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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길따라 도보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산시조
보행 지 |
남한산성 동문- 하남 구산성지- |
길라잡이 |
산시조 (010-2318-8095) | ||
코스 |
남한산성입구역-동문성지-남한산성-금암산-이성산-하남 구산성지-상일동역 :(약 23km / 8시간) | ||||
출발 일시 |
11월 14일(수) 9시 |
출발 장소 |
남한산성입구역 8호선 1번출구 |
도착지 |
5호선 상일동역 |
공지사항 필독 후 참가 신청해 주세요 !!!!! | |||||
공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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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2) 필요한 회원분은 여행자 보험을 개별적으로 꼭 가입하시기 바랍니다.
3) 모임시간을 꼭 준수합시다. 지각인 경우에는 미리 연락을 꼭 해주세요.
4) 혼자 앞서 걷거나 뒤쳐지지 않도록 유의해 주시고 대열에서 이탈시 진행자에게 꼭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5) 명찰을 패용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6) 카페 회원님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동일한 자격을 가지신 회원입니다.
7)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와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행복한 카페 활동을 해주세요^^(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은 삼가해 주세요)
8) 이 걷기는 도중에 산길(완만한 내림길)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준비를 해오시기 바랍니다.
9) 뒤풀이는 없습니다.
10) 보행중 매식이 어려우므로 반드시 도시락을 준비해오시기 바랍니다. | |||||
준비물 | 도시락, 식수, 행동식, 계절에 맞는 복장, 우의, 모자, 장갑, 스틱, 랜턴,갈아 입을 옷 등 |
<구산성지, 남한산성 동문 성지소개 >
지리좌표 동문 앞 순교 터 북위 37°28′58″ 동경 127°13′33″ 문의처 신장 성당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6킬로미터,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남한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661-681년)이 쌓은 주장성(일명 일장산성)의 옛터로 그 후 몇 차례 축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후금 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 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8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7.3미터 가량이다. 동서남북 4군데에 문루가 있고 역시 4방위에 각각 장대(將臺: 옛날에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 지휘하던 대)가 있었는데 현재는 수어 장대(守禦將臺)만이 남아 있다. 원래 9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남한 산성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병자호란 때이다. 청나라의 침략으로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이곳으로 피난하였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일 동안 수성을 하였지만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은 가운데 청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게되고 삼전도에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세우게 되는 치욕적인 역사의 장을 남기게 되었다. 두 번째는 순교 성지의 이정표가 말해 주듯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辛亥), 1801년 신유(辛酉), 1839년 기해(己亥), 1866년 병인(丙寅)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 순교자 2-3백 명으로 추산)순교한 곳임."에서 느낄 수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처형 터가 있어 헌종 5년 기해 박해(1839년)와 고종 3년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치명, 순교한 곳이다.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밖으로 던져지거나 물이 빠지는 구멍용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됐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됐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시구문은 동문 왼쪽 길 바로 밑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어른 두어 명이 허리를 굽히고 다닐 만한 크기의 사각진 구멍이다. 옆길로 돌아 비탈길을 내려서 시구문 바깥쪽으로 내려서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고 그 험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내고야 말았던 선조들의 굳은 신앙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동문에서 비탈을 따라 1킬로미터 올라가면 로터리가 나온다. 이 로터리 오른쪽 주차장이 천주교도들을 수감했던 옥 터이다. 정면에는 섭정 10년 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어느 사찰 승려들이 세워 준 것으로 불망비와 마주한 곳이 바로 처형 터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을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제일 먼저 참수된 교인은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 신유사옥 때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이 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동생 김문집은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가 생긴 것은 고종 3년 1866년 병인박해 때다. 대원군 섭정 10년 간 교인 2만여 명이 신앙의 증거 속에 거룩하게 순교한 것이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치명 터가 동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동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서문으로 와서 로터리를 거쳐 동문으로 빠져 나오는 길도 가능하다. 사실 대중 교통편은 성남 방면이 더 노선이 많다. 경기 도립 공원인 남한산성은 수림과 유적 기념관 등이 잘 정리돼 있다. 수어 장대, 숭열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1호부터 6호까지로 지정돼 있으며 본성 축성 당시 창건한 성내 9개 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경사와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장 등이 있다. 찾아가는 길 하남시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광주 쪽으로 가다가 광지원리에서 우측으로 접어들면 남한산성 가는 길이다. 동문을 들어서자 우측으로 넓은 터가 보인다. 안내 간판만이 서 있는 곳이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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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남 구산성지
김 성우(안토니오)聖人의 고향(故鄕)이고 묘소(墓所)가 있는 곳으로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 입니다.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이곳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聖地(성지)입니다.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 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산은 한강변 미사리 조정 경기장 옆에 위치해 있으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200여 년 동난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서울에서 불과 20분 거리 내에 있으며, 시원스레 뚫려있는 강변도로와 중부고속도로, 구리 - 판교 고속도로를 이용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이 구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구산 성지가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해도 카페촌으로 유명한 미사리와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거기!"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 - 10번지에 위치한 구산 성지는 한국성인 103위성인 중 71번째 나오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하여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성지라는 데서 교회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신앙의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입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群波)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만집(萬集), 문집(文集),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을 입교시켜 구산을 지금의 교우 촌으로 만들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유방제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고,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구산에서도 그 여파가 밀려와 그는 공소의 회장으로서 사학(天主學)의 괴수로 지목되어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곤장과 치도곤을 맞으며 배교 하라는 재판관의 강요에 아무런 굽힘없이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말로 오늘날 우리의 심금을 찡하게 울리는 그의 굳은 신앙심을 표현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성인은 다시 형조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안 관장은 결국 1841년 윤 3월9일(4월29일) 그를 교수형에 처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옥에 갇힌 지 2년이 지난 시기였으며, 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두어져 이곳 구산 성지에모셔졌습니다.
성인의 굳은 신앙심은 결국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하여 한국 103위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 되셨습니다.
현재 급격한 도시화의 이농현상에도 불구하고, 이 곳 구산 마을은 전통적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의 얼이 살아있는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입니다. 이곳 구산 성지가 평화의 은혜가 충만한 이유는 성인과 순교를 모신 곳이지만 피 흘림의 순교지는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서울에서, 8인의 순교자들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후에 이곳 구산에 모셔졌습니다.
천상의 얼을 받으신 성인과 순교자들을 모신 곳이기에 그분들의 전구로 평화로움이 가득한 성지가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 성현들의 진리탐구 정신과 천주공경 신앙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내일의 후손들에게 계승발전 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우리 성현들의 업적이 지닌 경신예절의 종교적인 측면과 진리탐구의 학문적인 면을 발전시키기위하여 이곳 구산 성지에 순교 기념 성전과 기념관이 건립될 계획으로 있습니다.
이곳 구산성지에 세워진 성모상은 구산성지와 구산성당 초대신부(1979-1984)이며 성모님에게 특별한 신심을 갖고 계시던 故 길 홍균(이냐시오 1931-1988)신부님이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학장이신 김세중(프란치스꼬)화백에게 작품을 의뢰, 김세중 화백이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작품입니다.
왕관을 쓰시고 오른손에 지시봉을 들고 계시는 특별한 모습의 성모님은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기리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귀중한 성모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