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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그리운 섬, 희망의 섬 14 - 욕지면 노대도
사발개 추천 0 조회 111 09.12.06 02:3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그리운 섬, 희망의 섬 14 - 욕지면 노대도
"돛 한번 올리 볼꾸마. 홀빡 바다로 가보세"
 
 
 

 

▲ 일흔일곱 노어부 최삼열 어르신.
"좋치. 나가 돛 한번 올리 볼꾸마. 홀빡 바다로 가보세."


 늙은 어부는 신이 났다.


 욕지 노대도 탄항마을 방파제 한 모퉁이 떠 있는 배 한척. 마침 눈 밝은 이가 있어, 몸집도 작디작은 그 배가 한(외)노가 아니라 두(쌍)노를 사용하는 근래에 보기 드문 어선임을 알아봤다. 그것도 돛을 달고 조업하는 마지막 돛단배라니!


 "돛 한번 올려 그 진가를 보여달라" 거듭 부탁을 드리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어부. 너른 바다, 거친 바다를 잊은 채 이웃의 양식어장 물고기 사료 주는 일을 거들던 늙은 어부는 배의 진가를 알아본 젊은이들의 부탁에 몹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방파제에 묶은 줄을 풀어내는 팔뚝에 어느새 힘이 불끈 들어간다. 적당한 바람을 만나기까지 쌍노를 저어가는 어부의 노질이 사뿐사뿐하다.


 돛대 기둥을 세우느라 오만 인상을 찡그리는 어부. 힘에 부치는 듯 겨우 돛을 펴 올리기 시작하는데…. 여기저기를 떼우고 기운 돛이 쇠잔한 어부의 얼굴 주름과 겹쳐 보인다. 상념도 잠시. 마침내 바람을 타기 시작한 돛단배의 돛이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마치 쏜살처럼 바다를 질주한다. 


 여든을 바라보는 최삼열(77· 욕지면 노대도 탄항) 어르신은 "웃노대, 아랫노대 섬 사람들 홀빡 바다를 보고 살았지. 욕지도, 소매물도, 국도는 아무 것도 아이야. 두 돛, 세 돛 짜리 돛배를 띄우모 절라도 청산도는 앞바다요, 중국이 훤히 뵈는 격렬비열도, 제주 추자도 어장도 우리 꺼 아이더나", "나가 소싯적에 힘 깨나 썼다"고 대단한 자부심을 내보인다.


 "요앞 욕지도부터 착착 문어단지하고 통발을 놔가모, 문에(어)며 장에(어)가 어찌나 마이 들던지. 그걸로 아덜 공부 시키고 시집보냈다 아이가.", "인자는 이런 배 몬 만들끼다. 2003년 태풍 매미때 있던 배가 박살이 나갖고, 새로 모안기라. 그때 맹글던 사람들 세상 베리고…. 이 배가 이래 뵈도 나무 일일이 물에 담갖다가 불로 호아냈는데, 인자는 그리 맹글라카는 사람도 없을끼라. 기계로 찍어낼라카지"하며 돛단배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부디 오늘이 마지막 항해가 아니길 기원한다.
 

 욕지면 노대도


 욕지면 노대리는 상노대도와 하노대도, 납도 및 유인도서로 형성됐다.
 상노대도에는 상리와 탄항, 산등 3개 자연마을이, 하노대에는 하리마을이 있다. 


 상노대도 상리마을을 중심으로 남쪽 하노대를 마주하고 있는 천혜의 항구로 한때 인근 욕지항과 함께 남해안 어업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하루 2번 통영항여객선터미널에서 (두미도행)바다랑호가 운행한다.


 경남도 기념물 제 27호 상노대도 패총을 통해 기원전 6,700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칼, 돌도끼 등이 같이 발굴, 진주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특이한 점은 석재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란 점이다.


 1976년 80여 세대 380명으로 가장 번성했으나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 65세대 106명이 살고 있다. 농업은 고구마와 보리, 마늘을 주로 경작했다. 70~80년대 장어통발, 문어단지 등이 성행했다. 통영은 물론 전남 여수, 완도, 목포는 물론 제주 일대까지 조업지를 넓혔다.


 술집 없애기 운동을 펼쳐, 지금도 섬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 70년대 장어통발 어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마을 내 10톤급 어선 14척, 소형어선 10척이 선단을 이뤄 장어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해상에 파시가 일어났다. 선원들이 술을 마시고 취하면 난투극이 벌어져 경찰에 고발 고소하는 사례가 끊이질 않았다. "대한민국 천지에 장사를 금하는 곳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에도 불구가고, 마을 유지들이 외상값을 받아 주고, 팔다 남은 술을 마을 기금으로 모두 구매해 바다에 버렸다. 이후 상리를 비롯 다른 마을에도 술을 팔지 않는다.

 

서른일곱 최연소 이장 정봉성씨

 

 상노대 상리에는 서른일곱, 통영에서 가장 젊은 이장 정봉성씨가 섬사람들 떠난 노대도를 되살릴 희망찬 꿈을 한창 꾸고 있다.


 불과 70m 바다를 두고 왕래를 하지 못하는 상노대, 하노대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놓는 일이며 가깝게는 납도, 봉도, 멀리 연화도, 통영 미륵산이 훤히 바라보이는 언덕에 전망대를 꾸미는 일까지. 섬사람들 불편을 줄이고 관광객 한명이라도 더 끌어오려고 본섬 욕지도의 면사무소나 통영시청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한 봉성씨.


 그의 본업은 가두리 양식이다. 마을 앞바다에서 참돔과 방어, 우럭을 키우는 일. 하지만 날로 치솟는 연료비, 사료비, 인건비에 비해 애써 기른 물고기값은 뒷걸음질하기 일쑤다. "힘들지요. 그래도 내가 태어난 고향인데, 저마저 떠나면 어쩝니까. 인터넷에 카페도 만들어보고, 양식장에 낚시객도 유치하고…그러면서 삽니다. 요즘 들어 돔이며 도다리가 많이 낚여 찾아오는 낚시객이 었어요. 남편이 낚시할 동안 아내와 아이들이 즐길만한 꺼리를 만들기 위해 몇 남지 않는 젊은이들과 매일 저녁 머리를 맞댑니다"며 노대도의 미래를 그린다.

 

 

전교생 1명 노대분교 혜진이의 희망은

 

 아침 8시 30분. 섬사람들을 뭍으로 실어 나르는 여객선 바다랑호에서 아이 둘이 내린다. 열한살 정혜진과 일곱 살 동생 은지. 정봉성 이장이 다닐 때 한 학년에 서른명이 넘던 노대초등학교(1945년 개교)가 이젠 욕지 원량초교 노대분교가 됐다. 100명도 넘는 아이들은 이제 낡은 사진 속에서 섬마을이 떠나갈 듯 달리고 웃는다. 이제 학생은 혜진이 하나뿐. 유치원도 없는 섬에서 홀로 남겨지기 싫은 은지는 언니와 함께 장난을 치며 등교하고 공부(?)한다.


 물뿌리개를 들고 나란히 텃밭에 물을 주는 혜진이와 은지. 자신들이 심은 자그마한 씨앗이 쑥쑥 자라 활짝 꽃 피길 기대하겠지. "함께 물을 뿌릴 친구 하나 보내줘" 희망을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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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2.06 19:43

    첫댓글 내가 고향떠날때만 하더라도 돛단배가 많았었는데......
    노대국민학교 친구들도 꾀~~~됬었는데 젊은 이장님이 고향을위해
    많이 애쓰신다니 고맙기도하지..숙원사업 조속히이루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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