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영가靈駕 소참법문小參法門
* 1987년 3월 28일 태안사에서 하신 영가 소참 법문입니다.
영가靈駕시여 세월이 흘러가는 강물 같아서 가신지가 49일이 지났습니다. 영가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오. 중생은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고 하고 모양이 없으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양이 있고 없고 간에 생명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이 없고 바로 영생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어두워서 생명의 본질을 못 보기 때문에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고 하고 모양이 안 보이면 죽었다 합니다. 금유전무今有前無라, 지금은 있어도 앞에는 모양이 없었습니다. 박 아무개 김 아무개라 하는 인간 존재가 지금은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는 모양이 없었습니다. 모양이 없다가 인연 따라 부모 연 따라서 금생에 사람 몸 받아서 사람 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금유후무今有後無라, 금생에는 모양이 있더라도 인연이 다해서 자기 몸이 사라지면 다시 죽은 다음에는 모양이 없습니다. 과거에 없던 모양이 금생에 있고 금생에 있던 모양이 미래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양이 있고 없고 간에 생명은 존재합니다. 영가시여! 생각해 보시오. 영가의 모양은 지금 못 보지만 영가는 분명히 이 자리에 와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바娑婆 고해苦海는 언제나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 또는 사물을 바로 보지 못 하는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바른 생활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갈래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자기 업장의 무게에 따라서 업장이 가장 무거우면 지옥으로 갔다가 조금 가벼우면 아귀로 갔다가 조금 더 가벼우면 축생으로 갔다가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서 육도六道 윤회라.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이와 같이 육도에 헤매는 것입니다. 이런 업장의 무게가 다 끝나서 본래의 마음 본래의 생명으로 돌아가면 삼계를 초월해서 욕심을 주로 하는 욕계欲界나 또는 모양이 있는 색계色界나 또는 의식이 아직 존재하는 무색계無色界나 이런 삼계三界를 초월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영가시여 깊이 생각하시오. 업장의 무게라는 것은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마음이지만 또 역시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업장業障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몸이 있다가 사라질 때는 세 가지 무거운 업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평소에 쓰고 있는 몸 이것이 내 것이다 하는 집착입니다. 몸이란 것은 지수화풍 4대가 각 원소가 모여서 각 원소가 또는 마음의 의식과 이것이 부처님 말씀으로 하면 사대四大 오온五蘊 인데, 사대 오온이 잠시 연緣 따라서 모여서 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몸이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각 원소는 원소대로 흩어지고 마는 것이고 다만 쓰던 마음씨 이 마음씨만 가지고 갑니다. 쓰던 마음씨 거기에 우리 업이 붙은 것입니다. 평소에 쓰던 그 마음씨가 몸은 사라져도 생명은 존재하는 것인데 그러한 마음씨에 집착심이 붙으면 그 집착 때문에 앞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삼계를 빙빙 돌면서 해탈을 못하는 것입니다. 해탈을 못 하면 우리 생명의 본 고향인 극락세계로 못 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우리 인간이 돌아갈 때의 집착심인가 하면은 우선 자기 몸에 대한 집착심, 내 얼굴 손발 이와 같은 자기 몸에 대한 집착심, 매장埋葬하면은 매장하는 거기까지 따라가면서 저 몸이 내 몸이라. 지금 땅에 묻히는 저 몸이 내 몸이다 해서 집착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화장하면 집착심은 죽어집니다만, 그러나 역시 집착하는 흔적 때문에 자기가 쓰던 몸에 대해서 느끼는 애착심을 떠나려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내 자식 남편 아내 동생 하는 권속 역시 금생에 나오면서 사귀던 권속에 대한 욕심은 못 떠납니다. 그런 미련을 못 떠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쓰던 세간살이 땅 지위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탐욕심이나 집착심 때문에 우리 중생은 금생의 생명을 다해서 저승으로 가는 길에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집착 자기 권속에 대한 미련 자기가 쓰던 재물에 대한 집착심, 영가여 이러한 것은 뜬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영가시여 깊이 생각해 보시오, 사람 몸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각 원소가 합해지고 또는 자기의식, 자기 분별 시비하는 그런 식이 합해져서 사람 몸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 몸을 구성하는 원소가 흩어지면 몸은 간 곳이 없습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텅 빈 광야에다 여러 가지 자재를 구해서 집을 만듭니다. 그러나 집이 필요 없어서 또는 인연이 다해서 허물어 버립니다. 허물어 버리면 그때는 텅 빈 광야만 남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람 몸도 역시 허공 가운데 연 따라서 잠시간 사람 모양을 나타낼 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모양은 없습니다. 몸을 구성한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탄소는 탄소대로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보면 이와 같이 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컴컴한 때에 지푸라기를 잘 못 보고서 ‘저것이 뱀이다’ 이와 같이 그릇 판단합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나 새끼토막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뱀이라고 느끼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가 합해진 각 원소가 합해진 그 몸뚱이를 내 것이다 하는 것은 마치 컴컴할 때 새끼토막 즉 짚으로 꼬아진 새끼토막을 뱀이라고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다만 우리 망상적 마음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없습니다.
‘나’다 하는 김 아무개 강 아무개 하는 그것 역시 방금 말씀대로 컴컴할 때 새끼토막을 가리켜서 잘 못 보고서 이것이 뱀이다, 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만 새끼토막에 불과한 것인데 즉 바로 보면 새끼토막 이고 정말로 바로 보면 지푸라기뿐입니다. 성자들은 그러한 그릇된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새끼토막을 “저것은 뱀이다”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자꾸만 업을 짓습니다. 이 몸뚱이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인데 내 것이다 하는, 새끼토막을 뱀이라고 보는 그런 잘못된 견해 때문에 자꾸 업을 짓습니다. 이 몸뚱이에 좋게 하면은 그때는 탐심을 내는 것이고 몸뚱이가 싫어지면 그때는 성내는 진심을 냅니다.
바른 지혜는 무엇인가 하면은, 지금 몸뚱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하는 지혜 이것은 어려운 법문입니다만, 이러한 어려운 법문 즉 말하자면 몸뚱이를 구성하는 내 몸이 본래 없다 하는 마치 물에 비치는 달그림자같이 사실은 달이 아닌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한 아까 말씀대로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그런 윤회하는 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것은 무엇인가. 새끼토막을 그릇 봐서 뱀이 된 것도 아니고 새끼토막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면 지푸라기 이듯이 우리 사람도 역시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두워서 못 본단 말입니다. 원소로 구성되고 또는 각 의식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다.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지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으로 보는 이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는 그런 견해가 없는 한에는 우리 중생은 몇 만생 죽고 살면서 생을 되풀이하면서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지옥이나 아귀나 수라 인간 천상 이런 경계를 빙빙 돌아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영가시여 깊이 생각하시오. 우리 인간이 돌아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어느 곳도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머무를 곳은 그때그때 무상한 일시에 불과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 이것이 영구永久된다 하지만 몇십 년이다 하는 세월이 흘러가는 강물같이 그때그때 변하고 변해서 몇십 년이 지나면 그때는 모든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머무른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만 존재합니다. 헌데 마음도 역시 집착하는 마음 욕심을 부리고 성을 내고 또는 자타를 구분하는 그런 마음은 참다운 생명을 묶어서 삼계를 윤회하는 저 지옥으로 뚝 떨어졌다가 좀 나아지면 귀신이 되었다가 또는 축생이 되었다가, 그렇게 헤매고 마는 것입니다.
영가시여 깊이 생각하시오. 우리 중생이 가는 우리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으로 이루어져서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집이나 또는 환경 모두가 찬란한 광명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영생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에 가야만 우리 인간은 비로소 인생의 고苦를 떠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떠나 또는 영원히 만나서 헤어지지 않는 무상無上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오. 우리 생명의 본바탕은 바로 부처이고 우리가 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뿐 만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역시 우리 참 모습 참 생명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참 생명은 부처님이고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비록 우리 인연이 복잡해서 지금 바로 극락에 못 가고 내 참 생명인 부처님이 못 된다 하더라도 어느 땐가는 돼야 합니다. 못 가면 못 되면 결국은 우리는 그만치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또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수라나 그런데서 헤매고 헤매는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영생하는 길 외에는 모두가 다 살고 죽고 아프고 늙고 하는 생로병사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영가시여 깊이 생각하시오. 영가가 가는 길은 오직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권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기가 쓰던 주변 세간살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부처님한테 가는 길 부처님이 되는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되는 길이나 극락세계에 가는 길은 똑같은 길입니다. 부처님이 되어야 극락세계에 비로소 가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야 참다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인간은 누구나 갈 수 있고 가야할 근본 생명의 고향인 것입니다.
영가시여 자세히 관찰하시오. 돌아갈 본 고향인 극락세계는 광명으로 빛나는 세계입니다. 아미타 부처님 또는 관세음보살님 또는 대세지보살님 무수한 보살님이 계시는 세계입니다. 영가시여 집착만 버리고 욕심이나 진심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그러한 업장을 구성하는 마음만 버리면 눈을 들면 바로 극락세계의 찬란한 영원한 세계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께서 관음보살이나 무수한 보살을 거느리고 영가 앞에 영가가 타고 가실 분명 영가가 타고 가실 찬란한 연화대가 놓이는 것입니다. 영가여 눈을 바로 들고서 보살님들이 내미는 금색 연화대蓮華臺에 오르셔서 조금도 미련이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유가족이시여 돌아가신 영가를 위하는 효심은 어떠한 것이 가장 지극한 효심인가 하면은, 오직 영가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참다운 이름 또는 영원한 생명의 이름 또는 우주의 이름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는 것입니다.
유족이시여, 다시 명심하시오. 돌아가신 김영순 영가를 위한 가장 큰 효심은 무엇인가? 영가를 위해서 무서운 재물을 쌓는 그것도 아무 필요 없고 다만 영가를 위해서 바른 마음 바른 생활을 하면서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가지고서 바른 생활을 하면서 오직 인간 모두의 참 이름, 일체중생의 참 생명 이름 또는 이 우주 이름 그러한 내 생명의 참 이름 우주 이름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을 일심으로 외우면서 김 영순 영가가 극락세계에 하루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최선의 효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가신 김 영순 영가나 우리 사부대중이나 모두가 다 한결로 자기 본 고향인 극락세계를 하루빨리 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는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
첫댓글 ..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광명으로 빛나는 극락세계..
조그만 어린 애들이 해맑게 놀고 있는 듯
꽃이 아기자기 예쁩니다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