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육현사 중수기》
천안 군청의 남쪽 수성리에는 산이 첩첩하고 물이 넘실거리며, 엄숙하고 장엄한 궁궐 같은 사당이 있다. 이는 향리의 선생들인 정랑 유공, 분곡 이공, 희암 현공, 사봉 서공, 안곡 이공, 복재 서공을 모시는 제사 장소이다. 육현 선생들은 행의로 유명하였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몇백 년이 지난 후, 진사 채홍신이 처음으로 용계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후 다시 용계에서 이곳 수성리로 제사를 옮겼다.
그러나 집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분곡 이공의 손자인 이심순, 이백순, 이석순과 군의 유생 박일진, 한윤모가 사당을 돌보며 사당이 완전하지 못하고 예가 갖추어지지 않아 육현 선생의 도가 묻힐 것을 걱정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한 끝에 함께 돈을 모아 수리하였다. 먼저 정당을 수리하고, 외사를 세우고, 부엌과 화장실도 만들고, 모든 기구와 도구를 갖추었다. 임진년에서 을미년까지 네 번의 세월을 거쳐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에 목주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전촌 송공의 의견을 따랐다.
사당이 완성되자 이심순은 근체시 한 수를 지어 낙성식을 열었다. 또한 그 일에 대해 나에게 기록을 부탁하였다. 나는 분곡 이공의 후손이므로 이를 사양할 수 없었다. 육현 선생의 아름다운 덕과 뛰어난 행적은 이미 명유들이 자세히 기록하여 찬양하였으므로, 내가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을 서술하면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옛날의 덕이 있고 어진 사람으로는 순임금, 고요, 이윤, 부열이 있었으나, 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후세의 군자들이 제사를 지낸 것은 많으나, 순임금, 고요, 이윤, 부열은 천고에 빛나고 있다. 후세의 군자들은 그 이름과 세대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다. 따라서 선비들이 덕을 존중하고 어진 이를 사모하려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문을 배우고 행실을 따르는 데 있다. 그들의 학문을 배우고 행실을 따르지 않으면서 헛된 이름만 빌려 그들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무당이 굿을 하며 자기 뜻을 펼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비록 집을 크게 짓고 제물을 성대히 차려서 매일 엄숙히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진 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지금 육현 선생의 사당이 완성되었다. 육현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이가 있다면, 비록 산속에 살며 물을 마시더라도 그들의 학문을 외우고 행실을 익혀 그것을 몸에 지녀야 한다. 이를 갈고 닦아 물들인다면, 세상에서 유학을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고을을 학문의 원천으로 삼을 것이다. 그렇게 한 후에야 육현 선생의 도가 천하 후세에 더욱 드러날 것이며, 그 영향은 멀리 퍼져 한 고을의 사당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면으로는 경서를 힘쓰지 못하고, 외면으로는 몸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그저 제사의 형식만 치르는 자가 있다면, 나는 육현 선생의 이름과 세대도 또한 잊혀질까 두렵다. 이것이 오늘날 경계하고 힘써야 할 바이며, 육현 선생이 후학에게 바라는 바이다. 아, 나는 비록 직접 사당을 돌볼 수는 없지만, 예전에 군의 선비들과 함께 사당에 대해 자세히 알았기에 깊이 생각해보면 마치 태구 만석의 고향을 오래도록 본 것 같다. 후세의 사람이 이 글을 읽고, 만약 나를 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것도 또한 다행일 것이다.
숭정기원 후 4 戊戌년(1638년) 맹추 하순에 풍산 후학 홍한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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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安六賢祠重修記
天安郡治之南修省之里。有山齾齾。有水瀰瀰。有宮嚴嚴翼翼。榱梲翬革者。鄕先生正郞兪公,盆谷李公,希菴玄公,沙峰徐公,安谷李公,復齋徐公俎豆之所也。始六先生后先接武於是。以行義聞。六先生歿數百禩。有進士蔡弘臣者。始報祀於龍溪之社。后又自龍溪移祀于是里。屋久而圮。盆谷之孫心純,百純,錫純。垍郡儒朴一鎭,韓胤模。旣有事于祠。怵焉歎曰廟不完禮不備。六先生之道湮矣。我將疇歸。遂共鳩緡錢以葺繕之。先正堂次外舍次庖湢器制。無不備者。繇壬辰底乙未凡四易寒暑。工告竣。乃設木主以祭之。從田村宋公議也。祠旣成。心純歌近軆一章。侑而落。和者亦若干人。又以其事來請記於余。余盆谷公之外裔。義不獲辭也。然六先生懿德卓行。已述於名儒鉅公所祝贊記事。惡乎贅私。至若叙其所未及者則有可得以敶矣。夫古之德而賢者。無如𦤎夔伊傅。而未聞有報祀。報祀之繁。又無如後之君子。而𦤎夔伊傅恒日星乎千古。後之君子至不能盡記其名字氏世矣。故士之欲尊悳慕賢者。不在乎報祀。在乎學其學行其行而已。不學其學行其行。徒借虛名以尊慕之者。又往往多藉手於此而肆志於他。是巫祝之報賽也。雖侈棟宇盛牲牢。日肅祀之。亦何與於賢德。今六先生之祠成矣。有欲尊慕於六先生者。雖巖棲水飮。悉能誦習而服佩之。磨揉而漸染之。則世之論儒學。必以是邦爲淵藪。夫然後六先生之道益著於天下後世。當源 遠而澤博。豈止於一鄕之祠也。苟有內不能劬經。外無所律躬。而徒紛紛然取籩篚尊彜之品。登降奠祼之禮。寓尊慕之名。則吾恐六先生名字氏世亦當廢然而不記。是可以勖礪於今日。而六先生之有佇於來學者也。嗟夫。余雖無以操几屨攝齊凾丈。而舊從郡人士得其事甚悉。慨然想見太邱萬石之里久矣。後之人讀斯文者。倘以余能爲有德者有言。則亦厚幸也已。崇禎紀元后四戊戌孟秋下浣。豐山後學洪翰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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