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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5:1~4(381)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 2023. 9. 24
사진을 한 장 보시지요. 화면에 나가는 책의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책 제목이 아주 독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강한 자 앞에서는 한 없이 비굴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한 없이 강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래서 힘이 있는 권력자 주변에는 늘 그 권력의 힘에 기대에 자신의 집지를 넓혀 보려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득실댑니다. 정치인들이 잘 나갈 때는 날마다 이런저런 청탁을 하고 만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정치인 집에는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반대로 정치인이 궁지에 몰려 있거나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면, 10리 밖에서도 정치인 집에서 곡소리 나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강한 자 앞에서는 강하게 나가고 약한 자 앞에서는 비둘기처럼 온유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에서는 강한 자 앞에서 한없이 강한 모습으로 나가고, 연약한 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나긋한 모습으로 다가선 한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면, ‘3.1운동 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34번째 민족대표’로 알려진 푸른 눈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에 관련된 글과 사진 자료 모음집입니다.
스코필드는 평생 한국에서 활동한 의료선교사였습니다. 27살 때인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에 들어와 수의학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합니다. 3.1운동 당시 제암 감리교회 안에 신도들을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서 마을 신자 26명을 불태워 죽인 일본 경찰의 포악상을 사진에 담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기사로 작성하여 전세계 언론에 최초로 알리는 놀라운 일을 했던 분입니다. 이런 놀라운 공적으로 인해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70년 돌아가신 이후에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히게 됩니다. 애국지사 묘역에는 212명의 애국지사가 묻혀 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묻혀 있는 분이 스코필드박사입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우연찮게 만나게 됩니다. 그가 스코필드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고 묻자, “먼저 이천만 동족에게 사죄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대답합니다.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이완용 앞에서 조금도 물러섬 없이 나라를 팔아 먹은 것을 사죄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정면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총독을 만나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고, 한국의 식민 지배를 그만둘 것을 요청합니다. 서대문형무소, 대구형무소를 찾아다니며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등 독립운동 수감자들을 만나 위로합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눈에 가시였던 일본 경찰은 강도를 위장해서 1920년 4월 스코필드 박사를 암살하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칩니다. 이런저런 끊임없는 살해 위협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양심에 근거한 올바른 외침을 던집니다. 악에 대해서 물러서지 않고 도전하는 그런 모습을 두고 책 제목을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게는 비둘기처럼”이라 붙인 것입니다.
한국을 사랑했던 애국자요. 하나님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요. 평생을 복음과 예수 사랑 실천을 위해 살다가 돌아간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후대사람들에게 참된 크리스천이란 어떠한 삶을 살고 세상에 모범을 보이는지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독교인들이 억울하게도 참으로 많은 욕을 얻어 먹고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더 진실하고, 더 온순하게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인들 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너무나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한 요즈음의 시기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할까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 드리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와 공간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기독교인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낮아져야 하고,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하고, 내가 먼저 자원함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가르치려고 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받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아니라, 낮아지는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에 참여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여러 가지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서신입니다. 본문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 당시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와 성도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가는 자들에 대한 교훈입니다. 단순하게 오늘날 장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장로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 생각을 굳히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어서 다른 사람을 이끌고 나가며 모범을 보여야 되는 모든 분들에게 주신 말씀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교회에서 일해야 하나요? 어떤 모습의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요?
1절 보십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가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직분을 세 부분으로 표현합니다.
1)‘함께 장로된 자’- 베드로 또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다스리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양육시켜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가진 장로라고 말합니다.
2)‘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공생애 사역을 하실 동안 항상 곁에 머물면서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했던 자였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모른다하고 부인하였던 아픈 과거가 있었지만, 새벽닭이 울 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크게 통회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 뒤로 베드로는 사도 바울과 함께 초대교회 최고의 전도자요, 예루살렘 교회를 목양하면서 성도들의 신앙이 굳건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베드로는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살아 있는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3)‘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 오늘 설교의 제목이자 중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영광에 참여할 자(헬, 독세스 코이노노스)’인데 “영광에 참여할 것을 보장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에 참여할 것을 보장 받은 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받았던 자신의 고난이 단지 고난을 당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복음의 고난으로 인해 나는 장차 나나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현실의 고난과 고통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복음을 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현실의 고난 때문에 장차 주어지는 놀라운 영광을 포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큰소리 치고 떵떵거리고 살면서 주님을 모른 체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교회에서 충성으로 봉사하고,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모든 분들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라고 저는 믿습니다.
1.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봉사하는 모든 분들이 지켜야 할 행동 수칙에 대해 베드로는 확고부동하게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1)억지로 신앙생활, 교회생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억지로 교회생활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데 목사님이 시키니 얼굴에 오만상을 다 찡그리고 일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일을 하면 본인도 힘들지만, 곁에서 보고 있는 다른 분들은 그 분의 비위를 맞춘다고 더 힘듭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이던, 직장 일이던, 이왕 내가 해야만 되는 일이라면, 감사함으로 하십시오. 나에게 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나도 행복하고, 나로 말미암아 내 주변에 사람들 또한 행복해 집니다.
2)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섬기며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자원함으로 하며’는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으로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발적인 열심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령이 이끌지 않는 자발적 행동은 종종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자발적인 열심은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영예를 가지려고 하는 자발적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절대 잊지 말도록 합시다.
마크 트웨윈 (Mark Twain 1835-1910)의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머니가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라고 톰에게 시켰습니다. 톰은 칠을 하기가 싫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쉽게 할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묘안이 떠 올랐습니다.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보고 재미있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톰의 생각은 적중합니다. 톰이 노래를 부르면서 흥겨운 모습으로 페인트 칠을 합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톰이 재미있어하는 칠하는 일에 관심을 보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듭니다. 모여 든 아이들이 서로 칠을 하게 해 달라고 졸라댑니다.
아이들이 몰려든다고 바로 허락해 주면 속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톰은 일이 재미있어서 자신이 혼자할거라 말하며 거절해 버립니다. 아이들은 이 재미있을 일에 끼일려고 안달이 납니다. 어떤 아이는 사과를 들고 와서 톰에게 주며 주면서 칠하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한명 두명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자원하는 모습으로 칠하게 되자, 금방 담장 칠하는 장소는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로 변해 버립니다.
자원하는 즐거움이 일하는 고통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항상 즐거워야 합니다. 나 같이 못난 인생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감격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모두 다 은혜입니다.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기쁨과 순종으로 모습으로 자원하시기 바랍니다. 자원하는 내가 즐거우면 내 주변의 사람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또한 기뻐하신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합시다.
2. 양 무리의 본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교회안에서 해야 되는 두 가지 상반된 행동을 3절에서 말씀합니다.
1)먼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주장하는 자세’라는 말이 매우 흥미로운 문장입니다. 직역하면 ‘not lording it over those entrusted to you’라는 말입니다. 이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네게 맡겨진 자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입니다. 성도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함께 봉사하고, 함께 사역하는 자들 위에 군림하면서 특권 의식을 가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동등하게 신앙생활하고 봉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어서 개개인의 성격과 개개인이 자신 특질이 모두 다릅니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같을 수 없고, 내 행동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따라와야 되는 기준이 되는 행동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것만이 최고라는 오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단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내의 군림하는 독단적 행동은 도리어 교회 안에 크고 작은 문제점을 만들 뿐입니다.
가끔 가다가 연합회 일을 하거나 노회 안에 일을 하다 보면, 독단적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나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결말을 보게 되면, 대부분 일을 망치거나 분위기를 깨뜨려 엉망으로 만든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모습,. 낮아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으로 채워 주십니다.
2)양무리의 본이 되라
이 말은 “따라가야 하는 모본이 되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서 일하는 자들은 겸손한 마음과 신실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양들을 돌보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본받아 마땅한 모범이 된다는 말이 그리 쉬운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게가 아들 게하고 같이 가면서 아들더러 옆으로 걷지 말고 똑바로 걸어라 훈계합니다. 그런데 아들 게가 보니 똑바로 걸어라고 말하는 아버지 게도 옆으로 걷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절대 모범이 아닙니다.
학교 선생님에게 욕하는 학생도 있고, 선생님에게 폭력을 쓰는 학생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막무가내 못된 학생들 뒤에 보면, 항상 문제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의 못되고 잘못된 점을 그대로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라는 아이들의 얼굴이자 교과서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된 모든 분들은 정말로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크니이두스의 망대(The Tower of Cnidus)’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니이두스(Cnidus)는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바로 왕을 위해 망대를 지으라는 명을 받게 됩니다. 망대를 건축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벽의 한 돌 위에 큼지막하게 새겨 놓습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이름을 가린 다음 겉에 바로 왕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바로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한 것처럼 가장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세월이 지나면 외벽에 칠한 회반죽이 먼저 떨어져 나가고, 그리고 그 뒤에 자신의 이름만 길이길이 남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거야 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거짓과 기만으로 위장된 나쁜 행동입니다. 혹시 우리도 크니이두스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면서 실상은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얍삽하고 치졸한 행동이 신앙의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목적은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일해야 합니다. 부디 자원함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이 되는 모습으로 충성하여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