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의 의성김씨 청계공 종가(글/윤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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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을 가다
"안동의 대 문벌을 이야기 할 때 안동사람들은 하회와 내앞을 비교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류청청이요, 천김쟁쟁'이라고 하지요." 내앞의 청계공 종가에서 만난 김명균씨의 말이다. 종가에는 종손은 없었다. 우리가 만난 김명균씨는 종손의 동생이다. "형님은 포항공대 가속기연구실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계시지요." 내앞 청계공 종가의 현 종손은 김창균씨이다. "자는 회성, 계사년 1953년 생." ≪의성김씨 청계공 종파보≫의 기록이다. 종손 김창균씨는 직장 때문에 집을 비우고 있었고, 집은 창균씨의 아우 명균씨와, 명균씨의 아우 승균씨가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명균씨는 안동대학교 국문학과에 강사로 출강하는 중이고, 승균씨는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 두 사람도 공부와 강의 때문에 여기 혼자 머물고 있을 뿐, 살림을 종가에서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종가에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하여도, 실제로는 종가가 비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듯 싶었다. 깨끗한 용모의 김명균씨는 종가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종손인 형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혹시라도 가문의 일이 잘못 활자화되면 큰일이라는 듯이,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설명해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류청청, 천김쟁쟁'! 나는 그 말을 비단 김명균씨에게서만 들은 것은 아니다. 전에도 두어 번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말은 다만 하회 유씨와 내앞 김씨가 그만큼 안동을 대표하는 명문이고, 피차 경쟁적 관계를 갖추고 오래 살아온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김명균씨는 내게 그 말이 두 가문이 갖는 어떤 속성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불의와 타협 않는 가풍은 청계 선조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명균씨는 '천김쟁쟁'의 '쟁쟁'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을 뜻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하류청청'의 '청청'은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웬지 그 의미를 김명균 씨에게 듣는 것은 적절치 않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그 점을 굳이 김명균씨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천김쟁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내앞 의성 김씨의 일원인 김명균씨에게 들었듯이 '하류청청'이라는 말의 의미도 하회의 풍산 유씨에 속하는 누군가에게 듣는 것이 적절할 것이리라는 생각은 내게는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내앞의 의성 김씨! 처음 안동의 종가를 취재하고자 했을 때의 우리의 계획은 역사가 오랜 종가부터 취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앞의 의성 김씨는 일찌감치 취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우리가 내앞의 의성김씨를 취재하기로 계획되었던 시기에 내앞의 종손은 타계하였다. 그러므로 취재가 미루어졌던 것인데, 이왕 미루어진 것이라면 종가 취재의 마지막에 다루는 것이 더 의미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이란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 중요성을 이 가문에 부여하여 주는 것은 순서가 무시되었다는 허물을 어느 정도는 상쇄해 줄 수 있을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앞의 의성 김씨는 그만큼 안동에서는 중요한 가문인 것이다. "우리집에 처음이예요?" 김명균씨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어왔을 때, 나는 마지막에 다루고자 했다는 변명거리를 마련하여 두었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내앞! 임하댐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그 아래쪽의 조정지 댐에 의해 차단되어 수량 풍부하게 모여있고, 물가에 북쪽으로 면하여 펼쳐져 있는 들판의 한쪽 끝, 얕으막한 산의 남쪽 기슭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마을의 터전은 넓고, 마을의 호수는 많다. 마을은 임동 쪽으로 나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진다. 중심은 서쪽에 있다. 서쪽에는 마을이 산 아래 쪽의 평탄면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산기슭을 따라가며 거의 일선으로 늘어서 있다. 종가는 서쪽 부분의 마을 속에 있고, 그 중에서도 서쪽 끝으로 자리잡고 있다. 종가의 동쪽으로 둘째 집의 종가가 위치하고 있고, 그 동쪽으로 여러 대소가가 터를 잡으며 마을을 확장시켜 낸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른바 보는 이의 입장에서 볼 때 좌측을 우선시 하였던 동양적인 방향관념이 마을 구성의 원칙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한다. 물론 종가가 분지의 서쪽 끝쯤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마을이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방향은 자연히 동쪽이었을 터이지만, 그러한 지정학적인 요인만이 마을 확장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것이었을까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종가의 입구 쪽에 이르렀을 때, 종가의 바깥마당으로는 막 여러명의 남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노년층에 속한 연배의 사람들이었는데, 종가의 바깥마당에서 잠시 지체하였으므로, 우리는 멀리서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종가의 바깥마당과 그 바깥쪽의 횡으로 뻗는 마을 길 사이에는 10여미터의 간격이 있었는데, 종가의 대문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상당한 넓이의 길이 뻗어나와 마을 길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종가는 아주 깊숙히 들어앉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여러 명의 남자 노인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과 작별하고 그 일직선의 길을 걸어서 마을 길 쪽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온 다음에야 우리는 종가로 천천히 들어갔다. 우리가 종가에서 만난 것은 바로 그 흰옷을 입은 사람, 김명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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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의 역사…내앞 시대 이전
의성 김씨는 김석을 시조로 한다. "의성군. 신라 대보공(김알지)의 29세 손. 경순왕의 네 번 째 아들.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양도. 고려 태자의 외손으로 의성을 봉지로 받음. 자손들은 이것을 본관으로 삼음." ≪의성김씨 청계공 종파보≫(이하 종파보)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따져 보면 명확하지가 않다. 시조 김석이 의성을 봉지로 받았다는 점은 분명한 시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성을 본관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김석으로부터인지, 아니면 후에 이르러 누군가가 김석 계열을 의성 김씨로 쓰게 된 것인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의성 김씨에게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성씨에게서 다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가 보기에 의성을 본관으로 하고, 의성 김씨의 확실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5세(1992에 간행된 대동보에는 9세) 용비에 이르러서부터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조로부터 4세까지의 역사는 불분명하고,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김석의 아들인 2세 일은 내사령, 평장사라는 간단한 기록만이 <<종파보>>에 보인다. 3세 홍술의 경우에는 몇 줄의 기록이 나타나나, 확실한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다. 여기 기록은 실제로 3세 홍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조로부터 3대의 역사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세는 공우(경자보 중 하나에는 홍술이 빠지고 국, 경진, 언미, 습광 등 4대가 있다고 하며, 만성보에는 공우 위에 4대를 첨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의성 김씨의 여러 족보들의 상계가 불분명함을 반영한다. 대동보는 아마도 이런 상계를 정리함에 있어서, 이본들에서 언급되는 세계를 다 포함시켜서 계통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종파보≫는 착오가 두려워 세계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구보인 ≪종파보≫를 바탕으로 하여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신보와는 4대의 차이가 남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이다. 금오위 별장을 지냈다. 5세 용비는 어느만큼 풍부한 기록을 갖추고 있다.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의성군. 부인은 영동정 강 후주의 여식. 묘는 의성 오토산에 진 방향으로 있다. 읍인은 백성에게 큰 공덕을 베풀었으므로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지냈으니, 사당을 진민사라고 한다. …부여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고려 명종 시대에 정승이 되시고 추성보절공신으로 의성군을 봉작으로 받았다고 하였다." ≪종파보≫는 5세 용비로부터 제대로의 모습을 갖추어낸다. 부인과 묘지에 대한 기술도 나타나고, 형제와 자식들에 대한 기록, 사위에 대한 기록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때부터 가첩이든 무엇이든, 가문의 역사를 소략하게라도 담아내는 기록이 전해지기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5세 김용비에게서 우리는 시조 김석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봉작, 의성군의 칭호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용비의 두 아우는 용필과 용주인데, 용주 계열은 개성 김씨가 되었다가 고종 시대에 다시 의성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5세 김용비의 아들은 의이다. "정헌대부 감문위 상호군이다. 아들 기지가 귀해짐으로 은청광록대부 병부상서 좌복야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진천 송씨이다. …묘는 고령군에 있다." 김의는 인지, 서지, 춘, 기지 등의 네 아들을 둔다. 내앞의 의성 김씨는 서지 계열에 속한다. 김의의 둘째 아들인 서지는 조현대부 내영고 소윤이며, 부인은 장사 유씨이다. "감악산에 제사지내러 가시다가 장단진에서 파선하여 돌아오지 못하셨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29년 계묘년(1303년)에 흥안도호부사라는 기록이 보인다.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배도가 왕의 총희와 짜고 공을 모함하여 파직되었으나, 나중에 발각되어 일당이 주살됨으로써 분을 풀었고, 경상관찰사가 되셨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김서지는 인회, 태권 두 아들을 두었다. 내앞의 의성 김씨는 둘째, 태권 계열에 속한다. "봉익대부 문예부 좌사윤이다. 공민왕 12년 계묘년(1363년) …김용의 변란에 해를 입으셨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판관 승고의 따님이고, 상락군 김방경의 증손이다. 후 부인은 죽산 박씨이니… 묘는 용인군에… 있다." 《종파보》의 김태권에 대한 기록이다. 김태권은 거두, 거익 두 아들을 두었다. 김거두는 내앞 계열 의성 김씨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이 사람에 의해서 안동으로의 입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봉익대부 공조전서이다. 고려말에 안동의 풍산현에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이고, …묘는 안동 남선면 … 에 있다." 김거두가 풍산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은 외가가 풍산이었던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말에 상대 조상 두 어른이 개성에서 낙남하셨는데, 형님 되시는 분은, 휘가 거자 두자인데, 영남으로 오셨고, 아우 되시는 분은, 휘가 거자 익자인데, 호남으로 내려가셨지요. 호남 내려간 분의 일파는 거의 부여 일대에 자리잡고 산다고 하는데, 종가가 유지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명균씨의 말이다. 김거두의 아들은 천인데, 풍산에서 안동성 밖의 방적동으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이다. "공민왕 11년 임인년(1362년) 출생. 정략장군 진예도 도만호. 국운이 다하는 것을 한탄하며 안동성 밖으로 이주하여 마을 이름을 방적이라 하시니 나라가 혁명됨에 내가 어찌 가서 귀의할 것인가(?)라는 말의 뜻을 취한 것이다. … 묘는 안동 와룡면 … 에 있으며, 부인은 홍주 이씨이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지금의 안동시 율세동이다. … 방적동인데, 음이 간편화되어 밤자골로 된 것을 뜻을 취해서 (다시 한자로) 율세동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종파보》의 서문에서 타계하신 전 종손 김시우씨가 적어두고 있는 말이다. 김천은 영수, 영명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내앞의 의성 김씨들은 영명 계열에 속한다. 《종파보》의 기술양식에 있어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김천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의성 김씨 세계 상 11세인 김영명으로부터 자를 기록하고 중국식 연호로 생졸년을 표시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아랫대로부터 호를 적는 문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김영명의 일생이 조선왕조의 창업 이후 시기에 놓여지는 것을 통하여 본다면, 이것은 조선왕조의 출범과 더불어 중국식 삶살기 방식이 보다 철저하게 추구되기 시작한 것과 관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이 때로부터 처를 부인이라고 표기하던 것을 바꾸어 배위로 표기하는 것도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어떤 문화를 반영하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자가 극배인데, 홍무 무인년(1398년)에 출생하여 천순 계미년(1463년)에 타계하였다. …조봉대부 신령현감을 지냈다. 묘는 안동시 운안동(에 있다.)" 김영명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삼취를 하였는데 배위는 광주 이씨, 광산 김씨이고, 안동 권씨이다. 김영명은 4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계, 한철, 한석, 한동이다. 김한계는 자가 형운이고, 호가 휴계이다. "영락 갑오년(1414년)에 출생하여 천순 신사년(1461년)에 타계하였다. 선덕 을묘년(1435년) 진사이니 하위지와 동방이고, 정통 무오년(1438) 문과 출신이니 성삼문과 동방이다. 3사를 역임하고 통훈대부 집현전 승문원사를 지냈다. 세조가 정란을 일으킴에 병을 칭하고 귀향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김한계의 묘는 와룡에 있으며, 배위는 덕산 송씨이고, 후 배위는 순흥 안씨이다. 김한계의 아들은 만근, 만신, 만흠이다. 김만근은 자가 신경이고, 호가 망계이다. 그는 1446년에서 1500년 사이를 살았으며, 147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증손인 성일이 영달하여 귀하게 됨에 좌통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해주 오씨이고, 묘는 임하에 있다. 그는 임하의 내앞에 처음 이주해 살기 시작한 사람이다. 김만근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인범, 예범, 지범이다. 현재의 내앞 종가를 유지하고 있는 청계공 계열은 둘째, 예범에게 연결된다. 김예범은 자가 국헌이다. 1479년에 나서 1540년에 타계하였으며, 손자 성일이 영달하여 귀하게 되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영해 신씨이고, 묘는 천전, 즉 내앞에 있다. 김예범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청계공 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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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의 역사…내앞 시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엄밀하게 말해서 의성 김씨의 내앞 시대는 13세 김만근 때 부터이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내앞의 대종가는 비록 김만근의 종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일지라도, 그의 둘째 아들이면서 청계공 김진의 아버지인 14세 김예범의 종가라고 지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인식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앞의 대종가를 청계공 종가라고 하고, 김예범 계열의 의성 김씨들을 청계공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종파보》에 적혀있듯이 청계공 김진이 씨족 중흥의 큰 조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성 김씨의 내앞 시대는 청계공 김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열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계공 김진은 누구인가? "자가 형중이고, 호가 청계이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부친께서는 홍치 13년 경신년(1500년) 2월 초 3일 정해일에 출생하여 만력 8년 경신년(1580년)윤 4월 23일 신유일에 타계하셨고, 이 해 7월 29일 갑신일에 장례를 지냈으니 향년이 81세였다. 좌의정 여흥 민제의 5대 손인 병절교위 세경의 여식을 아내로 맞았는데, 부친보다 34년 앞서서 타계하셨다. …부친은 태어나면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용모가 출중하였다. 나의 증조부이신 진사공(김만근)께서 보시고는 기특하게 여겨 작을 소자를 가지고 문회를 열게 하면서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중흥시킬 것이고, 그 식견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 하셨다. 16살에 처음으로 큰고모부인 청도 권간 공을 스승으로 섬겨 시와 예를 배웠는데, 권공은 가문의 예법을 깊이 닦아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법도가 있었으며, 그 부추기고 인도하는 것이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부친께서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게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복종하여 힘써 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공부가 크게 진보하여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할 정도였다. 외조부께서 그 뜻과 행동을 살피시고 사위로 선택하셨다. 외조부의 아우님은 현량과를 거친 세정공이신데, 기묘년에 해침을 당한 이름높은 유학자셨다. 부군께서는 또 그 분을 따라 배우셨으니, 당세의 여러 군자들의 학문의 단서를 섭력하셨다고 하겠다. 이로써 견문이 날로 넓어졌고, 문예 역시 통달하게 되었다.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성균관에 유학하셨는데, 하서 김인후와 돈독한 우의를 다졌고, 당시의 명사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폐하고 부암(부암은 옛날 중국의 부설이 집을 지었던 땅인데, 임하에 혹 부암이라고 이름붙여진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에 집을 짓고 가문을 이끌고 살았으며, 조석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서 문안을 드렸는데, 강을 건너 왕래하면서도 아무리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치더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혹시 타지에 갔다 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돌아오면 반드시 먼저 부모가 계신 곳에 들른 연후에 물러나왔다. 항상 가세가 빈한하여 제대로 봉양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으며, 비록 콩물이나 나물죽이 있더라도 먼저 부모님께 보냈으며, 심부름하는 사람이 돌아와 올렸습니다라고 말하면 기뻐하셨다. 부암 곁에는 서당 한 칸을 지어서 자제들과 마을의 어둑한 선비들을 모았는데, 학령을 세우고 과정을 엄히 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지은 김진의 <행장>속의 일절이다. 김성일에 의하면 김진은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중히 여겼으며, 무속을 극히 혐오하였다고 한다. "일찌기 세상 사람들이 무속을 숭상하는 것을 싫어하여 집안에 모시는 것이 있으면 배척하여 마치 오물을 보듯이 하였다. 당시의 크고 작은 무당들은 부친의 이름을 들으면 두려움에 떨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부친이 사는 곳에는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신당이 현의 남산 높은 곳에 있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고려 염흥방이 그 신이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무당들은 그것에 의지하여 요사스러운 짓을 일삼아서 풍속을 해치는 것이 날로 심하여졌다. 하루는 부친이 그 죄를 조목조목 따져 말하였다. 너는 전 왕조의 커다란 간신으로 죽음으로도 죄를 다 씻지 못하여서 하늘과 땅이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신기는 이미 죽고 그 귀신은 이미 신령하지 않은데 어찌 높은 데 자리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리 백성들을 미혹시킨단 말인가?(부친께서는) 즉시 신당을 파괴하게 하였다." 내앞의 의성 김씨들에게 있어서 청계공 김진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살림살이를 번창하게 한 중흥조로 받아들여진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시다가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돌보아야 할 자제분들이 있어서, 급거 돌아오셔서 집안을 돌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김명균씨의 말이다. "그래서 당시 영남 일대에서 최고수준의 부를 누리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청계공 김진이 경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행장>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만년에 영해의 청기현에 가셨다가, 그 산골짝이 깊고 넓은 것이 마음에 들고, 밭 갈고 고기 잡는 즐거움이 있어서 집을 옮겨 살면서 항상 가노들에게 농사와 잠업을 권장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으셨다. 곡식을 추수한 것이 많더라도 축적하여 두지 않고 자손이나 친족 중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러 자식들이 혹시 노년에 근로하는 것이 무리라고 간하기라도 하면 농사짓는 것은 백성된 자가 해야할 일이니, 백성이 농사 짓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백성으로서의 책무를 버리는 것이다. 황차 제사에 쓰는 제물과 처자를 기르는 곡물이 다 여기서 나오는 데 어찌 농사를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렇게 청계공 김진은 경제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물론 청계공 김진이 오직 경제에만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니다. "집안 경영 중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5형제분의 교육이었지요. 늘 의롭게 살다 죽으면 나는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겠다. 비굴하게 산다면 살아도 죽은 것으로 알겠다 그렇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김명균씨의 말이다. 김진의 이런 훈도는 그 아드님들이 훌륭하게 자라나는데 촉매가 된다. "아들 극일은 가정 병오년에 문과로 등과하였다. 전 밀양부사이다. 둘째 수일은 을묘생원이다. 셋째 명일은 갑자 생원인데 일찍 죽었다. 넷째 성일은 융경 무신년에 문과로 등과하였다는데 의정부 사인 벼슬에 있다. 다섯째 복일은 경오년에 문과로 등과하였는데, 형조 좌랑이다." <행장>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김진의 다섯 아들은 모두 생원 이상의 시험에 통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중 셋은 문과 급제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제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영달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문과 출신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그 개인의 영달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볍지 않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앞의 의성 김씨가 김명균씨가 말하듯이 이른바 영남 최고의 명문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계공 김진의 경제적 성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자식 교육의 성공에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빈서원에서 5현자와 더불어 향사한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사빈서원은 내앞에서 임하댐 쪽으로 더 나아가 다리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마을, 임하면 임하리 마을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 사빈서원은 경북문화재 자료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계 김진 선생과 그의 아들 5형제 분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 숙종 7년(1681년)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건립…" 사빈서원 앞 안내판의 기록이다. 사빈서원은 대원군 때 훼철되어서 지금은 강당과 주사만 남아있다. 원래는 임하면 사의동에 위치하였으나, 댐의 건설로 1987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역시 사의동에 있던 송석재사도 역시 이곳에 옮겨 놓았다. 그래서 이곳에는 서원과 주사, 그리고 송석재사 등 세 건물이 모여있는 셈이다. 사빈서원은 서향을 하고 있었다. 중앙의 넓은 마루 전면에는 사빈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중앙의 뒤쪽 위로는 흥교당이라는 현판, 좌 우 측으로는 진수재라는 현판과 존양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여기 자리잡고 있는 건물들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송석재사 였다. 송석재사는 경북문화재자료 38호이다. "임진왜란시 창의하여 안동 수성에 큰 공을 세운 대박 김철(1569-1616) 공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건립… 이 재사는 정침을 중심으로 좌 우익사를 두고, 전면에는 5간의 누각을 설치, ㅁ자형을 이루고, 목수의 치목수법과 결구 수법에서 고식을 잘 보존… 배치와 평면구성에서 특색…" 송석재사 전면에 세워놓은 안내판의 기록이다. 송석재사는 잘 관리된 흔적이 역력하였으며, 지금은 작은 디자인 회사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고, 디자인 관계의 자잘한 도구와 재료들이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다. 사빈서원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서쪽에는 5칸의 2층 누마루가 서향하여 일선으로 자리잡고 있고, 그 뒤편으로는 5-6미터 뒤로 물러서서 재사의 정침이 높은 축대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재사의 가운데 기둥들은 원형을 하고 있었는데, 양쪽 밖으로는 각진 기둥을 썼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둥의 형상이 통일성을 잃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재사의 기둥들은 갈아 댄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혹시 갈아댈 때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보았으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재목을 새로 간 것들도 형상은 원래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동서로 벌려서 높이 자리잡고 서 있는 두 건물의 양쪽 끝으로는 남 북으로 낮은 방과 토방 등이 위치하여서, 재사를 완전히 ㅁ자 구조를 갖추게 하였다. 동서의 두 건물은 지붕이 높았으나, 남북으로 이은 건물은 낮으막하였으므로, 햇살은 남쪽 건물의 지붕을 타고 넘어 ㅁ자 형상의 안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므로 안마당은 바람은 차단되고 햇살은 거침없이 비쳐 들어와서, 기분좋고 따뜻한 분위기가 주변을 조용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전면의 2충 누마루 건물은, 아래층은 나지막하였고, 윗층이 오히려 춤이 높았다. 아래층 기둥은 한아름은 되는 둥근 소나무였는데, 그 소나무 위에 2층의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2층의 기둥을 올려세웠다. 1층 기둥과 2층 상판 사이는, 상판의 가로목과 기둥의 중앙을 종으로 길쭉한 사각형의 나무가 쐐기처럼 파고 들어와 있어서, 견고하게 짜맞추어져 있는 형상이었다. 그러한 연결방식은 2층의 기둥과 지붕 사이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김진의 큰 아들 극일은 자가 백순이고, 호가 약봉이다. 그는 가정 임오년(1522년)에 탄생하여 만력 을유년(1585년)에 타계하였다. 퇴계 이황에게 배웠으며, 가정병오문과 관은 내자시정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인 수안 이씨이다. 극일로부터 복일까지, 5형제는 모두 퇴계 이황으로부터 배웠다. 극일은 아우 수일의 아들 철을 양자로 들였다. 이것은 《종파보》에서 보이는 최초의 양자 기록이다. 김철은 자가 심원이고, 호가 대박이다. 앞에서 말한 송석재사의 주인공이 바로 이분이다. 그는 화왕산성에서 의병으로 적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배위는 선산 김씨이다. 김철의 큰아들은 시온이다. 김시온은 자가 이승이고, 호가 표은이다. 만력 무술년(1558년)에 출생하여 현종 기유년(1669년)에 타계하였다. 명나라 멸망 이후에는 조선의 임금을 통하여 연대를 표시하는 사례가 여러 족보에서 나타나는데, 여기 의성 김씨의《종파보》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병자호란 후 와룡산에 은거하여 여러번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일어나지 않았고, 기유년 유언으로 묘도비의 제명을 숭정처사의 묘라고 하였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김시온의 배위는 풍산 김씨이고, 후 배위는 영양 남씨이다. 김시온의 큰아들은 방렬이다. 방렬의 큰아들은 여중이고, 여중의 큰아들은 지택이며, 지택의 큰아들은 민행이다. |
김 민행은 자가 선백인데, 1673년에 출생하여 1737년에 타계하였다. "공은 정대 통명, 신의로 이름이 높아서 무신년(1728년) 이인좌 등이 거병하여 종실 탄을 추대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용와 유승현이 의병대장이 되어 안동에 의진을 펼 때 옥천 조덕린 등과 호응, 의진에 가세하였다." 김민행은 시원을 양자로 들였으며, 김시원도 계운을 양자로 얻었다. 김계운의 큰아들은 곤수이며, 김곤수의 큰아들은 진종이다. 김진종의 큰아들은 형락이며, 김형락의 양자는 병식이다. 김병식의 큰아들은 형칠이며, 김형칠의 큰아들은 전 종손 시우씨이다. 김시우씨는 자가 여룡이며, 1926년에 출생하여 1998년에 타계하였다. "선고는 연전 영문학부를 다니셨지요. 그 때부터 우리 가문이 구학문과 단절하게 되었지요." 김명균씨가 말하였다. "근대에 신학문 쪽으로 돌아서 우리 가문에서 박사를 여러명 배출하였지요. 의학 쪽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뇌수술을 한 김시창 박사가 있었는데, 그분은 6·25 때 납북되었지요. 공학 쪽으로는 여순공대를 나온 김시융 박사가 있었지요. 그분은 해방 후 미국에 정착하셨지요. 원래 종가의 전장들은 주축이 영양 청기에 있었지요. 그 전장이 그 두 분의 학비로 다 들어갔다고 해요. 그 두 분은 조부 대 7형제 중 넷째 어른의 자제들이지요. 넷째 어른이 우리 조부께 반허락을 받고 팔아갔다고 합니다. 조부께서는 그 두 분의 미래가 청기의 재산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조부는 선비형이었답니다. 집중적으로 가학에 열중하셨지요. 그러나 구학문 주장만 하시지는 않고, 여러 자질들, 종반들을 서울로 유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하셨어요. 우리 집이 그런대로 세를 유지했던 것은 조부 대까지입니다. 일제를 넘기면서 가산이 기운 것이지요. 지금은 종가에 재산이라 할 것도 없지요. 이 앞에 한 이십여 두락? 문중 위토는 좀 많지만, 그래봐야 소출이 얼마나 나오겠어요?" 김명균씨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부친은 연전을 졸업하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가산이 기운 탓이랄 수는 없고, 당시에는 좌우익의 열풍이 거셌다고 합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대요. 그래서 종손이 잘못되면 큰일이라고 조부께서 불러 내리셨지요. 3학년까지 다니시고 돌아와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셨습니다. 종가를 지키셨지요. 학교 교사를 간헐적으로 하셨고요. 서울에 있는 장춘고 전신인 고계학교, 안동중학, 사법학교 교사… 오래 하시지는 않았어요. 한 때 서울에서 사업을 시도하시기도 했지만, 잘 안됐고, 그게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되어설 거예요, 부친이 40대 초반이었을 때지요, 제가 중학교 들어가서부터는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그 이후로는 한번도 종가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김명균씨는 부친에 대한 추억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아직 상중이었으므로, 김명균 씨가 부친에 대한 추억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선 방에는 아직 제청이 마련되어 있으며, 김명균씨는 무명 상복을 입고 우리를 맞았던 것이다. 김명균씨의 부친인 김시우씨가 아직 종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랑채의 대청마루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채의 대청마루는 서쪽으로 터져 있었는데, 서쪽 문에는 짚을 둘러서 여막의 모습을 갖추었고, 대청 북쪽면은 선조들의 글씨를 모아서 독특하게 만든 커다란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청계공 김진의 수적으로부터 100여편의 글들이 실물 그대로, 혹은 복사되어 때로는 직사각형의 형상으로, 때로는 정사각형의 모습으로 12폭 병풍의 부분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병풍을 지배하고 있는 미학은 나로서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대청 위쪽 벽으로는 한지를 돌려 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복을 입는 기한에 따라 나누어져 쓰여 있었다. 자잘한 글씨들로 채워진 이름이 만만치 않은 크기의 대청 벽을 한바퀴 휘돌고 있었다. 그러니 한 가문의 종손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이름들의 엄청난 숫자를 통하여 증명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
청계공 종택
"이 집의 내력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없어요. 건축 연대 등을 고증할 수가 없지요." 김명균씨가 말하였다. "그렇지만 고건축 하는 사람들이 자주 오는데, 그분들 말을 들어보면, 이 집이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닌 것 같대요. 처음에는 저 아래 대문이 있는 행랑채, 그 위에 안방이 있는 안채, 그리고 이 위 사랑채와 안방 위로 붙은 마루 끝방 줄, 이렇게 세 줄이 있었을 것이라는 거지요. 그랬던 것이 나중에 횡으로 연결시키는 건물들이 생겨서 두 개의 ㅁ자가 겹쳐있는 형상, 밖으로 큰 ㅁ자가 있고, 안으로 작은 ㅁ자가 들어앉아 있는 모습으로 되었을 거라는 거지요. 안채 동쪽을 막은 광창 방이나, 서쪽의 통로 방 등은 나중 중수 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미상불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닐 것이었다. 내앞의 큰 종가는 보물 450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의성 김씨의 종가인 이 집은 16세기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 김성일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건물은 ㅁ자 형의 안채와 1자형 사랑채가 행랑채와 기타 부속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ㅁ자 형 평면을… 안채는 다른 ㅁ자 형 평면주택과 달리 안방이 바깥 쪽으로 높게 자리잡고 커다란 대청이 이중으로 되어 동쪽을 향하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깊숙히 별채처럼 외진 곳에 배치… 손님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게…" 종가의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기록이다. 두 개의 ㅁ자가 겹친 구조의 안채와 사랑채 서북쪽 위로는 사당이 높이 올라앉아 있었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시멘트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초입에는 양쪽으로 측백나무가 심어져서 직선으로 쭉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사당에는 청계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데, 불행하게도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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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 내앞 큰 종가의 건물 모습에는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안채 마루의 모습이었다. 마루는 ㅁ자 형 구조의 안채 속에 서쪽으로 놓여져 있었고, 그 서쪽으로는 또 사랑채의 서쪽 행랑방이 막고 서 있었으므로,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빛을 쐬려면 안채의 안마당으로 내려서거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뜰로 나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듯 하였다. 그러므로 마루는 완전히 여름의 공간, 여름의 시원함을 중심적으로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안채 안마당 한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밝은 빛살과는 대조적으로, 어둑한 마루는 검은 색조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마루판은 두껍고 작은 판자들을 이어붙여 놓고 있었는데, 세월 탓인지 곰보가 되어 있었고, 그 곰보 마루판 중의 하나는 가운데를 4각형으로 손바닥만하게 베어내고 다른 나무로 채워놓기까지 하였다. 마루는 동일한 높이의 평면이 아니었다. 세 영역으로 나누어서 높이를 달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일 낮은 것은 동쪽의 ㅁ자 형 안마당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섬돌과 연결되는 부분이 길다란 사각형의 형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이 제일 낮았다. 그 다음으로는 안방 문으로부터 시작되어 사랑채로 나가는 문까지 이어지는 부분이 마치 중국집에서 쓰는 끝이 각진 칼 모양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동쪽의 마루보다는 10센티 정도가 높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밖의 마루, 그러니까 위쪽의 건너방에 붙은 마루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이었는데, 두 번째 층의 마루보다 또 10센티 정도가 높았다. 이렇게 하여 마루는 조각마루를 별 신경 쓰지 않고 이어붙인 형상, 솜씨 없는 목수가 높이를 맞추지 못하여 잘못 만들어 버린 것과 같은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런 미학은 사랑채 대청에 펼쳐져 있는 병풍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색다른 묘미를 갖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안채의 지붕을 처리하고 있는 방식, 안채의 동쪽 2층의 광창 방, 사랑채와 행랑채를 연결시키고 있는 서쪽의 통로방 등, 내앞의 종가는 여러 가지 눈여겨 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
흘러가는 세월과 정지되어 있는 역사
"친족들이 종가를 자주 방문하는가 봅니다." 나는 명균씨에게 물어 보았다. "가끔씩… 자주는 아닙니다." 명균씨가 말하였다. "견학하러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내앞의 의성김씨 종가! 그것은 이미 하나의 문화재, 전통시대를 엿보게 하는 하나의 자료가 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나 그러하듯이, 우리의 전통시대는 내앞에서도 현대와 당당히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가 도시중심성을 가지므로 시골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종가의 문화는 현대와 태생적으로 잘 어울릴 수 없다. 현대가 고향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삶살이의 무대가 아니고 직장 중심으로 타향살이를 강요하는 삶살이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므로, 여러 대 한 곳에 뿌리내려 살아왔던 전통적 삶살이의 방식은 현대와 친화하기 어렵다. 현대가 절대적으로 쾌적하고, 절대적으로 안전한 생활 공간, 절대적으로 편리한 생활공간을 요청하므로, 주변의 자연과 친화하기를 목적하였던 전통적인 가옥구조는 현대와 손을 맞잡기 어렵다. 현대가 개인 중심, 작은 가족 단위 중심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으므로, 큰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하여 넓은 영역에 걸쳐 여러 건물들을 펼쳐놓는 전통적인 가옥구조는, 무엇보다도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고, 유지 보전에 많은 경비가 든다는 경제적 이유 만으로도 현대에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내앞의 종가도 이렇게 현대와 친연성을 갖지 못하는 전통적 삶살이 속에 놓여진다. 이제 아무도 내앞의 종가와 같은 고택에서의 삶을 선택하려 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내앞의 종가와 같은 가옥, 내앞의 종가 가 담아냈던 것과 같은 삶살이를 만날 수 없다. 그런 삶살이를 형식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도시를 벗어나고 우리의 집을 떠나서, 멀리 내앞 같은 곳에 이르러야 한다. 내앞 같은 곳에 이르러 종가를 슬쩍 돌아보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도시로, 우리의 현대로 돌아간다. 그렇게 내앞 같은 종가는 우리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현장이나, 우리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 미래로 우리들에게 고려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내앞의 종가에서 만날 수 있는 김명균씨나 김승균씨에게서도 마찬가지이고, 장래 내앞으로 돌아와 종가를 지킬 것이라는 종손 김창균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형님은 세전의 제주를 물려받는 것을 즐거워 하셨습니다." 김명균씨가 전하는 종손 김창균씨의 모습이다. "20년 전(?)에 형님이 어떤 사람의 취재에 응했을 때 말한 바가 있지요. 형님은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시골이 편안하다, 그 때가 되면 내가 편안해서라도 집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셨지요." 김명균씨는 김창균씨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말 속에 은근히 갈무리해 감추고 있었다. "형님은 늘 종손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고, 한탄하셨지요. 아마 60 전에 여기 집이 편하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김명균씨에게는 종가는 이미 편하고 자랑스러운 곳으로 결론이 나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의식은 이미 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로의 회귀를 이루어 낸 듯 하였다. 물론 그것은 만만치 않은 세월을 허비한 다음의 결론일 것이었다. "우리는 성격이 꼬장꼬장 해서 마음이 안 드는 것이 많지요. 그래서 사회생활에 적응을 잘 못합니다. 월급쟁이는 별로 안 어울리지요." 김명균씨는 말하였다. "명색이 이런 집 자손으로 인문학쪽을 치지도외 할 수 없어 35살에 진학했습니다. 한문학 전공을 하고 싶었으나, 실제로 국문학 전공을 하게 되었고, 국문학 쪽에서 고전문학, 그러니까 한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김명균씨나 그의 아우 김승균씨가 느즈막히 한문학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가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탓인 모양이었다. 승균씨도 40이 넘어서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학문에 대한 안목을 새롭게 해준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명균씨나 승균씨는 이렇게 종가가 놓여져 있는 문화, 이미 단절되어 버린 가학의 전통을 새로 잇는 공부를 선택하고 있었다. 단절된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기, 박제가 되어가는 문화를 되살리기, 가문이 그 중심에 놓여지는 영광의 시대를 부활시키기는 명균씨나 승균씨의 화두일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화두인 것처럼. 그러나 명균씨나 승균씨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안다. 세월은 거칠게 흘러갔고, 우리 주변에 남은 역사는 겨우 비어버린 종가나 힘들어 하는 몇몇의 종손 밖에는 없다. "부친께서는 자신을 개미귀신의 모래 웅덩이에 빠진 개미로 비유하셨어요." 김명균씨가 타계하신 선친을 회상하면서 내게 들려주었던 말이다. "개미귀신의 웅덩이에 빠진 개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지요. 종가가 하나의 무덤으로 생각되었던 거지요." 이런 김명균씨의 말에 의하면 한평생 한 가문의 종손으로 살았던 김시우씨의 삶은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김시우씨는 평생의 투쟁을 통하여 그런 고단함을 편안함으로 바꿔 낼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오늘 땅 속에 묻혀있는 그의 영원한 잠은 평온한 것일 수 있을까? "여전히 종가가 시대 속에서 기능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중 단위의 공동체 의식은 점점 개인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좋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김명균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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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종가의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는 김명균씨와 김승균씨, 그리고 그들의 형님이면서 내앞의 의성김씨 큰종가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가야 할 큰종손 김창균씨! 나는 그들의 삶이 그 부친처럼 개미귀신의 모래웅덩이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는 곤혹스러움이 아니라, 결국 웅덩이 밖으로 빠져나온 자유스러움이기를 기원하여 본다. 그들의 자유스러움, 특히 종손 김창균씨의 자유는 그 혼자만의 고투를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대가 종가나 종손과 화해하는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의 자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대는 여전히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역사를 방치하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어디쯤에 역사를 구원하고자 하는 손길을 은근히 뻗혀두고 있는 것인가?<안동지 제 65호. 1999년 11월 30일 발행> |
통권 65호 - 안동의 종가를 찾아서 |
첫댓글 별도로 출력인쇄하여 상세히 잘보았습니다 감사
교장 선생님 !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좋은자료잘보았습니다 지난11월9일날 서계선조(청계선조님의 아우)님의 묘사때 김명균씨의 배려로 사빈서원에서음복도 하고 고마워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