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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준공40주년
공 사 개 요 1. 착공 : 서울~수원(오산) : 1968. 8. 1. 육군 공병대 시공 오산~대구 : 1968. 2. 1. 대구~부산 : 1928. 4. 1. 2. 준공 : 1970. 7. 7. (2년 5개월) 3. 연장 : 서울~부산 428km(추풍령->214km이정표) -> 현제 : 428km 4. 공사비 : 430억원(전액 대일청구금액, GNP 1인소득 $150) 1967년도 연예산의 23.6%(2018년도 수익 13조6,000억) 5. 노폭 : 당초 6차선계획(용지매수)=> 착공 4차선 6. 동원 인원 : 893만명, 부족인원은 형무소 제소자도 동원 7. 희생자 : 77명(추풍령휴계소 위령탑) 8. 동원 장비 : 165만대(외제 차관도입) 9. 사용자재 : 대일 차관에의한 완제품(페인트, 스카치테이프, 철제가드레일 등 일체)
경 과 1961. 5. 16.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GNP 1인당국민소득 $124, 한국 $87)일 때 이북만이라도 추월해 보려고 울산공업단지에 말뚝을 박고, 포항제철소를 계획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구상 해 보았으나 어느 나라 하나 돈 빌려줄 곳 없는 춥고 배고픈 나라여서 궁여지책으로 대일국교정상화에 시동을 걸어 보았으나 당시 서울시청앞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주변엔 시민단체와 야당 정치인들의 반대하는 시위가 격열 했으나 이나라 앞날을 담보하는 필사의 결단으로 1965년 대일 유무상 5억$을 받아 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당시 이름도 생소한 경제개발 첨단산업인 공업단지가 가동 당계에 있어, 필수여건인 물류혁명임을 직시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건설을 여기서 받아낸 돈으로 첫 삽을 떴습니다. 그러나 한치 앞도 못보는 야당 지도자들은 엉뚱하게도 김일성이 쳐내려올 길을 터 준다고 외치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저는 국내 최초 사우지(社友誌) 창간호에 경부고속도로건설의 필요성과 반대하는 야당 지도자를 질타하는 글을 올려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년(9.19선언)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북 땅 동서안에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건설해 주겠다고 장담한 망발은 6.25전범의 후손 김정은의 남침을 도와주겠다는 당신들의 말과 어떻게 다릅니까! 오늘날 이땅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때면 영웅도 때를 탄다고 백년대계를 직시한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드라면 누가 오늘의 영광을 쟁취 했을까?! 아찔합니다.
착공 1년전에 “국가기간 고속도로추진 위원회”를 개설하고, 현 청와대 압뜰 일본총독부건물 중앙청 내, 내무부에 건설국이 있어나 비좁고 인력난이라, 을지로6가에 “경부고속도로건설사무소”를 개소하여 기획하고 설계하고 온갖 준비를 허룸한 작업복에 도시락을 싸 들고 밤을 낮 삼아 부계표(현 품셈표)를 만들며, 공사비를 줄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당시 일본은 “도메이 고속도로(도꾜~나고야 간)”가 준공단계였는데, 우리의 설계와 공정표는 그 반으로 줄이는 데 주력해서 완결했습니다.
이리하여 시작된 건설현장 주변 관할관서는 물론 온국민은 총동원령을 내린 준전시 상태였습니다. 각 공구장은 육군대령, 산하공구 감독은 장교와 육군사관 생도를 동원했고, 준비된 현장원이 현장에 투입 될때는 주변 유관 관서와 주민과 자영업자들 까지 기다렸다는 듯 환영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진입 도로는 전무하여 장비와 인력 투입에 민원도 고충도 산적 했고, 통신 또한 불모지라 애로는 말로 표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현장원은 24시간 근무에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은 요령 끝 해야 했고, 모든 공종이 신공법이라 책을 구하기도 어려워 주로 일본에 주문하기에도 쉽지를 안았습니다. 값싼 공사비 때문에 준공 후유증도 적지않아 문을 닫은 업자도 생기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면 외상으로 구입한 유휴장비와 인력 과잉을 걱정하기도 했답니다. 그 후유증의 일환으로 한강개발이 한창일 때 반포지구의 한강 뚝과 수몰지 매립 유용하도록 특해를 준 3개 건설회사도 있었습니다.
이전에 “경인고속도로”는 욕심과 의욕만으로 소쿠리와 삽과 니아카를 굴리며 착공을 하였으나 가난도 한계가 있어 건설업자가 망하기도 했습니다. 응급결에 IBR 차관을 얻는데 국내 제벌 하나 없어 당시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 최상위 3개 건설회사를 묶어 “고속도로건설주식회사”를 설립, 겨우 돈을 빌려 착공을 했으나 외국 장비구입과 기술자 충원 등 난항이 산적 한때, 저 또한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직에서 건설회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이 도로를 타고 지나칠 때면 주변의 흙담 초가집 모습은 간데없고 세련된 농촌의 가정 집과 질서정연한 경지정리와 지방도시 등을 보노라면 눈시울이 떠거워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