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지역(2024. 9. 24) 문화 답사 자료 안내
노령산맥의 동쪽 산간지대 임실, 전주에서 국도를 따라 들어가는 임실은 전라북도에서 가장 내륙에 있다. 동쪽은 진안, 장수, 서쪽으론 정읍, 남쪽으론 남원, 순창이 있고 북쪽으론 완주군과 접한다. 무진장과 더불어 산간오지로 통한다. 하지만 임실은 숨어 있는 볼거리가 많고 섬진강의 상류로 자연환경이 청정하며 산자수려한 고장이다. 무엇보다 산 높고 골 깊은 임실은 어디를 가나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널리 서린 곳이다. 임실의 항일운동은 국내 어느 곳보다 줄기차고 강렬했다. 의병 54명, 3·1운동 78명, 국내 13명, 기타 1명을 합해 146명의 애국지사들로 도내 어느 지역보다 수가 많으며 장렬하였다. 가을 한 날을 잡아 그분들의 숨결을 찾아 나섰다. 이석용 의병장과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한 28 의사가 잠들어 계신 소충사,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 충절의 상징 오수의 원동산과 둔데기 마을의 이웅재 고가, 독립지도자를 길러낸 김영원 선생의 삼요정, 민족대표 박준승 선생 기념공원, 한영태 열사의 묘소 등을 찾아다니는 길은 멀고도 외졌다. 굽이굽이 고라실을 돌고 돌아야 했다. 1. 옥정호 출렁다리 전북 임실군 옥정호에 붕어섬 생태공원이 있다. 옥정호 붕어섬 출렁다리는 요산 공원과 출렁다리 건너 붕어섬 생태공원과 요산 공원 함께 둘러 보고, 국사봉 등산로 입구 맞은편 전망대에서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으나, 길이 좀 멀어 하루 일정으로 어려울 것 같다. 옥정호는 1927년 섬진강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인공 호수다.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댐이 완공되면서 그 구역이 더 넓어졌다. 붕어섬도 그때 생긴 섬이지요. 국사봉 전망대에서 보면 섬의 모양이 붕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붕어섬에는 원래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2018년부터 임실군이 매입 후 경관 조성을 통해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옥정호 출렁다리는 총길이 420m로 붕어를 형상화한 높이 83.5m의 주탑으로 되어 있다. 다만 옥정호 출렁다리와 붕어섬 생태공원은 유료이다. 옥정호 출렁다리
옥정호에서 가장 유명한 붕어섬의 원래 이름은 ‘외앗날’이었지만 섬의 모양이 흡사 붕어 같아서 이제는 붕어섬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붕어섬에 도착하면 먼저 방문자 안내소가 방문객을 맞아준다. 섬 한편에 있는 갤러리 정원과 숲속 도서관을 지나 수변 산책로에 이르면 붕어섬 안에서 바라보는 옥정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신기하게도 옥정호의 물안개는 붕어섬 주변에서부터 시작되고, 또 붕어섬에서부터 걷힌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붕어섬은 황금빛으로 변한다고 한다. 발아래로 펼쳐진 파란 호수, 그 속에는 붕어를 닮은 작은 섬 하나가 그림처럼 떠 있고, 행여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선경이 따로 없다. 이 신비로운 붕어섬에 발을 딛고 서서 걸음마다 달라지는 옥정호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다가 요산 공원과 붕어섬 코스이다.
2. 요산 공원(樂山 公園) 옥정호에 있는 요산 공원은 2009년부터 9년간 진행한 붕어섬 주변 생태공원 조성 사업으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때 낙향한 성균관 지사 최응숙 선생이 세운 누각인 양요정(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과 섬진강댐 건설로 수몰된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고자 세운 망향탑이 있는 곳이다. 요산 공원은 27,392㎡의 크기로 공원 곳곳에 심어놓은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어 풍경이 아름답고, 옥정호를 끼고 걷는 데크 로드 산책로가 있어 가족과 연인과 함께 걷기 좋다. 주변 국사봉 전망대에 올라가 붕어섬을 보는 것도 추천할 만한데 일정상 어려울 것 같다.
요산 공원 표지석
요산 공원
요산 공원 안의 양요정(兩樂亭)은 1997년 7월 18일에 전북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엽 최응숙 선생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성균관 진사 최응숙 선생의 본관은 전주, 호는 양요(兩樂), 시호는 충현이다. 최응숙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성균관 진사로서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책봉되었고, 후에 운암으로 낙향해 양요정을 짓고 소요했다. 양요정(兩樂亭)
양요(兩樂)라는 말은 논어 옹야편에 '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 지혜(智慧ㆍ知慧)로운 자는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의리(義理)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重厚)하여 변(變)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양요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옥빛 우물이란 뜻인 옥정호(玉井湖)의 모습은 육지 속의 섬이라는 붕어섬이 해 질 녘 풍경에 들어온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산을 둘러 흐르며 앞쪽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있어 주위의 풍치가 뛰어나다.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시문을 새긴 편액 14개가 남아 있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보다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아래 강변이었으나 1965년 섬진강댐을 건설할 때 수몰되자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국사봉 전망대에서 본 요산 공원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주는 망향탑(望鄕塔) 섬진강댐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을 위해 조성된 탑이다. 임실군은 7개 망향의 탑이 세워진 진안 용담댐과 달리 옥정호 주변에는 망향탑이 없음을 설득해 섬진강댐관리단과 수자원공사로부터 국비 2억 원을 확보해 망향탑을 조성하게 되었다.
요산 공원 내의 망향탑
망향의 탑은 운암면 입석리에 1,000㎡ 정도로 총 2억 5,000만 원을 투자해 망향탑과 망향비를 건립하고 공원 조경을 하여 2007년 완공되었다. 섬진강댐은 1961년부터 5년간 축조됐으며, 수몰민은 2,786세대에 1만 9,851명, 수몰면적은 1,455ha로 농업용수, 생활 식수 등으로 사용됐다. 댐이 준공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은 고향의 그리움으로 망향의 탑 공원 건립을 희망해 왔다. 3. 붕어섬 생태 임실 요산 공원·붕어섬 길은 옥정호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잘 조성된 ‘요산 공원’과 옥정호 안에 있는 신비로운 ‘붕어섬’을 연결하는 코스이다. 이 길은 요산 공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옥정호 출렁다리 및 붕어섬 생태공원은 붕어섬을 거쳐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다. 요산 공원에서 붕어섬까지 이어주는 출렁다리는 총길이 420m, 순 폭 1.5m이다. 붕어를 형상화한 높이 83.5m의 주탑과 스테인리스 매시 형 난간 그리고 스틸그레이팅 바닥판은 시원한 바람과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다.
붕어섬 생태공원
붕어섬의 원래 이름은 ‘외앗날’로 ‘외앗’은 「자두」의 옛말인 ‘오얏’이 ‘외앗’으로 발음되어 만들어진 전라도 방언이고 ‘날’은 산등성이를 가리키는 말로 '자두모양의 산등선'라는 의미다. 붕어섬 면적은 홍수위 기준 73,039㎡이고, 2017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그 후 2018년부터 임실군이 매입 후 2018년부터 경관 조성을 통해 오색 꽃들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다. 붕어섬 생태공원 입장료를 내면 옥정호 출렁다리를 들어갈 수 있다. 출렁다리는 임실군 섬 한편에 있는 갤러리 정원과 숲속 도서관을 지나 수변 산책로에 이르면 붕어섬 안에서 바라보는 옥정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운암면 입석리 413-1번지이고, 붕어섬 생태공원은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 259-3번지이다. 삼혁당(三革堂) 김영원(金榮遠, 1851-1919) 선생이 이곳에서 후학들을 길렀는데, 그래서 삼요정(三樂亭)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인생삼락(人生三樂) 중 제 삼락인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도 그의 제자인 임실 청웅의 박준승(朴準承, 1866-1927) 선생과 전남 해남의 양한묵(梁漢默, 1862~1919) 선생이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약하셔, 두 분 모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3.1만세운동으로 선생과 두 분 제자 전부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의 발상지라며 삼요정을 강제 철거했다는 것이다
삼요정(三樂亭)
현재의 삼요정은 인근에 2002년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복원한 것이다. 삼요정三樂亭은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고, 학문을 연마하기 좋으며,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호 삼혁당은 김영원 선생이 1894년 천도교 지도자로서 반외세, 반봉건을 기치로 한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1904년 삭발을 하여 갑진개혁 운동에 동참했으며, 1919년 민족 독립을 위해 3.1혁명 전개 등 세 번의 혁명을 이룩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옛터에 기념비를 세우고, 삼요정을 복원한 것은 민족정기의 고양 차원에서도 잘한 일이다.
꿀팁자료 -1 *인생삼락(人生三樂) ‘인생삼락’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맹자의 인생삼락이다. 맹자는 인생에서 세 가지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첫째, 父母俱存兄弟無故(부모구존형제무고). 곧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 둘째, 仰不愧於天府不怍於人(앙불괴어천부부작어인). 곧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고개를 숙여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셋째, 得天下英才而敎育(득천하영재이교육). 곧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유학자답게 근엄한 즐거움을 선택했다. 세 가지를 누리는 인생은 덧없는 즐거움이리라.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다 취하지 못했다고 불행한 그것은 아니다. 부족한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는 삶이 행복일 수 있다. 모두를 채우지 못했어도, 단 한 가지에서라도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더 현명하다. 애당초 신은 한 인간에게 끝없는 행복 또는 끝없는 불행만을 주도록 설계하지 않았다. 불행만 끝없이 계속되는 삶은 없다. 무한할 것 같은 행복 끝에 멈춤도 있고, 불행도 찾아온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 무수한 변수들이 섞이는 게 인생이다. 조선시대 4대 선비의 한 분으로 꼽히는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선생도 삼락(三樂)을 얘기했다. 첫째, 문을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둘째, 문을 열면 마음에 드는 손님을 맞으며, 셋째, 문을 나서면 산천경개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상촌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우한 시대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섬나라로부터 피폐한 나라 꼴의 끝을 보았으며 병자호란으로 북쪽 오랑캐에 굴욕의 역사를 체험했다. 내부로부터는 광해군의 폭압 정치와 이괄의 난 등 민란과 권력을 둘러싼 권모술수를 뼈아프게 느낀 시기였다. 그런 슬픈 시대의 유산처럼 상촌은 산천경개를 찾아 나서기를 세 번째 항목으로 권하고 있다. 추사체라는 명필로 명성을 크게 떨친 추사 김정희(1786-1856)도 인생삼락을 말했다. 첫째는 독(讀)이니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이요, 둘째는 색(色)이니 사랑하는 사람과 변함없이 애정을 나누는 것이며, 셋째는 주(酒)로서 벗을 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추사는 잘나가던 왕가의 외척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학문과 서예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24세에 청나라에 건너가 대학자와 고승들과 교유하면서 ‘해동제일의 유학자’란 칭찬을 받았고 우리 문화에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권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말년에 고금도와 제주도에 귀양을 갈 정도로 불운한 삶을 보냈다. 선인들의 삶을 뒤돌아보면 아무리 잘나가는 위인일지라도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될 때가 있음을 일러준다. 그래서인지 추사 선생은 주와 색을 즐거움의 하나로 지목했다. 마음에 드는 벗을 청하여 흉금을 터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운우를 나누는 것을 삼락의 중심으로 꼽았다. 그래서 즐거움은 느끼기에 달렸다. 세상이 불행의 요소들로 가득하다고 느끼면 불행할 뿐이다. 또 지천으로 널린 인연과 삼라만상이 나의 행복을 위한 그것으로 생각하면 행복할 수밖에 없다.
4. 임실치즈테마파크 임실치즈는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의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외국 선교사와 지역주민이 협동해 만든 지역 특산물이다. 임실치즈는 벨기에 국적의 선교사인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르스테반스) 선교사의 주도로 임실군의 소득 증대 사업을 위해 1966년 산양(山羊)을 키우면서 시작되었다. 사업 초기에 산양유(山羊乳) 판매가 부진하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산양류(山羊乳)를 이용하여 모차렐라 치즈(이탈리아의 물소 젖으로 만든 생치즈, 일면 파자치즈)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임실 치즈 마을
여기에 입실 역전교회로 부임한 심상봉 목사와 23년간 마을 일을 맡아본 이병오 이장의 헌신적 노력과 마을 주민들의 아낌 없는 성원의 덕이라 하겠다.
지정환 신부 심상봉 목사 이병오 이장
이는 국민 대다수가 치즈 소비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던 시기에 국내 치즈 생산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지정환 신부와 지역민들은 본격적으로 심상봉 목사의 노력으로 벨기에 교회의 협조를 받아 유럽에 가서 치즈 가공 기술을 배워 왔고, 1969년 우유로 제조한 카망베르 치즈(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만든 부드럽고 연한 치즈 )를 생산하였다. 이듬해 조선호텔에 저장성이 좋은 ‘체다 치즈(영국 서머싯주의 체더 지방에서 유래한 치즈로,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제품으로 일반적으로 강한 맛을 지니며, 단단한 형태를 띤다)’를 납품하면서 대규모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되었다. 1976년에는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생긴 최초의 피자 가게에 모차렐라 치즈를 납품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임실의 치즈 가공 낙농가들은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임실치즈 공장을 지역주민의 협동조합인 ‘임실치즈농협’으로 변경하였고, 지정환 신부는 운영권과 소유권 모두를 임실치즈농협에 양보하였다. 현재 임실치즈농협은 200여 호의 낙농 조합원과 100여 명의 임직원이 소속되어 치즈를 포함한 다양한 낙농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임실치즈로 알려진 지역 브랜드 이미지는 2000년대 임실군에 치즈 마을이 조성되고 소규모 치즈 가공 공장과 체험장이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임실치즈의 상표 가치와 지역 이미지를 이용한 ‘임실치즈마을’은 이후 추가로 조성된 ‘임실치즈테마파크’ 등과 어우러져 지역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池正煥 신부 벨기에 출신의 대한민국 천주교 전주교구 신부로, 전북 임실에서 한국 최초로 치즈 산업을 일으키는 등 농민과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다 2019년 4월 13일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지정환은 대한민국 천주교 전주교구 신부로, 본명은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이다. 한국 이름인 정환은 '정의가 환히 빛난다'는 뜻이다. 1931년 벨기에 브뤼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958년 사제로 서품됐고, 1959년 천주교 전주교구에 신부로 부임하며 한국 땅을 밟았다.
1961년 전북 부안성당에 부임한 지정환은 3년간 간척지 100㏊를 조성해 농민들에게 제공하는 등 지역 농민들을 도왔다. 1964년에는 전북 임실성당 신부로 부임해 산양을 키워서 농가 소득을 증대시키고자 치즈 생산에 나섰다. 3년간 실패를 거듭하던 그는 유럽의 공장을 돌며 장인들에게 기술을 배워 1967년 마침내 임실에 한국 최초의 치즈 공장을 만들고 치즈 농협을 출범시켰다.
마을에서 치즈를 만든 건 그로부터 십수 년이 더 지나서다. 처음 치즈를 만든 이는 김상철 전 숲골유가공 대표로, 두 번에 걸쳐 스위스로 낙농과 유가공 연수를 다녀온 뒤 이 마을에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원래 이진하 위원장이 가기로 한 연수였다.
"한국과 스위스의 교회협의회가 해마다 1명의 한국 청년을 뽑아 스위스 베른으로 낙농 연수를 보냈는데, 1994년에 김상철이 가게 됐어요. 원래는 제가 가기로 해서 몇 달에 걸쳐 아내랑도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는데, 심상봉 목사님이 더 젊은 사람을 보내는 게 맞겠다고 해서 기꺼이 양보했어요. 공동체의 경험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김상철 전 대표는 1994년 3월부터 1년간 스위스 베른주 알베르그라에서 낙농 연수를 받고 돌아와 젖소 7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사료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마침 스위스 교회협의회 관계자가 마을을 찾았고, 그때 심상봉 목사가 '김상철 형제가 스위스의 앞선 목장형 유가공을 배울 수 있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 간절한 부탁을 스위스 교회협의회가 받아들이면서 김 전 대표는 1999년 다시 스위스 유가공 전문학교로 연수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낙농가로서는 처음으로 치즈와 요구르트의 생산·판매 허가를 얻어서 20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목장형 유가공 공방'인 한스유가공연구소(현 숲골유가공)를 설립한다. 목장형 유가공이란 직접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짜서 치즈를 비롯한 유가공 제품을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스유가공연구소의 뒤를 이어 2004년까지 마을엔 모두 여섯 곳의 목장형 유가공 공방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30여 년 전 지정환 신부가 임실에 뿌린 씨앗이 또 다른 싹을 틔운 셈이다.지정환은 2016년 법무부로부터 한국 치즈 산업과 사회복지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국적을 받았고, 2018년 초에는 창성창본(創姓創本, 본관과 성씨를 만드는 것)을 신청해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다. 2019년 4월 15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됐으며, 고인의 유해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됐다.
▲ 임실의 목장형 유가공 공방 소개 페이지 ⓒ 이플유가공 한스유가공연구소가 문을 열고 3년 뒤인 2003년 금성리는 '녹색농촌체험마을'에 선정되었다. 도시민의 농촌 관광을 활성화해 농촌의 소득을 늘리려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 이진하·조영익 위원장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느티마을'을 내세워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주요 체험 소재는 치즈가 아니라 친환경 농업이었다. 다른 체험 마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가공 공방을 견학하고 치즈를 곁들인 식사를 하는 것 정도였다.
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치즈 만들기 체험을 시작한 건 다시 몇 년이 지난 2005년 무렵이었다. 당시 김상철 한스유가공연구소 대표는 직접 짜낸 신선한 원유로 유제품을 만든다는 것을 알리려고 도시의 생활협동조합 소비자들을 공방으로 불러 치즈를 만들어 볼 수 있게 했다.
이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면서 공방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첫해인 2005년에 한 달 체험객이 1,000명까지 느는가 싶더니 이듬해엔 한 해 동안 1만 명이 넘게 다녀갔다. 금성리는 이내 농촌 마을만들기 사업의 대표 성공 사례로 떠올랐다. 언론 보도도 쏟아졌다.
"마을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숲골유가공이 감당할 수 없게 됐어요. 체험객들도 마을에서 다른 먹을거리와 즐길 거리를 찾기 시작했죠. 그래서 녹색농촌체험마을에 선정되면서 지어놓은 유기농 체험관에서 식사를 팔기 시작했고, 마을 어르신들이 경운기로 방문객들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 체험도 도입했어요. 마을 주민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는 더 큰 사업이 된 거죠.
2007년 10월부터는 치즈 체험을 마을이 맡기로 했어요. 그렇게 하는 게 더 낫겠다는 합의가 이뤄진 거죠. 제가 김상철 대표에게 제안했고, 김 대표가 조건 없이 받아들였어요. 서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은 거죠."
▲ 임실치즈마을 치즈 만들기 체험 ⓒ 임실치즈마을 권봉관이 쓴 논문 <국가 주도 '마을만들기' 사업에 따른 농촌의 변화와 농민의 대응 - 전북 임실군 '치즈마을'의 경우>는 "그(김상철)가 확실한 수익이 보장될 것으로 예상되는 치즈 체험의 운영권을 치즈마을로 이양한 데는, 그동안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농민이 잘사는 농촌이라는 지향점을 공유하던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의 치즈 체험은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공동자산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 뒤로 임실치즈마을을 찾는 이들은 꾸준히 늘어 2010년엔 5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주관한 '제1회 대한민국농어촌 마을대상(마을가꾸기 분야)'과 '제4회 대한민국 행복마을만들기 콘테스트(체험·소득분야)'에서도 모두 대통령상을 받았다.
▲ 임실치즈테마파크의 모습 ⓒ 임실치즈테마파크 2012년 임실치즈테마파크가 문을 열면서부터 마을을 찾는 이들은 빠르게 줄었다. 테마파크가 조성된 곳은 성수면 도인리다. 이진하 위원장은 체험장만큼은 그 마을(도인리)에 줘야 한다고 임실군을 설득했다. 주민들이 땅을 빼앗기고 나면 먹고살 일이 막막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에서 하는 일을 막을 도리가 없었죠. 새로운 기회가 열리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테마파크에서는 체험 프로그램은 하지 말고 '지정환 공동체 학교'를 만들어서 사람을 키우자고 제안했어요. 멀리 내다보면서 사람을 키워야 마을도, 지역도 오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봤죠.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임실군이 재단법인을 만들어 파크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민간에 위탁을 맡겼어요. 기대했던 수익이 나질 않은 거죠. 그러니까 지금은 임실군이 홍보하면 할수록 개인들이 돈을 버는 구조예요. 사람들이 임실을 많이 찾는다고 하지만 정작 마을 주민이 어렵게 일군 치즈마을은 잊히고, 수익도 엉뚱한 곳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우리 마을에선 열심히 돈을 벌어 낸 세금으로 임실군이 테마파크 직원에게 더 많은 월급을 준다는 쓴소리도 나와요."
심순섭이 쓴 논문 <내생적 발전 차원의 농촌 마을 공동체 지속성 연구 - 임실치즈마을을 사례로>는 "(테마파크는) 치즈마을을 등에 업은 형태로 자리했는데 이는 실제로 알려진 치즈마을의 명성을 테마파크가 이용하는 형국이 되었다"라고 꼬집었다. 치즈테마파크 방문객 수는 2014년에 치즈마을을 앞지르더니 그 뒤로는 차이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가만히 돌아보니 우리도 잘못한 게 있어요. 테마파크와 우리 마을이 무엇이 다른지를 더 고민해야 했어요. 달라야 같이 살 수 있는데, 우린 따라가려고만 했어요. 임실군도 상생을 내세우면서 파크의 부족한 부분을 마을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가령, 주차장 같은 것들.
우리 마을은 농촌다움을 지켜가면서 주민의 삶을 근간으로 테마파크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했어요. 치즈마을 주민의 삶과 치즈마을만이 가지고 있는 농촌 자원으로 도시인으로 하여금 자연의 순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우리 나름대로는 '도시민과 함께 자연의 순리를 경험하는 학습활동'으로 정의했죠."
임실치즈마을은 앞으로 행안부 로컬 브랜딩 사업에 선정된 팀들을 마을로 불러 교육과 공정여행을 진행할 생각이다. 이 위원장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실제 교육이 다를 수도 있다고 했다. '6개월 만에 성공하는 로컬브랜드 만들기' 같은 건 가르치지 않겠단 뜻이다.
"이름을 멋들어지게 정한다고 브랜드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로컬브랜드가 되려면 지역민의 삶이 들어가야 해요. 사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따라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피눈물 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또 30년이 넘는 세월을 한 번에 따라잡으려 해서도 안 돼요. 우리한테는 실패가 없어요. 실수는 늘 존재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만한 브랜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오는 데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마을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자는 대명제가 있었을 뿐이죠. 그러니 계획을 잘 세운다고 로컬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임실치즈마을의 뿌리는 긴 공동체의 역사만큼이나 깊고 단단하다. 지금까지 쌓아온 마을의 자산도 30억 원에 달한다. 운영위원회는 마을은행의 역할을 맡아 사업을 하려는 주민에게 사업비를 지원해 주기도 하고 마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도 준다.
대학 입학 장학금을 받은 33명 가운데 11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이들을 비롯해 마을로 돌아온 운영위원회 회원들의 자녀는 모두 23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10명은 결혼해 13명의 아이를 낳았다. 마을을 지켜갈 다음 세대 50여 명이 마을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진하 위원장은 곧 마을에 있는 '지정환 공동체 학교'를 법인화하고 대학과 손을 맞잡고 마을과 지역을 지킬 젊은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더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로컬 브랜드'가 주목받는 시대, '로컬'과 '브랜드' 둘 모두를 살릴 길을 찾아야 할 때다. '브랜드'를 얻으려다 '로컬'(마을)을 잃는 건 어쩌면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일지 모르니까. 지정환은 1970년대에는 외국인 사제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가 강제 추방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농촌 경제 발전에 헌신한 공을 고려해 추방을 면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우유트럭을 몰고 광주로 가기도 했다. 임실 치즈가 입소문을 타면서 성장하던 중 다발성 신경경화증이 악화된 지정환은 치즈 공장을 농민들에게 대가 없이 넘겨주고 1981년 벨기에로 돌아갔다. 1984년 치료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 중증 장애인 재활공동체인 '무지개 가족'을 세우고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2002년 호암재단으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각계에서 받은 상금과 기부금으로 '무지개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보조코스 1. 사선대(四仙臺) 섬진강 상류 오원천(烏院川) 기슭 사선대 주변에 조성되어 1985년 12월 28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사선대에는 진안군 마이산의 두 신선과 임실면 운수산의 두 신선이 어울려 노는 것을 하늘의 네 선녀가 보고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내려와 함께 놀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사선대
사선대 위 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제135호로 지정된 운서정(雲捿亭)이 있다. 이 정자는 1928년부터 6년에 걸쳐 지었으며 전통적인 조선시대 건축 양식에 따라 정각과 동서재·가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나라 안의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나누며 나라의 앞날을 토론하였다고 한다. 운서정(雲棲亭)
예로부터 소나무와 벚나무가 울창하여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즐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을 이루며 겨울에는 하류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기에 좋다. 주변에 마이산·성수산·옥정호·성수산자연휴양림 등의 관광지가 있다. 2. 오수 의견(獒樹 義犬) 관광지 위험에 빠진 주인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으로 전국 유일의 대규모 애견 관광지이다. 관광지 내 반려견 전용 놀이터와 산책로, 오수 개 연구소 등이 있으며 오수천 옆으로 계절 꽃을 심어 철마다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2021년 한국관광공사와 전라북도가 선정한 [반려견과 함께하는 안심 걷기 길] 6곳 중 하나로 선정됐다. 너른 잔디밭에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소형견과 중·대형견 공간을 분리해 강아지가 위압감에 주눅이 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배려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차박 캠핑 행사를 개최했으며, 펫 카페와 반려 문화 전시실이 있는 반려동물 지원센터의 건립도 추진 중이다.
오수의견 상(獒樹義犬 像)
오수의견 관광지에서는 해마다 오수 개를 기리는 의견문화제가 열린다. 1982년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행사로, 지금은 애견과 함께하는 축제로 명성이 높다. 주인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다한 오수 개 이야기는 고려시대 문인 최자의 《보한집》에 기록되어 있으며, 현행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하다. 김 개인이란 사람이 집에서 키우던 개와 외출해 술을 먹고 돌아가다가 숲에서 잠들었다. 갑자기 들불이 번져 주인이 위태로워지자, 개는 근처 냇가를 수백 번 왕복하며, 몸에 적신 물로 불길을 막았다고 한다. 잠에서 깬 김 개인이 이 사실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죽은 개를 땅에 묻고, 갖고 있던 지팡이를 꽂았다. 이 지팡이가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됐고, 개 오(獒)와 나무 수(樹)를 합한 지명이 [오수(獒樹)]가 여기서 오수 의견(獒樹 義犬)의 유래로 발전하였다. 3. 임실 광제정(光霽亭) 광제정(光霽亭)은 누각을 처음으로 세운 양돈의 호(號)이면서 누각의 이름이다. '광제(光霽)'는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은 말로 '비가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며,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광제(光霽)'는 바로 선비 양돈 선생이 꿈꾸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광제정(光霽亭)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시판
해동 18현의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광제정의 시판을 음미하면 다음과 같다 梅堂隔世想餘音 (매당격세상여음) 양돈과 세대는 다르나 여운이 상상되고 亭在山高與水深 (정재산고여수심) 정자는 산 높고 물 깊은 곳에 서 있네. 雨歇芳郊淸潤色 (우개방교청윤색) 비 갠 후주변 숲은 맑은 빛을 머금고 烟消靜夜見明心 (연소정야견명심) 연무가 걷힌 고요한 밤에는 밝은 마음 보인다. 三盃酒裏看天地 (삼배주리간천지) 삼배 술 가운데 천지의 이치를 깨닫고 一局棋中送古今 (일국기중송고금) 한판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네. 鞍馬昔年秋峽晩 (안마석년추협만) 옛날 말 타고 늦가을 골짜기 갔었을 때, 可憐奔走失登臨 (가련분주실등임) 아쉽게도 바삐 가느라 오르지 못했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