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명 |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이 비(碑)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 금석문(金石文)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다. 1400여년의 오랜 풍우(風雨)로 그 비신의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25일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分甲兵之□□□年□□□□覇主設□賞□所用高祀□□□□□□相戰之時新羅太王德不□兵故□□□□□强建文大득人民□□□□□□□□□□□□□□□□□□□□如有忠信精誠□□□□□□徙可加賞舜物以□□心引□□衆路過□城陟□□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近干南川軍主沙夫智及干未智大奈末□□□沙喙屈丁次奈天指□□幽則□□□□□劫初立所造非□巡守見□□□□□刊石□□□記我万代名
이 비문은 조선(朝鮮) 순조(純祖) 16년(1816, 병자(丙子))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친히 북한산 비봉에 올라 처음으로 판독하였다.
그리고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하여 주고 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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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 표시판에 있는 설명)
이 비는 신라 진흥왕 ( 재위 540년~576년.) 이 새로운 영토의 국경을 직접 둘러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런 비를 순수비 ( 巡狩碑 ) 라 부른다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곳은 경상남도의 창녕. 함경남도의 이원 (利原 ) 의 마운령 ( 磨蕓嶺 ) 과
길주 ( 吉州 )의 황초령 ( 黃草嶺 ) 그리고 북한산 비봉 ( 碑峰 ) 등 4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문은 오랜 세월이흘러 글자가 마멸되어 전체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지역 순시를 칭송한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 나오는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은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원래 이 비는 오랜 세월이 흘러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글자도 읽기 힘들게 되어 조선시대
무학대사 ( 無學大師 ) 가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찾아다닐 때 이 비봉( 碑峰 ) 에 올라와 보니
"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왔다 " 라고 쓰여있어 급히 내려갔다는 전설이 전해져
진흥왕 순수비라는 자체를 모르게되고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816년 당대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이 비를 직접 찾아보고 비문을 탁본하여 연구한 결과 모두 68자를 읽어냈고
바로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하였다는 사실을 새겨 놓았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진흥왕 29년 ( 568 ) 에 세워진 마운령. 황초령.비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원래 비석 윗 부분에는 비석돌이 씌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원래의 비석은 풍화가 심하여 1972년 이곳으로부터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 보존되어
오고있으며 2006년 10월 원래의 자리에 현재의 복제 비석을 세워 역사적 현장을 보존해
오고있다 |
첫댓글 영감 적당히 해라 운동도 과하면 독이 된다는 사실을 록수 처럼 안하는것두 문제지만 내가 보기엔 과한것 같구나 월간 2회로 줄임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