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명을 굶겨 죽인 독재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가 지난 10월27일부터 11월4일까지 워싱턴에 머물면서 던진 메시지는 이 한마디였다. 지난 6년간 그가 자신의 저서와 저술을 통해 수없이 밝힌 주장 그대로였다.
언론들은 그가 혹시 깜짝 놀랄 만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고, 한국 정부는 그에게 4명의 경호인을 따라 붙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黃 前 비서의 주변에서는 『망명 정부를 선언한다』, 『미국에서 장기 체류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으나, 그는 정해진 시간에 한국行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정부가 북한 체제, 즉 金正日 정권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미국을 압박하는 기이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黃 前 비서는 북한 체제를 탈출했던 1997년의 절박한 심정으로 돌아간 듯했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 가는 慘狀(참상)에 직면한 그는 자신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급했던 체제를 버렸다. 『인민이 굶어 죽는데 무슨 사회주의냐』는 그의 외침은 그대로 북한체제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黃 前 비서는 워싱턴에서 『북한을 떠날 때 5년 안에 金正日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그때의 내 예상이 틀린 게 아니라, 그 후 金正日을 살려 주려는 조건들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는 이번 訪美에서 인민을 굶겨 죽이는 정권을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악마와의 공존을 평화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분연히 칼을 꺼내 들었다.
『300만 명을 굶겨 죽인 독재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그의 외침은 金正日 정권의 대학살을 외면한 채 金正日 정권의 협박에 무릎을 꿇은 한국인들의 良心(양심)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수백만 명의 인민을 굶겨죽인 金正日 정권을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워싱턴의 黃長燁은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묻고 있었다.
두 시각
黃長燁씨의 미국 방문을 취재하기 전 1주일간 뉴욕에 머물렀다.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30代 한국系 펀드 매니저와 점심을 함께 했다. 미국에서 자라고 배운 그는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한 쪽이었다. 하지만 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 자문을 하고 있어 한국의 정세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黃長燁 前 북한 노동당 비서의 訪美가 화제에 오르자, 그는 대뜸 이런 얘길 했다.
『인간이 죽을 때가 되면 좋은 일을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무슨 얘긴지 언뜻 다가오지 않아, 『지금 黃長燁씨 얘기를 하는 건가요』하고 물었다.
그는 『金大中씨 얘기』라며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어서, 국민들을 속이고 金正日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나요. 인권운동으로 노벨평화상 받은 사람이 굶어 죽는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정말 부끄러워요. 자기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인민들을 희생시켰어요. 죽기 전에 좋은 일 하고 죽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金大中 前 대통령이 정치적 욕심 때문에 북한 인민들을 희생시켰다는 말이죠.
『아니오. 남쪽 사람들을 희생시켰어요. 모두가 「북한 리스크」를 얘기하는데, 북한이 붕괴되면 어떻게 할지, 아무 대비를 안 했잖아요. 그 사람 말대로 金正日을 살려주면, 북한이 개혁하나요. 「햇볕정책 덕에 한반도에 전쟁이 안 났다」고 하는데, 북한은 핵무장을 끝냈잖아요. 盧武鉉 대통령이 그 햇볕정책을 이어받는다니까, 내 주변에 있는 미국인들이 전부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물어요』
뉴욕에서 만난 한 한국의 고위 외교관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對北 유화정책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고 했다. 「약소국에 무슨 외교가 있느냐」는 논리였다.
『대한민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對北정책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정권 교체)」입니다. 金正日 정권을 무너뜨리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레짐 체인지는 미국만 할 수 있어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힘으로 무너뜨리잖아요. 미국의 힘을 빌려서 金正日 정권을 무너뜨릴 수는 있겠죠. 그러려면 대통령이 나서서 金正日을 惡(악)으로 규정하고, 「金正日 정권을 압박하다가 金正日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고, 혹시 전쟁이 날 수도 있다」,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그 부담을 우리가 모두 안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통일로 가는 호기일 수 있다」고 설득해야 합니다. 한국에 이런 거대한 비전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있습니까?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李會昌씨도 「햇볕정책의 기조에 공감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金正日의 눈치를 보면서 지금처럼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세계 12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언제까지 이렇게 패배주의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까.
『「북한이 붕괴해서 우리가 부담을 지는 것은 싫다」, 「통일도 싫다」는 게 우리 국민 대부분의 생각 아닌가요』
「아웃 오브 시즌(out of season)」
그는 黃長燁씨의 訪美에 대해 『아웃 오브 시즌(out of season)』이라고 했다.
부시 대통령이 「문서로 북한 체제, 즉 金正日 정권의 안전보장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발언하는 마당에, 「金正日 독재를 제거해야 한다」는 黃長燁씨의 지론이 먹혀들 여지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盧武鉉 정부로서는 6년간 미뤄 온 「黃長燁 訪美」라는 고민거리를 털어 버릴 절호의 시점을 잡은 셈이다.
金大中 정권은 金正日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黃씨를 5년간 사실상의 연금상태에 묶어 놓았다. 黃씨는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한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月刊朝鮮社를 통해 두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글을 읽어 보면 그의 주장은 간결하다.
「金正日 독재와는 타협할 수 없다. 金正日은 타도의 대상이다. 金正日 독재와 타협할 수 있다는 사람은 우리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타협할 수 없다는 사람은 우리 편이다」
지난 10월26일 오후 델타항공 비행기로 뉴욕 「라 구아디아 공항」을 출발해서 워싱턴으로 향했다. 1시간 남짓 남쪽으로 날아간 비행기는 美 국방부 청사 펜타곤을 스치듯이 지나서 「로널드 레이건 공항」에 착륙했다. 펜타곤 옆으로 사람들의 긴 행렬이 보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이라크 주둔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反戰 시위였다. 언론은 『5만여 명이 시위에 참석했다』, 『베트남 反戰 시위 이후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펜타곤은 워싱턴 DC에, 로널드 레이건 공항은 버지니아州에 있다.
黃長燁씨의 공식 수행원들이 묵을 예정인 버지니아州의 「알렉산드리아 힐튼」에 방을 잡았다. 텔레비전을 켜 보니 방송들은 이라크 戰況, 정확하게는 戰死者 일일 보도로 넘치고 있었다. 이날은 이라크를 방문한 울포위츠 국방부 副장관의 숙소 아래층이 砲擊당했다는 게 가장 큰 뉴스였다. 「전쟁 종식 선언 때(지난 5월1일)까지 발생한 전사자보다 그 후에 발생한 전사자 수가 더 많다」는 10월29일자 뉴스는 부시 행정부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大選 레이스를 시작한 민주당의 大選 후보들은 일제히 부시의 이라크 정책을 물고 늘어졌다. 「팍스 뉴스」만 외롭게 부시 행정부를 옹호하고 있었다. 黃長燁씨의 워싱턴 방문을 알리는 보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진보 진영의 대변지로 알려진 「뉴욕 타임스」는 黃長燁씨의 訪美 기간 내내 그의 뉴스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지금 당장 북한 金正日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칼을 빼들기에, 부시 행정부가 너무나 깊이 이라크 수렁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에서 다시 연금된 黃長燁
이날 오후 6시30분쯤. 한국에서부터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한 「디펜스 포럼 파운데이션」의 남신우(61·미국 펜실베이니아 州 거주)씨를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그는 백발의 노신사였다.
남신우씨는 디펜스 포럼으로부터 黃長燁씨의 공식 수행원으로 초청받은 「탈북자동지회」의 윤대일씨 등 4명도 이날 오후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고 알려줬다. 黃씨의 訪美를 주관하고 있는 남신우씨는 黃 前 비서가 언제, 어디 공항을 통해 워싱턴으로 도착하는지, 숙소는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다.
워싱턴 주위에는 공항이 세 곳 있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국과 일본 특파원들의 문의전화로 그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렸다. 남씨는 『黃선생이 언제 어디로 오는지 金기자가 혹시 들은 게 없느냐』고 물었다.
한국 정부는 黃長燁씨 訪美 허가에 전제조건을 하나 걸었다. 「黃長燁씨가 워싱턴에서 갖는 모든 모임에 한국 외교관 1명을 반드시 배석시킨다」. 여기에 덧붙여서 한국 정부는 경찰청에서 파견하는 경호원 3명이 黃씨를 현지 경호하고, 경호를 위해 黃 前 비서와 수행원 일행을 분리하겠다는 뜻을 디펜스 포럼 측에 요청했다.
말이 협조 요청이지 최후 통첩이었다.
「디펜스 포럼」은 이 최후 통첩을 수용했다. 남씨의 설명이다.
『협상이 다 끝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1주일 전쯤에 한국대사관에서 전제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외교·경호 관례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니까 디펜스 포럼의 회장 수잔 솔티 여사와 척 다운스씨가 기가 막히다고 해요. 우리가 黃선생님을 초청하는 이유는 「한국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북한에 관련된 중요 정보를 부담 없이 미국 정부에 전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한국 외교관 1명과 경호원 3명이 계속해서 黃선생님을 인질로 잡아두겠다는 겁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버텼죠. 수잔 솔티 여사가 「金大中 정부가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이유로 黃선생의 訪美를 저지했다. 이러다가 방문이 또 무산되겠다. 이번에는 黃선생이 미국을 방문하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자」고 가닥을 잡았어요』
오후 7시30분쯤. 디펜스 포럼 측과 수행원들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수잔 솔티 여사는 黃 前 비서가 미국에서도 부자유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데 수행원들에게 사과했다.
『수행원들에게 미안하다. 「한국 외교관과 경호팀이 어디서나 黃선생을 수행하겠다」는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黃선생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했고, 수행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조건은 받아냈다. 「黃선생이 만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만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에 한국 정부가 동의했다』
한국 정부의 최후 통첩
디펜스 포럼 측의 이런 기대는 黃長燁씨의 訪美 기간 내내 빗나갔다.
「면접 허용권」을 가진 한국 외교관과 경호원들이 黃씨와 외부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했고, 수행원들도 면담신청을 거쳐서야 黃 前 비서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10월30일 있었던 黃씨와 美 국무부 관계자의 만남에서는 한국 외교관이 디펜스 포럼 측 인사를 내쫓으려고 하는 해프닝이 빚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黃長燁씨에게는 3개월 기한인 1회용「상용 관광 비자」가 美 국무부에서 발급됐다. 美 정부는 보통의 한국인들에게도 10년짜리 비자를 내준다. 黃씨의 워싱턴 이외 지역의 방문은 금지됐다.
10월27일 오후 워싱턴에 도착한 黃씨는 워싱턴 시내의 「리츠 칼튼 호텔」로 향했다. 리츠 칼튼 호텔에서 수행원들이 묵고 있는 버지니아州의 「알렉산드리아 힐튼」까지는 승용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거리다. 리츠 칼튼에서 黃 前 비서는 한국 외교관과 경호원에 둘러싸여 지냈다.
黃 前 비서를 초청한 교민사회, 수행원들 사이에서는 분노가 폭발했고, 『한 달 이상 연장 체류해 한국 정부에 항의해야 한다』, 『망명 정부를 선포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黃 前 비서는 10월28일 밤 자신의 訪美를 성사시켜 준 이들과 알렉산드리아 힐튼호텔에서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이번 訪美에서 큰 성과를 내려고 욕심을 내기보다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들로 구구한 억측들을 모두 쓸어냈다.
黃長燁 訪美를 뒷받침한 在美교포 남신우씨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軍 복무를 마친 뒤 미국 캔자스 주립대에서 유학한 건축설계사다. 뉴저지州에서 건설된 공립 중고등학교 건물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다. 서울 토박이로 나이는 金正日과 동갑이다.
2년 전부터 그는 북한인권 문제를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디펜스 포럼의 脫北者 지원 사업을 위해 「디너 파티」를 열고, 탈북자들을 미국에 초청해 북한의 참상을 전하는 일이 그의 주업이 됐다.
『金正日은 악마, 죽여야 합니다』
黃長燁씨의 訪美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남신우씨와 백영중 패코스틸 회장(73)이다.
『金正日을 죽여야 합니다』 이런 거친 표현이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온다. 역사 서적과 위인들의 傳記(전기)를 읽는 게 취미였고, 링컨의 傳記를 틈틈이 번역해 세 권의 번역서를 펴낸 우아한 중년 신사는 왜 갑자기 북한인권 운동가가 됐을까? 그는 우연한 기회에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전하는 책과 비디오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탈북자들의 수기를 많이 읽었어요. 「국수 한 그릇만 먹고 싶다」면서 굶어 죽어 가는 여덟 살짜리 동생 이야기를 적은 글을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굶어 죽어야 합니까. 어떻게 사람을 300만 명이나 굶겨 죽일 수가 있습니까. 「金正日은 사람 죽이는 악마다. 이놈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어요』
링컨 傳記 읽기가 취미였던 그는 행동하기 시작했다. 북한인권 운동가 문국환씨와 함께 탈북자들의 北京(북경) 중국 외교부 진입 시도, 瀋陽(심양)의 일본 영사관 진입 사건을 지원했다. 그는 현재 「북조선 난민 구호기금」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 노예보다 참혹하게 살고 있다」는 자각이 그를 설계사무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6者회담 진전을 위해 「북한 체제 보장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는 격하게 비판했다.
『인민을 수백만 명씩 굶겨 죽이는 독재자를 지지하면 그 사람은 惡입니다. 악마와 공존하자는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300만 명의 동족이 굶어 죽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金正日의 눈치를 살핀 사람들은 언젠가 죄값을 치를 겁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盧武鉉 대통령이 對北정책을 확 바꿔야 합니다. 金正日에 의한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몰랐다」, 「학살의 증거가 있느냐」는 얘기를 해봐야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盧대통령이 북한인권에 대해 과감하게 발언해야 할 때입니다』
남씨는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살았고, 이제는 그걸 사회에 돌려줄 때』라며 『북한에서 인민을 굶겨 죽이는 정권이 축출될 때까지 북한인권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黃長燁, 『미국이 「金正日 제거」를 결심해 달라』
10월28일 밤에는 黃長燁 訪美를 성사시키는 데 힘을 보탠 이들을 위해 패코스틸의 백영중 회장이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미국 측에서 샘 브라운 백 상원의원의 보좌진, 하워드 콕스 하원의원, 피츠 하원의원 등이, 한국 측에서는 신민당 총재를 지낸 素石 李哲承(소석 이철승) 선생과 교민들이 참석했다.
黃 前 비서는 이 자리에서 「미국의 결심」을 여러 번 얘기했다. 그는 『金正日 독재를 제거할 수 있는 담당자는 미국』이라며 『미국이 결심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金正日 정권을 제거한다」는 결심을 해 달라. 북한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과 惡의 근원이 金正日이다. 金正日 독재를 제거하는 결심이 먼저고, 수단과 방법은 다음이다. 대전제를 가지고 논쟁할 때는 지났다. 그런 논쟁이 진행되기 때문에 金正日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남한의 反美 운동 역시 金正日이 살아 있고, 군사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에 번성하고 있다. 金正日 제거가 만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길이다』
「북한을 압박하다가 전쟁이 일어날 우려가 있지 않느냐」는 미국 측 참석자들의 질문에 黃 前 비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부분도 미국이 결심해야 할 부분이다. 金正日은 「남한에 주한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못 한다」고 얘기했다. 지금도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북한을 지원하는 역량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전쟁 가능성은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에 달려 있다』
黃 前 비서는 金正日 제거의 첫 단계로 「중국과 북한의 분리」를 얘기했다.
『중국이 제공하는 식량과 기름으로 북한은 겨우 연명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분리는 곧 金正日의 사망선고다. 더 구체적인 방법은 사람들이 더 적게 있을 때 얘기하겠다』
黃 前 비서는 10월29일 오전 美 국무부의 존 불턴 군축담당 차관의 보좌진인 파울라 드소토 차관보 등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던 북한 핵개발 秘史(비사)를 집중 증언했다.
제네바 핵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중앙당 군수공업담당비서 전병호가 『5~6년 안에 핵사찰을 받아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고 보고하자, 金正日은 『5년 후 (핵보유 사실을) 선포하고, (미국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북한은 1994년 무렵 지하 핵실험을 준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黃선생의 비밀대화록, 『北은 지하 핵실험 준비 완료했었다』
月刊朝鮮은 美 국무부 관계자들과 黃 前 비서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을 단독 입수했다. 대화록을 요약 소개한다.
《―북한의 핵개발이 어디까지 진전된 것인가.
(黃長燁)『연도와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 나는 북한의 실질적인 핵개발 프로그램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핵무기와 관련한 對外문제를 담당하는 3인 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다. 핵무기와 관련한 對外문제는 중앙당 국제담당비서인 나와 외교부장, 對南 당당비서 세 사람의 소관이었다. 기술적인 문제는 군수공업담당비서, 원자력 총국장, 핵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위원회가 맡았다. 美北 간에 제네바 핵합의(1994년 10월)가 타결될 때까지 金正日 주재로 두차례 회의를 가졌다. 강석주 제1부상과 북한의 핵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제네바 핵합의의 골자는 북한이 흑연 감속로를 이용한 핵개발을 포기하고, 대신 미국·일본·한국이 경수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金正日은 당시에 정말 핵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던 것인가.
『강석주를 제네바에 보내긴 했지만, 핵개발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석주가 제네바 합의를 타결짓고 돌아와서 金正日에게 상세하게 보고했다. 강석주는 중앙당 국제부 과장 시절 내 밑에서 일했다. 내게 개인적으로도 보고를 했다. 박성웅 부부장에게서도 얘기를 들었다.
북한 핵개발의 핵심 인물은 군수공업담당비서 전병호다. 당시 전병호는 「지하 핵실험이 준비됐다」고 金正日에게 보고했다. 핵실험을 하지는 않았다. 전병호가 「제네바 협상에 따르면 5~6년 후에는 사찰을 받아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고 하자, 金正日은 「5년 후에 (핵무기 보유 사실을) 선포하고, (미국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고 지시했다』
―지하 핵실험을 왜 하지 않았나.
『준비했으나 하지는 않았다. 전병호가 「핵실험을 안 해도 괜찮다. 핵폭탄은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고 했다』
―金正日은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와 핵시설들을 은닉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가.
『전병호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걱정하자, 金正日은 「(핵시설들을) 옮겨서 숨겨 버리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전병호는 「핵 폐기물 저장 시설은 100년이 지나도 옮기기 어렵다」고 했다.
땅을 깊숙이 파서 핵 폐기물을 넣고 흙을 덮었다. 운동장만 한 크기였는데 美 인공위성에 발각됐다. 金正日이 「그 위에 창고를 지으라」고 지시했고, 대외적으로 「군사시설이라 사찰을 할 수 없다」고 우겼다. 전병호가 「그렇게 해봐야 계측기를 가지고 근처에만 와도 확인이 된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플루토늄 더 사와야 하는데』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개발은 언제 시작한 것인가.
『1996년 무렵 전병호가 「러시아에서 플루토늄을 더 사 와야 하는데 돈이 없다. 돈을 좀 만들어 달라」고 해서 위원회를 열었다. 그때까지 만든 핵무기가 몇 개인지는 모르겠다. 박성봉은 「더 만들자」는 주장을 했다. 그 뒤 전병호가 「플루토늄을 더 살 필요가 없다」며,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 관련 기술을 들여왔다고 했다. 1997년 무렵 「(파키스탄에서) 넘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중국과 소련이 북한의 핵개발을 지원했나.
『1984년 국제비서로 있을 때 소련대사가 나를 몇 차례 찾아왔다. 「핵무기 개발을 하면 큰일 난다」는 경고를 했다. 金正日에게 보고를 했더니 「답을 하지 말라」고 했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지원하지 않았다. 金正日은 핵개발 사실이 소련과 중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엄중하게 보안조치를 했다』
―앞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검증 사찰이 가능하겠나. 사찰 프로그램을 만들 때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겠나.
『그런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지식이 없다. 나는 노동당의 지도사상을 교육하는 일을 해 왔다. 제조된 핵무기는 중앙당 군수부문에서 군대로 넘겨진다. 핵무기의 사용 보관 책임은 인민군대에 있다』
―金正日은 핵확산방지(NPT) 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나.
『金正日은 「NPT에 괜히 들어갔다. 사찰을 공연히 하겠다고 했다」고 후회했다. 그래서 「생화학은 (사찰 수용을) 안 하겠다」고 했다. NPT 체제에 순응할 생각이 없다』》
이날 오후 제임스 켈리 차관보와의 면담이 있었다.
10월31일에는 울포위츠 부장관 등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과의 면담이 진행됐다. 黃 前 비서는 「미국이 金正日 정권 교체를 결심해야 한다. 이걸 전제하지 않는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북한에서 중국을 분리시키는 게 첫 번째 목표가 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 체제의 붕괴가 언제쯤 일어날 것으로 보느냐」는 켈리 차관보의 물음에 黃 前 비서는 『붕괴가 시작했고, 이미 오래된 일』이라고 대답했다.
黃 前 비서는 美 국무부와 국방부 정책 당국자들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대의명분을 살려서 북한을 옥죄어야 한다. 미국이 잡아야 할 대의명분은 인권이다. 경찰은 총을 가지고 도둑을 잡을 권한과 명분이 있다. 도둑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 뺏어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만을 다루면, 이건 强者(강자)와 弱者(약자) 사이의 싸움이 된다. 인권이라는 명분을 잡는 것이 먼저고, 핵무기는 다음 이야기다.
지금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북한 체제를 개혁하려면 집단농장을 없애고, 농지 경작권과 소유권을 농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小상인들의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해야 한다. 金正日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黃長燁 前 비서가 美 국무부 관계자들에게 핵개발에 대해 극비 증언을 하는 동안, 기자는 워싱턴 DC 중심가에 위치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금(NED)」의 칼 거시만 회장을 만났다. 「북한인권위원회」의 이사이기도 한 거시만 회장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북한인권운동단체에 대한 재정지원, 「북한 정치범 수용소 실태조사 보고서」 발간, 「북한인권 지원법」 제정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金大中 햇볕정책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이해하지만, 이 정책은 방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칼 거시만 회장: 『북한에 외부적 압박을 증대시켜야 할 시점』
『논리적으로 보면, 햇볕정책은 두 개의 트랙 위에 서 있다. 북한 정권을 변화시키고, 그와 함께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것이다. 金正日 정권의 인권탄압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북한 정권이 인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나? 나는 햇볕정책으로 인해 북한에 어떤 질적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거시만 회장은 『(金大中·盧武鉉 정부 사람들이) 「북한이 변화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변했는지 얘기를 좀 해달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북한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외부적 압력」을 증대시켜야 할 시점』이라며 『변했다, 안 변했다는 해석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NED의 다른 관계자도 『햇볕정책은 북한이 변화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표를 제시하지 않고, 정책의 중간 목표를 설정하지 않은 일종의 「트릭」』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등 3개 북한인권단체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 NED는 최근 요덕 정치범 수용소 탈출자인 강철환, 안혁씨가 추진하고 있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철폐운동」에 대한 자금지원을 결정했다.
거시만 회장은 『NED는 폴란드의 자유노조 같은 舊동구 공산권 국가內의 反체제 인권단체에 재정지원을 했다』며 『북한은 反체제 단체가 형성될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인권탄압 국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한국과 중국의 북한인권운동단체를 지원하고 있지만, 북한內에 反체제 그룹이 형성되면 직접 지원에 나설 계획』이라고 했다.
부시 再選은 金正日의 災殃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11월6일 NED 설립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서 북한을 「압제의 전초기지」로 규정했다. 압제의 전초기지에는 쿠바, 미얀마, 짐바브웨가 포함됐다. 부시 행정부에 의해 북한은 「惡의 축」이자 「압제의 전초기지」로 규정됐다.
부시는 기념식에서 『이 국가들의 국민들은 속박과 공포, 침묵 속에 살고 있지만, 이들 정권이 자유를 영원히 유폐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며 『언젠가는 수용소의 감옥 망명지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 지도자가 떠오를 것』이라고 역설했다. 金正日의 독재에서 시달리는 북한 주민의 친구가 될 것임을 부시 행정부는 다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10월23일 『金正日은 인민들을 굶주리게 하면서 핵무기를 만드는 실패한 지도자』라고 다시 한 번 규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호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金正日이) 국민들을 기아에 허덕이게 하고, 영양실조로 체격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6者회담의 진전을 위해 부시 대통령과 콜린 파월 美 국무부 장관이 「북한 체제 보장」을 가끔씩 언급하고 있지만, 金正日 정권을 제거해야만 할 「惡」으로 바라보는 부시 행정부의 시각에는 큰 변화가 없음이 확인되고 있다. 10월31일 미국 언론들은 「미국 국내총생산(GDP)이 3분기에 7.2% 성장, 19년 만에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비지출이 5년 만에 최고인 6.5% 늘어났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부시 행정부가 애타게 기다려 온 경제회복의 강력한 신호가 확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부시 대통령에게 안보는 가장 큰 장점이었고, 경제문제는 아킬레스건으로 비쳤다. 이제 부시 대통령과 보좌관들은 미소를 지으며 경제지표를 가리킬 수 있게 됐다.
부시의 당선이 金大中 햇볕정책의 재앙이었다면, 그의 再選은 金正日 정권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金正日은 굶어죽는 것을 「사람」으로가 아니라 「숫자」로 파악』
미국 의회는 지난 7월16일 「자유아시아 방송(RFA)」에 향후 2년 동안 정부 예산을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의회에 북한 주민들이 「자유아시아방송」을 청취할 수 있도록 라디오를 공급하라고, 국무부에 권고했다.
북한 주민에 대한 정보공급, 탈북자 미국 수용은 미국 의회가 북한 민주화를 위해 꺼내 든 두 개의 칼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은 현재 북한 주민들을 향해 매일 4시간의 한국어 방송을 쏘아 보내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의회에서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4시간 방송을 24시간 방송체제로 전환할 계획이다. 한국어 방송 인력은 14명이다.
한국어 방송 책임자인 안재훈 국장은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느라 분주했다.
安국장은 경기高와 서울大 국문학과를 나와 워싱턴 포스트에서 26년간 일한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북한 엘리트 계층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金正日을 비난하거나, 북한 체제를 비방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거예요. 모든 독재자들은 국민들이 많이 아는 걸 싫어해요. 알면 판단력이 생기거든. 진정한 북한 민주화의 주체는 북한 주민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거짓말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하는 게 우리 목표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듣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북한이 「자유아시아방송」을 없애라고 끈질기게 요구를 하고 있어요. 듣는다는 얘기죠.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주민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들은 것으로 조사됐어요. 중요한 청취자 그룹이 생긴 거죠』
―RFA 창립 이후 지금까지 한국어 방송을 이끌고 있는데, 金正日은 어떤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니까.
『평양에 주재하다가 쫓겨난 폴란드 기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이 친구가 「金正日은 주민이 죽는 걸 숫자로만 파악하지, 사람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래서 괴로운 게 없는 사람이다」고 해요. 정확한 관찰이에요. 金正日은 사람 죽는 걸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국민들 고통받는다고 개혁·개방하겠어요. 넌센스지』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도와줘야지. 옆에서 굶어 죽으면 민족이 아니라고 해도 도와줘야죠. 북한을 도와준 전체 액수를 보면, 한국 경제에 비해 크지 않아요. 얌체 소리 들을 만해요. 그런데 金大中 前 대통령은 북한하고 거래하면서, 민주적 질서를 파괴해 버렸어요. 인도적 지원을 10배로 늘리더라도 법절차를 밟아야죠. 군사적 대치상황인데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뇌물을 金正日 개인계좌에 보내주고. 햇볕정책은 의도는 좋았는지 몰라도 완전히 도덕적으로 파산한 거예요』
한국 언론의 의무방어전
安국장은 미국 의회가 추진 중인 탈북자 수용 등을 골자로 하는 「북한 민주화 법안」이 통과되면, 金正日 정권에 엄청난 압박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한 난민을 2만 명 수용하자, 3000명으로 줄이자, 논의가 한창이에요. 이 법이 통과되면 미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겁니다. 미국이 탈북자를 수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金正日 체제를 떠받치는 엘리트들도 난파선을 떠나기 시작할 거예요. 우리 RFA도 열심히 알릴 거고』
지난 10월29일 「아오지 탄광에서 일하던 黃長燁씨의 아들이 부상을 입어 평양으로 후송됐다」는 일본발 기사가 黃 前 비서의 수행원들에게까지 전달됐다. 수행원으로 온 윤대일 「북한민주화동맹」 副위원장은 『아오지 탄광은 정치범 수용소가 아니라 일반 탄광이다. 黃선생 아들을 도망가기 쉬운 국경 근처의 탄광에 배치할 까닭이 있겠느냐』며 『黃선생을 겁주기 위한 언론 공작』이라고 일축했다.
黃長燁씨는 워싱턴에 도착한 지 3일 만인 10월30일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하워드 콕스 공화당 하원 정책委 의장이 일정에 없던, 「黃長燁 기자회견」을 마련하고, 전날 저녁 내외신 기자들에게 일제히 이 사실을 통보했다.
한국 정부와 駐美 대사관도 美 공화당 하원 정책委 의장을 제지하지는 못했다.
10월30일 오전 10시30분.
下院(하원) 본관에 있는 H122호실은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장 관심이 큰 것은 일본 언론들이었다. 「일본 TV」의 서울 주재 특파원인 시카노 마사키(鹿野正樹) 기자는 10월27일 서울에서 黃長燁씨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뉴욕을 거쳐 워싱턴으로 날아왔다.
시카노 기자는 『黃長燁씨는 일등석에, 나는 비즈니스석에 탔지만, 경호원의 제지로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며 『접촉하지 못하기는 워싱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마이니치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인 나카지마 데스오(中島哲夫) 기자는 『어제 요미우리 신문이 黃長燁씨와 단독 인터뷰한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다뤘다』며 『북한 핵문제, 납치자 문제 때문에 일본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나다』고 했다.
한국 특파원들은 『서울에서 큰 관심도 없고, 큰물이나 안 먹으면 다행』, 『의무 방어전 치르듯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중앙일보의 워싱턴 특파원인 金鍾赫(김종혁) 차장은 『黃長燁씨와 전혀 접촉이 안 되기 때문에 기사를 쓰는 데 근본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며 『방문 시점만 제대로 맞았으면, 黃長燁씨의 訪美가 엄청난 휘발성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행정부의 5大 관심사를 꼽으라면, 북한 핵문제가 반드시 거론된다. 이라크 戰後 처리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지만, 미국이 언제든지 팔을 걷어붙이고 달라붙을 수 있는 「핫 이슈」이기 때문이다. 부시가 再집권한다면 金正日을 손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년 大選 때까지는 조용히 덮어 두자」는 분위기가 부시 행정부內에서 지배적이다』
예고됐던 시간보다 한 시간이 늦은 오전 11시30분쯤, 黃長燁씨가 한국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방으로 들어왔다. 콕스 의원의 간단한 소개에 이어 곧바로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이 시작됐다. 기자회견은 30분간 계속됐다.
그는 작심한 듯 단호한 어조로 「金正日 체제 제거」를 촉구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독재체제 보장을 결의할 수 있나
―부시 대통령은 『金正日이 북한의 핵개발을 완전히 포기하면 체제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밝혔다. 당신은 『金正日 독재정권은 제거돼야 한다. 어떤 형태의 金正日 정권 안전 보장에도 반대한다』고 한다. 두 이야기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데.
『민주주의 국가가 어떻게 「독재체제를 보장해 준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 미국이 9·11 테러를 계기로 「反테러 전쟁」을 선포하자 세계적 범위에서 지지가 있었다. 그것은 대의명분에 맞기 때문이다. 가장 악랄한 독재자들도 「反테러 전쟁」에 반대하지 못했다. 속으로 반대하더라도 겉으로는 그러지 못했다.
알 카에다 같은 조직이 「앞으로 테러를 안 하겠다」고 말로 맹세한다고, 그 조직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金正日이 핵개발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독재체제를 보장하면, 세계의 독재체제를 다 용인해 줘야 한다. 이것이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는 일인가. 金正日은 「핵개발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네바에서 똑같은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았다. 金正日 독재를 보장하겠다는 것은 세계의 인민을 기만하는 조치가 될 것이다』
―金正日이 심리적으로 안정적인가.
『잘 먹고 잘 자고 있다. 안정이고 불안정이고 말할 게 없다』
―金正日은 헤네시 코냑을 좋아하고, 2만 개 이상의 할리우드 비디오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합리적인 지도자인가, 非합리적인 지도자인가.
『정치 지도자는 그가 어떤 정책을 폈는가,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로 평가돼야 한다. 그의 행적이 민주주의에 도움이 됐느냐, 독재에 도움이 됐느냐, 그에게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생각이 있었느냐를 살펴봐야 한다. 金正日의 생활습관이나 흥미 있는 얘기는 알고 있어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
―가까운 장래에 휴전선에서 韓美 양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있을 가능성이 있나.
『독재와 민주주의의 투쟁은 국가內의 투쟁인 동시에 국제적인 투쟁이다. 金正日 독재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은 한국 인민뿐 아니라 미국 인민의 주요 과업이 돼야 한다.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러분들도 이런 방향으로 일해 달라』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됐느냐, 독재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됐느냐」로 평가해야 한다는 원칙을 얘기했다. 그 선에서 이해해 달라. 시시콜콜 다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黃 前 비서는 『비행기를 오래 타고 와서 지금 머리가 띵 하다』며 『내가 對北정책에 관한 많은 책을 썼다. 단 한 권이라도 읽어보면 내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폴러첸과의 遭遇
하원 건물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려고 워싱턴 도심 18번街의 한 뷔페식당에 들어섰다.
한 외국인이 다가와 『하이, 킴』 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북한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하다가 강제 추방된 독일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씨였다. 두어 달 전 서울에서 봤을 때와 달리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폴러첸씨는 오렌지 주스 두 병만 집어와서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이집트에서 런던을 거쳐 워싱턴으로 오는 바람에 기온 차로 감기가 걸렸다고 했다.
『이집트에서 워싱턴까지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말썽을 일으키려고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폴러첸씨는 10월27일자로 「워싱턴에 온 黃長燁씨가 한국 정부와 국정원의 감시下에 놓여 있다. 자유로운 활동이 전면 차단됐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全세계로 날려 보냈다. 이메일을 받아 보고 그가 워싱턴에 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폴러첸을 길거리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참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러첸씨가 잠시 머물고 있는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허드슨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눴다. 허드슨 연구소는 미국內에서 북한인권 문제에 가장 관심이 큰 연구소의 하나로 꼽힌다. 「북한 자유 법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마이클 호러위츠 국제종교자유 프로젝트 국장도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폴러첸씨는 언제나처럼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쏟아 냈다. 『당신을 이렇게 지구를 떠돌게 만드는 힘은 도대체 뭐냐』고 했더니, 폴러첸씨는 『북한에서 만난 굶주린 어린이들의 눈빛』이라고 했다.
―당신이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黃長燁씨를 이렇게 밀착 감시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宋斗律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黃長燁씨의 증언이 사실로 드러났다. 북한 자금과 간첩들의 남한 침투, 金大中씨의 親北 행위, 남한에서 북한에 간 더러운 돈, 남한 정치인들의 더러운 對北 거래에 대해 黃씨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黃씨가 宋斗律씨 건에 대해서만 알고 있겠나. 盧武鉉 정부에 대해서 불리한 얘기가 나오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다고 본다』
―黃長燁씨가 6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아직까지 털어놓지 않은 비밀들이 있다고 생각하나.
『동독의 스파이가 서독 정부에까지 침입해 있었다. 통일 전까지 1만 명의 동독 간첩들이 서독에서 활동했다. 나는 金正日 정권이 왜 무너지지 않는가, 의구심을 가져왔다. (남북한 간의) 비밀스런 이야기, 한국에서 활동 중인 5000~6000명의 북한 간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金正日 체제는 붕괴했을 것이다. 그래서 워싱턴에 와서도 한국 요원들이 黃長燁씨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우스꽝스럽지 않나. 미국은 자유로운 사회다』
『더러운 거래를 숨기려고, 黃의 입을 막고 있다』
―黃長燁씨가 망명한 것은 1997년이다. 그가 金大中·盧武鉉 정부 인사들의 對北 비밀 뒷거래를 상세히 알기는 어렵지 않겠나.
『나는 2000년 12월에 북한에서 추방됐다. 지금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내 친구들로부터 최근 평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비밀정보를 얻고 있다. 黃씨는 金日成·金正日 옆에서 40년을 산 사람이다.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있다. 한국의 親北 정치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지켜봤다. 어떤 뒷거래가 오갔는지 黃씨는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金大中 정부와 金正日 간의 뒷거래는 사실로 들어났다. 당신은 盧武鉉 정부와 金正日 사이에도 더러운 거래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정치가가 아니다. 의사일 뿐이다. 전직 노동인권변호사가 북한에서 고통받는 주민들의 참상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진짜 인권변호사라고 믿지 않게 됐다. 왜 그는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해 침묵하나. 통일 전 동서독의 예를 감안하면, 나는 뭔가 「더러운 거래」가 있지 않을까 의심한다』
―盧武鉉 정부는 북한 인권문제를 철저하게 외면해 온 金大中 정부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변화가 있을 걸로 보나.
『북한 인권에 대한 서방 언론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북한의 숨겨진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조사 보고서도 나왔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盧武鉉 대통령은 「왜 당신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눈을 가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6者회담에서 일본은 납치자 문제를 얘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얘기한다. 관심이 없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과 盧武鉉 대통령이다』
폴러첸, 『나는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의 친구』
―盧武鉉 정부가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일을 준비할 것인가.
『나는 점점 과격해지고, 정치적인 활동가로 변해 가고 있다. 언론에게 북한의 참상을 알리고, 더 많은 말썽을 일으키려고 한다. 한국 정부나 부시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의 친구다. 그들을 돕기 위해 어떤 비난과 고난도 감수할 것이다. 나는 신사가 되려는 게 아니다』
―6者회담이 북한의 金正日 체제 보장과 북한 핵개발 포기를 맞바꾸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소련이 헬싱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인권문제를 받아들이도록 한 전례를 우리는 따르려고 한다. 그것이 소련 체제의 종식을 가져왔다. 부시 행정부를 압박하고, 일본과 한국 정부를 압박해서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도록 압박할 것이다』
―당신은 6者회담을 지지하나.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떠들수록 북한은 혼돈을 느끼게 된다. 이게 내가 「캅 아나무어」(독일의 긴급구호의사회, 「캅 아나무어」는 베트남 보트피플 구조선의 이름이다)의 일원으로 북한에서 일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북한은 민주주의, 다양한 의견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캅 아나무어에서 여러 의견을 제시하면, 북한 관리들은 「제발 한 목소리로 얘기를 좀 해라」고 사정을 했다. 이런 점에서 6者회담은 좋은 기회다. 북한은 6者회담에서 미국·한국·일본·중국·러시아가 내놓는 얘기들에 혼을 빼앗길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나는 북한으로 돌아갈 것이다. 해주의 아이들과 병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곧 런던으로 가서 북한에서 철수한 8개 인도적 지원기관의 대표들을 만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통일의 비용을 너무나 겁낸다. 우리가 함께 들어가서 그 짐을 나눠 지려고 한다』
가까이서 지켜본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虛張聲勢(허장성세)하거나, 『한국 정부가 지난 6년간 나를 이렇게 괴롭혔다』고 자존심 없이 떠들어 댈 그런 類(유)의 사람이 아니었다.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그는 金大中 前 대통령이나 盧武鉉 대통령의 對北정책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래서 워싱턴 현지에서는 『답답하다』는 얘기가 많았다.
폴러첸 같은 행동주의자들은 세계의 이목을 끌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黃 前 비서 주변을 압박했다. 그런 맥락에서 망명정부 얘기도 나왔고, 미국·일본 망명說도 나왔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10월31일로 예정된 黃長燁씨의 디펜스 포럼 강연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위협하는 이들도 있었다.
素石, 『왜 80 늙은이들을 괴롭혀. 젊은 사람들이 싸워야지』
버지니아州의 베트남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한 素石 李哲承 선생은 『그 양반이 지난 6년간 마음과 몸이 많이 상했다』, 『80노인에게 무얼 그렇게 많이 바라느냐』고 했다. 黃長燁씨보다 한 살이 위인 素石은 黃 前 비서의 망명 직후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아, 각종 보수단체의 집회에 黃 前 비서의 이름을 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우리 집에 찾아와서 밥을 같이 먹은 게 일고여덟 번쯤 될 거여. 올 때마다 기가 꺾이는 게 눈에 보여. 가족들 다 버리고 와서, 그 나이에 폐인 안 되고 버티는 것만도 다행 아니야. 선비 같은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버틴 거여. 내가 같이 미국에 와 준게 힘이 되는 모양이야. 교민들하고 밥 먹는 날(10월28일) 밤에 「미국에서 투쟁하라」, 「망명정부를 선언하라」는 얘기를 교민들이 쏟아 냈어. 黃長燁씨가 나를 가리키며 「저기 계신 素石 선생님 같은 애국인사들과 한국에서 일하겠다」고 몇 번을 얘기해. 북한 민주화투쟁을 남쪽의 젊은이들이 해야지, 왜 집 떠난 팔순 늙은이를 앞장 세우려고 해』
10월31일 워싱턴 의회의 레이번 빌딩에서 열린 오찬 강연회는 黃 前 비서의 워싱턴 방문 기간 중 유일한 대중과의 만남 자리였다. 「디펜스 포럼」 측은 당초 예상한 400명보다 많은 참석자가 몰려 애를 먹었다. 햄버거가 나온 점심 식비는 26달러였다.
黃 前 비서는 미리 배포한 연설문에서 「북한 민주화를 위한 4단계 접근법」을 내놓았다. 1단계의 목표로 그는 집단농장의 개인 영농제로의 전환, 중소 상공업과 교역의 자유화를 제시했다. 이 정도의 자유로운 공간이 형성돼야만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金正日 체제를 비판하고 개혁할 수 있는 세력이 형성될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민주화의 2단계로는 「金正日 독재의 제거, 통일에 대비한 북한 사회의 민주적 개혁」, 3단계로 「남북 사회의 경제·사회·문화적 이질성의 축소」, 4단계로 「남북한 국경의 제거와 중앙 정부의 구성」이 제시됐다.
黃 前 비서는 2시간20분 가까이 꼿꼿한 자세로 서서 참석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연설은 미리 배포한 연설문으로 대체했다. 『망명정부를 구성할 생각이 없느냐』, 『북한이 언제 붕괴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들에 대해, 그는 『그런 질문은 나를 모독하는 것』, 『나는 점쟁이가 아니다』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의미 있는 문답을 간략히 정리했다.
《―金正日은 「개방=자살」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金正日은 1995~1998년의 위기를 겪기 전까지는 모든 문제는 독재를 강화함으로써 해결된다고 믿었다. 「소련과 동구가 망한 것은 독재와 개인숭배를 약화시켰기 때문이다」고 얘기했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으면서 金正日 정권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공장마다 무장보초를 세워놓는 데도, 직공들이 공장 기계를 뜯어갔다. 보초들이 잡으면 「가족이 다 굶어 죽는데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따졌다. 경제는 무너지고, 통제는 상실됐다. 「독재강화만으로 통치할 수는 없다」고 결론이 났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개혁하자고 하는 것이다. 작년 7월의 가격 현실화 조치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런데 왜 안 되느냐. 제한된 자원을 자기의 절대적 지위를 높이고, 군대를 강화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도 自作農(자작농) 증대에 나섰다. 1단계 개혁 조치는 金正日의 독재정권을 강화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북한 정권 내부 와해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金正日 정권이 붕괴하지 않는 이유
―북한이 일단 동구 수준의 개방체제가 돼야, 북한 민주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할 때 동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가 가장 심했다. 그런데도 북한 독재의 10분의 1 수준도 안 됐다. 지금 동구를 붕괴시켰던 접근법을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소한의 경제개혁, 인민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돼야, 그 다음 단계를 얘기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소떼를 몰고 갔다. 큰 변화다」, 「평양을 관광한다. 큰 변화다」라고 얘기한다. 무슨 변화인가. 변화했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6者회담에서 핵개발 포기를 전제로 한 북한체제 보장이 얘기되고 있다. 1994년의 제네바 핵합의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겠나.
『「핵개발은 계속한다」는 것이 金正日의 일관된 생각이다』
―對北 지원식량은 군대로 갔나,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됐나.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첫째로 군부에 가고 그것이 남았을 때 시장에 내다 팔아서 (군대가) 외화를 갖게 된다. 직접 보지는 않았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金正日이 핵폭탄을 만드는 목적은 무엇인가? 핵무기의 공격목표는 어디인가.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기 위해 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金日成과 金正日을 평가해 달라.
『金日成은 사람을 굶겨 죽이지는 않았다. 金正日은 金日成이 쌓아 놓은 것을 다 무너뜨리고 인민을 굶겨 죽였다. 金正日의 죄질이 더 나쁘다』》
디펜스 포럼의 토론회가 끝난 후 국제인권 전문가 데이비드 호크씨와 레이번 빌딩 앞 정원에서 만났다. 호크씨는 『黃씨가 얘기한 민주화 4단계론 가운데 1단계가 金大中씨의 햇볕정책과 비슷한 게 재미있다』고 했다.
호크씨는 미국의 비영리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10월22일 「숨겨진 수용소, 북한 감옥 폭로」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치범 수용소의 인공위성 사진들을 담은 이 보고서는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호크씨는 국제인권 조사 분야의 베테랑이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캄보디아 지국장(1996~1997년)을 지냈고, 1995년에는 미국 난민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르완다에서 자행된 대학살을 조사했다.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장을 오랫동안 지냈다.
1980년대 초 중반에는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군의 학살을 조사한 뒤, 미국 컬럼비아 대학 인권연구소와 공동으로 학살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출간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는 크메르 루즈 지도부의 국제전범 재판 회부를 추진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브랜다이스 대학의 인권국제법 분야 방문교수로 일했다.
호크씨는 11월4일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관해 증언을 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2주일 동안 숨바꼭질을 했다.
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워싱턴의 사무실을 오가고 있었다. 기자가 뉴욕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그는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고, 워싱턴으로 가는 날 그는 뉴욕의 집으로 가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이날 토론회가 끝나고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수용소보다 金正日의 수용소가 더 잔혹』
―당신이 현지 조사한 캄보디아와 르완다의 학살과 비교할 때,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르완다 학살은 석 달에 걸쳐 이뤄진 「논 스톱」 학살이었다. 캄보디아는 3년8개월에 걸쳐 다양한 부류의 인구를 분류해 조직적으로 말살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이런 전형적인 학살과는 차이가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목적은 노예노동이다. 관리소에 갇힌 사람들은 평생 노예노동을 해야 하고, 교화소에 갇힌 사람들은 3년 내지 6년간 노예노동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 르완다와 비교할 때 북한의 정치범 탄압 시스템은 잘 짜여 있다. 50년간 정비된 탁월한 탄압 제도다』
―북한의 교화소는 보통 국가의 형법에 의한 감옥과 비슷한 걸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정치범 수용소와 일반 감옥의 혼합 형태다. 일반 국가에서 범죄가 아닌 사소한 일들을 범죄로 몰아 처벌하고 있다. 도 집결소, 노동단련대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관한 비디오를 보거나, 중국에 나가서 한국인 중국인을 만나는 것이 중범죄로 처벌된다. 명백한 인권침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와 스탈린주의 시대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인권침해의 정도가 심각한가.
『물론 북한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스탈리 시대의 「굴락」 그 자체다. 그러나 북한은 연좌죄를 통해 3代의 가족을 처벌한다. 강철환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 갔을 때 그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북한 당국이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한 이의 손자였을 뿐이다. 스탈린도 정치범의 가족들은 잡아가지 않았다.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지되는 사람들만 처벌했다』
―11월4일 상원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관해 증언한다고 들었다. 어떤 정책적인 대안을 제시할 건가.
『(상원의원들에게) 세계식량기구(WFP)를 통해 「북한의 학교와 고아원에 식량을 공급하듯 북한의 교화소와 관리소, 도 집결소에 식량을 보내라」고 권고하려고 한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은 생존할 수 없을 정도의 식량을 공급받고 있다. 세계식량기구가 식량을 공급해 수감자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북한 정권이 세계식량기구의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잘 모르겠다. 나는 세계식량기구와 유엔이 북한에 그런 제안을 하라고 아이디어를 제시하겠다. 북한 당국이 거절한다면 그건 그들의 책임이다. 교화소, 도 집결소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제안할 만하다』
―관리소, 즉 요덕수용소 같은 격리 정치범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관리소는 다 폐쇄돼야 한다. 한 사람의 수감자도 그곳에 남겨져서는 안 된다. 이곳에 수감된 이들은 어떤 사법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재판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혐의가 씌워져 있는지도 통보받지 않았다. 다 석방돼야 한다. 남한, 일본, 미국처럼 상당수의 한국인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중국에 접근해서, 관리소에 있는 사람들이 북한을 떠나 제3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북한의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불법 행동에 익숙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제안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린다.
『물론 북한은 「우리나라에는 정치범 수용소가 없다」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면 북한 같은 폐쇄사회도 움직인다. 소련, 동구 공산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사회가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제기하자 북한은 10여 개였던 정치범 수용소를 최근 5개 정도로 통폐합했다. 「관리소를 폐쇄하라」, 「정치범인 관리소 수감자를 제3국으로 내보내라」고 미국과 한국, 일본이 압박하면 적어도 그 사람들을 교화소나 도 집결소로 보내지 않겠나』
―중국이 「관리소에 수용된 북한의 정치범들을 제3국으로 내보내도록 하자」는 제안에 동참하겠나.
『정치범들이 중국에 오면 중국에 머물지 않고 제3국으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건 캄보디아인들을 태국으로, 베트남 보트피플을 태국으로 잠시 보낸 후 호주나 미국, 캐나다로 보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북한 난민, 미국정착 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북한 정치범을 구출하는 사업에 참여하라고, 남한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북한 정부를 설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웃음) 잘 모르겠다. 한국을 세 번 방문해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을 만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한국 정부 관리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내 제안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지 한번 대화하고 싶다』
―미국 상원과 하원이 북한 인권문제 개선을 위한 법안을 몇 개 준비 중이다. 對北 방송을 증대시키고, 수천 명 규모의 탈북자를 받아들이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언제쯤 이런 법안들이 통과될까.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내년이나 혹은 다음해…. 현재 돌아가고 있는 법안들이 얼마나 하원과 상원에서 입법에 필요한 지원을 얻고 있는지 잘 모른다』
―미국이 탈북자를 수천 명씩 수용할 가능성이 있겠나.
『미국에는 수백만 명의 한국계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국 교민들과 교회들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똑같은 일이 북한 탈북자에 적용될 수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美 상원의 북한 청문회에서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얘기할 생각인가.
『즉각 착수하라고 권고할 조치는 6者회담에 관련된 것이다. 6者회담은 북한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 합의를 도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6者회담은 실패할 수도 있고, 안보와 관련된 조치만을 담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북한의 미사일과 핵문제를 북한의 안보보장 조치와 맞바꾸는 방식이 얘기된다. 하지만 북한은 그것 외에 외국의 對北 원조와 투자, 세계시장에 대한 접근, 세계은행의 차관, 미국·일본 시장에 대한 접근, 투자와 교역까지 포함하는 해결책을 원할 것이다. 이 패키지에 북한 인권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산가족의 재결합과 생사확인, 자유로운 왕래는 시급한 현안이다. 미국 의회가 행정부에게 이 부분을 강하게 권고해야 한다』
―金大中 정부와 뒤를 이은 盧武鉉 정부는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회피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과 NGO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한국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데 건설적인 역할을 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지난 봄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對北 결의안을 표결하는 현장에 참석하고도 기권했다. 한국 정부는 이 이슈에 대해 발언하지 않았다. 한국의 NGO와 인권단체들이 내년 결의안 채택에 한국 정부가 참여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한국 정부에 권고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북한 탈북자에게 계속해서 피난처를 제공해야 한다. 사실상의 난민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중국의 한국 대사관과 영사관에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으나, 너무 규모가 적다』
달걀이 바위를 깨는 날
호크씨와 대화를 나누다가 기자는 여러번 웃음을 터뜨렸다.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식량을 공급하자」,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 폐쇄를 촉구하자」, 「폐쇄 정치범 수용소인 북한의 관리소 수감자들이 제3국으로 나올 수 있도록 중국 정부를 압박하자」, 「탈북자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법안을 마련하자…」
호크씨의 제안들이 꿈 같은 얘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기자가 실없이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호크씨는 『왜 웃는 거냐』며 정색을 했다.
嚴酷(엄혹)했던 유신시절, 5共 치하에서 민주화투쟁을 했던 이들은 『달걀로 바위를 깨려는 거냐』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바위가 안 깨지더라도, 바위에 달걀 얼룩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며 철벽 같은 권력에 맞서 싸웠다.
북한 민주화 투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鐵壁(철벽) 같은, 그래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스탈린주의의 국가폭력과 정치범 수용소를 고발하는 이들은 바위에 달걀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는 얘기들이 언젠가 실현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달걀이 바위를 깨는 날이 결국 오지 않을까?
『金正日 독재를 제거하라』고 외치는 黃長燁씨를 보면서, 『북한 아이들에게 돌아가겠다』는 폴러첸을 보면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을 제3국으로 빼오겠다』는 호크씨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黃長燁씨는 11월1일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가인 「마운트 버논」을 방문했다. 黃長燁씨는 북한에도 민주주의가 꽃 필 수 있다는, 한반도의 남쪽이 북한 민주화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을까?
● 글: 金演光 月刊朝鮮 차장대우
● 출처: 월간 조선
첫댓글 DJ 가 김정일에게 우리나라의 안보를 팔아넘긴 행위는 헌법에도 위배되고 보안법 에도 위배 되는데, 그는 평생 좌익이념으로 살아오면서 정치해온 자이며, 엄청남 돈을 김정일에게 준것은 나중에 노무헨이가 집권해서 사실로 밝혀젓을때,DJ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대통령의 통치행위'duT다고 둘러대djT고, 무기력한 국회에서는 따지지도 못하고 지나rkT고, 386세대와 주사파들, 좌익계, 민노총,전교조들이 한패거리가 되어 단결해서 반정부운동을 하는바람에 이나라는 난국으로 치닫기 시작~이땅에 보수는 용감한 국민행동본부와 재향군인회등을 제외하면, 보수는 행동 안하는 비겁한 사람들이였고, 이제 우리국민은 그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