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파산정책의 후퇴를 보면서
1997년의 외환위기, 2003년의 신용카드 사태를 거치면서 대량으로 발생한 금융피해자들에 대하여 우리 법원이 단기간에 이룩해 낸 파산보호의 성과는 국민과 함께 하는 사법부를 추구한 당시 소수 엘리트들의 노력을 반영한다. 그런데, 2006년도에 99%에 이르던 면책율이 최근 87% 수준까지 후퇴한 것은 대다수 법률실무가들의 인식이 파산제도가 민사법상 권리의 실현을 방해한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리라. 세계시장의 형성으로 국제적 경쟁에 노출된 기업과 가계가 적응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중심에서 가계부채에 파묻혀 표류하는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보호는 당연히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야 할 것인데, 이에 반대하여 우리는 선진국과 여건이 다르다는 주장은 파탄의 원인이 국제적인 점을 간과한 안이한 주장이고 전염병에 대응하는 약을 선진국의 것보다 불량한 것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선진국에서 최고의 보호가 제공되다가 약간 후퇴한 것을 보고 우리도 후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굶어서 빼빼 마른 꽃제비에게 비만과 당뇨가 걱정되니 먹을 것을 조금만 줘야 한다는 식이다.
경제주체의 지급불능에 닥쳤을 때 정치체제의 선택은, 첫째 사회주의적 방식 즉 정부가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것, 둘째 자본주의적 방식 즉 파산재단으로 파산채권을 처리하는 파산제도를 통하여 실패의 결과를 금융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내부화하는 방식이 있다.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위기극복을 명분으로 거액의 공적 자금을 민간 은행에 퍼 주는 것을 보면 금융기업의 정치적 영향력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동차 산업도, 건설 산업도 농업도 지원을 받으니 대략은 정치적 지대추구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빚에 몰려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서민, 모든 계층으로부터의 낙오자인 그들은 특수이익으로 조직화되기 힘들다. 그들은 덜 평등한 것이다. 심지어는 ‘환승론’이라는 명목으로 공적자금 대출을 받아 고금리대출을 갚게 하여 대부업자들에게 횡재를 가져다 주고 조직화된 채권추심에 시달리게 하는 희생이 되고도 마치 혜택을 받은 것처럼 주장된다. 그리고 ‘도덕적 해이’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토마스 제퍼슨도 금융업자들은 군대보다도 위험하다고 했던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용서를 받고 나서 자신에게 오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핍박하는 상황과 무엇이 다른가.
제발 좀 용서하고 살자. 그들에게 파산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특별한 공적 자금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파산제도는 금융채무에 대하여는 보이지 않는 글씨로 채무자가 파산한 경우 파산재단에서의 배당을 제외한 나머지 채무로부터 면책된다는 약관이 보이지 않는 글씨로 적혀 있다고 강제함으로써 채권자가 신용을 주기 전에 채무자의 지급능력을 엄격히 심사하고 또 대출 실행 이후에도 채무자를 감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한다.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것이다. 한편 조세, 불법행위채권, 부양료 채권 같이 사회적인 우선순위를 누려야 할 채권에 대하여는 비면책채권으로 규정하여 파산제도를 투과하게 하니 스스로의 의사에 기하지 않고 채권을 취득한 억울한 채권자를 강력하게 보호한다. 용도를 묻지 않고 제공된 신용에 치여 자식의 학비를 대지 못하고 세금을 체납하던 가장은 다시 가족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고 국가에 충성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심각하다고 문제가 제기된 이후 여러 해가 지났다. 800조에 달하니 큰일이라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1,000조라고 한다. 거시경제 차원에서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희망없는 강제저축이 가계소비를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업의 존립기반을 흔든다. 거대자본이 운영하는 대기업들이 포퓰리즘적 견지에서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대중의 소비에 제공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함으로써 대중에게 봉사한다는 점에 있다. 수십억, 수백억원 횡령, 배임했다고 기소되었던 분들을 경제에 대하여 기여하였다고 용서할 수 있다면, 주제 넘은 소비를 하여 그들 대기업 활동의 기반이 된 수백만 대중을 용서하지 못할 바 아니다. 잘 운영되는 파산제도는 내수 기반을 넓혀 대기업을 살린다. 그들을 용서한들 영원히 빚을 갚는 그들이 부자 되겠는가.
취업이 어려운 시절에 창업을 지원하는 정책은 잃을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한 청년들도 위험한 기업활동에 가담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미래는 불확실하고 기업은 실패하기 쉽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때는 벤처기업가 흉내를 냈지만 삶의 리얼리티는 그들 대부분을 신용불량자로 만든다. 그러고서는 재기하려는 노력을 도덕 타락으로 비난한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어느 누가 창업을 할 것이며, 그 밑에서 어느 누가 몇달, 몇년씩 컵라면으로 때우며 밤을 새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며 스톡옵션 대박을 꿈꾸겠는가. 한 때 인재가 넘쳐 흐르던 IT업계에서 인재충원을 하지 못하는 반면 노량진 공무원시험 준비 학원에, 신림동 고시원에 애늙은이가 넘쳐 흐르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철수 씨도 기업활동의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은 파산제도가 기업인들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완전하지 않다. 정부지원으로 실패가 용서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기업가 정신을 진작하지 못한다. 국민의 세금을 노리는 타락을 금융권 너머로 확대하는 어리석음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타지마할 카지노가 현금수입의 감소로 위기에 처하자 제11장파산(회생절차)으로 기업의 재무상태표를 새로 쓰고 주거래은행과의 개인채무 워크아웃을 통하여 개인 순채무를 수백만달러로 줄였지만 자신이 파산하지 않았음을 과시하지만, 그에게 파산제도에 의한 면책이라는 무기가 없었다면 인색하고 가혹한 은행이 개인채무 재조정에 나섰을까. 우리 은행이라면 그렇게 할까. 한 동안 잘 되던 연예사업의 실패가 영원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 준 파산제도가 없었다면 망하고 서부로 갔던 월트디즈니가 재기하여 전 세계인에게 환상을 주는 사업에 나설 수 있었을까. 오히려 전통적인 파산보호의 대상은 상인이었고 그 역할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상환능력이 있으니 의사, 변호사는 영원히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찌질함을 제발 법률가는 버려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노숙자, 영세민, 서민은 파산제도로 얻을 것이 없고 중산층에 대한 파산보호도 극적인 감동을 주지 못한다. 대략 그들은 채무를 면하여 준들 다시 현실로 돌아가 새로 빚을 쓰고 영원히 빚을 갚는다. 어쩌면 파산제도는 영원한 소비자금융업의 기반이기도 하다. 과거의 빚을 면하여 새로운 빚의 착취대상이 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난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 병든 영혼은 주위 사람을 슬프게 한다. 담보 다 빼 먹은 깡통빌라를 제 것인 줄 알고 열심히 고치고 살며 할부 중고차라도 타고 직장에 열심히 다녀 대출이자 내고 어쩌다 한번은 회사 콘도에 가서 삼겹살 구워먹는 중산층이 대량으로 노숙자, 노예가 되면 어떤 병든 영혼은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하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어나가기도 한다. 사회보험의 원조인 비스마르크는 연금을 받을 기대를 하는 노동자는 다루기 쉽다고 말했다. 누구나 채무노예상태에는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Rawls 적인 최저한의 보장은 사회에 안전망을 제공한다. 용서는 고대로부터의 지혜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복음 6장 12절)는 영어로는 “빚진자를 용서하였으니 저희 빚도 용서해 달라는 의미로 적혀있다.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forgive our debtors). 도저히 채무자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크리스천임을 자칭한다면, 기도할 때 위 두 줄은 빼고 외우라. 도시의 아름다움은 거대한 교회 건축물에 있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쉴 곳에 있다며 노숙자를 위한 활동에 평생을 바쳤던 피에르 신부가 살았던 프랑스에 개인파산제도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 분도 개인파산제도의 옹호자 중 한 명이 되었으리라.
파산제도를 관대하게 운영하면 너도나도 빚을 쓰고 갚지 않으면 될 것이니 금융의 근간이 무너진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편견을 가지고 채무자를 보는 것이다. 대다수의 채무자들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굳건한 중산층이며 모든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리대의 희생이 되는 피해자들이 대다수이다. 대부분은 파산보호를 택하기에 앞서서 절망적인 상태에 이를 정도로 채무를 이행한다는 점이 그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사회적 낙인효과 때문이기도 하고 또 사업상, 가사상 필요한 대출을 계속 받기 위하여 기존의 신용 유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파산제도를 운영하는 미국과 영국의 금융산업이 융성하는 것을 보면 파산법이 금융을 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한다.
파산신청이 늘어나면 사법체계에 큰 업무부담이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오로지 불량채권에 대한 소송과 집행이 줄어들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추심인은 절망적인 채무자가 마지막 선택으로 파산으로 몰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적절차를 자제할 것이다. 너도 나도 파산하면 소는 누가 키우고 식의 한가한 사고로 파산신청을 억제하겠다는 발상은 한심할 뿐이다. 사람들이 파산으로 몰려드는 발본적 원인을 제거해 보라, 미국의 여러 주처럼 급여 압류를 금지하여 보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면책을 받아 보았자 곧 다시 고리대금융에 빠져 영원히 빚을 갚는 사람들의 파산신청은 당장 사라질 것이고 파산신청은 현재의 10분의 1로 줄 것이다. 변호사, 법무사를 채무자대리로 선정하면 채무자에게 직접 통신을 못하게 해 보라. 적정한 가격에 부실채권을 해결하는 거래가 작은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개인회생제도를 거의 대체할 것이다. 실패한 사업가를 보호하려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파산제도는 운용될 것이다. 병원에 환자가 폭발적으로 느는 것은 지역사회에 전염병이 돈다는 것 아니면 갑자기 주민들이 단체로 꾀병을 가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산에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전자라면 역학조사를 하고 치료제를 강구할 일이고, 후자라면 진료를 제한할 수도 있겠다. 가계부채가 심각하다는 진단이 도처에 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꾀병한다는 식의 한가한 말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