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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연의 섭리
세상이 녹색으로 변하더니, 채소와 화초도 포함된 식물들이 제각각 왕성한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내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a, 여름으로 가는 세상
b, 매실 따기
c, 자기 방식
d, 아픈 개
e, 미리 하는 걱정
f, 짝 찾아주기
a, 여름으로 가는 세상
기로가 마루에서 보니,
박 만석이 호수에 떠있던 상범의 모터 배 끈을 묶어주고 있었다.
요즘 모내기철이라 호수에서 물을 방류한다던데, 날마다 물이 빠져나가다 보면... 배가 땅에 걸터앉게 되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었다.
어차피 기로도 호수 둔덕에 흙이 나오게 되면, 그 흙을 퍼다가 작업을 하려던 참이었고,
며칠 전, 한 도자하는 사람으로부터, '흙작업은 어떤 흙으로든 할 수 있다.' 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에,
'여기 '둔터니'에서는 여기 흙을 이용해서 작업을 해보리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비가 많이 와서, 호수에 물이 불어... 다시 둔덕의 황토가 나오기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비록 여기 흙이 기대했던 것 보다는 점력이 약했지만, 서울에서 가져온 흙과 섞어서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흙작업을 하고 있는데 군산에서 기로 형 부부가 왔다.
이미 아침에 형수한테서 전화가 와서, 오늘 날씨가 너무 좋으니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격은 옛날 주인 부부를 보면서는, 한 편으론 반가움에 또 한편으론 낯설음에... 꼬리를 흔들면서도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몇 달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자기 어릴 적 주인을 몰라보지는 않고... 금세, 꼬리를 치고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기로는 잠깐 형수에게 배를 태워주었는데(형은 싫다고 했다.),
그런 뒤 기로 형 부부는, '할미꽃' '하얀 민들레'와 '하얀 오랑캐' 등 이 근방에 있던 토종 야생화 몇 뿌리를 캐가지고 군산으로 돌아갔다.
"어이, 장씨!"
산장 쪽에서 박 만석이 기로를 불렀다.
그래서 보니, 박 만석은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이었다.
"바쁘지 않으믄, 잠깐... 왔다 가!" 하고 소리를 치던데, "올 때, 사진기도 갖고 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챙긴 뒤 서둘러 가 보니, 박 만석은 감나무에 올라 벌을 따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저께, 산 속 묘 부근의 소나무에는 벌집이 들어서지 않아 허탕치고 돌아왔기 때문에(기로가 사진을 찍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장면 사진을 찍어보라고, 일부러 기로를 부른 것이자,
박 만석은 손에 벌들이 매달린 통을 들고 있었는데, 끈이 필요한 상태여서... 기로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기도 했다.
기로로서는 우선 그 신기한 장면에 확!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로도 사다리를 타고 감나무에 올라, 벌이 새끼를 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작업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자... 벌에 쐴지도 모릉게, 내려 가."라는 박 만석의 말에 사다리를 밟고 내려오는 순간,
정확히 그 순간, 이마를 쏘이고 말았다.
“아이고!” 하고 소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따끔하면서도 뭉뚝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부엌 쪽으로 달려갔는데, 김 순임이 벌침을 빼야 된다며 손으로 침을 뺐고, 물파스를 발라주어 응급처치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박 만석이 전에 새끼로 직접 짰다는 벌집에 벌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그 것 역시 기로에게는 이 시골에 내려와 사는 소중하고 값진 기록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夢想?'으로 돌아온 기로는 흙작업을 시작했다.
반 구의 형태에 한 쌍의 남녀가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건, 스페인에서 작업해서 이미 전시에 나가 서울의 원룸 자신의 방에 액자로 붙어있던, '테라코타' '사랑하고 싶은 사람' 시리즈이기도 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도 느낌이 썩 괜찮았고, 다 만들어 놓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기로의 생각으론, 이 작품을 다 한 뒤 겉 표면을 석고로 떠서, 가운데를 비워놓은 상태로 몇 점을 복사한 다음 구워볼 계획이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홈페이지 때문에 신세를 지고 있는 제자 K에게 선물하고(그는 기로의 홈페이지 호스팅에 관한 여러 상황을 맡아 해주고 있다.), 나머지는 여기를 찾아오는 누군가에게 팔 생각이기도 했다.(일단 작품으로 만들어 완성을 해 놓으면,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창고 쪽 그늘에 앉아 작업을 하는데, 가끔 고개를 돌려 보이는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작업을 한다는 것도 행복일 터였다.
어디 그뿐이랴? 오늘따라 먼 산 위의 구름들도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다.
비록 어제와 같은 파란 하늘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구름이 아름답게 보이는 날도... 1 년 중에는,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날은 환했는데도, 시간은 이미 저녁 일곱 시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손을 멈춰야만 했다.
저녁 준비도 해야했고, 개 밥도 줘야했고, 또 마당의 풀도 조금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에이, 하루가 이렇게 훌쩍 지나가 버리니... 그나저나, 나도 참으로 바쁘다." 하고 푸념 비슷하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어두워진 뒤 방문을 닫고 불을 키고 앉아있으니, 방안이 후텁지근했다.
이제, 여름인가?
드로잉을 해야 하는데, 손에 잡히질 않자... 기로는 밖으로 나와 쉼터에 가 앉았다.
밖은 호수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있어서 한결 나았다.
밤하늘엔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한참을 쉼터에서 기로는 호수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아, 이제 이 곳 생활에 푹 빠져가는 느낌이다. 여러 가지로 익숙해서 마음마저 편하다. 이렇게 내 일을 하면서, 이곳에서 다른 것 다 잊은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순간,
'그렇다면, 지금 나는 행복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드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는 했다.
'그래,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야. 이렇게 스스로 만족하는 생활이 행복일 것이다. 아, 이 행복을 지키고 싶은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 '여름'으로 접어드는 길
이제, 주변 곳곳에서 여름 냄새가 풍기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나무마다 싹을 내는 시기가 달라 다양한 연두색의 싱그럽던 산도 그 색이 짙어져, 단순하면서도 조금 답답한 느낌이고, 날은 더워서(벌써 30 도를 넘어선 곳도 많다는데...) 몸에 끈끈한 땀이 배기도 합니다. 물론, 햇살도 따가워 한 낮에는 볕에 나가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구요......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세월이 가고 있다는 것일 테지요.
아, 정말... 왜 이리 세월은 빠르기만 한지......
마루에 서서 보니, 산장아저씨가 호수에 있던 친구 상범의 모터 배의 끈을 묶어주고 있었습니다.
요즘 모내기철을 맞아 호수에선 물을 방류해서인지, 날마다 물이 빠져나가... 배가 땅에 걸터앉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도 호수 둔덕에 흙이 나오면, 퍼다가 흙작업을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렇게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흙작업을 했습니다.
이 마을도 집집마다 벌이 새끼 치는 것을 새로 받느라 (날아가 버리면 안 되니까), 식구 중 한 사람씩은 자기네 벌통 앞에서 어딜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그 상황을 지켜보며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옥수수도 한 뼘 넘게 자랐고, 호박이며 오이도 본 이파리를 두 서너 개씩은 내놓은 모습이고, 고들빼기씨도 영글어 베어다 말리고 있기도 합니다.
토마토며 고추도 이제 꽃이 피어나서 머지 않아 지줏대에 묶어주어야 한다고 하고,
방에 앉아있거나 마당에서 뭘 할 때, 지붕에서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어리둥절해 했던 나도, 그건... 매실이 지붕으로 떨어져 땅으로 구르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내로는 매실도 따야 될 것 같고......
그런가 하면 화초들도 그 모습이 하루 다르게 커가고 있어서, 물론... ‘수선화’인 줄로만 알았던 ‘상사화’도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등,
날마다 그런 것들을 돌아보는 일로도 심심찮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시골에 사니... 그런 일들은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자연과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 과정이다' 라더니,
여기 둔터니 마을 중에서도, 더 작은 내 세상에도... 그런 일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하루의 시간이 더더욱 짧기만 합니다.
내 일도 해야지, 밭에도 나가 봐야지, 마당의 풀도 뽑아야지......
그리고 산장 할머니가 파도 뽑아다 옮겨 심으라고 했는데, 땅을 팔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하고 있고,
오죽하면 요즘엔 배를 탈 시간마저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그런데 이런 게, '농부의 마음(?)' 아닐까요?
(나는 마치 농부라도 된 기분이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는,
요즘 각종 벌레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겁니다.
파리 모기는 물론이거니와 이름도 모를 곤충이나 벌레 등이 어찌나 많은지......
그러고 보니, 벌레뿐만이 아니고 새들의 울음소리도 각양각색이란 걸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요즘에도 '소쩍새'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게 울어대고, 사람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웃음새'(내가 그렇게 명명함), 그리고 '뻐꾹새'......
새들이 그러는 것도 아마, 자기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일지도 모르는데,
그게 맞을 겁니다.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거든요......
그렇듯, 정말, 만물(식물이거나 동물도)이 활개를 치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더니, 저마다 삶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름이 오는 거야. 아니, 이미 여름이 와있는지도 몰라......
어느덧 나도 여기서 한 계절(봄)을 다 보낸 것입니다.
5 . 28
다음 날도 기로는 오전 내내 쭈그리고 앉아서 전 날 시작했던 흙작업을 했는데,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생각은 금방 완성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는,
'그렇긴 하다. 뭐든... 언제나 그만큼의 정성이 들어가야 일은 되는 거니까......' 하고 있는데,
아침을 시원찮게 먹어선지 허기가 졌다.
그런데 간단하게 요기할 것이 없다 보니, 밥밖에 해 먹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아, 이런 일을 할 때엔, 누군가 밥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미쳤나?' 하고 얼른 그 생각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마을에 사람이 없으니, 내내 작업을 하고 있어도 '夢想?'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키큰 아저씨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기로에겐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일에 몰두해 있을 때는, 워낙...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꺼려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로는 요즘 격에게 신경 쓸 일이 하나 생긴 상태였다.
개가 밥을 잘 안 먹으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요 근래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이따금 고기를 준 것이, 개의 입맛을 변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날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마련해 모실 수는 없잖겠는가 말이다. 개도 주인의 식성을 닮아야 하는데......' 하고는 있었지만, 보통 신경 써지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그 전 날 왔던 기로의 형이,
"내버려 둬. 배가 고프면 다 먹으니까, 아무 것도 더 주지 마라." 하면서, "어쩌면 쉬었을 것 같은 밥도, 그대로 놓아 둬라." 고 해서, 그대로 하리라는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래도 개가 밥을 잘 안 먹으니... 여간 신경 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로는 일을 하면서도, 엎드려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개에게,
"격, 왜 밥을 안 먹냐?" 하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오후에 기로가 옆집 할머니 집에 가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할머니 눈에 반장이 돌아오는 모습이 띄었나 보았다.
"저기 00이 오네..." 하는 것이어서,
기로가 보니,
나무 틈새로 웬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마치 형무소에서 출소하거나, 수용소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문 쪽으로 나가,
"오랜만입니다. 반장님! 퇴원하시는 길입니까?" 하고 기로가 묻자,
"아니요... 하도 답답해서 나왔어요." 반장이 대답했다.
"근데, 어떻게?"
"외출증을 끊어서 나왔어요. 내일 퇴원하라고 하는데, 오늘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답답해서 못 살겠더구만요..."
"그렇겠지요. 이 시원한 곳을 두고 병원 건물 안에 있기가 답답했을 것 같네요."
"예, 정말... 못 살겠어서......" 하는 반장은,
아직은 이마에 큰 반창고 하나를 붙이기는 했지만, 멀쩡한 모습이었다.
허기야 기로가 보기에도, '타박 찰과상'이라... 아물기만 하면 큰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잠깐, 평상에 앉읍시다." 하고는,
더위에 걸어오느라 힘들었을 그에게(더구나 다리도 불편한데), 기로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와 한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또, 반장이 병원에서 보고 느꼈던... 그렇고 그런 얘기를 한참이나 들어주었다.
사실 기로에게 그런 반장의 얘기는 관심 밖이었다.
그렇지만, 마치 재미있는 얘기라도 되는 듯... 신이 나서 하는 반장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뒤, 조금 일찍 저녁을 해 먹고... 마당의 풀 좀 뽑은 뒤, 기로가 방에 들어와 하모니카를 부는데, 전화가 울렸다.
박 만석이었다.
"장씨, 지금 바뻐?"
"아니요..."
"그러믄, 조금 왔다 가."
"예..."
그런데 기로가 얼굴이나 씻고 가려고 세수를 하는 사이, 박 만석의 트럭이 '夢想?' 앞에 멈추는 것이었다.
'근데, 저 양반이...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새를 못 참고 트럭까지 몰고 왔다지?' 하며,
"무슨 일인데요?" 하고, 기로가 겨우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묻자,
"어서 타!" 하는 것이었다.
그그저께 가 보았던 산 위 소나무 아래에 벌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것을 옮겨오려면 누군가 거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박 만석은 참지 못하고 서둘러 기로에게 왔던 것이다.
그렇게 둘이 다시 산에 올랐다.
이제는 한 번 가 봤던 곳이고, 산이래야 바로 동네 뒷산이라 문제될 게 없었는데,
그렇게 그 소나무에 갔더니,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어둑한 중에도 몇 마리 벌들이 그 구멍을 향해 기어들어가는 게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하고 기로는 감탄까지 하고 말았는데,
어쨌거나 그렇게 벌통을 옮겨다 산장 집에 놓은 걸로, 또 한 무리의 벌을 잡아오는 데는 성공을 한 것이다.
박 만석은 기로에게 저녁밥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기로는 이미 식후였고, 또 자신의 시간을 갖기 위해 '夢想?'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그런데 몸을 움직여서인지 더워서, 쉼터로 나가 고즈넉한 밤 분위기에 조용하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호수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은 금방 식었다. 그러면서 어두워졌는데,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엔 별의 모습도 보였다.
'내일은 비가 온다지?' 하면서 언뜻 보니,
가로등 불빛으로 할머니 집 콘크리트 벽에 투영된 자신의 하모니카 부는 실루엣이 퍽 재미있었다.
'야, 지난번 미국인 S처럼... 그런 광경을 카메라로 담아보고도 싶은데, 나는 지금 디지틀카메라가 없으니 그러지도 못하고...... 그런저런 이유로 내 홈페이지에 요즘, 이미지를 올리지 못하는 것도 아쉽기 짝이 없다. 그런저런 것들이 다 돈과 연결된 일이라, 맘대로 되지가 않는다. 아, 모든 건 돈이다. 돈과는 무관한 듯 이렇게 시골 생활을 하다 보니, 무뎌진 건 사실이지만... 다시 내 통장의 잔고가 바닥난 지도 며칠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평하게 살아간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도 기로는 하루 종일 바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5 시경)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했고, 한 시간 뒤에 격에게 용변을 보게 하러 나간 뒤 돌아와서부터......
마당의 풀을 조금 뽑다가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은 뒤,
전 날 마무리 지었던 흙작업의 겉틀을 뜨기 위한 석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 작업이 그렇듯,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쪼그려 앉아 정성을 들여 일을 하다 보니... 허리가 몹시 아팠다.
반구 형태의 작품이라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공정이었지만, 두께를 고르게 하는 일이... 신경에 쓰이긴 했다.
그렇게 석고 작업을 끝내고 난 뒤, 다시 그 안에 있던 흙을 꺼내는 작업과 또 다시 흙을 채워 넣는 일... 그 일을 끝내놓고 나니 열한시가 되어 있었다.
'오늘,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는데?' 하면서 기로는,
며칠 전, 산장 할머니가 대파를 뽑아다 옮겨 심으라고 했던 말을 상기하면서,
'에이, 비가 오기 전에 얼른 그 일을 끝내놓자!' 하면서, 바로 곡괭이와 호미를 들고 뒷 밭에 올랐다.
일단 딱딱한 땅의 풀을 대충 뽑아낸 다음, 골을 타며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번의 곡괭이질에도 땀이 났던 기로에게는, 그 일도 힘겨웠다.
그래서 세 고랑을 판 걸로 마친 뒤, 산장 할머니 밭에 가서 뵌(빽빽하게 자리 잡은) 곳의 파를 골라 뽑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뒷밭으로 돌아와 마치 줄을 세우듯 간격을 고르게 만든 다음 흙을 덮어주는 것으로,
'파 심기'도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러는사이에 산장 할머니가 그 너머 밭에서 김을 매고 있어서, 기로는 그 곳으로 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무리 찾아 봐도 안 뵈시기에... 어디 계신가 했더니, 여기 계시는군요."
"예, 풀을 매주느라..." 하고 할머니는 땀을 닦았다.
"그런데 할머니, 제가... 할머니네 파 뽑아다 제 밭에 심었어요."
"그려? 잘혔네..."
"오늘 비가 온다기에, 비 오기 전에 뽑아다 심느라 서둘렀던 거지요."
"비 온다고 혀?"
"예, 오후에 비가 많이 내릴 거라고 하든데요......"
"아이고, 나도 어서 끝내고... 저기 위에 또 올라가봐야 허는디. 고들빼기 씨도 털어야 허고... 헐 일이 태산 같어..."
"할머니, 혼자 하시기엔 너무 힘든 일 아닌가요? 조금씩만 하시지......"
"그 건 그려. 근디, 그냥 둘 수가 있어야지..."
하는 얘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그래도 할머니는 자꾸만 기로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기로는 배가 고프다며 상추 몇 포기를 뽑아 가지고 통나무집으로 내려왔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기로는, 다시 뒷밭에 올라갔다.
상추와 쑥갓을 심은 곳이, 상추밭인지 풀밭인지 모르게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였는데,
짜증은 났지만 하는 수 없이, 일일이 풀을 뽑아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시간이 없어서 손도 대지 않으려 했는데, 채소를 심어 놓긴 했으면서... 먹지도 못한 채 방치해 둘 수만도 없었던 것이다.
그건, 풀과의 전쟁에서 지는 일이자... 시골 생활을 한답시고 내려온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제초제를 칠 수도 없었다. 코딱지만 한 밭에 심은 채소가 얼마나 된다고 농약까지 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이런 청정지역인 산골에서 사는데, 굳이 농약을 친 채소까지 먹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풀을 뽑고 있는데 반장이 왔다.
그러더니 그는 기로가 있던 뒷밭으로 올라왔고,
"인자, 매실도 따야겠는데요?" 하면서, "큰 것은 바로 따고, 작은 것은 조금 뒤에 따세요. 그리고 토마토는 지줏대에 끈을 묶어주어야 하는데, 조금 더 자란 뒤에 해도 되겠네요. 그런데, 저 오이는 맛이 없는 품종인데?" 하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서 기로가 산장 할머니가 줘서 심어 놓았던 몇 포기의 오이를 보니, 그 사이... 가물어서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가요? 이건... 전주 종묘사에서 사온 건데, 맛이 없는 것이라니... 에이, 여태까지 헛수고 한 기분이네!" 하면서,
'그래도 아직은 여름의 시작이라 그리 늦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하면서,
"오늘 비가 오면, 내일 쯤 다시... 산장할머니한테 부탁해, 한국 재래종 고추와 오이 몇 포기를 얻어와야겠네요." 하면서 내려왔다.
그러면서 반장은 돌아갔고, 기로는 이제 흙 작업한 곳을 가보니,
석고 틀 속에 채워 넣었던 흙은 석고와 틈이 생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건 그대로 놔두기로 했고,
이젠 장화로 갈아신은 뒤 낫을 들고는 돌미나리 밭으로 내려갔다.
요즘 돌미나리가 웃자라서 먹을 수 없는데, 낫으로 베어주면... 밑에서 연한 새 순이 돋아 나온다는 산장아저씨의 조언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어슬렁어슬렁 키큰 아저씨도 나왔다.
"장씨, 거기 옥수수.... 그것도 너무 뵌게, 비가 온 뒤 한 곳에 두 포기 정도만 남기고 다 뽑아줘야 돼!" 하면서, "그려야 열매가 크게 달링 게." 하고 덧붙이기에,
"예, 알았습니다." 하며 생각해 보니,
'오늘 이웃들에게 주워 들은 것만 해도 얼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것마저 재미가 있었고 또, 뭔가 기분 좋은 일 같았다.
그렇게 기로는 자신이 시골에 살면서 조금씩 식물의 이름을 알아가는 것과, 또 채소를 어떻게 가꾸는지 배워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다가 다시 마당의 풀을 뽑고 있는데,
"이제 좀 쉬어."
평상에 앉아 있던 키큰 아저씨가 말했다.
사실, 기로는 아침부터 내내 일을 했더니, 허리도 아프고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다 비가 오기 전에 해 놓아야 될 일이라, 정신없이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 다음, 작업 방에 군불을 지피는 것까지......
그 일 역시, 비가 온다기에... 차고 눅눅한 방에 있기가 싫어서 미리 불을 지폈던 것이다.
저녁을 해 먹고 마당의 풀을 뜯고 있는데, 박 만석이 트럭을 타고 왔다.
'저 양반이 트럭타고 오는 것에 재미 붙였나?' 하면서도,
"무슨 일인데요?" 하고 기로가 물으니,
"정처 없이 왔어."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처 없다니? 저 양반은 가끔, 시를 써요, 시를......' 했지만,
박 만석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친근미를 나타내는 의미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렇게 박 만석은 요즘 속에 담고 있는 얘기도 곧잘 기로에게 털어놓는 등, 기로에게 상당한 믿음과 우애(?)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비가 오는 저녁시간인데도... 차 두어 대가 산장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식당에 손님이 온 것이라, 박 만석은,
"그럼, 내일 봐!" 하고는 부랴부랴 돌아갔고,
얼마 뒤에 산장집 원두막에 전기 불 들어오는 게 보였다.
손님들이 호숫가에서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다음 날,
기로가 새벽에 눈을 떴는데, 빗소리는 여전했다.
안방으로 건너와 시계를 보니 네 시 반. 전날 밤에는 격이 짖어 한 번 잠이 깼을 뿐이었다.
빗소리는 들리는데 격이 짖어댔다. 방문을 열어보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왠 검은 차 한 대가 집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옆집 할머니의 서울 아들이거나(그 전에도 검은 차를 타고 왔었다.) 뒷 집의 손님일 터라, 다시 잠을 청했던 것이다.
낮에 때놓은 군불에 방은 알맞게 따뜻했고, 그런 느낌이 기로의 온몸으로 전해져왔었다.
잠결에도 어쩐지 그런 상황이 기로는 행복한 것 같았다.
계속 비는 내리는데, 뻐꾸기는 새벽에도 울었다.
호수 건너편에서 우는 것 같아 시간을 보니, 다섯 시 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뻐꾸기는 밤낮도 없이 우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는 비가 오는데도 우는 것이니까.
비가 계속 오기에 기로는 문득 일을 하자며 우비를 입고 나갔다.
우선 옥수수 구덩이마다 다니면서 네 다섯 개씩 자라는 것에서 두 포기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뽑아냈다. 그런데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 것들을 다른 곳에 옮겨 심어주었다.
'이래도 살면 다행이고, 아니면... 할 수 없고......'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뒤 뒷밭으로 올라가 보니, 옥수수는 하룻밤 사이에도 조금 커 있었는데, 그 전날 파를 옮겨 심은 골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바로 배수로를 내 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누가 가르쳐줘서 했던 건 아닌,
'다음에는 밭을 일굴 때, 배수로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식으로, 기로 스스로가 깨우쳤던 것이다.
그런 뒤 이제는 바로 산장 할머니 집에 갔다.
그리곤, 오이 몇 포기와 우리 재래종 고추를 뽑아다가 심어 놓으면서는,
'이렇게 비 올 때 심어놓아야, 식물들도 자리 잡기가 편할 테니까......' 하고 허리를 펴고 있는데,
"부지런하기도 하네..." 하고, 길 쪽에서... 키큰 아저씨가 큰 목소리로 말을 하기에,
"아침부터 어디 가시는데요?" 하고 묻자,
"시방, 전주 병원에 가는 길여..." 하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뒤 흙작업한 곳에 가 보니, 이제는 조금 말라 있긴 했는데... 틀과 본체를 분리해 보려 하니, 마음 같이 되지가 않았다. 그러니,
'이거, 실패한 거 아냐?' 하는 생각과 함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열심히 해 놓았는데, 계산 착오로...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
어쩌면 문을 두 짝만 했던 게 원인일 수도 있었는데,
'최악의 경우엔, 석고 틀에 석고를 넣어... 한 개만 뜨는 수도 있기는 한데......' 하고는 있었는데,
그렇게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일을 했더니, 비에 젖어(우비를 걸쳤는데도 속옷까지 젖은 상태로)... 몸이 으실으실 추워지는 것이었다.
'이러다 몸살이라도 걸리는 거 아닌가?' 하면서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비가 개더니 돌풍이 몰아닥쳤다.
그런데 그 바람에 앞산의 나무들이 희끗희끗거리기까지 하자,
기로는 그 게 아카시 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바람이 세서 나뭇잎들이 뒤집혀 생긴 현상이었다.
그럴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은 동풍이라... '夢想?'의 마루에는 비가 들이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로는 오늘도 하루 종일 밖에서 일을 했는데,
오후 내내 마당에 남아있던 풀을 다 뽑아버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풀을 뽑으면서도 '풀을 뽑다 뒤를 돌아보면, 다시 풀이 쫓아온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뒤돌아 보니,
정말... 자신이 뽑아냈던 땅에는, 다시 잔 풀이 고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
'아, 내가... 이렇게 풀에 지고 말 것 같다......' 하면서,
이제는 방에 군불을 지피기로 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바쁘게 보냈는데, 오죽했으면... 하모니카 불 시간마저 없자,
'아이, 내가 왜 이리 바쁜 거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군산의 형수였는데,
기로가 전화를 받으면서 보니, 앞산의 윗부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내내 구름이 끼어있었는데, 해가 다 넘어갈 무렵에야... 해가 잠깐 나왔는지, 산의 윗부분만이 황금색으로 착각할 정도로 빛나는 찬란한 색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아랫부분은, '夢想?' 뒷산의 그림자였던 것으로,
'아! 이런 모습도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자연의 아름다운 한 모습이로구나......' 하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화를 끊자마자 기로는, 카메라를 꺼내들고... 서둘러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밤에는, 그 '산 그림자'란 소재로... 모처럼 드로잉 두 개를 해버렸다.
그렇게 5월 말 며칠을 보냈고, 이제 '夢想?'에서의 본격적인 여름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