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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대전문학토론회 주제발표
작가의 사회참여
-볼테르의 풍자와 관용사상
이 규 식
왜 볼테르인가
볼테르는 18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볼테르는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 다음과 같은 말로 유명합니다. “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 놓겠다.” 볼테르가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말했던 것은 아닌 듯 이 말의 출처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볼테르의 행동은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하는 태도는 관용의 태도입니다. 볼테르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가치는 바로 이 관용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볼테르와 루소
사실 볼테르하면 장-자크 루소와의 언쟁이 먼저 생각납니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원시 상태에서 인간은 선하고 자유로웠으나 문명에 의해 타락하게 되었다는 논지를 펴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했을 때 볼테르는 루소에게 “당신의 말을 들으면 네 발로 걸어 다니고 싶어지는군요”라면서 루소를 빈정댔습니다. 그 후로도 루소가『에밀』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상적인 교육론을 펼쳤을 때 루소가 하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는 사생활을 폭로하여 루소를 궁지로 몰아넣고 공격한 것도 볼테르였습니다. 그래서 볼테르와 루소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편지에서 루소는 볼테르에게 대놓고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라고 쓰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백과전서의 일부 항목을 집필했고 당시의 구제도를 비판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기틀을 마련한 위업으로 프랑스의 팡테옹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습니다. 볼테르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 물고 뜯고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의 권리를 옹호할 줄 알았습니다.
‘볼테르의 시대’- 괴테
18세기가 지나고 대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운명과 역사에 대한 불확실성이 인간의 심연을 뒤흔들고 나자 인간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불안과 무한과 신비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 낭만주의가 도래하고 낭만주의는 루소를 선구자로 떠받들게 됩니다. 괴테는 “이제 볼테르의 시대가 가고 루소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19세기에 감성이 중시되면서 볼테르의 이성 중심적이고 실질적인 사고방식은 낡고 건조한 느낌을 주었고 볼테르는 잊혀져갔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다면 볼테르는 ‘타자’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고 우리와는 다른 문명, 다른 제도를 갖는 다른 사회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관용의 출발이라면 볼테르는 이러한 관용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맨 먼저 일궈낸 사람입니다.
볼테르의 대표작품으로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쩌면 이것만 알려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풍속론』에서 유럽만의 역사가 아닌 세계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서양 중심의 세계사 속에서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고유민족인 칼데아인, 인도인, 중국인들에게 주목하기도 했던 역사가이기도 하고 당대의 성공한 극작가이기도 합니다. 은행가의 영혼을 지녔다고 말해질 만큼 이재에 밝아서 볼테르는 많은 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볼테르가 페르네라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 근처에 땅을 사들여 자신의 영지를 구축하고 독립자존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볼테르가 가진 재력의 힘이 컸습니다. 『나폴레옹』이라는 다섯 권 짜리 대하소설이 번역되어 많이 읽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소설을 쓴 유명한 전기 작가 막스 갈로가 볼테르의 생애를 소설로 집필했을 정도로 볼테르의 삶은 당대의 권력층과 세계적인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얽혀있는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볼테르의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드라마 같은 삶
볼테르의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çois Marie Arouet)로 부르주아 출신입니다. 볼테르가 태어날 당시는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이 지배하던 귀족 사회라는 것을 감안하고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의미를 파악해야합니다. 프랑스 귀족의 성에는 대개 de 가 붙습니다. 성에 de가 없다는 것은 평민 출신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잘 나가는 공증인이었고 부유한 편이어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파리의 유서 깊은 명문고등학교인 루이 르 그랑의 전신인 예수회 학교를 다녔으며 그의 대부였던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상류사회에 소개했고 동창들 덕에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총명했고 재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니농이라는 사람이 유언으로 10살 된 볼테르에게 책 사 볼 돈을 남겨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볼테르는 12, 3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재주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다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루이 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시작했을 때 그가 지은 시구가 문제가 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1년 간 투옥되었다.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네” 라는 별 것도 아닌 구절이었습니다.
당시 바스티유는 왕과 귀족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 곳이었고 투옥 기간과 석방 여부는 그들의 선의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유 없이 감옥에 갇힌 젊은이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볼테르는 여기서 이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는 볼테르가 되는 것이지요. 감옥에서 그는 두 편의 희곡 작품 (『앙리아드』와 『외디푸스』)의 초고를 집필했고 출옥 후 공연하여 성공하고 연금을 받습니다. 이것이 향후 볼테르 재산의 종자돈이 됩니다.
그런데 1726년 서른 살이 된 재기발랄하고 거칠 것 없는 이 젊은이에게 한 귀족 청년이 “성(姓)도 없는 부르주아” 라고 빈정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에 볼테르는 “내 성은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당신의 성은 당신에게서 끝날 것이오” 라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화가 난 귀족은 하인들을 시켜 거리에서 볼테르에게 뭇매를 가하도록 했고, 일개 공증인의 아들인 볼테르가 기사인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귀족들이 모두 귀족 편을 드는 바람에 볼테르는 또 다시 바스티유에 갇힙니다. 이미 한차례 수감 생활을 경험한 볼테르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청원하였고 영국으로 간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풀려났습니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볼테르에게는 약간의 돈이 있었습니다. 이미 신분의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던 볼테르는 재산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뿌리깊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은행가들과 교분을 쌓고 투기사업에 참여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볼테르의 영국 생활은 망명이나 다름없었지만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다니고 카페에 드나들고 작가들과 교류합니다. 1728년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1734년에 『철학편지』를 발표하고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고 맙니다.『철학편지』는 구시대를 향해 던진 최초의 폭탄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안에 체제비판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10년 간 볼테르는 샤틀레 부인의 시레 성에 몸을 피해서 살았습니다. 샤틀레 부인은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있던 물리학자였고 뉴턴의 이론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부인은 볼테르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쳐주었고 볼테르는 부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는데 프러시아의 왕을 만나기도 했고 궁정의 실세인 퐁파두르 부인과 교분을 쌓기도 했습니다. 이 퐁파두르 부인의 주선으로 볼테르는 왕의 사료편찬관이 되었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됩니다. 볼테르-샤틀레 커플은 파리로 돌아와 베르사유 궁정이 아닌 파리 근교 소(Sceaux)에 자신들의 궁정을 만들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샤틀레 부인이 아이를 낳다 죽게 되고 볼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홀로 남게 되는데 밤이면 샤틀레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헤맬만큼 극도로 슬퍼했다고 합니다. 결국 볼테르는 전에 프러시아 왕의 초대를 받았던 일을 생각해내고 1750년 프러시아의 포츠담으로 떠납니다. 특별한 호의와 자유를 약속받았지요. 프러시아의 왕 프레데릭이 프랑스어로 시를 지으면 볼테르가 교정을 해주는 역할이었는데 그 댓가로 2만 리브르 (약 8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강했던 두 사람은 3년 후 결별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볼테르는 “왕은 내게 세탁할 속옷을 보내오지”라고 말했고 왕은 “오렌지를 짜고 나면 껍질은 버리는 거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루이 15세는 볼테르가 파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페르네에서 펼친 꿈
이 무렵 볼테르는 이미 상당히 많은 돈을 예치해 두고 있었으므로 스위스 주네브 호수가에 집을 짓고 델리스 (délice, 悅樂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인 후 거기서 살았습니다. 극장도 지어 연극을 공연하고 비서와 요리사를 두고 독립 자존의 생활을 누렸으며 『백과전서』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입니다. 마침내 1758년에는 프랑스 국경 근처 투르네와 페르네에 토지를 사들여 자신의 성을 짓습니다. 그곳은 국경 근처라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도망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뒤쫓아 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 세 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볼테르의 지론이었지요. 페르네는 당시 인구가 50명에 불과한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볼테르는 이곳에 직물 공장과 시계 공장을 세우고 주네브 공국에서 빠져나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정착시켰습니다. 그리하여 20년 후 볼테르가 이곳을 떠날 때에는 인구가 1200명으로 늘어난 자족하는 마을이 되어 있었다.
‘광신’을 넘어, ‘관용’을 향하여
페르네에 진영을 구축한 볼테르는 이성과 문명을 옹호하며 부당한 권력과 광신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지성의 투사로서 활약합니다. 칼라스 사건이 대표적인데 칼라스라는 신교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일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사건을 전해들은 볼테르는 광신이 빚은 비극임을 알아차리고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볼테르가 놀랐던 것은 판사들이 그가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신교도는 발붙이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볼테르는 사실 일면식도 없는 신교도의 인권을 위해 싸웠고 마침내 3년 뒤 칼라스는 복권되고 가족들은 피해를 보상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볼테르는 불의를 고발하고 무고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제도나 국가의 폭력을 문제 삼아 지칠 줄 모르고 투쟁했습니다. 전 세계의 지인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팜플렛을 발간하고 여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가 매일 아침 썼던 편지들은 4만 통이 넘습니다. 1778년, 드디어 파리를 떠난 지 28년 만에 84세가 된 볼테르는 드디어 개선장군처럼 파리로 귀환합니다. 그러나 쇠약해진 건강이 감동과 피로를 이기지 못하여 석 달이 못되어 죽었습니다.
볼테르는 가톨릭 교회의 권력이 막강하던 시절에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외치며 광신의 위험을 고발하고 대신 관용의 정신을 지닐 것을 호소했습니다. 『철학편지』에서 볼테르는 “영국에 종교가 하나 밖에 없었다면 그 횡포를 염려해야 했을 것이다. 종교가 두 개 있다면 서로 상대의 목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서른 개나 있으니 행복한 평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미크로메가스』라는 작품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주까지 확대되어 다른 태양계가 존재할 수 있고 심지어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까지 합니다. 인간보다 더 작은 미물이 있듯이 인간보다 더 큰 거인이 있을 수 있고 그 거인이 미물로 보이는 또 다른 거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만이 혹은 인간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전쟁과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캉디드』에서 본 세상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볼테르의 대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인데 『캉디드』에서 볼테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여행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캉디드』는 당시의 철학 사조 중의 하나였던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이지만 동시에 세상물정 모르던 캉디드가 (캉디드는 프랑스어로 ‘순진한 사람’이라는 뜻) 갖가지 풍상을 겪으며 삶의 지혜를 찾아가는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캉디드는 독일 땅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을 거쳐 남아메리카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파라과이까지 항해했다가 엘도라도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고 다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수리남과 프랑스, 영국, 베네치아를 거쳐 마침내 동서양의 교차점인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합니다. 그 기나긴 여정에는 추위와 배고픔, 종교재판의 폭력, 노예제도의 수탈, 사기, 배신, 위선, 편견, 야만적인 식인풍습 등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불행과 지진, 폭풍 등의 자연 재해와 전쟁, 페스트 같은 질병 등이 함께 합니다. 낯선 의식이나 풍습과도 만나는데 낯선 의식이나 풍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태도에 대해서 볼테르는 “자기 나라를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태도”라고 비꼬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캉디드와 그의 하인 카캄보가 남아메리카에서 오레옹 족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인데 두 처녀가 벌거벗은 채 비명을 지르면서 초원을 달려가고 있었고 원숭이 두 마리가 처녀들의 엉덩이를 물어뜯으며 처녀들을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캉디드는 처녀들을 구할 생각으로 총을 쏘아 원숭이들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이 도우시어 좋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 보상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처녀는 죽은 원숭이를 껴안고 가슴 아프게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는 처녀들의 애인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밤에 오레옹 족에게 붙잡혀 커다란 가마솥에 들어가 잡아먹힐 운명이 되고 맙니다. 물론 반전이 있어 목숨을 구하게 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부족이 있고 그런 풍습이 있을 수 있으며 야만적이라고 여겼던 그들도 선한 본성을 지녔음을 알게 됩니다.
볼테르와 21세기
볼테르는 전쟁에 대해서도 모자를 쓴 사람 십만 명과 터번을 두른 사람 십만 명이 미치광이처럼 서로 이유도 모른 채 죽이려고 덤비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금도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금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자기 나라의 문화나 관습을 기준으로 상대방의 문화나 관습을 폄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야만적이라고 보는 일부 외국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미 볼테르가 『캉디드』를 통해 어떤 나라에서는 귀부인들의 총애를 받는 원숭이가 있다는 것이 어째서 이상한 일이냐고 반문했다는 사실은 그의 통찰과 예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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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식_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한남대 문과대학장, 지은 책과 옮긴 책 『문화 에너지』 등 30권. yescultur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