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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3:8(257) ‘사랑을 빚진 사람’ 2020. 10. 4
세상에는 사람을 괴롭히는 무섭고 지독한 것이 여럿 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 중에서도 단연코 사람을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이‘빚’이라고 생각합니다. 빚지는 것에 대한 무서움과 공포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빚은 저승까지 따라 간다”는 말입니다.
제 아무리 손가락질 받는 나쁜 죄를 지었어도, 그 사람이 죽으면 죄를 추궁하지 못합니다. 범죄사실로 기소되었어도 그 사람이 사망하면 <공소권 없음>이라 해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혐의를 삭제시켜 버립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범죄사실이 밝혀져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빚은 그 사람이 죽었어도 저승까지 따라가서 괴롭힌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자 눈부신 산업과 경제 발전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산업이 발달할수록 그 이면에는 빈부격차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있다면,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용해야 할 돈을 마련하지 못하여 타인의 돈을 빌리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 영국의 런던에는 7개의 채무자 교도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채무자 교도소란 말 그대로,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였습니다. 7개 교도소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마샬시 교도소(Marshalsea Debtors’ Prison)였습니다.
이곳이 유명했던 이유는 영국의 대문호인 ‘찰스 디킨스’가 어린 시절 이 교도소에 생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겨우 12살 때 아버지가 이웃에게 빌린 40파운드 10실링, 지금 시세로 약 7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갚지 못해서 부모와 어린 동생 둘과 함께 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거기서 나올 때까지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빚이란 꼭 갚아야 하는 것이고, 갚지 못하면 매우 힘든 일을 겪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도 빚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아버님이 큰 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저희집이 동네에서 부자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세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고,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적은 돈을 자주 빌렸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동네 아줌마가 돈 받으러 왔고, 불과 몇 천원도 안 되는 적은 돈이지만, 제때에 갚지 못한 어머니가 봉변을 당하였고, 단칸방 구석에서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에 빚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돈을 받으려는 왔던 그 분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였겠지만, 어린 저로서는 그 분들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런 속박도, 그런 굴레도 다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저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내 수중에 돈이 없다면, 아예 물건을 살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저는 카드 사용도 빚이라 생각해서 카드조차 잘 사용안 합니다.
그런데 이해 안 되는 것은, 제가 사용하는 카드회사에서는 제 신용등급이 최고 등급이라고 말합니다. 주거래 은행에서도 제 신용등급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제가 은행에다가 현금 수억원을 꼽아 놓은 것도 아닌데, 그리고 매달마다 수 백만원씩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저더러 최고신용등급이라 대우를 합니다. 이거야 말로 정말로 웃기는 코메디입니다.
빚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 것은 과거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들 주변을 살펴보면, 빚으로 인하여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흥청망청 거리다가 빚을 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빚을 지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 빚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빚’이라는 말 자체가 싫고,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빚은 이런 무서운 내용의 빚이 아닙니다. 무서운 빚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빚’에 관한 말씀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1.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진 사람들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먼저 오늘 성경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빚이라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심적 부담을 안겨주는 말입니다. 빚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은 언젠가는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빚이 있다는 것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빚을 갚기 까지 그 빚에 속박되어야 하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빚이라는 순수 한글도 있지만, 법적인 용어로 사용할 때는‘채무(債務)’라고 말합니다.
채무라는 한문이 빚의 성격을 잘 말해 줍니다. 債務(빚 채, 일 무), 빚이 있는 사람이 그 빚을 갚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해서 갚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채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그래서 갚을 빚이 있는 사람을 채무자, 빚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을 두고 ‘빚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해서 ‘채권자’라고 말합니다. 고로 빚이라는 말은 제 아무리 좋은 의미로 생각하여도 육적 심적 부담을 주는 것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 모두가 어떤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빚은 어떤 빚인가요? 그것은“사랑의 빚”입니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빚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의 빚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요?
이 사랑의 빚은 모든 사람들이 지고 있는 빚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엄청난 부자라서, 남에게 갚아 줄 돈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받아야 될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사랑의 빚만큼은 지고 있는 채무자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이름을 세상에 날리고 있는 줄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어느 누구로부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지만 스스로 독야청청 홀로 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받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세요.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하기까지 우리 모두는 부모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선생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받는 빚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받은 사랑의 빚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남편을 만나서 내가 받은 사랑의 빚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랑의 빚을 우리는 갚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은혜를 아는 자가 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의 빚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내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빚 중에 가장 큰 빚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랑의 빚입니다.
이 사랑의 빚에 대해서는 바울이 롬 5: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든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상반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살펴 보면, 이 문장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잘 나타납니다. 문장 뒷부분에 있는“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를 강조하는 구문이 아닙니다. 이 부분보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구문이 더 강조된 내용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문장이 나타내려는 의도는 이것입니다. ‘물질적인 빚을 진 사람은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의 빚을 진 사람도 반드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사랑의 빚을 반드시 갚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내 가까운 지인에게 받은 사랑을 갚으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가족에게 받은 사랑을 갚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의 빚 또한 갚으려고 늘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 쉽게 사랑을 잊어버리는 나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어떤 부부가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나갔습니다. 모든 수속을 다 마치고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면서 부부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탑승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남편이 심심해하는 아내를 위하여 공항 안에 있는 비싼 커피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아내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신 후에 커피를 남편 옆에 두고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를 일어 납니다. 그리고 아내가 볼 일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 왔는데, 웬 여자가 자신이 자리에 놓고 간 커피를 들고 마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내는 화를 버럭 내면서 그 여자에게 ‘이 커피는 자신의 커피’라 말하고 훽 하니 낚아채어 자리를 일어섭니다.
커피를 들고 자리를 비운 남편을 원망하면서 남편을 찾아봅니다. 남편이 공항안의 편의점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을 봅니다. 그것은 남편의 손에 커피 두 잔이 들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여러분도 짐작하다시피, 조금 전에 화장실에 갔다 와서 자신의 커피라고 빼앗은 커피가 누구 커피였을까요?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 여자의 커피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창피하고 무안해집니다. 행여나 자신에게 커피를 강탈당한 그 여자가 따라와서 창피를 줄 것 같아서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남의 커피를 자신 것인 양 당당하게 빼앗아 가는 자와 같습니다. 자기 것 두고도 남의 것을 뺏으러 다닙니다. 커피를 빼앗은 여성은 모르고 빼앗았다고 핑계라도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나누어 주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그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나누어 줄 때에 조건을 달지 모십시오. “너가 나를 사랑했기에 내가 빚을 갚는 의미로 내가 너를 사랑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랑하지 마십시오.
2.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적인 갑부가 많습니다.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부자가 많다고 해도 유태인 부자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지 못할 장도로 유대인들은 세계경제를 쥐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린이 경제학>이라고 해서 어릴 때부터‘자녀들에게 경제 교육’을 시킵니다. 탈무드에 보면, 자녀들에게 “빚의 무서움을 가르치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빚의 무서움”이라는 부분에서 여러 항목이 있는데 두 가지만 소개합니다.
1)‘아무리 갖고 싶고, 먹고 싶고, 하고 싶어도, 자신에게 그럴 힘이 없으면 포기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억지로 무리해서 빚을 내면 결국 그 빚으로 인해 노예가 된다.
2)‘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룬다 해도, 그 빚으로 인하여 나는 노예와 같이 된다’그래서 이 말 때문에 유대인들은 함께 사업하는 동업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빚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보면, 경제가 어려우니까 빚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국내 신용불량자가 400만 명이나 된다는 충격적인 통계였습니다. 국민 10명 중 한 명이 신용불량자라는 말입니다. 충격적인 내용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은 우리나라가 갚아야 할 대한민국 채무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화면에 나가는 통계표를 보세요. 작년말 기준입니다. 대한민국 국가 부채가 자그만치 1,744조원입니다. 이 빚은 국민 한 사람당 나누면, 국민 1인당 1,409만원입니다. 부부 두 사람이면 2천800만원의 빚입니다. 바로 태어난 갓난아이도 빚 1400만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무서운 내용입니다.
금년 4월 선거를 앞두고 정부에서 재난 지원금을 국민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공짜로 나누어 주는 돈이라 생각하여 잘 사용하였습니다. 저도 그 돈 받아서 새안경으로 바꾸고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짜가 좋기는 좋다” 저도 공짜 돈 받아 보니 참 좋더라구요. 이것이 모두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국민 모두가 받은 그 돈이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부가 빚을 내어서 국민들에게 선심을 베푼 것입니다. 정부 여당이 국민들을 생각해서 주는 돈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돈은 정부 여당에 있는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재를 털어서 나누어 준 돈이 아닙니다. 고로 공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갚아야 되는 빚이라는 점입니다. 저와 여러분 갚아야 될 돈입니다.
저는 정부 여당에서 자꾸 선심성 돈을 남발하는 것을 매우 우려합니다. 자신들이 선심 쓰듯이 뿌려대는 그 돈은 결국 누가 갚아야 합니까? 명에는 자신들이 다 받아 챙기고, 빚은 국민들 모두에게 돌아갑니다. 제가 받은 공짜 돈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저희 집 아이들이 두고두고 갚아야 될 돈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부에서 선심 쓰듯이 뿌려대는 돈을 정말로 걱정하고, 또 그 폐해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중국 청나라 말기에 호림익(胡林翼, 1812~1861)이라는 관리가 자기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빚’에 대해 써놓은 것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빚을 안고 있으면 마치 뼈에 종기가 붙어 있는 것과 같다. 빨리 종기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종기가 너의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다.”
잠언 22:7절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말합니다. 채주(債主)는 빚을 준 사람을 말합니다. 즉 채권자입니다.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아야 되는 동안 채주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빚을 지지 않도록 슬기롭게 생활해야 합니다.
본문 하반절을 보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에게 사랑의 빚을 졌고, 여러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을 아는 성도라면, 그 빚을 ‘사랑함으로서 갚으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빚을 받은 줄로 깨달았다면, 이제부터는 그 빚을 갚으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아스퍼거 장애 또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발달장애의 특별한 형태 중에 하나로,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이 아스퍼거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원활한 교류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모습이 많이 있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정상인들 중에도 아스퍼거 장애를 가진 분들이 종종 있는 것을 봅니다. 서로 함께 힘들어 하고 피해를 보는데도, 막상 자신만 힘들고 피해를 본다고 생각을 합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만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사랑을 베풀어도 자신의 관점에서만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당신은 왜 나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면서 화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올바른 사랑의 행동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좋은 추석한가위 명절입니다. 그리고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참 좋은 10월의 시간에 우리는 머물고 있습니다. 이 좋은 시기에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또한 받은 사랑은 빚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사랑을 되돌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김석균 씨가 지은 “주님께 빚진 자(905)”라는 복음송 3절을 부른 후에 설교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1. 죄악에 썩은 내 육신을 주님이 쓰시려했네. 죽음의 덫에 걸려있는 몸 주님이 쓰시려했네. 속죄하는 손 치유하시고 속죄하는 발 치유하셨네. 새 생명 얻은 이 몸 다 바쳐 주님께 영광 돌리리.
2. 먹물로 칠한 내 육신을 주님이 희게 하셨네. 십자가 보혈 증거 하라고 주님이 살리셨네. 기도를 할 때 음성주시고 찬송을 할 때 기쁨주시니 내 작은 입이 내 작은 몸이 주님께 붙들린 자라.
3. 평생 갚아도 빚진 자되어 주님께 빚진 자되어 주님 가신 길 택하였건만 눈물만 솟구치네. 생명주신이 주님이시라 능력주신이 주님이시라. 말씀전하여 복음전하여 주님께 빚을 갚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