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사의 역사
살사는 스페인어로 '소스(sauce)'라는 뜻으로, 여러 장르의 음악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는, 다양한 문화를 포함하는 음악 장르이다."
사실 살사를 정의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살사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지만, 살사는 많은 라틴 문화권 국가와 아프로-캐러비안 국가의 다양한 춤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춤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살사 댄스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음악의 탄생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살사 음악의 탄생
푸에르토 리코를 식민지화한 미국은, 1917년에 푸에르토 리코인들에게도 미국 시민권을 주기 시작했다. 그 이후 푸에르토 리코인들의 미국으로의 유입은 꾸준히 늘어났다. 그들은 뉴욕에 이웃해 있는 여러 도시들, 특히 브루클린, "엘 바리오El Barrio"라고 불려지는 이스트 할렘East Harlem, 로워 이스트사이드the Lower East Side, 어퍼 웨스트사이드the Upper West Side, 그리고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에 정착하였다. 1920년대 초반에 많은 쿠바 음악인들 또한 뉴욕으로 이주해 왔고, 같은 밴드에서 푸에르토 리코인들과 같이 연주하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라틴 음악과 재즈의 삼투현상이 일어나면서 서로 섞이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음악가들로는,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칙 웹Chick Webb,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알베르또 소까라스Alberto Socarrás, 마치또Machito, 마리오 바우사Mario Bauzá 등이 있다. 그리고 기타 다른 라틴 밴드 리더들 또한 미국 음악가들을 영입했다.
1960년대 후반, 쿠바의 수도 아바나와 미국의 워싱턴 사이의 외교관계가 끊긴 이후에는 푸에르토 리코인들이 뉴욕의 라틴 음악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소울 음악의 영향을 받은 부갈루boogaloo와 싱걸 링shingaling이 잠깐 동안 유행을 끌었지만, 이에 지겨움을 느낀 음악가들은, 다시 쿠바 음악의 뿌리인 손son, 볼레로bolero, 그리고 과라차guaracha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럼펫이 주로 연주되는 쿠바의 손son과는 달리, 트롬본이 주 악기가 되었고, 노래 가사는 뉴욕의 바리오스(barrios,스페인어 통용 지역) 생활을 노래했다. 이 새롭고 변칙적인 음악은 '살사'라고 불리우며 곧 뉴욕의 모든 라틴계 사회를 결집시키고, 또한 푸에르토 리코, 도미니카, 콜롬비아 및 라틴 아메리카의 리듬을 하나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업적인 음악 장르는 외우기 쉬운 이름을 필요로 하기에 "다시 만들어진 쿠바 댄스 음악"보다는 더 부르기 간편한 이름을 찾게 되었고, 이후 '살사'라는 용어는 각종 무대에서 흔히 사용하게 되면서 그 인기를 더해갔다.
살사 음악의 대표 주자로는, 피아니스트 에디와 찰리 빨미에리 형제Eddie and Charlie Palmieri, 꽁가Conga 연주자인 조 꾸바Joe Cuba 와 레이 바레또Ray Baretto, 트롬본 연주자 윌리 콜론Willie Colón, 얼마 전에 타계한 띰발레스 연주자인 띠또 뿌엔테Tito Puente(이들은 모두 푸에르토 리코 출신이며 뉴욕에 살고 있는 뉴요리칸(Nuyorican, 뉴욕에 사는 푸에르토 리코 출신)이다), 유태인인 피아니스트 래리 할로우Larry Harlow, 쿠바 출신 꽁가 연주자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 도미니카 출신 플룻 연주자 죠니 빠체코Johnny Pacheco가 있고, 가수로는 라 루페La lupe (곧 셀리아 끄루스Celia Cruz의 그늘에 가려져 버렸다), 헥토르 라보에Hector Lavoe, 루벤 블레이드Rubén Blades, 후스또 벤딴꾸르뜨Justo Bentancourt, 그리고 체오 펠리시아노Cheo Feliciano가 있다.
살사의 엄청난 성공에는 1960년대 중반에 제리 마수끼Jerry Masucci 와 죠니 빠체코Johnny Pacheco에 의해 뉴욕에 설립된 화니아 음반사Fania Record 의 공로가 크다. 빠체코Pacheco는 화니아Fania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뽑아서 '화니아 올스타즈Fania All-Stars'를 결성하여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했고, 많은 음반을 만들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살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이루다가 최근 다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이끌어가고 있다.
살사 댄스의 기원
살사의 조상으로는 먼저 단사Danza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아이티에서 도 망간 프랑스인들에 의해 전해진 영국과 프랑스의 콘트라-댄스Contra-Dance (Country Dance)와, 아프리카가 기원인 룸바Rhumbas가 섞여서 만들어진 춤이다. 그리고, 콜롬비아의 구아구안꼬Guaguanco, 쿠바의 손Son, 스페인의 소네로Sonero 등이 아프리카의 드럼 비트 등이 혼합되어 끌라베Clave(두 개의 막대로 된 타악기)의 리듬에 맞춰 추는 파트너 댄스가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차차차Cha Cha Cha, 꿈비아Cumbia, 맘보Mambo 등도 살사댄스에 녹아 들어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살사는 '양념(sauce)'이라는 뜻으로, 언제나 새로운 장르의 춤과 혼합되어 발전해 나가고 있다. 아르헨티나 탱고, 발레 뿐만 아니라 힙합, 브레이크 댄스, 심지어는 태권도의 동작까지 흡수하여 살사 댄스의 새로운 형태를 이루어 가는, 자유분방한 형식의 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페인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했던 콜롬부스가 도착한 곳은 카리브해였다. 이것이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다.
쿠바는 1492년에, 푸에르토리코는 1494년에 발견되었다.
당시 카리브 지역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은 황금의 나라를 꿈꿨던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정복되었고, 노예화 되었다.
가혹한 노예생활과 전염병에 의하여 그들은 거의 멸족하여 버렸다.
그래서 농장과 광산 등의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식민지와 노예제도의 끔찍한 역사가 약 400년간에 걸쳐서 계속된다.
흑인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고향을 그리면서 힘든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하여, 그들의 조국에서와 같이 북을 두드리고
조국의 말로 노래를 부르며 본능적인 그들만의 율동으로 춤을 추었으며, 그들의 신을 위하여 경배의 축제를 계속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에 아프리카의 문화와 스페인의 문화는 서서히 섞여 갔으며,
이로서 카리브해 특유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쿠바 기원설
살사의 시작이 쿠바에서 발생되었다는 설은 여러 가지 근거로 인하여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하다.
백인, 흑인, 그리고 혼혈의 전체적 인구구성의 복합적 영향을 민족 정체성의 기반으로 했던 쿠바는
이들 각각의 민족적 동질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음악장르가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son' 이라는 음악적 특징을 발생시켰으며,
이는 곧 쿠바에서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어권의 카리 브해 전역 문화권에 영향을 미쳤다.
발생 처음 몇 십년동안은 동쿠바에서 기원한 'son'은 점차 로 스페인에서 파생된 전통과 아프로-쿠반의 두 요소들이 혼합되어
1920년이래 지금까지 전해져 왔고, 대부분의 살사 음악(쿠바에서는 son 또는 guaracha라고 불린다)이 이 패턴을 따르고 있다.
이 즈음 1940년대 쿠바에서 발생된 또 하나의 창조물은 '맘보'라고 할 수 있다. 맘보는 아프로- 쿠반 리듬에 스윙과 재즈로부터의
빅밴드 형식이 결합된 형태이고, 쿠바의 밴드 리더로서 멕시코와 그밖의 섬 전역에서 대부분의 여생을 보냈던 'Perez Prado'의
초창기화에서 시작하여 1950년대 맘보형식에 'son'을 결합하여 뉴욕에서 성황을 이루게 했던 Beny More의 활약과 더불어
맘보밴드는 멕시코와 미국 뉴욕에서 독특한 스타일을 이루어내는데 기여했다. 이와함께 쿠바 음악이 섬 밖으로 널리 퍼져
1960년대 살사붐을 여는데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기원설
1800년대 초기이래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쿠바의 danz, son, guarancha, rumba, bolero같은 다양한 쿠바의 음악스타일을 채택하였고,
고유의 다이나믹한 포크 뮤직과 대중적인 뮤직에 영향을 주면서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음악적 문화의 풍요로움에 큰부분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쿠바음악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창조해낸 seis, bomba, plena 등의 장르는 푸에르토리코의 음악적 고유한 특성을 부각시켰고,1920년대에 이들의 음악은 문화적 요소를 포함한 이민경험을 바탕으로 뉴욕시티의 중요한 생산물이 되어왔다.
그 결과 푸에르토리코 문화는 그들만의 문화가 아닌, 오히려 뉴욕 및 북미 문화 전체에서 녹아있는 흑인 및 라틴 문화와 중복되어
'Newyorican'문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푸에르토리코보다 뉴욕에 더 많은 살사 밴드가 있다.
라틴의 기원으로서 더 많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쿠바는 공산주의 택하는 한편, 미국령이었던 푸에르토리코에서의 보다 자유로운 활동이 많은 푸에르토리코인들에 의하여 살사가 보급되고 전파되는데 그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살사의 역사
모임등에 살사모임이 만들어졌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한국의 살사는 동호회 중심의 독측한 모임으로 급성장했다.
레포트를 쓰면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보다가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어떻게? 살사가 들어 오게 되고 추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요정도 밖에없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