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보면 교우들이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구분되지 않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 대림시기부터 성탄장식이 시작되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오니 축제에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마스가 지나버리면
성탄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전례력에서는 성탄시기는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2~3주 가량으로 정해서 성탄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8일 동안은 성탄 팔부축제를 지내며
하루 만이 아니라 무려 8일 동안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순간을 ‘순간의 이벤트’가 아닌
‘일정 기간 동안의 축제기간’으로 연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력에 따라
대림시기를 대림시기로
성탄시기를 성탄시기에 알맞게 지내는 것은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를 그리스어에서는 두 개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먼저, 카이로스(kairos)라고 불리는 시간의 개념은
하느님의 시간을 나타내고
하느님과 인간을 수직적인 연결해주는 시간입니다.
반면, 인간의 시간은 크로노스(kronos)라고 하는데
시간이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의 개념과 같습니다.
시간을 구분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인 반면에
인간의 시간은 언제나 유한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시편 90편은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하시고,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말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의 시간을 체험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전례력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례력은 바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연결해주는
‘시간의 안내서’이기 때문이지요.
간혹,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수평적인 인간의 시간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단, 1초의 시간만 있더라도 누구나 하느님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전혀 없더라도, 카이로스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찰라의 순간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의식적으로 시간을 구분하여
대림시기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待臨, Advent)는 ‘기다림과 임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도착하시는 사건을 앞두고
구세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 부분은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을 묵상하며 깨어서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인것 처럼 기다립니다.
이스라엘 결혼 풍습에서는
신랑은 오고 싶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 보낼지는 신랑의 아버지가 결정하기 때문에
신랑 조차도 그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림의 두번째 부분은
12월 17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까지 입니다.
이 시기의 전례독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초점을 두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 전에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해 안내를 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이들이 태어나기에 앞서
의미있는 탄생설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들면, 석가모니의 탄생설화, 단군의 탄생설화,
박혁거세, 수로왕 등의 탄생설화 등이 있지요.
이와 비슷하게, 두 번째 시기의 독서와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치 TV 드라마와 같이 한번에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에피소드가 업데이트 되면서
우리를 기대하게 만들어 절정을 고대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대림시기는 양파껍질처럼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비로운 탄생을 기대하며 지내게 됩니다.
오늘의 복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예수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에 앞서, 요한을 미리 복선으로 두어
예수님의 등장이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고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줍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
미리 회개하고 준비하라고 하며 ‘대림’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회개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고
포용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포용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즉,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을 자비로이 여는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라고 말하며,
곧 등장하실 예수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해야할 것을 잘 알고 있고,
해야할 일을 부지런히 해 나갑니다.
또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 중에 “낄낄빠빠”라고 있지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내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내가 해야할 것을 하고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하고 명확한 구분입니까?
우리도 전례력을 통해서 시간을 구분하여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살면 어떨까요?
또한, 세례자 요한의 모범처럼
우리의 삶을 세속적인 삶과 구분하며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세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속과 나의 삶을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써 구분된 삶을 살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