등이 정권을 잡아 오로지 강화 정책만을 고집하여 주전파인 악비 등을 모반죄로 몰아 죽이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소강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몽고가 서하.금나라 등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남송에 침입해 왔다. 남송에서는 항전파인 문천상.장세걸 등이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9대 152년만에 몽고의 원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송나라는 문화 국가를 표방하였으므로 이 시대에는 많은 문인.학자가 배출되어 여러 가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자치통감'의 사마광,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 당송 사대가인 구양수.소동파 등은 이 시대의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 원나라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 명나라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 중국 민족은 몽고족(원나라)에 정복되어 약 100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몽고족의 압박에 시달리던 중국인들은 원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홍건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홍건적의 두목이던 주원장은 마침내 몽고족을 몰아내고, 1368년에 도읍을 양쯔 강 유역인 금릉(지금의 난징)으로 정하고 명(明)나라를 세웠다. 명나라 태조가 된 주원장은 홍무제(洪武帝)라 불리었는데, 그는 몽고족 밑에서 시든 중국 고유의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는 송나라 때와 같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직결시키는 황제 독재 체제를 택하였다. 우선 재상 제도와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각각 독립시켜 황제가 직접 지배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어사대를 도찰원이라고 고치고, 황제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게 하였다.
지방은 13개 지역으로 나누고, 포정사라는 관리를 두어 각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농촌에는 이갑제를 실시하여 시골 구석구석까지 통치력이 미치도록 하였다. 한편 세금의 징수와 부역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토지 대장인 어린도책과 세금 대장인 부역황책을 만들었다. 어린도책이란 토지의 모양이 고기의 비늘과 같이 나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락제 이후 나라가 차츰 기울게 되자, 이틈을 타서 세력을 되찾은 몽고족이 다시 침입해 왔다. 한때는 수도인 베이징까지 쳐들어와 임금을 사로잡는 일도 있었다. 한편 남쪽 해안 지대에는 왜구의 출몰이 잦아 피해가 컸는데, 이러한 남북으로부터의 외환을 북로 남왜라 하였다. 북로 남왜는 명나라가 쇠퇴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신종(만력제 : 재위 1572∼1620년) 때에는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였으나, 우리 나라의 임진왜란에 참전함으로써 나라가 다시 기울어졌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를 위협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여진족을 막기 위하여 세금을 과다하게 거두어 농민들의 저항을 받았다. 마침내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 청나라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명나라의 힘이 약해질 무렵, 만주의 여진족은 차차 힘을 키워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성경(지금의 선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누르하치(태조)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태종(재위 1626∼1643년)은 만주뿐만 아니라 내몽고까지도 정복하고,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고쳤다. 다음의 세조(순치제 : 재위 1643∼1661년)는 명나라 장군 오삼계 등의 힘을 빌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군대를 쳐부수고, 베이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남쪽 지역과 타이완에서는 청을 반대하는 세력이 남아 있어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제4대 성조(강희제 : 재위 1661∼1722년) 때에 이르러 '삼번(三蕃)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에서 반항을 계속하던 정씨 일족도 굴복시켜 중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들은 한인(漢人)들에게 자기들의 풍습인 변발과 만주복을 강요하여 한인들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국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동일 관직에 만주인과 한인을 병용하는 만한 병용제를 실시하고, 조세를 가볍게 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옛날 원나라(몽고족)가 중국을 통치하던 방법과는 다른 것으로 청나라가 한족을 300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청나라는 통일을 완성시킨 강희제로부터 다음 옹정제를 거쳐 제6대 건륭제 시대까지의 약 130년간이 전성기였다. 강희제는 중국에 접근해 온 러시아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는 동시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았다. 또 몽고를 공격하여 외몽고 일대를 영토로 삼고 티베트도 청나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옹정제 시대에는 티베트와 칭하이 지방을 청나라의 세력 밑에 넣고,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1727년)을 맺어 외몽고를 국경으로 정하였다.
건륭제는 이웃 민족들에 대해 적극적인 정복 정책을 써서 많은 속국을 만들었다. 곧 서쪽의 위구르를 정복하고, 다시 남장에 진출하여 안남(베트남)·미얀마·시암(타이) 등지를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 영토는 몽고 제국 다음 가는 큰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건륭제>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 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 ·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 ·유학생 ·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 중화민국
청말 세계의 열강들이 거대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중국 사람들은 서구의 발달한 문명 앞에 너무나도 무력한 봉건주의 체제 아래 놓여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1840년에 일어났던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중국이 영국의 해군력 앞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굴복을 하게 되자 중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 수천 년을 두고 굳혀져 왔던 중화(中華)사상도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1850년 태평천국의 난과 1856년의 애로호 사건 등은 서양 근대문명의 강력한 힘을 더욱 실감케 하였다. 이제 중국은 스스로 깨어나 세계 열강들의 움직임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중국의 힘을 부강하게 하려는 수많은 움직임이 다양한 방면에서 일어났다. 특히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배워다 중국을 부강케 하자는 양무(洋務)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것을 모체로 하고 서양의 것을 응용한다)을 주장하였으므로, 서양의 근대적인 정신과 체제가 아닌 그 발달된 기술에 관한 것만을 배우길 바랐다. 결국 그들은 근본적인 면에서 시종 중화적 사고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894년에 중국은 일본과의 청일전쟁(淸日戰爭) 에서 또 한 번 크게 패배했다. 이미 메이지 유신 등의 근대화 정책으로 힘을 기른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무참히 수포로 돌아가자 많은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의 모방을 통한 현대화가 더 이상 중국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곧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만이 사경에서 헤매는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일전쟁 후, 중국에는 두 유형의 변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청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그 안에서의 개혁을 추구하는 변법(變法)파로서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담사동(譚嗣同) 등이 중심이 되었다. 다른 한 파는 소위 청조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근대 정부를 세우자는 손문(孫文)의 혁명파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던 19세기 말엽의 지식인에게 혁명사상은 다소 과격하여 수용되기 어려웠으므로, 그들 대부분은 변법의 개량에 동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따라서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서방의 학술을 도입해 백성들을 계몽시키는 각종의 죄들, 예를 들면 신문사, 출판사, 학교 등의 설립을 주창하고 조정도 이에 적극 동참하여 줄 것을 기대하였다. 당시 청조의 황제인 광서제(光緖帝)도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이를 후원하였다. 그러나 수천녀네 걸친 정치 전통과 사회제도 등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수천년에 절친 정치 전통과 사회제도 등을 단번에 개혁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유신변법(維新變法)은 견고한 당시 보쉐력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광서제는 보수파의 시력자인 서태후(광서제의 선제인 동치제의 생모)에 의해 연금당하고 강유위, 양계초는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결국 이 새로운 시도는 시행 1백일 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술변볍이 실패로돌아간 다음해인 1899년에는 의화단(義和團)이 중국인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하는 평원현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국인들은 계속되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사회혼란으로 인해 각지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자주 서양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였는데, 이 의화단의 난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의화단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북, 북경, 천진, 산서, 하남, 내몽고, 동북 등지로 발전해 갔다. 의화단이 내건 구호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붙들어 일으키고 서양세력을 내쫓고 침략자를 내몰고 국가를 재건하자는 것이어다. 그러나 이들이 택한 방법은 서양 선교사 살해와 교회방화, 철도 파괴 등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결국 의화단은 열강 8개국(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의화단의 난을 구실로 중국에서의 지분을 더 챙기고자 했던 여러 열강들은 진압을 위해 출병한 군대를 철수를 조건으로 이제까지 받았던 이권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교섭과 타결될 때까지 각지를 점령하였다. 결국 1901년 청조는 열강에 항복하고 신축조양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내용은 막대한 배상금 지불, 외국군대의 북경 주둔 인정 등을 담고 있어 중국은 사실상 열강의 공동 관리 밑에 들어간 셈이 되었다.
이렇게 중국은 1840년부터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을 겪었으나 한 번도 상대방을 제압해 보지 못하였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혁신운동도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들은 망국의 위기에 대한 각성을 하기 시작했으며 자연히 민족주의도 발흥하게 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정보의 출현과 제국주의 열강의 축출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혁신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위기를 느낀 청조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입헌(立憲)운동 등을 벌였다. 그러나 청조는 개혁정책은 철저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이에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들은 1905년 일본의 동경에서 중국동맹회(국민당의 전신)를 결성하고 청조 타도를 외치며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의 이념은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을 주장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였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도 혁명세력이 성장하여 1911년 10월 11일 마침내 호북성 무장에서ㅢ 군사봉기가 성고앟자 혁명은 전국을 휩쓸었다. 이 무창봉기 이후 각 성(省)은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혁명파는 1912년에 드디어 남경(南京)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손문이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동맹회는 국민당으로 창설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이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조의 260여 년에 걸친 통치가 끝나고 2천여 년 동안의 황제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근대 민주주의 정부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중화민국 내에서 혁명파들은 혁명을 주도적으로 실행해 나갈 실질적인 힘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여 보수세력들의 군사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또 다른 보수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또한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이 모두 손문의 삼민주의를 지지하여 근대적인 민족 민주국가를 세우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분위기에 밀려 참가한 군벌세력도 있었는데, 이들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있는 원세개(遠世凱)를 총통으로 앉히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타협 끝에 손문이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원세개는 민족주의에 불타거나 혹은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대총통의 자리에 취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개인적인 야심에 가득 차 다시 황제지배 체제로 바꾸어 자기 자신이 직접 황제로 즉위하려고 하였다. 혁명세력은 원세개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있지 못했으므로, 이런 원세개의 야심과 복고주의적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1913년 의회가 해산되고 국민당은 사라졌다.
손문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다시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손문은 이 조직을 바탕으로 활발한 공작을 하여 제2혁명, 제3혁명을 거듭 일으켰으나 중국을 장악하지 못했다.
1919년 혁명세력은 겨우 광주지역에 혁명파의 거점을 마련하고 광주에서 다시 국민당의 이름으로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대 말까지 중국은 원세개의 뒤를 이은 여러 군벌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국민당은 각 지역에 할거한 군벌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 중화인민공화국
전쟁 이전까지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곁으로는 일본과의 싸움에 온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로는 일본 패망 이후 중국에서의 패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 등으로 일본과의 전쟁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전쟁 이후의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계가 양세력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던 전쟁 이후의 새로운 중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
2.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
3.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 당나라의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
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며 국력을 강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다시 한번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비해 모택동은 전쟁 이후 새로운 국가형태를 연합정부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은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를 단결시켜 민주적인 임시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며, 당면 위기를 극복하여 전중국의 항일세력을 통일,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후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들어 해방 이후 중국 전인민들을 이끌어 중국을 하나의 독립된 자유·민주·통일국가로 건설해야 한다」
2차대전의 전세가 일본 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사건은 소련의 극동전선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은 1945년 4월 얄타회담에서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8월부터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 9일 소련군은 극동의 500km 전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약 150만 명이다. 소련군은 8월 중 하얼빈, 여순, 대련 등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만주의 괴뢰정부 만주국도 끝을 맺었다. 일본은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에 굴복하여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지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최후의 한판이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오랜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말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을 받아 중경으로 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평화교섭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는 미국 대사가 함께 했다. 미국은 당연히 국민당 정부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의 도움이 없다면 공산당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겉으로는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하면서도 은밀히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타격을 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했을 1945년 당시 전력에서는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모택동과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0월 국민당 정부는 약 200여만에 가까운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했다. 물론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했다.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내정간섭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1946년 1월 미국특사 마셜의 조정에 의해 국·공 양당의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각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가 중경에서 열렸다.
국민당은 정치협상회의의 결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협의를 하고도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정치협상은 만주지방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깨지고 만다. 국민당은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고, 그 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이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로 번지게 된 것이다.
두 세력의 싸움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있었다. 그 점에서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앞서있었다. 실제적인 군사력은 약하지만 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인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토지개혁은 인민들을 공산당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946년 6월 200만에 가까운 국민당군이 화북과 화중의 대규모 홍군 근거지를 공격했다. 홍군은 화중지방, 양자강 하류 등의 거점에서 밀려났다. 국민당은 47년 3월 대장정 이후 심장부였던 연안을 점령했다.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공격대상이 되는 도시거점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대를 빼돌려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택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중에도 두 세력 사이에는 평화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어느 쪽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47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총통인 자신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을 채택했다. 공산당도 역시 47년 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전복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3월에는 중경, 남경, 상해, 북경 등지에 남아 있던 공산당 대표단이 철수했다. 협상은 끝이 났고, 싸우는 일만 남게 되었다.
초반에는 국민당이 군사적 우위에서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난 47년경에 이르면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의 부패, 그리고 생존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이미 민심을 잃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물가폭등에 대한 도시 노동자들의 항의시위가 계속되었고 농촌에서는 납세거부 시위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장악한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도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특정지역을 방어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붕괴시키고자하는 공산당의 계획은 성공하고 있었다.
1947년 홍군은 전세가 유리해진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47년 말 홍군은 하북, 산서, 산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46년에 국민당군 400만에 대해 100만에 그쳤던 공산당 군대가 200만으로 증가했다.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는 엄청난 물가상승 등 경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화폐를 월급으로 받지 않으려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실업자도 늘어났다. 궁지에 물리기 시작한 장개석은 1949년 남경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공산당과의 평화교섭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답으로 공산당은 8개항의 평화안을 제시했다.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른 군대 재편성.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 등을 요구한 것이다. 장개석은 이미 대세가 기운은 것으로 판단, 49년 봄부터 정부의 금괴와 정예부대를 대만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전 3년 만인 49년 1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했다. 4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남경을 점령했다. 남경 국민당 정부는 광동과 중경, 다시 성도로 옮겼다가 49년 12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대만으로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공산당 창당 이후 30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수도는 북경, 주석에는 모택동이 선출되었다. 30년에 걸친 긴 내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공산당이 된 것이다.
<문화 대혁명>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의 중국은 장기간의 내전으로 피폐해 있었으며 아직도 많은 반공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에 모택동은 국가발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5대 운동(토지개혁운동, 3반5반 운동, 반혁명진압 운동, 사상개조 운동, 항미원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가발전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5대 운동이 끝나자 중국공산당은 두 가지의 장기발전 목표를 선포하였다. 하나는 사회주의 개조이다. 이 사회주의 3대 개조는 급속히 추진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은 이 3대 개조가 원래 목표보다 12년 빠른 1956년에 일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경제 조건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임금은 높아졌으며 실업자는 줄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모택동은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을 일으켜 공개적인 언론의 자유와 당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였다. 공개적인 비판을 통해 당의 관료주의. 분파주의를 극복하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의도였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의 기반이 잡혔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자유의 고양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비판으로 전개되자 1957년 모택동은 이것을 반우파(反右派) 투쟁으로 연결시켰다. 곧 공산당의 지도권을 부정하거나 비판을 가한 사람들은 모두 부르주아로 지목되어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비판을 당했다.
이 때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이념논쟁이 일어나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모택동은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스탈린식 모델보다 더욱 급진적인 '삼면홍기(三面紅旗, 대약진, 인민공사.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 정책을 실시하였다. 중공업 정책이 적극 추진되었으며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인민공사(人民公司)가 만들어졌다. 인민공사에서는 공급제와 임금제가 채용되었는데, 식비는 노동의 유무에 상관없이 인민공사가 지급하고 일정 등급에 따라 임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임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과도 맞지 않아, 농민들에게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키지 못했다. 결국 대약진 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성장우위 정책과 과격한 농촌집체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후 유소기(劉少奇)와 등소평(鄧小平)은 피폐한 국민경제의 회복을 위한 경제조정 정책을 실시하면서 자본주의적 방법을 도입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권력에 불안을 느낀 모택동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켜 격렬한 반우파투쟁을 일으켰다. 그는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 인물과 당내의 자본주의적 실권파를 공격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 선봉대를 혁명적인 청소년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청년 노동자, 대학생, 중학생, 심지어는 소학교 학생까지 가담한 홍위병이라고 불리는 단체가 무수히 만들어지면서 모택동의 외침에 호응하여 일제히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이러한 광기를 동원하여 유소기, 등소평 등을 자기비판하게 하여 실각시키는 한편. 사회 전체를 경직된 사회주의 분위기로 만들었다. 이 문화대혁명의 열광적인 반우파투쟁은 소위 4인방이라 불리는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강청 등 4명에 의해 지속되다가 모택동이 죽자 급속히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