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의 융합을 상징하는 동림사 녹나무
1500년의 나이답지 않게 수세가 왕성한 녹나무
동림사(東林寺)는 중국 여산(廬山)의 서북쪽 기슭에 있는데 서림사(西林寺) 대림사(大林寺)와 더불어 여산의 3대 사찰로 꼽히는 고찰로 구강에서 멀지않다.
동림사는 동진(東晉, 312~420)의 명승 혜원대사(慧遠大師)가 386년에 창건한 사찰로 서림사(377년)보다 9년 늦었으나, 동진시기에 중국 남방불교의 중심지였으며 당나라 때는 전각과 승사가 310여 칸, 승려 수가 수천 명, 소장 불경이 수만 권에 달하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항일전쟁시기(1937~1945)에 모두 파괴되고 부서진 전각 한 동만 남았는데 지금은 옛 모습을 거의 복구하여 1983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당시 동림사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혜원 스님이 손님을 배웅하려고 이 시내를 건너면 뒤 산의 호랑이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내가 ‘호계虎溪)’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문을 들어서면 노목의 위용을 자랑하는 녹나무
호계를 지나 ‘수읍여산(秀挹廬山)이라 쓰인 산문을 통과하면 수령 1500년이나 된다는 녹나무(樟木)을 만나게 된다. 수고 15.4m, 가슴높이둘레 6.2m나 되는 거목이 50cm 정도 높이로 쌓은 돌 축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산문에서 보는 나무모양은 굵은 가지가 하늘로 뻗어나간 모양이 노목의 형상을 띠고 있으나, 반대편에서 보는 나무모양은 반원형을 그리는 장년의 모양 세를 하고 있어 수형이 아름답다. 아열대지방에서 보는 녹나무는 대개 호흡근이 치렁치렁 늘어져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으나, 이 나무의 호흡근은 나무줄기에 약간 붙어 있을 뿐 비교적 단정한 모습이다. 줄기에는 작은 가지들이 붙어 잎을 달고 있어 매끈한 모습은 아니며 1.5m 정도에서 큰 구멍이 나 있어 오랜 세월 역경을 이겨낸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구멍이 난 상처 위에서 여러 개의 가지를 내고 있다.
많은 가지를 달고 있는 녹나무의 줄기
동림사에는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의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우리들이 동림사 앞을 흐르는 호계에 놓인 호계교(虎溪橋)를 건너면 오른쪽에 ‘호계교’라는 돌에 새긴 오래된 비석이 있고 바로 뒤에 호계삼소정이 있다. 이 호계삼소정에는 소동파가 쓴 시 ‘삼소도찬(三笑圖讚)’이 금가루로 새긴 오석의 비가 있다.
혜원 스님이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의 방문을 받은 어느 날, 이들을 배웅하다가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호계교를 넘어버렸다. 그러자 뒤산의 호랑이가 울었고 세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호계삼소’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혜원․도연명․육수정이 고담준론에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넘어버린 호계교
혜원이 입적할 때 도연명의 나이가 50세였고, 육수정의 나이는 10여 세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이 세 사람이 함께 모여 담론을 주고받을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야기의 사실여부를 떠나 이 고사는 유교와 도교에 대해 혜원의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불교가 도입된 초기에 유교와 도교를 지배하고 있는 중국사회에 불교가 손을 내밀어 타협을 요청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유학을 신봉하는 사람이고 육수정은 도사(道士)이다. 그러므로 이 고사는 이 시기 유(儒)․불(佛)․도(道) 삼교의 융합을 암시하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소동파의 ‘삼소도찬(三笑圖讚)’의 시비
이 녹나무는 호계삼소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이 호계삼소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 사람들이 호계삼소의 고사처럼 종교나 이념과 대립하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에 서로 돕고 보살펴주는 유․불․도 삼교의 융합의 정신을 가르치고 있는 듯 도도하게 동림사를 방문하는 세상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