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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제자를 파송하심
마태복음 10장 5-42절(막6:7-13,눅9:1-6)
5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命하여 가라사대 異邦人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羊에게로 가라 7가면서 傳播하여 말하되 天國이 가까웠다 하고 8病든 者를 고치며 죽은 者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鬼神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너희 纏帶에 金이나 銀이나 銅이나 가지지 말고 10旅行을 爲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아니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11아무 城이나 村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合當한 者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合當하면 너희 빈 平安이 거기 臨할 것이요 만일 合當치 아니하면 그 平安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迎接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城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15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審判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城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羊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智慧롭고 비둘기 같이 純潔하라 17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公會에 넘겨주겠고 저희 會堂에서 채찍질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를 因하여 總督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異邦人들에게 證據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念慮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者 곧 너희 아버지의 聖靈이시니라 21將次 兄弟가 兄弟를,아비가 子息을 죽는데 내어주며 子息들이 父母를 對敵하여 죽게하리라 22또 너희가 내 이름을 因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救援을 얻으리라 23이 洞里에서 너희를 逼迫하거든 저 洞里로 避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洞里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人者가 오리라.
24弟子가 그 先生보다,또는 종이 그 上典보다 높지 못하나니 25弟子가 그 先生 같고 종이 그 上典 같으면 足하도다 집 主人을 바알세불이라 하엿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光明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傳播하라 28몸은 죽여도 靈魂은 能히 죽이지 못하는 者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靈魂을 能히 地獄에 滅하시는 者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許諾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貴하니라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是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是認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否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否認하리라
34내가 世上에 和平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和平이 아니요 劍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며느리가 시어미와 不和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怨讐가 自己 집안 食口리라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自己 목숨을 얻는 者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自己 목숨을 잃는 者는 얻으리라
40너희를 迎接하는 者는 나를 迎接하는 것이요 나를 迎接하는者는 나 보내신 이를 迎接하는 것이니라 41先知者의 이름으로 先知者를 迎接하는 者는 先知者의 賞을 받을 것이요 義人의 이름으로 義人을 迎接하는 者는 義人의 賞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弟子의 이름으로 이 小子 中 하나에게 冷水 한 그릇이라도 주는 者는 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決斷코 賞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5절).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막6:7-13,눅9:1-6)과는 달리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사도 삼으심(10:1-4)과 그들을 파송하여 전도하게 한 일(10:5-42)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사도삼으신 일에 이어서 바로 그들을 파송하여 전도하게 한 일을 같이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그러나 여기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중반기에 들어서시면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신 후 날이 밝자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부르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로 임명하셨다(눅6:12-16,마10:1-4,막3:13-19). 그리고 나서 그들과 같이 내려오셔서 평지에 이르시자 그곳에 모여 기다리고 있던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였다.그들은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해안지방 두로와 시돈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온 사람들이었다.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어 주시며,병을 고치시고,또한 산상수훈과 쌍두마차격인 평지설교(평지수훈)를 해 주셨다(눅6:17-49).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근처에 있는 한 산 아래에서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시고서는 홀로 산 위에 올라가셔서 좌정하여 계셨는데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와 있자 그들을 향하여 주옥같은 여러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그것이 산상수훈(산상보훈)이다.에수님은 산상수훈을 마치시고는 그곳을 떠나 갈릴리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제2차 갈릴리 전도 여행.제1차는 사역 초기에 있었으며 누가복음에서의 행적으로 볼 때 눅4:42-5:39에 기록되어 있다-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가르치시며,이적을 행하셨다.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에서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시는데 이에 앞서 먼저 본문의 기록인 전에 사도삼으신 열 두 제자를 전도 파송하시는 일을 하신다.그리고 나서 예수님 자신은 단독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신다(마11:1).이와같이 마태복음에서의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임명하시고,이어서 그들을 전도 파송하신 행적에는 많은 시간적 간격의 차이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신 것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일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이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서 능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자기 곁에 두시고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 말씀을 전파하게 하고 귀신 쫓는 권세도 주시려 함이었다(막6:13-15).예수님께서 사도삼으신 열 두 제자에게 말씀을 전파하게 하는 것과 함께 귀신 쫓는 권세도 주시는 것은 천국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의 권능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으로서 이다.곧,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에게서 사단의 나라를 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게 하시는 것으로서 주어진 권세이다.따라서 열 두 제자에게 말씀 전파와 함께 귀신 쫓는 권세도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오신 에수님을 위하여 일하게 하기 위해서 였음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그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가르치시고,이적을 행하신 것에서 그러한 복음의 의미를 보고 배워야 했다.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던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그들에게 자신의 일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신 것이었다.하나님의 권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위해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 부여하신 권능이다.열 두 제자가 행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을 맡아서 하는 것으로서 이다.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을 행하여 나타내는 것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신 자라고 하는 신적 증거를 보였다.이에 따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열 두 사도가 어떤 자들인가 하는 것은 그들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행하는 것에서 알고서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복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열 두 제자들이 행한 권능을 보는 것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 죄로 말미암아서 사단의 권세에 압제되어 있는 자신들에게서 사단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음을 믿어야 했다.
'命하여 가라사대 異邦人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羊에게로 가라'.마태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전도 파송하신 것을 마9:35-38과 관련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다.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그래서 지금은 열 두 제자들은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하기 가장 좋은 추수기에 놓인 일군으로 부르시고 내어 보내시는 것임을 말하고자 해서이다. 열 두 제자는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백성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백성들의 주인으로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열 두 제자의 전도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신 것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곧,유대인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이지 이방인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귀신들려 고생하는 딸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에게 말씀하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가나안 여자)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속에 그들도(이방인) 있게 하셨다(마15:21-28).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 지방으로 가실 때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면서 한 동네에 들어가셔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 알게 하여 그 여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셨다.또한 그 동네의 많은 사람들도 그 여자의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말을 듣고 그들도 믿게 되었다(요4:1-42).이 두 경우에서 보는대로 예수님은 이방인을 전도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셨다.그러나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이 원칙을 지키셨다.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한정하신 것으로 말씀하신 것은 선지자들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따른 것인데,선지자들은 종종 메시야의 구원을 우주적인 특성으로 말하면서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구원을 먼저 상속할 것이라고 밝혔다(사49:6)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구원이 온 우주적으로 선포되고 시작될 때까지-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됨-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잠정적으로 제한하신 것뿐이고 나중에서는 그것을 없애셨다(참조.행2:21,10:1-48,13:46).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선택하여서 이스라엘을 삼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맡기시는 은사를 주신 것은,그것을 통해 먼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또 그것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다(롬3:1-2).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앞서 큰 특권을 부여받은 민족이었다.이에 따라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시는 자로 오신 것이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신 복음을 믿지 않고 배척하였으며,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 거부한 복음은 이방인들이 상속하였으며,이로써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이방인들도 위한,곧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셨다."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니라"(롬3:29-30).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복음에서 알려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박윤선은 본절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에 대해 주석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이방 사람들을 천국에서 제외하거나 이스라엘에게 민족적 우대를 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고, 복음 전도의 유효한 순서를 가리키는 것 뿐이다" 라고 하였으며,또한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의 순전한 혈통을 잃은 혼혈족이었고 그들의 종교도 혼합종교였으니 만큼 유대인에게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을 낮추어 보시는 의미로써 말씀하시지 않고 전도 순서의 첫째 대상을 유대인으로 하신 의미에서 말씀하셨다"라고 하였으며,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의 전부를 하나님의 양 곧,택한 백성으로 보시는 의미가 아니고 그들 중에 있는 뺀 백성을 이름이다. 택한 백성을 양에 비하는 성구들은 구신약을 통하여 많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전도 파송하시면서 몇 가지를 분부하셨다.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전도 사역을 수행하면서 지켜야 할 준칙에 관해서 이다(7-15절). 두 번째는,전도 사역을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만나게 될 박해 앞에 가져야 할 처세법에 대해서 이다(16-39절).세 번째는,전도 사역하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서 이다(40-42절). 본 구절들은 그 첫 번째인 열 두 제자들이 전도 사역을 수행하면서 지켜야 할 준칙에 관한 것이다.
'天國이 가까왔다 하고'.열 두 제자들이 할 일,곧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사명의 수행은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파하는 것이다.열 두 제자들이 전파해야 할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부터 전파한 복음이다(마4:17).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 시작과 더불어 이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헤르만 리델보스(H.N.Ridderbos)에 의하면 「세상사(世上史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개입을 의미」한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임마누엘하신 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주인)이시다.그 예수님께서 세상의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는 것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자기 백성들에게로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백성들의 것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한다.그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삼으셔서 하나님의 통치 속에 두신다는 것이다.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 일이 시작되었으며 세상은 종말이 가까워졌다.그러나 그것이 아직은 도착한 것은 아니므로 천국의 특성을 말하기를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마12:28,눅17:20-21),또는『현재적이며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이 가까왔다는 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종말에까지 나타난 설교의 중심 내용이었으며,또한 이 세상 종말에까지 계속해서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였으며,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자의 것이 된다.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임박하고 있는 것이다.천국 복음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고,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한 사람에 까지 그 복음이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면 그제야 세상은 끝나며 마지막 심판이 진행된다(마24:13-14) 그때가 오기까지 천국 복음을 듣는 자들은 회개하여야 한다.그러므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하신 것이다.천국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긴급히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그리고 이제 그 사역을 제자들에게 사명으로 부여하셔서 수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셨다.
'病든 者를 고치며 죽은 者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鬼神을 쫓아내되'.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눅9:1). 이것에 대해서는 앞서(5-6절) 설명하였다.열 두 제자들은 자신들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회개케 하는 이 일이 하나님께로 부터 사명을 받아서 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그 증거로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받았다.이 권능은 자신들이 증거한 천국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뒷받침(증명하는 역할) 한다.따라서 열 두 제자들이 아무 때,아무 사람에게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권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그들이 임의로 권능을 행사하고자 하면 원한대로 권능이 나타나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제자들이 걱정해서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해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이 해야 할 말을 알려 주셔서 말할수 있게 하신다고 하셨듯이(19절),제자들에게서 권능을 행사하신 분은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신데,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그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만,그러니까 필요한 때에만 나타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치유의 은사(신유 은사)를 주장하면서 집회를 병고치는 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예수님 당시,그리고 사도시대(초대교회) 때에 나타내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제어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행사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천국)복음의 계시성에 따른 것이며,복음이 문서계시인 성경 기록으로 완료된 후에는 계시의 종결과 함께 계시의 필요성으로 나타내셨던 이적을 행하시는 권능(표적)도 감추셨다.그러나 그 권능은 없어진 것이 아니요,교회와 더불어 존재케 하시니 곧,교회를 세워나가시며,온전케 해 나가시는 교회적 은사로 그 권능을 행사하시는 것이다(고전12:-14:)
물론,사도에 의하여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동안은 사도는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권능을 복음 전파와 함께 이적(표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며,또한 교회 안에서는 각양 은사받은 사람들이 있어 교회를 섬겨나갔는데 병고치는 은사로 섬기는 성도들도 있었다.그러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능은 계시의 기록 및 교회의 세워짐과 더불어 점진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그래서 사도 교회 이후에는 이적에 의한 권능 행사는 점차 드러내지 아니하셨다.이유는,계시(구원 진리)의 완전성,충족성,충분성,명료성과 같은 계시 특성에 따른 것이다.하나님은 오직 복음 계시에 의해서 구원해 나가시기를 기뻐하셨다.그러니까 사도 교회 이후는,복음 계시에 의해서 믿음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이적을 체험하고서도 믿음을 갖게 되지 않는 것이다.사실 예수님 당시나 사도 교회 시대 때에도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은 이적을 보고서가 아니다.오히려 그들은 이적을 보고서도 마음이 강팍해 있었다.그 어느 때나 이적은 복음에서 전파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는 일을 했을 뿐이다.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것은 예수님과 또한 그 제자들인 사도들이 전한 천국 복음의 말씀(구원의 진리)을 듣고서 이다.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달아 믿는 자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심으로써 였다.그러나 이적에 의한 권능 행사는 교회의 세워짐과 더불어 점차 교회적 은사로 주어져 사용하게 하셨다.사도 교회 시대에서는 이 두 경우가 같이 존재하기도 하였지만,어느 때부터는(성경이 완성된 뒤인 사도 교회 이후) 점차 각양 교회적 은사로만 존재해 오게 하셨는데 계시를 돕는 은사로 주어졌던 은사에서 이적성(異蹟性),신비성(神秘性)을 띈 은사-병고치는 은사,이적을 행하는 능력,영들을 분별하는 능력,방언,통역의 은사가 그것이다-는 나타내시지 않으셨다.따라서 각양 교회적 은사는 더 이상 항목별(명칭별)로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적 은사-지혜의 말씀(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지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권위자가 되는 재능),지식의 말씀(성경의 계시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재능),믿음,예언함(성경에 계시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능력,또는 설교자의 능력)이 그것이다-로 말미암은 봉사의 성격을 띄고 있다.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드려 헌신하게 된다.이때 헌신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삶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교회를 돕는 '봉사의 능력'이며,이는 '섬김의 정신'에서 행해진다.이것이 교회적 은사의 활용이다.즉,성령께서 교회의 각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심에 따라(하나님께서 성도 자신들에게 갖고 계신 선한 뜻을 좇아) 자신을 드려 봉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권능이 이제는 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즉,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다.다만,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권능(은사)을 주셔서 그것이 복음 전도와 관련해서 말하든,교회를 돕는 것으로 말하든지간에 그 권능을 은사로 받아 있기 때문에 언제,누구에게라도 이적을 행하여 나타내 보일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주장을 경계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지금도 권능을 행하신다.예컨대,병고침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직접,또는 어느 성도의 손길을 통해서 언제든지,또한 얼마든지 행하신다.그러나 그 권능의 행하심은 자기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으로서 이다.죽어가는 사람을 복음에 연결시켜 그 생명을 구원하고자 해서 권능을 행하신다고 하면 그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한 것이다.그리고 그 자비하심이 하나님께서 직접 권능으로 나타나셨든지,아니면 어느 성도의 손길을 통해서 나타나셨든지간에 그 자비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나타내신 것이기에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그 은사를 행할 수 있는 권능을 계속적으로 지닌 것으로 주장하여 그 은사가 어느 개인의 특별한 재능으로 설명되면 개인의 권능과 자랑이 되며,여기에서 종교적 영웅주의가 나오게 된다.
다음의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라.예수님께서는 전도 파송시 열 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으나,죽은 자를 살리는 일에 있어서 제자들 모두가 나가서 죽은 자를 시도 때도 없이,이 사람 저 사람마다 나서서 죽은 자를 살려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나서서 살리는 일을 한 일이 없으며 행9:40에 가서야 비로소 사도가 죽은 자를 살렸다는 기사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사도들이 함께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베드로 한 사람에게서 뿐이었다.베드로는 욥바에 다비다(헬라어로는 도르가 곧,'사슴'이라는 뜻임)라는 여신도가 병들어 죽었는데 욥바로 부터 그 소식을 듣고는 다비다의 시신이 안치된 욥바로 살린 것이다.이 일은 욥바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였다(행9:36-43).사도가 죽은 자를 살린 기사는 한 번 더 있는데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 아닌 바울에 의해서 이다.바울은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복음의 교제를 나누었는데 드로아를 떠나기 전날인 주일에 성만찬을 나누려고 모였을 때 바울은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해 나갔다.그런데 졸음을 이기지 못한 유두고라는 청년이 깊은 잠이 들어 그만 앉아있던 3층 누각에서 떨어져 죽었다.그것을 보고 성도들이 걱정하는데 바울이 내려가서 청년을 팔에 안고는 성도들에게 청년이 살아났다고 말하여 안심시켰다.그 일로 인해서 모두는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고 3층으로 다시 올라가 주님의 만찬을 나누며 새벽이 되기까지 주의 말씀을 들었다.이 일 또한 바울의 고별 설교를 듣는 드로아의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속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있는 일이었다(행2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이러한 말씀을 해 주심은 열 두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에 의해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하는 것을 자신들의 눈을 통해서 보고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순식간에,또한 순간적으로 미혹받아 마치 자기들이 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그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서 자기들이 권능을 행할려고 하는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열 두 제자들이 이적 행하는 권능을 탐욕에 의해서 정욕적으로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행하는 그 권능이 제자들 개인의 의와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불쌍한 양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주이신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는 가운데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능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라는 분부를 하신 것이다.그럴 때에 예수님이 파송한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보는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다.
'너희 纏帶에 金이나 銀이나 銅이나 가지지 말고 旅行을 爲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전도를 위하여 파송되고 있는 것이므로 복음 전파를 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준칙에 관하여 분부해 주셨다.그 첫째는,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겪게될 생계(生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고 그로 인하여 겪는 극한 고난을 감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전대'(纏帶)는 돈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는 허리띠이다.이곳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넣어가지고서 전도 여행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또한 전도 여행을 할 때 음식물을 담아가지고 다니는 여행용 주머니나 몸 보호를 위하여 여벌의 옷과 신을 지니지도 말라고 하셨다.그와 같은 이유로 지팡이도 금하셨다.한편 동일한 기사인 막6:8-9에서는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여기서는 전도 여행을 위해 지팡이와 신은 허용하고 있다.이로 보건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시에 필요한 신과 지팡이마저 금하여서 맨발로 다니게 하고,먼 길을 다님으로 인해 힘들고 고된 피로도 외면하신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곧,전도 여행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지팡이와 신마저 금하신 것은 아니다.예수님은 단지 여행을 위해 염려하고,해서 끼니와 몸 보호를 위해 음식물,의복,돈,지팡이를 준비하는 등의 특별한 예방책을 세우고 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시에 필요한 지팡이와 신 이외의 것은 지니고 다니지 않도록 금하셨다.예수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복음 전도를 위해 여행하게 되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해야 하며,이때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있게되는 곳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아 지냄으로써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그것은 주인이 일군을 보내 일을 맡겨 시킴에 따라 일군은 주인으로 부터 저 먹을 것을 받는 원리와 같이,제자들은 주님께로 부터 일을 맡아서 세상에 보냄을 받아 일하는 것이므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만 일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주님의 일에만 전념할 일이지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여 그에 대한 예방책을 세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주인이 다 알아서 준비하시고 도와주시고 제공해 주시는 것이다.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생계를 고려해 주실 줄 알고 나아가야 된다"고 하였다.헤르만 리델보스(H.N.Ridderbos)는 "제자들은,생애동안 그들이 복음을 전할 자들의 선한 뜻과 도움에 의존하며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야만 하였다.그들의 삶의 원리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는데 있었고,그것은 예수님의 '거저 주어라'는 명령의 이면에 해당된다.동시에 회심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촉진시키는데 참여할 의무,적어도 물질적인 도움을 부가하셨다"라고 말하였다.
'아무 城이나 村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合當한 者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合當하면 너희 빈 平安이 거기 臨할 것이요 만일 合當치 아니하면 그 平安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迎接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城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審判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城보다 견디기 쉬우리라'.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복음 전도를 위하여 여행할 때에 지켜야 할 둘째 준칙에 대하여 분부해 주셨다.이것은 우리에게 복음 전도에 있어서 무분별하고 무원칙적인 전도 방법에 대해 신중한 생각을 갖게 한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들은 복음의 사신인 그들에게 거주할 곳을 제공하기에 '합당한 자'를 찾아야 함을 말씀하셨다.여기서 합당한 자란 이방인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글(눅24:44),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리켜 기록된 모든 글에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계획을 알고 그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 자들이며,복음이 우주적이며 보편화된 때로부터는 주의 구원의 은혜를 열망하고 있는 자들이다.이런 자들은 구원의 도의 참된 가치를 바로 알고 있는 자들이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를 위하여 여행함에 있어서 먼저 그런 자들을 찾아내어 그들 집에 들어가서 그들이 열망하고 있는 주의 구원의 복음에 대해 가르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고,그곳을 본거지로 하여 다른 집들을 찾아다닐 수 있도록 하고 있다(H.N. Ridderbos)
오늘날 복음 전도에 있어서 그 방법론이 매우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이다.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천국 복음,구원의 도를 전하고 알리는 방법과 수단에 불과하다.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전도'(십자가의 도)는 구원얻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 사실이다(고전1:19) 다시 말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방법과 수단이 아니라는 말이다.전도는 십자가의 도의 선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이것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얻게 하시는 것이나 거부하는 자로 나타나지는 것이 다 전도를 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심이다.전도에 의해서 믿는 자가 더해지거나,그렇지를 못하는 이 모두가 다 복음을 듣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이며,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심인 것이다.교회는 '구원얻은 자',곧 '믿는 자들의 모임' 그것으로만 설명되어야 한다.그런데 복음 전도를 교회 부흥(교회가 커지는 것)을 목적으로만 한다고 하면,그래서 복음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믿음도 없이 교회 예배당에만 많이 나오면 교회가 부흥한다고 하는,사람 수를 기준으로 하여서 교회 부흥을 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진정한 교회 부흥은 하나님이 구원얻게 하신,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자들이 교회의 속성,교회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그런 자들로 성장하는가 하는 것이다.교회는 대교회,소교회로 구분될 수가 없다.교회는 부흥(성장)한 교회,부흥하지 못한 교회로 구분될 수 없다.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그의 몸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믿는 자가 얼마나 되느냐? 그런 이해가 아니다.믿는 자가 얼마이든지간에 믿는 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곳,그곳이 교회인 것이다.그러기에 성경에서 교회는 예컨대,"로마에 사시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롬1:1,현대어성경),"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고 하나님께 용납을 받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분과 각처에 흩어져 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고전1:2,현대어 성경)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따라서 교회가 복음 전도 방법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으나 교회 부흥의 수단과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믿는 자를 얻게 하시고 그래서 믿는 자를 더하게 하심은 모든 교회의 바람이나 그것은 세상 끝날까지 마지막 한 사람을 회개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의한 것이다.그러나 한편으로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누구나 교회로 들어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며,때에 따라서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을 교회로 부터 분리시켜 나가게 하시는 일을 하심을 알아야 한다.이것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부흥이다.이런 이해를 가진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 여행을 함에 있어서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 들어가 그 집에서 떠나기까지 머물라고 하신 말씀에서 오늘날 교회가 복음 전도를 함에 있어서 무분별하고 무원칙적인 전도 방법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해야 할 것이며,교회 부흥을 빌미로 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해 나가시는 은혜의 순서(질서)에서 먼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시작하여 이방인에게로 확장시켜 나가게 하셨다.그런 섭리에서 이방인에 앞서 먼저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으며(롬3:1-2),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게 하셨다(요12:34).그리고 또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예수님의 세상에 오심과 성령강림은 그러한 일로서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셨다.예수님은 이 원리를 제자들을 파송하여 복음 전도하게 하실 때 그들이 지켜야 할 준칙에서도 적용하셨다.그것이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들어가 그 집에 머물면서 다른 집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분부이다.이것은 전도의 방법론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며,반드시 이렇게 해야 전도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의도로 하신 말씀도 아니다.
제자들은 복음 전도를 함에 있어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면 그들이 열망하는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게 하고,또한 그곳을 복음의 본거지로 하여 일정한 기간동안 머무는 동안에 구원의 복음을 듣고자 찾아오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주며,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도 갖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합당한 자를 찾아 발견하여 그 집에 들어가 머물게 될 때에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하였다.이것은 그 집안 사람들을 축복하는 인사를 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13절에 의하면 평안하기를 빈 이 인사는 복음 전도에 합당한 자에 대해 평안을 기원하는 통상적인 인사인데 제자들이 찾아낸 사람들이 합당한 자,곧 주의 구원을 열망하여 제자들을 반갑게 맞아들이는,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이라고 하면 제자들의 복음 증거를 통해 그들이 열망하는 주의 구원이 임하여 하나님 나라의 평안이 주어질 것임을 담고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주의 구원을 열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그래서 제자들을 환영하여 맞아들인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제자들이 증거한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13절의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이 그 사실을 말해 준다.그렇다면 제자들이 빈 평안은 어찌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기를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하셨다.그러니까 그 집에 빈 평안은 헛되지 아니하고 제자들에게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말이다.이는 복음을 거부하는 좀 더 포괄적인 면에서 주의 구원에 합당한 자를 찾기 위해서 어느 동네나 집에 들어가 평안하기를 빌며 복음을 증거하고자 할 때 영접도 아니하며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그렇다(14절).제자들이 베푼 평안이 그들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은 그 집이 복음에 합당치 못하므로 상종 못할 것이며,그 가족의 일원들은 제자들이 방문하여 그들에게 전해준 복에 낮선 자로 남게 될 것을 의미한다(H.N. Ridderbos) 그리고 제자들이 그 집을 위해 빈 평안은 제자들 자신들을 위한 것이 된다.그 평안은 제자들의 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그러니까 복음을 위해 애쓴 제자들의 구원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어느 집이나 성이든지 제자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증거하는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찌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예수님의 이 명령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행13:51).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지역을 통과하여 여행을 할 때면,다시 유대 땅을 땅을 밟기 전에 자기들의 신과 의복에 묻은 모든 먼지를 떨어 제거하였다.이방인들을 부정하다고 간주한데 따른 것이다.그러므로 제자들은 유대인의 땅 내에서 이런 관습을 시행함으로써 그들이 볼 때 해당 집 또는 성읍은 이방의 고을과 다름이 없으며,제자들은 그곳 사람과 친교를 갖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H.N.Ridderbos) 이런 이해 속에서 박윤선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명령하신 말씀에는 몇 가지 뜻을 가졌다고 설명을 하였다.①사도들은 그 할 바 책임을 다하였다는 것 ②그들과 그 배척자들과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③그 먼지 떠는 행동은 역시 최후로 복음을 믿으라는 무서운 권고와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증거하는 복음을 듣지도 않는 집과 성은 소돔과 고모라 땅보다 죄악이 더 큼을 말씀하셨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소돔과 고모라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죄악의 도시의 상징으로 남는다.그런데 제자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증거하는 복음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행위를 가짐은 그들이 유대인이라고 할찌라도 이방인들이 부정한 것보다 더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셨다.따라서 그들의 죄악은 이방인들이 죄악된 것보다 더 큰 것이다.그런한 집과 성으로 부터 나온 제자들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게 함으로써 그 집과 성이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받아 저주 아래 놓여져 있음을 묵시적으로 나타내셨다.그러므로 마가와 누가는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라고 부가하여 기록하였다(마6:11,눅9:5).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羊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智慧롭고 비둘기 같이 純潔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公會에 넘겨주겠고 저희 會堂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因하여 總督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異邦人들에게 證據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念慮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者 곧 너희 아버지의 聖靈이시니라. 將次 兄弟가 兄弟를,아비가 子息을 죽는데 내어주며 子息들이 父母를 對敵하여 죽게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因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救援을 얻으리라. 이 洞里에서 너희를 逼迫하거든 저 洞里로 避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洞里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人者가 오리라. 弟子가 그 先生보다,또는 종이 그 上典보다 높지 못하나니 弟子가 그 先生 같고 종이 그 上典 같으면 足하도다 집 主人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光明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傳播하라 몸은 죽여도 靈魂은 能히 죽이지 못하는 者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靈魂을 能히 地獄에 滅하시는 者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許諾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貴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是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是認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否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否認하리라. 내가 世上에 和平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和平이 아니요 劍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며느리가 시어미와 不和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怨讐가 自己 집안 食口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自己 목숨을 얻는 者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自己 목숨을 잃는 者는 얻으리라."
예수님은 비교적 긴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복음 전도 사역을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만나게 될 박해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가르치셨다.예수님이 이 말씀을 해 주심은 가까운 시기로는 이제 복음 전도를 위해 파송되어가는 시점에 있기 때문이나 한편으로는 장차 겪게 될 박해를 염두에 두고서 이다.그때는 처음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당하게 될 박해보다 훨씬 더 심하고 무서운 박해를 만날 것이었다.사실 제자들이 받는 박해는 그들이 주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후 제자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 증거로 인해 박해를 받았다.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박해의 내용은 제자들이 그들이 구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체포되어 공회에 넘겨져 채찍질 당하며,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감을 당하며 죽음을 당할 것에 관한 예언으로 되어 있다.그렇게 제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그 몸은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 속에서 굳은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헤르만 리델보스(H.N.Ridderbos)는 말하기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본문에 말씀하신 것의 상당 부분이 그의 고별 강화와 장래에 관한 그의 강설에서 발견된다"(참조17-22절,막13:9-13,눅21:12-17)라고 하면서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신 것과 그들이 장차 당할 시련에 관한 예언을 연결시킴으로써 사도성과 핍박은 공존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라고 하였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羊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智 慧롭고 비둘기 같이 純潔하라.'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도를 위해 파송되어가는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냄을 받은 양에 비교하셨다.그럼으로써 제자들이 얼마나 큰 위협 앞에 있으며 위험을 당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양을 삼키려는 이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제자들은 박해 앞에서 아무런 저항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로 보내지고 있는 것이다.그런 현실 앞에서 복음 전도를 하는 제자들은 적절히 대처해야만 하여야 한다.그것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뱀의 지혜를 지녀야 하고 비둘기의 순결성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여기서 언급하시고 있는 '뱀의 지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창3장에서 뱀은 동물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존재로 등장한다.그러나 그 지혜는 뱀의 독특한 특성과 결부된다.하나님은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나아오게 하시고는 두고 보셨다.그러자 아담은 자기에게 나아온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으며 그 이름의 모든 생물들의 이름이 되었다(창2:19-20).아담이 이처럼 모든,곧 많은 생물들의 이름을 각기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고 막연하게 떠 오르는대로 지은 것이 아니라,그것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 그 특성을 좇아서 지은 것이다.따라서 생물들의 이름에서 생물들의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에드워드 J.영(Edward J.Young)은 아담이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해 말하기를 "성경이 아담은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생물들을 바라보고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의인화(擬人化)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것인 것 같다.셈족의 언어에서 어떤 것의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그것의 본질적인 성품과 특징을 인정하고 계획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아담이 분류하고 범위를 정했다는 것이다.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수도 있었다.아담은 동물들의 존재와 동물들과 자기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아담이 동물들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러므로 뱀을 가장 간교한 존재로 성경이 언급하고 있을 때 그것은 뱀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인데 뱀은 모든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한 그러니까 모든 들짐승들이 간교하였는데 뱀은 그중에서도 가장 간교한,곧 지혜로운 존재였다.여기서 '간교하더라'는 글자 그대로는 꾀가 많아 교활하고 약삭빠른 것을 뜻하나,히브리어는 '아룸'으로 그 뜻은 「영리하고 멋진」이며,이는 곧 지혜이다.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물은 각 특성에 따른 본성적 지혜가 있어 살아간다.그리고 뱀은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지혜로왔다.이렇게 뱀의 지혜를 다른 들짐승에 비해서 뛰어난 지혜로 기술하고 있으며 그 지혜를 간교란 용어로 사용한 것은 왜일까? 아마도 뱀이 다른 들짐승과는 다른 삶의 지혜를 보이며 살기 때문일 것이다.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생물도 마찬가지이다.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만족할만한 선한 속성을 지니고서 창조되었다.그러니까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지혜를 행함에 있어서도 선하다.그것은 뱀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지혜를 써서 살아가는 것이다.그런데 뱀의 지혜의 특성은 간교하였다.무슨 말인가 하면 뱀의 지혜는 다른 들짐승에게서는 볼 수 없는 면이 있었다.쉽게 말하면 머리 회전이 빠르고 꾀가 많아 약삭빠른 것이다.좀 더 고상한 표현으로 말하면 영리한 것이다.사악한 영인 사단은 그러한 뱀의 지혜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서 뱀의 지혜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꾀어 거짓말을 하고 미혹하여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타락시키는데 이용하고자 뱀을 도구로 사용하였다.그렇게 해서 뱀의 지혜는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본래적인 성품과는 다르게 변질되어서 가장 사단적인 지혜가 되었다. 곧, 사악한 지혜가 된 것이다. 그것이 뱀의 지혜인 '간교함'이다. 즉, 간교성을 띈 지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뱀에게서 보는바와 같이 간교한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닌줄은 우리가 잘 안다.그러면 어떤 의미에서인가? 예수님은 사악한 도구,사람을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뱀의 간교함이 아닌,단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인 들짐승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지닌 뱀의 지혜를 들어서 제자들이 이제,또한 장차 박해 앞에 서 있게 될 때 어떻게 처신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여기에는 두가지의 견해가 있어 왔다.하나는,제자들이 주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만나게 될 박해 앞에서 매우 지혜롭게 대처할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이다.제자들은 주를 인하여 죽음에 직면하는 박해를 만나게 될 것이지만,그러나 필요없이 위험한 곳에 나서서는 안되었다.그래서 쓸데없는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다(H.N. Ridderbos).또 하나는,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제자들이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어떤 위험한 일을 만나게 될 때 그 전하는 진리를 가리우거나 꾸부러뜨리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전도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시키는 것이 첫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고 또는 감화있게 드러내는 것이 첫째라고 하였다(박윤선).
그러나 이 두 견해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말씀을 박해를 만났을 때 어떻게 지혜롭게 처신할 것이냐를 대처 방법론으로 하신 것이라고 하면 두 견해 모두가 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이다.사실 쓸데없는 고난을 피하지 않거나 자초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닌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그러나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고난 앞에서는 기뻐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주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밝히 나타내시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이어지는 구체적인 박해와 연결되어 있다.예수님은 세상에 보냄을 받는 제자들이 어떠한 현실 앞에 부딪칠 것인지를 예지하고 계셨다.복음을 들고 나가는 제자들에게 세상은 양을 삼킬려고 기회를 엿보는 이리와 같다.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런 곳으로 보내고 계신다.곧, 고난의 현장으로 내보지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18절에서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데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주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의 증인으로 내보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박해 앞에 서기 될 것인지를 예지하고 있어야 한다.한편 자신들이 무슨 일을 위해서 박해 앞에 서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목적 의식도 갖고 있어야 한다.그리고 제자들은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무슨 말인가 하면,뱀은 모든 들짐승 중에서 가장 지혜롭게 살아간 짐승이었던 것과 같이,제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혜보다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참고로 바울은 엡5:8-9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들을 '빛의 자녀'로 묘사하면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였다.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이것은 불순종의 아들로서 어두움에 속한 부끄러운 짓을 하며 사는 자들에 대해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상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말씀에서 제자들의 지혜가 세상 사람들이 지닌 지혜와 다른 지혜의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한다.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알고 행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이 지혜는 하늘에서 온 지혜이다.사도 요한이 요1:12-13에서 말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그들이 지닌 지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지닌 지혜보다 가장 뛰어난 지혜이다.제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믿는 진리를 말하는 지혜로운 자들이다.자신들을 삼키려는 이리와 같은 자들 앞에 서게 될텐데 그때에 제자들이 가질 처세법은 진리를 말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아담과 하와를 시험한 뱀은 사단의 도구로 그 지혜를 사용하였지만,제자들은 주의 도구로 자기들의 지혜를 사용하여서 주의 이름을 나타내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19-20절의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신 말씀을 주의깊게 보라.제자들을 보내신 분이 주님이시며,제자들로 증거하게 하시는 분도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영,곧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따라서 제자들은 박해 자 앞에 세움을 입을 때에 주의 도구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증거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뱀같이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셨다.이때 이 지혜는 주의 증인된 삶만이 아니라 본절 아래에서 언급하시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적인 삶과 희생적인 삶에서 보여지는 지혜를 다 포함하고 있다.참고로 바울은 롬16:19에서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여기에서의 선한데 지혜롭다는 것은 로마의 교회가 받은 복음적 교훈에 순종함을 뜻하였다(롬16:18,19).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시고서는 비둘기의 순결성을 덧붙이심은, 제자들이 지혜롭게 처신함에 있어서 그 자신들 스스로가 흠 없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제자들은 자신들이 증거하는 진리에 대해 그 믿음이 온전히 서 있어야 하며,그 믿음은 분명 마음이 비뚤어지고 완고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어두움에 속한 세대들과는 다른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그것이 어두움에 속한 자들과 다른 빛의 자녀인 제자들이,그리고 또한 복음 증거를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는 제자들이 가질 순결성이다.만일 생명의 말씀인 주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제자들이 비둘기 같이 순결함을 지니지 못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그 자신 스스로도 속는 참으로 간교한 뱀의 지혜가 되고 말 것이다.그리고 그 결과는 주의 구원의 복음을 위해 일한 무든 수고가 헛되이 되고 말 것이다(참조.빌2:15-16),순결성이 없는 지혜는 사단이 바라는 바이며,사단의 전략으로 이용될 뿐이다.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지혜는 순결성을 지니고 있어야 선하며,그 지혜가 참 지혜이다.
한편,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얕은 꾀를 쓰거나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박해를 모면하여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거나 또는 복음을 증거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 동기에 있어 순전하며,그 행위에 있어서 순수해야 한다(H.N.Ridderbos)고 하며,제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지혜롭게 행할 것이나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정절을 파상(破傷)해 가면서까지 해서는 안된다(박윤선)고 한다.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한데 대한 두 견해를 따를 때 당연하다.사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분명히 그래야 한다.그렇지만 본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지혜에 따른 순결성의 본 뜻과는 그 의미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그것은 본절 이후에 계속되어지는 말씀과 연결시켜 보아도 그렇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公會에 넘겨주겠고 저희 會堂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因하여 總督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異邦人들에게 證據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예수님은 복음 전도를 위하여 파송받아 세상에 나가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받게 될 박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주신다.먼저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다.이 말씀은 사람들을 주의하라,경계하라는 것이다.여기서 말씀하신 사람은 그 다음에 계속해서 언급하신 내용을 볼 때 일차적으로는 유대인이며,그 다음은 이방인이다.제자들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일하지만 유대인들은 제자들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경계를 시키신 것이다.그러니까 복음 전도하는 자신들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알고서 박해를 당하게 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주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유대인들은 제자들을 잡아 공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그러나 박해는 유대인으로서만 끝나지 않는다.제자들은 이방인인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감을 당한다.그러니까 제자들이 받는 박해는 유대인에게서만이 아니라 이방 땅에 들어가서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거기서도 제자들은 주를 위하여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제자들을 유다 땅에서 이방 땅으로 확장하여 보내실 것을 계획하셨으며,그에 대한 준비로서 사울 (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그리고 그것은 그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행9:15,16).제자들에게 있어서 복음 전도와 그에 따르는 박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오는 수단이 된다.왜냐하면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무슨 뜻인가 하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심문과 채찍질당하고 이방인들에게 끌려가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 앞에 주의 증인이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것을 통해서 그들이 주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갖게 하시는 것이다.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을 찾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결국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시는 일을 하게 된다.이것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念慮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者 곧 너희 아버지의 聖靈이시니라.' 제자들이 붙잡혀 유대인들 앞에나 이방인들 앞에 세워지는 것은 주의 증인이 되는 기회를 갖는 것인데 이때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며 그것을 어떻게 말을 해서 증거해야 할지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그들 속에 계시며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 그들이 할 말의 내용과 말할 방도까지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앞서 언급이 되었지만 제자들은 주의 의로운 일을 위하여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제자들을 보내신 분은 그들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시며,그분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지혜로 자신이 하실 말씀을 하도록 도우신다.그러므로 제자들은 유대인들 앞이나 이방인들 앞에 세워져 주의 이름을 증거하게 될 때에 무엇을 말할 것인지,또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염려하지 말고 자신 안에 내주하셔서 말하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온전히 의지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將次 兄弟가 兄弟를,아비가 子息을 죽는데 내어주며 子息들이 父母를 對敵하여 죽게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因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救援을 얻으리라. 이 洞里에서 너희를 逼迫하거든 저 洞里로 避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洞里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人者가 오리라.'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장차 제자들이 받을 박해의 성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박해는 복음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온다. 형제가 형제를 죽게하고,부모가 자식을 죽게하며,자식들이 부모를 원수처럼 여기고 대적하여 죽게하는 참으로 엄청난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주의 이름을 인하여 이처럼 가족간에 불화가 일어나며 분열로 발전하고 분쟁으로까지 이어져 나간다.그리고 이것은 점차 심화되어서 가족간에 서로 죽이는 참극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주의 이름을 믿는다는 오직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있게 되는 일이다.형제가 형제에 주의 이름을 증거하고,부모가 자식에게 주의 이름을 증거한다고 해서 형제가 주의 이름을 믿고,자식이 주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주의 이름을 믿는 것은 한 피를 지닌 가족이라 하는 것에 의해서,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라고 해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또 그것을 내세워서 주의 이름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이다(요1:12-13) 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미움을 받게 된다.그것이 박해의 성격이다.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에는 이처럼 주의 이름을 믿고 복음을 전도한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이로 인해서 가족간에도 서로 갈라져 원수삼고 죽는데 내어주기까지 한다는 것은 복음이 갖는 위력이다.사실 주 안에서 부모와 자식이 되고 형제로 있지 않으면,그래서 주 안에 있는 자와 주 밖에 있는 자가 된다면,한편은 하나님의 자녀로 있고 한편은 마귀의 자녀로 있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복음이 분명히 나타내고 구분짓게 한다.그리고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은 대적하는 자로 나타나게 된다.박해는 그것으로 있게 되는 일이다.형제가 형제에게,부모가 자식에게 복음을 전도하지 않으면 대적하는 행위도 없다.따라서 박해도 없다.그러나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들을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살려내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형제가 형제에게,부모가 자식에게,그리고 이웃에게 증거되어야 한다.그것은 가족간에 위험과 박해를 가져오는 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제자들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여 믿는 자들을 얻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그러니까 어두움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거부하는 앞에서 어떤 자들에게서는 어떤 위험과 박해를 감내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믿는 것에서 주의 구원과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그들은 나중까지 주의 이름을 붙잡고 견디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그러기에 제자들,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믿음에 인내가 요구된다.헤르만 리델보스(H.N.Ridderbos)는 「'나중까지'는 투쟁과 핍박의 끝을 의미한다.예수님의 많은 제자들 개개인에게는 이것이 그들의 생명의 끝을 의미했다.그리고 일반적인 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그 전에는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구원은 천국이 최종적으로 나타날 때 있을 구원이다.이것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모든 신자들이 인내할 동기가 된다」라고 하였다.칼빈(J.Calvin)은 말하기를 「이 간단한 약속은 신자의 마음에 힘을 준다.그 이유는,그가 끝까지 참아 견딘 결과는 행복이기 때문이다.세상에는 이렇게 실패없는 결국을 내어다보는 싸움이 없다」고 하였다.이렇게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들에게 박해는 필연적인 것이었다.그것은 앞서 언급이 되었듯이 어두움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거부하는 현상으로서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박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겨 다니게 된다."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하게 되는데 이는 앞절의 14절에서 보는대로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고 거부할 때 그곳에서 나와 다른 동네,다른 사람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도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며,장차 있게 될 일인 행1:8에서 분부하시고 있는 복음을 확장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있게 될 일을 예지하고 있는 것에서 이다.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사도의 설교에 의해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점점 믿는 자들이 더해갔으나 그와 함께 유대인들의 박해도 진행되어져 갔고 얼마후 예루살렘에 환란의 바람이 불어와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여 사도들을 제외한 주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신을 해야만 했다(행8:1).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묶여 있지 않게 하시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시겠다고 하신 위대한 계획의 실행에 따른 의도적으로 있는 일이었다.그리고 바울에 의해서 로마까지 복음이 확장되었으며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행9:15,28:29). 한편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는 무엇보다 믿음에 인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洞里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人者가 오리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박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겨 다니는 일을 거듭하게 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즉 그들이 더 이상 피하여 옮겨다닐 장소가 없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 전도 사역과 예수님의 재림과는 상관 관계에 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을 찾아 회개케 하여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일로 있는 것이다.그 일이 완료되기까지,곧 모든 민족에게 천국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는 그날까지(마24:13-14)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같이 여기시면서 기다리신다(벧후3:8).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더디 완성되지 않고 속히 될 것이다.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같다(벧후3:8) 예수님의 재림은 제자들의 복음 사역이 완료되고 예수님을 주로 믿는 모든 자들이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과 더불어 영원히 생명의 기쁨을 갖는 시작이 되는 종말적 전환점이 된다.그때가 오기까지 에수님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아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하는 고난을 겪지만 그 피하는 길을 통해서 자신들이 맡은 복음 전도의 사역을 마치기까지 그들의 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며,후에는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주의 영접을 받아 주의 영광을 입는 복을 받게 된다.
'弟子가 그 先生보다,또는 종이 그 上典보다 높지 못하나니 弟子가 그 先生 같고 종이 그 上典 같으면 足하도다 집 主人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본절은 제자들이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받게 되는 박해가 무슨 이유로 인해서 받게 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이다.제자들이 받게 되는 박해는 순전히 그들이 선생으로 섬기는 예수님을 인해서,그러니까 예수님과의 관계성,곧 선생과 제자,주인과 종의 관계성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여기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같으면 족하도다"는 말씀은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요 주인이신 예수님보다 낮은 자로서 그들이 섬기는 높은 분과 더불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해 나가는 관계인데,그들이 섬기는 선생이요 주인이 당한 고난과 같은 박해를 받아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면 그것은 제자가 선생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는 일이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의미이다.주종의 관계는 공경과 순종과 충성이다.제자는 선생만큼 높지 못하며 종은 주인만큼 높지 못하지만 그러나 선생과 주인을 높이 받들어 섬기고 시키는 일을 순종하고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을 통해서 선생과 주인이 받는 기쁨을 같이 누린다.제자들이 받는 박해는 자신들이 선생이요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님을 인해서 받는 것이다.즉 선생의 제자로서 선생이 맡긴 일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주인의 종으로서 주인이 시키신 일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박해이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로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뜻을 받들어 섬기고 순종함으로 기쁘게 고난을 받으셨는데 제자들도 그들이 섬기는 예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분의 일을 순종함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같은 고난을 받게 된다고 하면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그것이 예수님을 선생으로,주인으로 섬기는 제자의 정신이요 자세요 삶이다.그러면 제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선생이요 주인의 관계성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데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는지를 말씀하셨다.제자들이 선생이요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바알세불이라고 하면서 박해를 한다는 것이다.'바알세불'이란 귀신들의 왕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표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되신 권능을 나타내신 것을 귀신의 왕 사단이 힘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참람한 말을 하였다(9:34,12:24).제자들의 선생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처럼 취급당하면서 박해를 받으니 제자들 또한 예수님과 같은 일단의 무리로 취급되어 같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 되는 이유이다.
또 하나는,제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선생이요 주인이신 예수님보다 높을 수 없는데 예수님의 일을 하며 그로 말미암아 당한 고난의 박해로 인해서 예수님이 입은 영광과 같은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니 제자가 선생만큼 높아지고 종이 주인만큼 높아지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너희가 섬기는 예수님을 인하여 박해를 받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너희에게 맡겨진 일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는 의미이다.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로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서 바알세불에 붙어있는 일단의 무리로 취급되어 멸시와 박해를 받겠지만 그것은 장차 자신들에게 그들의 선생이요 주인이 입은 영광과 같은 영광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된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光明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傳播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위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거한 천국 복음의 진리,곧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드러날 때가 온다는 말이다.인류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로 인류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난 자가 되었다.하나님은 그때부터 인류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도록 감추셨다.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의 계획 안에 두시고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주의 구원(의 언약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그러므로 천국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씀하셨다.볼 수 있는 자만 보고,알 수 있는 자만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볼 수 없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과 자신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이 이제까지 감추신 천국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확연히 드러내신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그러나 볼 수 있는 자만 보고,알 수 있는 자만 안다.이것이 천국 복음의 특성이다.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시는 때가 온다.그 동안에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다.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거하는 천국 복음을 듣지 않고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천국 복음의 진리를 감추어 보지 못하게 하시고 알지 못하게 하심에 따라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람들의 악함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때가 오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는 그러한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의 진리가 드러날 때가 오면 자신들을 박해한 자들의 악함도 낱낱이 드러내시어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그리고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23절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이제 그들에게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여 전파해 나갈 것을 말씀하신다.'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두운데서 은밀히 말씀하셔야만 했던 것을 이제 제자들은 밝은데서 드러내놓고 증거하라는 것이며,'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는 귀엣말로 속삭이듯이 말씀하셔야만 했던 것을 이제 제자들은 집 위,곧 지붕(옥상) 위에서 큰 소리로 증거하라는 것이다.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은 오직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다.심지어 그 몇몇 소수의 사람들도 그것을 조금씩만 깨달을 수 있었을 뿐이다(요16:12-15).그러므로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 것을 분부하시며,또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능력을 나타내시고 하셨었다(막5:43,6:5)예수님께서는 당분간 은밀하게 행동하심으로써 이스라엘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그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고,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그가 가지신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광명한데서,그리고 지붕 위에서 전파해 나가야 한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비밀을 모든 사람에게 계시할 것이기 때문이다.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들의 증거에서 예수님께서 증거해 오신 것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복음을 나타내실 것이다(H.N. Ridderbos).
'몸은 죽여도 靈魂은 能히 죽이지 못하는 者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靈魂을 能히 地獄에 滅하시는 者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許諾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貴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是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是認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否認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否認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하여 나감에 있어서 사람들에게서 박해를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씀하셨다.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에 대해 증거한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가하며 죽이기까지 한다.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이 제자들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그들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분이시라고 하셨다.'몸은 죽여도 능히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고 하심은 사람이 임의로 사람의 몸을 해쳐 죽인다고 해서 생명의 본질인 영혼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영적인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한다.그러니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박해를 가하여 몸을 죽인다고 해서 그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한다.그렇다면 제자들이 비록 몸은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영혼은 살아있는 것이니 실상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그러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제자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몸과 함께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다.'지옥에 멸한다'는 것은 상반절의 '죽인다'는 의미와 다른 『지옥의 고통(형벌)에 집어 넣는다』는 의미이다.그 고통은 영원하다.그런 의미에서 몸과 영혼은 모두 멸하게 되는 것이므로 영멸이라고 한다.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심은 복음 증거로 인해 박해를 당할 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여서 복음 전도에 대한 주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주를 부인하는 그런 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역설적으로는 사람의 생명은 그들의 주이신 예수님께 있으니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신앙고백하며 복음 증거하라는 것이다.이 아래 구절인 29-33절은 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이다.한 앗사리온-로마의 동전으로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의 1/16의 가치에 해당되는 화폐 단위이다-에 헐값으로 팔리는 두 마리의 참새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는다.이처럼 하찮은 참새의 생명일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관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제자들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들의 머리털 하나 하나 까지도 세심히 관심가져 살피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니 그 어느 것보다 가치있는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다.그런데 만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면 예수님도 마지막 심판날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중재할 중보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겠으나,누구든지 예수님을 부인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마지막 심판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이 한 행위를 좇아 멸망당할 때 긍휼베푸시기를 거부하고 외면하시겠다고 하셨다.한마디로 어떤 박해 앞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킨 자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그들의 생명을 지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며,박해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자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외면하여 그들의 몸과 영혼이 지옥에 던져져 멸망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내가 世上에 和平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和平이 아니요 劍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며느리가 시어미와 不和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怨讐가 自己 집안 食口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自己 목숨을 얻는 者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自己 목숨을 잃는 者는 얻으리라.' 여기서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되는 원인이나 그 성격을 보다 본질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다.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화평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셨다.구원론적인 면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화평케 하기 위해서이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평안)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28)고 하셨다.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다(롬4:25-5:1).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과 세상은 심각한 분쟁에 있게 된다.그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환히 드러났기 때문이다.곧 마귀적인 것과 하나님적인 것이다.마귀에 속한 자는 그 어두운 특성으로 말미암아 빛을 싫어한다.그래서 복음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행위를 한다.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그 빛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을 싫어한다.그래서 복음을 환영하나 그것 때문에 어두움의 심각한 적대 행위에 부딪히게 된다.아들이 그 아비와,딸이 그 어미와,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할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서로의 감추인 마음이 드러나 불편한 관계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위협적 요인이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형제가 형제를,아비가 자식을,자식이 아비를 죽는데 내어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21절).그러므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였다.이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관계가 혈육의 관계보다 더 깊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까운 가족적 인연보다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화'는 이것보다 더 심각한 그 이상의 결과에 놓이게 됨을 의미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왜냐하면 복음을 환영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져 화평을 누리나,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불화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죄의 값으로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일이며,예수님을 좇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에 관한 일이다.그러기에 그 누구와의 관계나,그 어떤 일보다 우선할 일이다.사람이 일을 하여 집안 식구 생활을 안정되게 하고,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부모를 장사하여 효의 예를 다하고 하는 가장 애착이 가는 일이요,그 모든 것은 그것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마8:18-22,눅9:57-62)그러나 그 가치와 의미는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에 불과하다.다시 말해서 아무리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죽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그러니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생명을 얻지는 못한다.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본 자는 생명을 얻는 일을 하여야 한다.다시 말해서 생명이 되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그러니까 가족에 의해,또는 어떤 일이나 소유로 인해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에 발목이 잡혀 돌아서고,부인하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것은 예수님을 인해서 가족과 불화하게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그런 의미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아무리 자기 가족을 사랑해서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또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회피하고 에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 자도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얻을 생명을 포기한 그 댓가로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다.예수님의 제자된 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가족에 대한 관계만이 아니라 자기 목숨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로 인해서 생명을 영원히 얻는다.
"너희를 迎接하는 者는 나를 迎接하는 것이요 나를 迎接하는者는 나 보내신 이를 迎接하는 것이니라. 先知者의 이름으로 先知者를 迎接하는 者는 先知者의 賞을 받을 것이요 義人의 이름으로 義人을 迎接하는 者는 義人의 賞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弟子의 이름으로 이 小子 中 하나에게 冷水 한 그릇이라도 주는 者는 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決斷코 賞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0-42절)
본절에서 예수님은 복음 전도하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거기에 합당한 상이 주어질 것을 약속하시고 있다.여기서 사람들이 상을 받게 되는 기준은 예수님과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였다는데 있다.제자들이 증거하는 복음에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곧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보고서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그들을 영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그러니까 제자들이 영접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영접을 받고 계시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접을 받고 계시는 것이다.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하는 데에는 제자들이 당한 고난과 같은 고난이 따르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그럼에도 그 고난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이 한 행위에 합당한상을 약속하심으로 그들을 축복하셨다.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한 행위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확증시켜 주시는 것이다.그들이 받는 상은 선지자,의인이 받는 상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란 사람들이 제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참으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음이다.그들은 선지자들이 받는 상과 똑같은 상,의인이 받는 상과 똑같은 상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게 된다.그들이 제자들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라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 하찮은 행위까지 하나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여 상을 베푸실 것임을 약속하셨다.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의로운 일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막6:12-13과 눅9:6은 예수님의 여러 말씀이 마치자 분부대로 제자들이 나가서 각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파하여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고 하는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